불교 입문 교리

8-3 유심과 유식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1:17

유심(唯心)과 유식(唯識)


앞에서 12지 연기를 설명할 때 세 번째의 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그 '식'은 여기서 말하는 '심'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현세에 생을 받은 경우 탁태(托胎) 최초의 순간에 형성되는 그 무엇을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개인존재의 핵이 되는 식은 과거 세에서의 무명과 행(숨은 세력)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다. 이 식이 다음 생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는 집착·욕망을 그 속에 품고 있다.
이와 같이 식이 12지 연기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최초로 표명한 것이 《화엄경》이다. 보살이 수행에 따라 획득하는 단계의 특색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십지품(十地品)'에서 반야바라밀의 임무(그것은 즉각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를 설명하는 제 6지(現前地)의 해설에 의하면 12지 연기는 모두 일심에 근거해서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삼계는 오직 마음뿐(三界唯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작자는 아비달마 교학의 분석적 성격이 가능한 한 정치(精緻)한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성격 때문에 부처님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실하고 있다고 직관했다. 그리고 단연코 그런 이론체계의 허구성을 지적해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표현했다. 여기서의 '모든 것'중에는 당연히 '심'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마음도 또한 연기된 것'이다. 따라서 찰나마다 생멸을 되풀이하는 것이며 그래서 무아라는 아비달마 교학과 공통기반에 서게 되었다. 즉 심을 제법과의 관계로만 파악하고 기능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반야경》은 제일의의 구극적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사이의 차별을 보지 않았다. 물론 《반야심경》에 있듯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하여 모든 특수성을 부정하면서도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하여 즉시 공성(空性)에 뒷받침 된 개별성의 세계를 승인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제법 가운데 심과 그외의 존재, 즉 주관과 객관의 기능적 상위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마음과 대상, 주관과 객관의 기능적 대립성이라는 것에 주목해서 새로운 이론구축을 시작한 것은 유가행파였다. 이것이 이른바 유식설이다. 이들이 《반야경》의 입장을 해명하는 나가르쥬나(龍樹)와 그 후계자들, 즉 중관파(中觀派)가 주장하는 '공'의 학설을 계승하면서 이것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켰다.
이들이 소의(所衣)한 경전은 《화엄경》 십지품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가르침이었다. 유식학파는 《화엄경》유심설의 직접적인 계승자라 할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식이나 심, 그리고 의까지도 모두 똑같이 하나의 '마음'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아비달마의 학설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유식설에서는 똑같은 마음이라 해도 기능적으로 몇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각각 다른 기능은 '심' '의' '식'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 부르는 것에는 먼저 현재 작용하고 있는 순간의 것과 과거의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이 있다. 그런데 과거나 미래는 엄밀히 말한다면 현재화할 때만 존재하게 된다. 즉 모든 존재는 과거로부터 미래에로 이어지는, 미래의 것이 현재화해서 다음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는 의식의 흐름(心相續)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식의 흐름에는 또 한가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잠재적인 것이 있고 이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업의 활동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업을 만드는 작용을 '심'의 기능에서 구하고 그것은 잠재적인 형성력(종자=행=업)을 저축하는 장소(저장고)로 아뢰야(阿賴耶)식이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현재 기능한 마음은 그 어떤 인상을 남긴다. 그것이 다음 찰나의 마음에 작용하는데 동시에 그 일부는 그대로 마음에 저축되어져 일정한 시간을 걸쳐 발현하는 일도 있다. 주객의 어떤 인상도 아뢰야식으로서의 심에 인상하고 그것이 차후 마음의 성격을 결정하고 작용을 결정한다.

인상(印象)으로서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작용을 '훈습(훈습)'이라고 하고 인상을 '습기(習氣)'라고 부른다. 습기란 향을 피워 옷에 향기가 배게 하면 언제까지나 냄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에 비유해서 생긴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음의 마음을 결정하게 되므로 '종자(種子)'라고도 한다. 종자는 결과를 낳는 것이므로 땅에 떨어져 나중에 싹이 트는 초목의 씨앗에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기능에 의해 우리의 의식의 흐름이 과거의 업을 짊어지고 있고 개개인의 의식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며 그 존재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

아뢰야식의 흐름(상속·찰나멸의 연기)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자아라고 생각한다. 즉 아뢰야식을 '나'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인하는 작용도 또한 주관으로서의 의식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분명히 아뢰야식과 별개이다. 그리하여 이런 작용을 의(未那)라 불렀다. 이것이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은 이런 뜻에서 개인존립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이론으로 말하자면 무아인 의식의 흐름에서 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능은 당연한 방향(당위)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자아의식은 자기의 소유(내것)의식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것을 아집, 아소집이라고 한다. 그것은 또한 업을 야기시키고 결과로서 괴로움을 낳게 하고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의식이 있는 한 괴로움의 소멸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의(意)'는 '더럽혀진 마나스'라 불리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은 잠재의식으로서의 아뢰야식(즉 心)과 그것을 아로 오인하는, 따라서 아집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으로서의 마나스를 배후에 가지고 있으면서 대상인식(인상)의 기능을 영위하고 있다. 이런 대상인식은 아비달마의 학설과 마찬가지로 눈·귀·코·혀·몸·뜻의 6식 중 어느 것엔가에 의해서 행해진다.

이 기능이 주관의 기능이지만 주관은 객관에 따라서 여섯가지로 나누어질 뿐이고 과거인 경우는 모두가 마나스(意)란 이름으로 불리운다. 즉 6식의 구별은 현재에만 관계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선·악 따위로 성격을 갖게 되는데 그런 마음과 함께 작용하는 '심소(心所)'의 기능에 따르게 된다. 그리고 배경에 '아뢰야식'과 '오염된 마나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도 악도 한결같이 윤회생존을 계속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결국 아뢰야식→마나스→6식이라는 입체구조를 가진 마음이 윤회생존을 가져오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가 없더라도 무엇이 어떻게 해서 윤회하느냐하는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이다.

식, 즉 인식주관은 대상을 잡는 것이 그 본성이다. 즉 식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그래서 식의 작용을 능취(能取), 대상을 소취(所取)라 부른다. 이 소취 중에는 우리의 육신, 그리고 우리 자신의 행동, 반성된 한도내에서의 의식활동, 모든 다른 개체. 환경, 세계, 내지는 경전의 말씀과 의미에 이르기까지 요컨대 의식내용이 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우리는 그러한 소취가 객관적으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 인식의 대상, 식에 의해 알 수 있게 된 대상(의식내용)으로써 있는 것이며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의 인식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관심의 범위 내라고 해도 좋다. 따라서 우리는 제멋대로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세계는 우리의 마음이 거짓으로 꾸민 것이며 진실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 점을 파악하여 유식설은 '표상(表象)으로서만 있다'고 말한다. 이 표상(의식내용)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식의 의미다. 이에 대해 인식하는 작용은 '식'이라 한다. 유식이란 오직 식뿐이라는 것인데 이 식이란 사실은 '식에 의해 알게 된 것' 즉 지식내용으로서의 표상이란 뜻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표상의 세계에 대해서 실재감을 갖고 집착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모두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밖에 형용할 수가 없다. 이런 뜻에서 유식설에서는 먼저 우리의 인식구조 그 자체를 잘못된 견해로 생각하여 그것을 허망분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허망 분별의 눈으로 보고 알게된 소취·능취의 대립세계는 거짓으로 구상된 세계라는 뜻에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부른다. 소집이라는 것은 가정으로 구상된 세계에 우리가 집착하고 거기에 괴로움을 낳게 하고 있다는 뜻에서 부가된 말이다.

이에 대해서 표상으로서의 소취·능취를 표출하는 허망분별은 과거의 무명·업의 힘으로 형성된 것, 연기된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부른다. 타에 의존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현재의 식이 과거 무한의 찰나의 인상을 받은 결과로써 일어나고 있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이라는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의타기한 아뢰야식 위에 주객대립의 세계, 나·나의 것이라는 관념의 세계가 전개되어 그것이 우리의 현실, 미망의 세계, 윤회의 생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미망의 세계는 마땅히 없애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깨닫는 것도 또한 '마음'의 작용이다. 허망분별로 작용하고 주객의 세계를 현출하고 있는 아뢰야식을 두고 달리 깨달음의 당체가 되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아뢰야식이 아뢰야식 그대로인 한에서는 깨달음은 없지만 그것이 다른 상태가 되었을 때 깨달음이 나타나고 열반이 실현된다. 그것은 아뢰야식이 허망분별로 작용하지 않고 주객의 대립을 나타내지 않을 때이다. 식은 능소의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 본래의 역할이기 때문에 그것은 식이 식이 안될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주객이 둘다 아닐지라도 식이 진여와 하나가 된다고도 말하지만 식의 기능(주체로서의 마음자세)으로 본다면 무분별지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식이 지로 전환한 것이다(전식득지 : 轉識得智).

앞서 말한 '별개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으로 전의(轉依 ; 소의의 전환)라고도 부른다. 이런 상태는 경전에서 설명하는 '법'을 알게 되고 그것에 의해서 수행을 쌓은 후에 달성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완성된 상태'라는 뜻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태에서만이 비로서 '진실을 본다'. 이 경우의 보는 마음은 아뢰야식이라 부를 수는 없다.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지(智)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변계소집성·의타기성·원성실성(이것을 3성이라 한다)은 마음의 작용방식에 따라 서로가 전환하는 것이지 결코 각각 별개의 세계는 아니다. 이것이 처음에 인용한 아함의 '마음이 오염되면 중생도 오염되고, 마음이 정화되면 중생도 정화된다'라는 경문에 대한 해석이다. 깨달음을 사물을 보는 방법의 전환(마음의 전환)에 두고 있는 이 학설의 기본이 여기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무분별지가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작용하고 대상을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부처님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중생의 모든 일을 분명히 알고 있고 중생을 생각하고 구제를 위해 무한한 활동을 한다. 이 경우에는 역시 거기에 능소의 구별이 있고 주객에 의한 인식이라는 구조도 구비돼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마음의 활동을 유식설에서는 '무분별지 후에 얻게 되는 깨끗한 세간지' 줄여서 '후득지(後得智)'라 부르고 있다. 이런 부처님의 마음도 능소로 갈라져서 활동하면서 또한 능소를 보지 않는다. 즉 아뢰야식처럼 인과관계를 만들지 않고 미망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는다. 인과관계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유위(有爲)한 것, 무상하고 생멸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무위법이다. 후득지란 무위법으로서의 부처님(三法身)의 자발적 활동이다.

앞에서 우리는 유식설이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마음의 전환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마음의 전환(轉依)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유가행, 즉 선정의 수행이다.
유가행의 기본은 '유식관(唯識觀)'이다. 유식관은 불교의 이론, 즉 법을 듣고 머리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닌 체득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선정에 들어 있을 때 상상하는 여러 가지 영상이 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해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대상은 마치 꿈속의 영상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울러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대상도 그대로(보이는 그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상 자체가 없고 따라서 대상을 보지 않게 될 때,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던 마음 역시 없다고 깨닫고, 마음도 대상도 모두가 없는 경지(境識俱泯)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경지를 '유식에 든다'고 한다.
이러한 유식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유가행의 실천만이 아닌 불교의 모든 실천수행 방법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같은 실천에 따라 순차적으로 계위가 올라가 마침내 부처의 경지(불위)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본은 어디까지나 유식관이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유가행을 닦는 파를 '유가행파' 또는 '유식론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식의 이론은 인도 대승불교가 낳은 최고의 이론체계라 할 수 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진실의 모습(眞如)은 변함이 없으나 그것을 보는 견해에 따라 미오(迷悟)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으면 모든 대상을 진실 그대로 볼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색을 공으로 보지 않는 미망에 대해 색을 공으로 보는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고 있지만 동시에 '색즉시공'을 '공즉시색'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과 같은 소식이다. 선종에 이르면 이러한 경지를 간단하게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柳錄花紅)'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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