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교리

7-3 팔정도와 삼학도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1:12

팔정도


8정도는 '8성도(八聖道)'라고도 한다. 여덟 개 항목으로 된 성자가 밟아야 할 길이란 뜻이다. 여기서 성자란 부처님 그리고 그 제자 또는 출가수행자들을 이르는 존칭으로 보아도 좋다.
여덟 개 항목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①정견(正見:올바른 견해)-4제를 관찰할 것
②정사(正思:올바른 마음자세)-출리(出離)를 원하고 분노와 혐오를 갖지 않으며 탐착을 갖지 않는 것.
③정어(正語:올바른 말)-거짓·중상·비방·천한 말을 쓰지 않는 것.
④정업(正業:올바른 행위)-살생·도둑질·음행을 하지 않는 것.
⑤정명(正命:올바른 생활)-교단의 규율에 따르며 여러 가지 사악한 생활방식에서 떠날 것.
⑥정정진(正精進:올바른 노력)-이미 생긴 악은 끊고 악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며 선이 생기도록 하여 그것을 증대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四精勤).
⑦정념(正念:올바른 생각)-이 몸은 부정하며, 감각(受)은 괴로움이며, 마음은 무상이며, 제법은 무아라고 볼 것. 그러므로 몸은 정결하고 인생은 즐겁고 마음은 항상 변함이 없고 나(我)가 있다고 생각하는 네가지의 잘못된 생(四顚倒)을 없앤다.
⑧정정(正定:올바른 선정)-4단계의 명상(四禪)


이 배열은 먼저①4제의 가르침을 이해한 뒤 ②∼④마음과 언어 행위(身口意 三業)를 바르게 지키고 ⑤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⑥악을 막고 선이 생기도록 계속하며 ⑦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직관, 억념(憶念)하고 ⑧마음의 안정을 향해 주력하도록 되어 있다.이 가운데 ②∼⑤는 모두가 올바른 생활태도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계(戒)'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다. 이에 비해 ⑥∼⑧은 대체로 불교수행의 구체적 실천방법(四精勤·四念處·四禪)이다. 이것은 다시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定)'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의 관법은 선정 가운데서 채득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관법은 올바른 견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일관해서 지혜 즉 '혜(慧)'의 활동이 요구된다. 선정과 지혜가 함께 행해지고 조화되는 것은 불교수행의 이상이기도 하다.
후에 확립된 수행의 단계에 의하면 4제의 관법은 성자가 된는 제 1단계라 하여 이것을 '견도(見道)'라고 했다. 이후의 여러 단계는 '수도(修道)'가 된다. 8정도를 여기에 대입시켜 보면 ①정견은 견도이고 ②정사∼⑧정정은 수도가 된다. 그리고 이 수도의 내용은 계·정·혜 즉 삼학(三學)으로 정리된다. 그런 뜻에서 8정도는 범부가 아닌 수행을 쌓은 성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계·정·혜(三學)


8정도는 계를 지키고 선정을 실천해서 지혜를 얻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계·정·혜 3학이다. 여기서 '학(學)'은 글자 그대로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말하는 학문과는 달리 수행을 가리키는 것이다.3학은 종종 수행도 전체의 틀로써 쓰여진다. 가령 남방불교의 개설서로 한역의 ≪구사론≫의 위치에 해당되는 ≪청정도론(淸淨道論)≫은 불교수행론의 전체를 계·정·혜 3학으로 조직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수행론을 3학으로 나누어서 좀더 상세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①계(戒) - 계의 원어 Sila는 '습관이 된 행위' 또는 '행위상의 습관'을 뜻한다. 따라서 가치적으로 말하면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있다. 그래서 나쁜 습관은 악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계란 깨달음을 향한 좋은 습관만을 가리키는 거스로 행위상의 여러 가지 규범을 뜻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불교도는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거나 삼보에 귀의해서 신자가 될 때 계를 지킬 것, 즉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 선한 일을 하겠다고 결의한다. 그런 뜻에서 계는 맹세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맹세는 실제로는 행위(身口意, 三業)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불교의 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죽이지 말 것(不殺生), 훔치지 말 것(不偸盜), 음행하지 말 것(不淫行), 망령된 말을 하지 말것(不忘語), 술마시지 말 것(不飮酒) 등 5계다. 출가수행자에게 이 오계는 5학처(五學處)가 된다. 이중 불망어는 어업(口業)이고 그외는 신업(身業)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의업(意業)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불음주는 음주 자체가 문제이기보다는 술을 마심으로써 취하여 자제를 잃는 것을 염려해서 생긴 계다. 또 불음행(不淫行)은 범행(梵行)으로 독신을 지키는 일인데 그것은 결혼이 인간으 욕망을 증가시키고 마음을 열반과는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이 계는 재가신도의 경우 불사음이라 하여 부부 이외의 성관계를 금하는 도덕적 문제로 바뀐다. 물론 여기에도 무한한 욕망의 제어라는 뜻이 있다.

어쨌거나 수행자에게 있어 불음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한편 불살생이나 불투도도 보편적 인륜도덕이라 해도 좋다. 불살생은 인간끼리는 물론 모든 동물에 대해서도 위해를 끼치는 행위를 금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존중이라는 자비 사상 외에도 윤회사상의 영향도 있다.

앞에서 말한 불교의 기본적 5계는 그 원형이 자이나교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또한 불살생과 같은 계율은 바라문교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로인해 재래의 희생제(犧牲祭)가 향화공양(香華供養)으로 바뀌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힌두교나 나아가서는 인도사상 전체의 특색이 되고 있다. 자이나교는 다섯 번째의 계로 불음주가 아닌 무소유를 제시하고 있다. 자이나교의 수행자는 그 때문에 재산은 물론 의복까지도 소유를 금한다. 극단적으로 그들은 나체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 불교에서는 의복에 관해서는 삼의(三衣)의 착용을 규정하고 있다. 그 기본은 '소욕지족(小欲知足)'에 있다.

계를 지키는 목적은 심신을 깨끗이 하고 그럼으로써 수행을 용이하게 하는데 있다. 때문에 수행자는 비구가 2백50계, 비구니가 3백 48계라는 세세한 규정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재가신자는 삼보에의 귀의(三歸依戒)와 5계만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실천이 요구된다. 이것을 사불괴정(四不壞淨)이라 부른다. 재가신자는 이 계의 실천 외에 보시의 실천이 강조된다. 보시는 사후에 생천(生天)의 과보를 가져온다고 가르쳐 진다.
대승불교는 그 출발점이 재가자들의 신앙운동이었다. 때문에 앞으로 설명할 6바라밀에서 보여지듯 보시와 지계를 앞부분에 배치하고 있다. 이중 계는 10선업도를 기본으로 한다. 10선업도란 ①불살생 ②불투도 ③불사음 ④불망어 ⑤불양설 ⑥불악구 ⑦불기어 ⑧불탐욕 ⑨불진에 ⑩불사견을 말한다. 이중 ①∼③은 신업(身業)이고 ④∼⑦은 어업(語業) ⑧∼⑩은 의업(意業)이다. 8정도에서는 정업·정어·정사에 해당되는 것이다.

10선은 중생들에게 모범이 될 '제왕(帝王)의 덕'이라 할 수 있다. 실질적인 내용은 금지해야 할 불선업의 부정이므로 계라 해도 무방하다. 대승에서는 이것을 10계라고 부르는데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지악(止惡)과 행선(行善)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타의 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뒤에 섭율의계(攝律儀戒 ; 止惡으로서의 계) 섭선법계(攝善法戒 ; 行善으로서의 계) 섭중생계(攝衆生戒 ; 중생을 이익케 하는 행의 실천)라는 삼취정계(三聚淨戒)로 정리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대승계란 ≪범망경(梵網經)≫의 보살계를 말한다. 이 계는 삼귀의계(三歸依戒)·삼취정계(三聚淨戒)와 10중대계(十重大戒)·48경계(四十八輕戒)로 되어 있다. 삼귀의계는 삼보에 대한 귀의를 말하며 10중대계는 앞에서 말한 10계(10선업)와 내용이 같다.
②정(定) - 마음을 통일하고 안정시키는 것을 음사해서 '삼매' 또는 '삼마지(三摩地)'라고 하고 번역은 '등지(等持)'라고 한다. 같은 말로 '등지(等至)' '등인(等引)'이 있으며 그 상태를 설명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 즉 마음을 한 곳에 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마음의 작용이 정지한다는 뜻이므로 '지(止)'라고도 부른다. 여기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으로는 '선(禪)'이라 불리우는 명상이 주된 것이므로 이 양자를 합쳐서 '선정(禪定)'이라고 하기도 한다.

선은 dhyana의 음사어로, 번역하면 '정려(靜慮)' 또는 '사유수(思惟修)'라는 뜻이다. 즉 마음을 가라앉히고 궁리한다는 뜻인데 골똘히 명상할 내용은 불교가 가르치는 여러 가지 교리가 된다. 이것을 '관(觀)'이라 부른다. 관은 뒤에 설명할 '혜(慧)'의 작용이다. 이것은 반드시 '선(禪)'이나 정(定)', '지(止)'와 더불어 체득되기 때문에 '지관(止觀)'이라고 붙여서 쓰는 경우가 많다.

선과 정은 모두 요가의 범주 속에 드는 것이다. 요가는 마음을 하나로 맺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도 때로는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대승불교의 유식학파는 유가사(瑜伽師)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유가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유가사는 또한 선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교단내의 이론파인 법사와는 달리 선정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선이든 정이든 또는 요가이든 그것이 의미하는 범위는 거의 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불교는 이 가운데서 '정(定)'을 대표로 하여 선·등지·등인·심일경성·지·등지와 현법낙주(賢法樂住)란 말을 보태서 정의 일곱가지 이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법낙주란 마음의 안정된 결과로서의 안락의 경지를 말한다.선정은 순서에 따라 점점 높은 곳으로 진전하여 보다 높은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을 '9차등정(九次等定)'이라 하는데 득과(得果)는 앞서 말한 삼계에 걸쳐 배치하고 있다.
선정의 최초단계는 4선으로 8정도의 정정(正定)이 여기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성도를 할 무렵 수행했던 선정이 이것이다. 그위에 '4무색정(四無色定)'이 있으며 다시 그 위에 최종적으로 '멸진정(滅盡定)'이 있다. 멸진정에 들어가면 마음의 동요는 완전히 정지한다. 그러나 선정은 설사 최고의 멸진정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깨달음 또는 열반과는 다르다. 그 자체가 깨달음이나 열반이 아니라는 얘기다. 선정은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컨트롤하는 것을 뜻한다.

경전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정심(定心)과 산심(散心)으로 나누고 있는데 산심은 우리들의 보통 마음상태다. 그러나 선정에서 정심으로 변하고 다시 산심으로 돌아간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에 들어가서 이런 단계를 쉽게 오르내린다. 그리고 출정(出定)한 뒤에 제자들에게 설법한다. 수행자도 역시 같은 훈련을 받는다.
선정을 공부하는 방법인 관(觀)은 여러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남방불교는 관법의 대상을 '업처(業處)'라 부르는데 종류는 열네가지가 있다. 또 《구사론》에는 부정관(不淨觀)·자비관(慈悲觀)·인연관(因緣觀)·계차별관(界差別觀)·수식관(數息觀) 등 오정심관(五停心觀)이 제시되고 있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더욱 많은 관법이 나타난다. 대승불교는 관법을 보통 삼매라고 하는데 염불도 원래는 관법의 하나였다. 특히 대승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는 삼매가 유명하다. 이것을 반주삼매(般舟三昧)라 한다. 부처님을 현전(現前)에 세워 놓는 삼매라는 뜻이다. 후대에 이르게 되면 선과 염불은 완전히 대립하는 별개의 교리처럼 생각되고 있으나 근본을 따지고 보면 염불도 역시 선정의 하나였다.

③혜(慧) - 혜는 반야, 즉 지혜를 말한다. 말뜻은 '지(智)'와 같다고 해도 되지만 불교에서는 때로 구별해서 쓰는 경우도 있다. 일상적인 의미로서 지(知)라든가 지성을 지칭할 때도 있고 때로는 지각을 가리킬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혜'는 깨달음에 인도하는 지혜 또는 괴로움의 멸각, 즉 열반에 인도하는 수단으로서의 지를 뜻한다.지(智)는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법을 받아들여 자기 마음속에 생각하고 반추해서 올바르게 깨닫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하며 그 지(知)를 심화시켜 최후의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혜는 입문의 처음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단계에 따라서 작용하는데 그 전부가 혜학(慧學)의 내용이 된다.
혜는 그 단계에 따라 문혜(聞慧)·견혜(見慧)·수혜(修慧)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정(定)의 내용으로서 제시되는 관법은 이중 수혜에 해당되는 것이다. 4제의 현관(現觀)이나 12연기, 나아가서는 대승불교의 공관(空觀)이나 유식론은 한편에서는 법이며 교리이기 때문에 먼저 듣고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동시에 선정 수행에 의해 그것을 체득할 수 있으므로 수혜이다.

일반적으로 지(知)라고 할 때 안다고 하는 작용(認識)과 알게된 내용(知識)의 양쪽을 뜻하는데 불교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안다고 하는 작용은 감각적으로 아는 것(知覺)외에 분석적인 지식(判斷·分別) 또는 직관적 (知)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혜'가 법을 간별하는 작용(擇法)이라고 말해질 때는 이론적·분석적인 인식에 가깝다. 이것은 유분별지(有分別智)다. 4제라든가 연기·무상·무아라는 진리는 이런 경우 알려진 내용으로서의 지(所知)다. 그러나 똑같은 진리가 수행실천을 통해서 체득되면 '이것은 4제이다' '이것은 12연기다'라는 분별이 없어진다.

그것은 안다는 것과 아려진다는 것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이것은 깨달음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 세계이며 '진여'바로 그것이다.동시에 부처님이라 해도 중생을 상대로 하고 제자를 앞에 놓고 법을 설하고 있을 때는 통상대로의 분별의 세계에 있는 것이 된다.

즉 아는 작용(主觀·能知)과 알게 되는 대상(直觀·所知)은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통의 인간, 즉 범부가 가지고 있는 그런 의혹이나 어리석음·미혹·애매함 또는 부정확함
이 없고 나아가 그 대상에 대한 집착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智)는 부분별지에 힘업어 깨달음 후에 얻게 되는 지(智)라는 뜻으로 '후득지(後得智)'후득의 유분별지(有分別智)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활동하는데 불가결의 지(智)이므로 후득의 세간지라고도 한다. 이것은 특히 대승불교의 강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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