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교리

8-4 자성청정심과 여래장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1:17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여래장(如來藏)


유식설의 마음, 즉 아뢰야식이 미혹한 범부의 마음을 기본으로 해서 이론을 전개하는 것과는 달리 아무리 미혹하더라도 그 마음은 본디 깨끗해서 부처님의 마음과 같다는 견해가 있다.'보리심'이라든가 '발심(發菩提心)'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으로 향하는 마음은 오염됐다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으로 향하는 노력을 가능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에 착안한 사고방식이다. 이것을 자성청정심이라 한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판타카라는 형제가 있었다. 형 판타카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아우는 교리의 말 한마디도 외우지 못하는 머저리였다. 그 때문에 아우 판타카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다. 부처님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손수건을 손에 들고 그것이 먼지와 때로 더러워졌어도 빨면 깨끗해진다는 사실을 관찰해 보라고 했다. 판타카는 늘 손에 있는 손수건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선정에 매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손수건의 비유에서 알수 있듯이 마음은 본래 깨끗한 것이나 우연히 번뇌의 때가 묻어 더럽혀져 있는데 불과하다는 것이 자성청정심의 이론이다. 자성청정심이란 마음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이므로 일견 성선관(性善觀)과 비슷하다.

유식설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 좁은 뜻에서는 아뢰야식만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그 활동방향이 서로 틀린 의(意:마나스)라든가 안식(眼識) 따위의 6식뿐만 아니라 그 마음과 수반돼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심리작용(心所法) 등을 통틀어서 말하고 있다. 이것에 비해 자성청정심의 이론에서는 마음에 수반되는 작용으로서의 번뇌 따위와 같은 것은 마음 위로 외부에서 일시로 찾아오는 손님에 불과하다(客塵煩惱)고 한다. 번뇌가 밖에서 찾아온다고 해서 어디엔가 번뇌가 실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마음이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진실을 모를 때 즉 무지(無明)일 때 나타나 마음에 부착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달빛을 가로막는 구름으로 비유된다. 그러나 구름이 지나가면 다시 달빛이 빛나듯 깨달음이란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구름이 몰려와 달빛을 가로막아도 달빛은 조금도 변함이 없듯이 미오에 구애 없이 중생의 마음도 항상 깨끗하다(自性淸淨)는 설명이다.
《아함경》에도 같은 비유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고 있다. 하지만 객진(客塵)의 여러 번뇌로 더렵혀져 있다… 그러나 성스러운 제자들은 알고 있다. 수련을 쌓으면 객진이 사라지고 마음이 다시 빛난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변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수행에 의해 알 수 있음이 설명되고 있다. 즉 수행에 의한 마음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유식설처럼 마음 자체의 전환이 아니고 마음상태의 변화(마음 그 자체는 불변)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자성청정이라는 사고방식은 금이 광산에서 다른 광물과 섞여 있어도 채굴되어 정련(精鍊)되면 광채를 내는 것과도 비유된다. 그렇다고 금 자체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번뇌를 마음을 뒤덮는 덮개로 보는 것(五蓋)으로 마음도 금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빛을 가지는 불변의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범어로 금을 뜻하는 말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하나가 jatarupa다).

아함의 가르침에는 이와 같이 마음을 본래 밝게 빛나는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생각은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고 대승불교에 와서 갑자기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대승의 경우에도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반야경》에서는 '자성이 청정'하다는 말을 '자성이 없다'는 뜻 즉 공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쯤 되면 유식설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혹도 깨달음도 마음이 열쇠라는 것과 가까워진다. 물론 그런 가르침과 자성청정심의 이론이 모순되는 것은 아니고 두 가지 모두 통일이 가능하지만 《반야경》의 경우는 그 이상으로 마음의 문제를 캐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어찌됐건 유식설이 미혹도 깨달음도 마음이 열쇠라는 가르침에 입각해 학설을 전개한 것과는 달리 자성청정심의 가르침을 출발점으로 해서 새로운 학설을 전개시키는 계통이 나타났다.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유식설보다 먼저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들을 이런 자성청정심의 항상 변하지 않는 점, 부처님의 마음과 똑같은 점에서 깨달음의 원동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이 성불의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불성(佛性)'이라고 명명하고 또한 중생 모두에게 그것이 구비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을 보통 '여래장사상'이라고 부르는데 여래장(如來藏)이란 중생의 '태(胎)'에 여래를 잉태하고 있다는 뜻으로 태중의 여래, 즉 '여래의 태아'이다. 동시에 이 여래의 태아는 그대로 성장하면 여래가 된다는, 따라서 중생과 여래는 동질성을 가지며 일관해서 변함없다는 본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여기서 태내에 있다는 것은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것(無知)과 금광속에서 금이 다른 광물과 섞여 있듯이 번뇌의 덮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범부의 상태도 나타내고 있다.

또 한가지 '여래의 태아'라고 할 때는 여래가 부모이고 중생은 그 자식이라는, 그리고 여래라는 태내에 중생이 모두 들어가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러한 모든 의미가 '여래장'이라는 말속에 담겨져 있고 또한 여래장사상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불성'이라는 말로는 고작 부처님과 같은 성질이라든가 부처가 되는 기반, 원인이라는 의미 밖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교리는 함의(含意)가 많은 '여래장'으로 이런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에서는 자성청정이 단순히 마음일 뿐만 아니라 부처와 중생을 통틀어서 모든 기초가 되어있는 듯한 그 무엇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것은 불변의 것이라는 점에서 아뢰야식이 찰나 생멸의 존재, 연기된 것, 유위법인 것과는 달리 무위법이다. 무위법은 또한 진여라 불리우고, 법계(법의 근원 = 깨달음, 법의 기반 = 법성)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불, 여래는 그런 무위법(법계)으로 된 존재이므로 법신이라 불리우고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여래장은 번뇌에 시달리는 법신(재전위의 법신)이 된다.

또한 법계에서는 법의 영역이라는 뜻으로 전우주적인 보편성이 부여되고 있는데 그것과 일체가 된 부처님의 법신 또한 허공처럼 모든 존재에게 다 미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일체지자(一切智者)로서의 여래의 지혜활동이 중생 모두에게 미치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이론화해서 여래(의 본성)가 중생 모두에게 깃들어 있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우파니샤드와 베단타철학의 가르침인 '범아일여'의 설과 똑같은 구조의 사고방식이 나타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한편 동질이면서 중생은 더러움(오점)을 가지고 있고 부처님은 더러움이 없다고 하는 상태의 변화에 착안해서 중생, 여래장을 '유구진여(有垢眞如)', 그리고 부처님, 보리를 '무구진여(無垢眞如)'로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자성청정심이 전면적으로 무위법·진여·법계·법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와 동일시되면 번뇌의 존재는 점점 그림자가 희미해지고 극소화된다. 그리고 끝내는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이므로 중생은 본래 깨닫고 있다(本覺)고 하는 말까지 나온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수행에 의한 정화라는 과정까지도 극소화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는 어찌 이다지도 번뇌가 많고 좀처럼 제거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설명이 불가능하게까지 만든다. 아뢰야식이라는 학설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곤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는데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자성청정심인 여래장과 아뢰야식은 동일한 것의 안과 밖, 창과 방패처럼 상반되고 대립하면서도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를 동일시하는 생각이 나온다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견해는 《능가경》에서 시작해 《대승기신론》에 이르러 완결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그 기본을 여래장 쪽에 두고 있는데 여래장의 측면을 '심진여(心眞如)' 아뢰야식의 측면을 '심생멸(心生滅)'이라 부르고 있다. 이 경우에도 여래장위에 어째서 본래 있지 않은 번뇌가 나타나느냐 하는 메카니즘은 반드시 훌륭하게 설명되는 것 같지는 않다.

한편 유식설에서는 여래장의 학설을 진여·법계의 설명과 함께 도입해 원성실성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점은 미오전환 기반으로서의 중성적인 장(場)이라는 의미가 강력해지고 있다. 그리고 깨달음을 미혹의 근원인 아뢰야식의 전환, 자기 부정으로 추구했던 종교적 실천은 여래장사상 이상의 깊이를 보이지만 어떻게 그러한 전환이 생기느냐에 관한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공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불교술어로 말한다면 아뢰야식에 그것과 본질상 서로 수용되지 않는 무루(無漏)의 종자가 법을 들은 여훈(餘熏)으로서 생겨나 불어서 점점 본체를 누르고 소멸시키게 된다는 얘기다. 결국 두 사상은 상보적으로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주체의 정당한 모습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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