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교리

8-1 마음과 실천의 문제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1:15

무아설과 실천의 주체


앞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실천의 방법을 알아보았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통괄하는 것이 유명한 '칠불통계(七佛通誡)'다.


"모든 악을 짓지 말라(諸惡莫作)
모든 선을 행하라(衆善奉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라(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諸佛敎)"


즉 계를 지킴으로써 악행을 삼가고 선업을 쌓으며 나아가 정혜(定慧)를 잘 닦음으로써 마음을 깨끗이 해야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일은 최종적으로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 되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 자체가 불교수행의 목적이라 해도 좋다.
그러면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한다든가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한다고 할 때의 자기란 무엇인가. 또 깨끗해져야 할 마음이란 무엇인가.

'스스로'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실천수행의 주체로서의 자기를 뜻하고 있음은 설명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부처님이 '스스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自覺, 無師獨悟)' 또는 '법은 스스로 증명해야(自內證)하는 것'이라고 말한 경우의 자기 자신과 같은 말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삼으라(自燈明, 法燈明)'라고 가르친 '자신'도 같은 것이다. 이런 용례는 불교가 실천에 있어 수행자 개인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불교는 무아설을 주장한다. 무아란 우리가 상식적으로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란 실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가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하는 곳에 괴로움의 원인이 있다고 불교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무아설과 앞서 말한 주체성의 강조는 이론상 분명히 모순된다. 내가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느끼고 집착한다고 했는데 그런 '느낌'과 '집착'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인가, 다름아닌 자기자신이다. 깨달음을 향해 실천하는 주체와 같은 자기이다.

무아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내가' 생각한다는 생각도,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도 잘못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같은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또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버리는 자신이 있어야 하며 깨닫는 자신은 없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이 자신과 진리가 일체가 되는 것, 진리 그 자체가 되는 것이라 해도 진리와 일체가 되는 자기(이것을 여래라 한다)가 남는다. 이런 문제는 언어를 통해 아무리 추구해 나가도 결국은 해결을 볼수가 없다.

무아설이 갖는 이론적 약점은 업이라든가 윤회를 말할 때도 나타난다. 아가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업을 짊어지고 다음의 생을 받는 것인가. 자업자득은 스스로 지은 없을 스스로 받는다는 것인데 무아라면 누가 짓고 받느냐는 얘기다. 무아 또는 윤회라는 어느 한쪽의 교리체계를 가지고 다른 쪽의 이론을 모순없이 설명하고자 할 때 생기는 최대의 난제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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