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信)과 행(行)
불교에서의 믿음(信)은 첫째로 삼보에 대한 귀의다. 그것은 끝까지 부처님의 말씀(佛語)을 믿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란 결국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다. 초기의 단계에서는 특히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조도(助道)의 하나인 오근(五根)·오력(五力)이 앞머리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믿음은 수행 그 자체라기 보다도 수행의 전제가 되는 수용태도라 생각해도 좋다.
즉 그것은 먼저 마음을 열고 법을 듣고(認許) 그것에 의해 마음이 맑아지는 것(心淸淨), 그리고 깨달음을 향해 의욕을 일으키는 것(欲)등 세 단계를 포함한다고 해석된다. 믿음을 이처럼 수행의 전단계로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행(行)'과는 별개가 된다. 그것은 재가신자의 경우 행은 요구되지 않고 다만 삼보에 대한 귀의와 오계의 준수만을 요구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출가수행자에게는 믿음과 수행이 요구되며 믿음을 전제로 해서 수행으로 나가서 해탈·깨달음·열반을 얻는 것이 목적이지만 재가신자는 믿음만 있고 수행이 없으며 따라서 해탈과 열반은 바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 대신 보시를 베풀고 계를 지키면 죽은 후에 생천의 과보는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시론(施論)·계론(戒論)·생천론(生天論)의 차제설법이다. 이것은 출가·재가의 믿음과 수행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도 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길을 달리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수신행자(隨信行者)' '수법행장(隨法行者)'의 구별이 그것이다. 법을 듣고 다만 그 가르친대로 믿는 것이 수신행자이고 법을 올바르게 간별하는 것이 수법행자다. 이것은 신앙형과 이론형, 신(信)과 지(知)의 대비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정(定)과 관(觀)이 있다. 이 모두를 합해서 해탈의 길에는 신해탈(信解脫), 심해탈(心解脫; 정에 의한 것), 혜해탈(慧解脫) 등 세 가지가 있다. 이 경우 심해탈을 얻는 자는 실천형, 좁은 의미의 행형(行型)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해탈은 정과 혜를 함께 구비한 '구분해탈(俱分解脫)'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믿음 그 자체에는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것은 불교가 출가수행자 중심으로 해석되고 특히 수행은 그들을 위한 것만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기인한 것이다.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승불교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화엄경≫은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대지도론≫에서는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써만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원래 재가불자들의 운동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충족하는 교리구조를 갖는데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점은 상좌부 불교의 출가중심주의와 크게 비교되는 특징이다.
대승이란 '커다란 탈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부처님이 체험한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가능한 것이라는 믿음 아래 수행의 방법도 개방돼 있다. 따라서 누구든 부처님과 같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發菩提心 ; 發心) 그것을 목표로 수행할 것을 가르친다. 즉 부처님으 전신과 같은 '보살'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서원에 근거한 것으로써 자비심의 발로다. 부처님의 자비심에 대한 절대적 신뢰감은 대승불교의 믿음의 원형이다. 그것은 힌두교의 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비슷한 절대적인 귀의이고 무조건적인 것에 가깝다.
원시불교와 아비달마(部派) 불교에서의 믿음은 부처님의 말씀을 믿을 것,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기본인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인격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에는 ≪아미타경≫을 중심으로 하는 정토교가 있다.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은 오늘에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 초기의 대승경전에는 많든 적든 부처님의 서원과 자비심, 인격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을 절대적인 자리에 놓고 그의 도움(가지:加持)을 빌려서라도 부처님을 본받아 같은 길을 걸어서 그 자리에 도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 것이 대승이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모든 수행이 행해질 뿐 아니라 동시에 부처님과 같이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타행의 실천원리다. 때문에 대승은 재래의 출가수행중심의 아함이나 아비달마의 가르침을 '소승'이라고 낮춰 부른다. 소승이란 말은 수행자 혼자만의 해탈과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남을 구제하는데 소홀하다는 비난의 뜻이 포함돼 있다.
이타행
그러나 소승이라 해도 아함과 아비달마의 가르침이 전혀 이타행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가르침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이다.사무량심은 자(慈)·비(悲)·희(喜)·사( )를 말한다. 자란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비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 희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기뻐해 주는 것, 사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초월한 평온한 마음이다. 중생에게 한량없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자신도 범천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사범주(四梵住)라고도 한다.
사섭법이라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고 섭수하는 네 가지의 덕행이라는 뜻이다. 그 첫째는 보시(布施)다. 남을 자비심으로 대하고 재물과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애어(愛語)다. 남을 대할 때 항상 따뜻한 얼굴과 다정한 말로 대하는 것이다. 셋째는 이행(利行)이다. 항상 남을 위해 이익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넷째는 동사(同事)다. 나와 남의 구별없이 타인과 고락을 함께하고 협력하는 것이다.그러나 이와 같은 이타행이 보다 적극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대승불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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