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心·意·識)
이것에 답해서 막연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자기라고 인식되는 실체를 '심(心)'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경에 '마음이 더러우면 중생이 더럽고 정화되면 중생이 정화된다'는 말이 있는데 앞서 말한 '자정기의(自淨其意)'와 통하는 말이다.여기서도 중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미혹도 깨달음도 마음 갖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교다.
즉 불교는 마음의 자세를 문제로 삼아온 종교다. 자기라든가 중생이라든가 하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미혹하거나 깨닫거나 하는 마음은 있다. 마음만큼은 실천의 주체임에 다름아니다.
마음을 정화하는 것은 곧 자기가 맑아지는 일이다.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고 할 때의 '마음'은 목적격이 아니고 '스스로(自)'와 동격의 실천주체인 것이다. 마음이 곧 자기인 것이다.
불교가 마음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신·구·의 삼업으로 나누면서 신·구 이업의 근원으로 의를 들고 있는데서도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말을 모방해서 말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마음(心)'이라해도 실은 무아설과 모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오온〈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가운데 어느 것도 아는 아니다. '나'라는 개인적 존재는 오온 가운데 색(色)은 육체, 즉 신체의 여러 기관(根)이고 다른 네가지인 수·상·행·식은 마음이라 불리우는 정신작용이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 부르는 것은 이같은 수·상·행·식이라는 여러 가지 심리작용, 현상으로 분해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무상이며 자기의 생각대로 어떤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심'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심의 작용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생각하는 아(我)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우리는 분명히 마음(心)이 있다고 하며 또한 불교에서도 통상 그렇게 말하고 있다. 목석은 마음이 없어 무정이라 하지만 동물은 유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한 술 더떠서 선가(禪家)에서는 '마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주인공'이라는 말도 쓰는데 역시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천의 주체인 마음을 설명하는 교리해석 중 가장 오래된 방법은 오온의 식에 대한 의미규정이다. 해석가들은 수상행식이라는 심리작용 가운데 마지막 '식(識)'에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나머지 수·상·행은 여기에 종속시켰다. 식을 심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또한 그때까지 식과 동의어로 취급해 왔던 6근 가운데 의근(意根)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가 부여됐다. 식은 원래 신체의 일부분인 눈과 귀, 코와 입 등과 같은 감관의 하나였다. 다만 이 경우라도 의는 물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의 기능을 제외하고 별도로 마음이라 불리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의는 심으로 인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차차로 심 = 의 = 식이라는 것이 교리적으로 확인됐다. 경전에서도 심(心) 또는 의(意)나 식(識)으로 언급되는 것은 실천의 주체로서였다.
마음은 여러 가지 번뇌를 수반해서 업을 일으키고 그 결과(과보)를 책임지게 되는 것, 아울러 설법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르며 점차 번뇌를 버리고 착한 마음과 지혜를 축적해 나가는 것, 그리하여 업과 윤회로부터 해방되어 열반을 얻는 당체라고 생각되었다. 일체법의 분류에서 말했던 오위(五位)에 의한 분류에서 '심왕(心王)'이라 불리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오온 가운데 수·상·행은 식으로 불리우는 심왕에 복종하는 하인과 같은 심소유(心所有, 마음의 속성)다. 이것은 항상 마음과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아비달마의 교리에서는 정(三 )이나 혜(智)도 이같은 심소법에 불과하다. 마음이 안정되고 혜의 활동이 강해진 극한에서 마음에 깨달음이 생기고 해탈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마음은 줄곧 지속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실천의 주체라 해도 무아를 기본으로 하는 아비달마의 교리에서 결코 그와 같은 지속적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다. 다른 유위의 제법과 마찬가지로 마음 또한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순간마다 생겼다 없어지는 존재이다. 다만 우리들은 일정한 업이 집적(集積)된 결과로써 이 세상에서 생을 받는다. 즉 탁태(托胎)의 순간에 식으로써 형성된다. 그리하여 찰나생멸을 반복해 가면서도 일정한 기간(업의 힘이 다할 때까지, 혹은 태어난 후 새로운 업의 힘이 일정한 조건을 채울 때까지) 동일한 개체로서 이 세상에서 생존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이라는 상식적인 입장에서의 개인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아비달마의 교리에서는 '심상속(心相續)'이라고 부른다. '아'라고 하는 것은 찰나멸(刹那滅)의 마음이 일정한 조건 아래서 상속(相續, 의식 있는 흐름)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정한 조건이란 수명(命根)이라는가 열(따스함, 체온) 따위를 말한다. 이러한 것들이 사대로 되어 있는 신체를 하나로 묶어 유지하며 마음이 작용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생리학으로 설명하면 신체의 세포가 시시각각 신진대사를 반복하면서 또한 그것에 동일한 개체의 존속을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심상속이라는 생각은 원칙적으로는 대승불교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대승불교는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보다 정밀한 이론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유가행파의 유식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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