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와 열반
4제의 세 번째 '멸제'란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상태로 그것은 '열반'과 같은 뜻이다. (제 4장 불교의 진리관에서 설명했다.) 열반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요함이 수반되는 안락의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는 불교가 지향하는 구극적인 이상의 경지다. 부처님은 정녕 이 경지에 도달했던 분이 틀림없다.
하지만 '부처님'이란 호칭은 직접적으로 이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이상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으로는 '여래' 또는 '여거(如去)' '선서(善逝)'등의 호칭이 있으나 이것도 직접적으로 열반이라는 말과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굳이 찾아본다면 '지나(고뇌를 극복한 승자)'라는 말이 고뇌를 극복했다는 의미로 고멸(苦滅) 또는 열반에 가까운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밖의 호칭은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자'라는 지적인 완성상태를 나타내든가 세상을 구제하는 사람, 또는 스승이라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즉 지혜와 자비의 측면이 강조되고 있으며 열반의 경지는 그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원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의 체험, 다시 말해 보리(普提)는 부처님을 부처님답게 하는 까닭이며 부처님의 본질에 다름아니니 것이다. 따라서 보리의 획득이야말로 불도수행의 최고 목표라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보리와 고멸이라는 뜻의 열반과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 것인가.
불전의 입장에서 보면 보리는 성도이고 열반은 입멸에 해당된다. 이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부처니은 생전에는 아직 열반을 이루지 않았던, 또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열반이라는 말은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는 뜻이 된다. 열반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에 '불사(不死)'라는 것이 있고 이것은 열반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 부처님이 성도에 즈음해 고뇌를 극복하고 마음은 더러움으로부터 해탈하여 이제 윤회로서의 생존은 두 번 다시 받지 않을 것임을 자각했다고 선언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또 현실적으로는 생노병사에 매인 몸이면서도 불로(不老)·불병(不病)·불사(不死)로 위 없는 안온한 열반을 얻었다고도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을 현법열반(現法涅槃) 즉 이 세상에서의(생존 중의) 열반이라고 한다.
이 경우 부처님이 처음부터 추구했던 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불사의 경지이며 열반이었던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의 수행자들은 윤회로부터의 해탈과, 해탈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그것을 무상·무아인 인생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깨달아 인생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만듦으로써 달성했던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했던 이 같은 방법이야말로 부처님의 특색이었다. 부처님이 다른 종교가와 분리되어 부처님이라 불리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도식으로 풀어간다면 보리(깨달음)는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불교의 특색이 깨달음에서 발견되어졌기 때문에 마치 보리가 최종 목적으로 생각되어진 것이다. 특히 깨달음의 강조는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의 보편화에 영향받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깨달음 또는 안다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불교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미 종래의 신들을 모시는 것으로써 신의 은혜로 불사의 세계로 향한다는 견해와는 다른 철학이 나타나고 있다. 즉 '우주적인 절대자인 브라흐만과 우리들 개아가 본래 하나'(梵我一如) 라는 것을 앎으로써 개아는 브라흐만에 귀일(歸一)하는 것이 해탈이며 불사의 획득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경우 '안다'는 것은 수단이면서도 그것이 즉각 불사가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거의 목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불교는 깨달음을 목적시함에 따라 점점 우파니샤드적인 사고에 접근했다가 마침내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불교의 체계에서는 '보'가 '열반'과 함께 나란히 달성해야 할 동일한 이상·목적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깨달음은 지(智) 또는 혜(慧), 혹은 반야바라밀의 이름으로 쓰인다. 즉 수단적인 지위, 4제로 말하면 도제(道諦)에 속하는 성격까지도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안다고 하는 것이 도제와 멸제의 인과관계를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녕 무지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에 대응하는 불교 교리의 도식이라 할 수 있다.
보리와 열반을 상이하게 보는 관점은 부처님의 입멸을 대반열반(大般涅槃, 위대하고 완전한 열반)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대반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즉 육체라는 의지처를 남기지 않는 열반이라고 하고, 그 이전의 보리를 증득한 상태는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열반은 부처님의 제자들도 얻을 수 있다 하여 해탈의 일미(一味)는 등미(等味)라고 하지만 보리는 부처님에게만 한하고 이것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밖에도 번뇌의 멸진과 단제(斷除)를 열반이라 하고 지혜의 획득을 보리라 하여 (斷)과 지(智) 양면으로 부처님의 덕을 나타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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