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그러면 이 삼계를 윤회하게 하는 작용은 무엇인가. 불교의 대답은 '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업은 번뇌(惑)가 유발시킨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불교가 인생을 바라보는 기본태도인 혹(惑)→업(業)→고(苦)의 체계이다. 고라는 것은 사제에서 보면 고제이다. 즉 윤회이다. 번뇌(혹)는 집제로서 갈애 또는 무명이다. 그리고 업은 사제에서 고와 집을 연결시키는 작용이다.
업에 관한 생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불교에서는 종래의 생각에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 중요한 교리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처님은 때로 '업론자(業論者)'라고 불리기도 했다. 업론자란 업을 매개로 하는 도덕적 인과율의 신봉자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업론자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과보를 만들어 내는 힘으로써 현재의 행위를 강조하고 특히 착한업의 집적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업'이라고 번역되는 카르만은 '만든다' '한다'라는 의미의 어근 Kar man이라는 '작용'을 나타내는 어미를 붙여서 생겨난 말로 작용과 힘을 나타낸다. 이것은 '행(行)'이라고 번역되는 상스카라와 비슷한 개념이며 경전에서는 종종 두 가지 용어가 혼용되기도 한다. 다만 '행'은 '제행(諸行)'으로서 제법을 연기하게 하는 것과 같은 용법이 업에는 없다. 그대신 업은 윤회를 가져오는 힘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도 영향력은 남게 마련이며 그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그것이 업이라는 것이다.
불교교리에서 업은 대체로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신업은 신체, 즉 손이나 발 등으로 사용한 동작이다. 구업은 어업이라고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언어표현, 말이라는 뜻이다. 이와 달리 의업은 마음의 작용, 정신의 작용이다. 의업은 신체의 동작, 언어의 표현을 있게 하는 정신작용이므로 행위라고 하기에는 정확하지 않을지 모르나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업이라 할 수 있다. 이 행위론은 다시 선업과 악업에 관련되고 계율문제와도 관련된다. 이를테면 생명을 죽이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등은 삼업과 관련이 깊다.
3업은 세분하면 10업이 된다. 즉 신업에는 살생·도둑질·간음 등이 있으며 구업에는 이치에 안 닿는 말·거짓말·욕설·이간질 등이 있고 의업에는 탐욕·분노·어리석음 등이다. 이 10업은 그 반대가 될 때, 즉 살생대신 방생을 하면 그것은 선업이 된다.
또 표면화의 문제에 있어 3업은 표업(表業)과 무표업(武表業)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신체적 행동이나 말은 표현은 나타나므로 표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있다. 의업(정신작용)에도 표업·무표업이 있다는 주장이다. 어쨌거나 마음은 행동의 근원이 되므로 마음의 개조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된다.업의 선가 악은 도덕적으로도 매우 중요하지만 인과관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즉 나중에 복을 가져올 것이냐(복업), 아니냐(비복업)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냐(부동업) 하는 것이다.
업의 인과관계는 삼계의 윤회를 초래한다. 반대로 업은 도를 닦아 해탈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통상 말하는 업과는 성질이 다르다. 때문에 삼계의 윤회(有)를 야기시키는 업은 '유류업(有漏業)' 즉 번뇌를 수반하는 업이라 부른다.
도를 닦아 생기는 업은 그 반대인 '무루업(無漏業)'이다. 그러면 부처님이 중생제도를 하는 업(행위)은 어디에 속하는가. 이는 별도로 '불업(佛業)'이라고 한다. 불업은 윤회의 원인으로서의 과를 낳는 업이 아니다. 그러나 보살의 경우는 무루업에 해당된다는 것이 교리상의 해석이다.업의 문제와 결부해 생각할 것은 윤회의 주체가 무엇이나 하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개아(個我)가 인정되지 않는다(無我). 그렇다면 업은 누가 짓느냐 하는 문제다. 이는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여서 교리상 논란이 가장 많은 부분이다. 대승의 유식설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서 자세한 소개는 어렵다.
번뇌(惑)
번뇌라는 말은 우리들의 일상에 널리 쓰이는 말이다. 이를테면 '백팔번뇌'라는 말이 그것이다. 불자들이 백팔염주를 돌리는 것도 백팔번뇌를 없애기 위해서다. 〈목환자경〉에 의하면 나무로 만든 구슬 백팔개를 꿰어 수주(數珠)를 만들어 돌리면서 삼보를 생각하면 백팔의 결업이 없어지고 위 없는 도과를 성취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백팔결업이란 백팔번뇌를 말한다.
그러면 백팔번뇌란 무엇인가. 중생은 여섯가지의 감각기관(眼·耳·鼻·舌·身·意)으로 사물을 대하게 되면 그 느낌이 각각 다르다. 즉 좋다(好) 나쁘다(惡), 그저 그렇다(等)는 느낌을 갖는다. 여기서 열 여덟가지 번뇌(6×3)가 생긴다. 이는 다시 괴로움(苦), 즐거움(樂), 버림(捨)이라는 세가지 받아들임(受)을 만들어서 18번뇌(6×3)를 만들어 모두 삼십육번뇌(18+18)가 된다. 이 번뇌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르기 때문에 백팔번뇌(36×3)가 된다. 약간 다른 설명도 있으나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백팔이란 요컨대 인간의 번뇌가 많다는 뜻이지 숫자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일사에서 충분히 경험하는 사실이다. 불교는 이같은 번뇌의 근원을 추구하여 그것을 없애려는데 관심을 갖는다. 번뇌가 있는 한 인간은 많은 죄악을 저지르게되고 필경은 생사 윤회를 되풀이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번뇌의 원어 크레사는 '더럽히다'라는 뜻으로 '오염' 또는 '혹(惑)'이라고 번역된다. '제법의 분류'에서 설명한 마음의 작용(心所有法 : 마음이 현상에 상응해서 작용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시말해 여러 가지 번뇌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을 두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불교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느냐에 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정리해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우선 아함경전 속의 한 마디를 인용하고자 한다.
"마음이 더러우면 중생은 오염되고, 마음이 정화되면 중생은 깨끗해진다."
이것은 미혹도 깨달음도 중생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4제법 가운데 고집의 2제와 멸도의 2제의 성격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즉 고를 집합시킨 것이 번뇌로써 마음이 더럽혀지면 거기에서 중생들의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번뇌로부터의 오염을 떠나 정화되면 번뇌가 없어지고 따라서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한 열반의 경지로 도달된다.
이같은 설명은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은 번뇌와 업과 그 결과로서의 괴로움이라고 하는 혹→업→고의 전과정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같은 논리구조는 마음의 '잡염(雜染)'은 바로 도를 닦음으로써 '청정(淸淨)'에 이른다는 과정과 대비된다.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번뇌만은 아니나 그 모든 것의 근원은 마음의 작용, 특히 '오염'이 번뇌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선과 악의 관계로 말하면 신체와 말에 의해 나타나게 되는 행위의 배후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작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즉 마음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불쑥 몸으로나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언제나 행위의 근원이 되는 마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기론에 선다.이와 같이 행위의 배경에 있는 잠재적인 작용은 그 자체가 '업(業)'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또 '행)'으로도 부리운다. 번뇌는 이런 뜻에서 심업(心業=意業)이며 심행(心行)이라 할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지금 어떤 사람이 몹시 화를 내고 있다고 치자. 그는 분노에 못이겨 험상궂은 얼굴에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떤다. 이것은 신업이다. 그는 또 상대에게 욕을 퍼붓는다든가 꾸짓는다든가 한다. 이것은 구업이다. 이밖에도 그는 현재 분노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다. 이것은 의업이다. 마음의 움직임,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분노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분노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마음의 작용에도 현재의 상태와 그 원인이 되는 과거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번뇌 속에는 현재 작용하고 있는 것과 잠재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는 얘기다. 앞의 것을 '전(纏)의 번뇌'라고 부른다. 현재 생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뒤의 것은 '수면(隨眠)'이라고 한다. 잠들어 있어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곧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곧 활동하게 된다는 뜻에서다. 이 이론은 번뇌를 없앤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실천론적인 뜻에서 순간적인 전'보다 잠재적으로 지속하는 '수면'쪽에 비중을 두고 바로 이것이 번뇌의 본질이라는 견해가 생기게 되었다. 《구사론》의 수면품이 이런 입장이다. 여기에서는 번뇌는 즉 수면의 상태며, 그 의미는 괴로움을 증폭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전'은 일종의 부차적인 번뇌가 된다.
그러면 번뇌라고 불리우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가장 많이 거론되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삼독의 번뇌' 또는 '삼불선근(三不善根)'이라는 탐진치가 있다. 탐(貪)은 '탐욕'이라고 번역되듯이 욕심과 집착을 의미한다. 욕망일반이라 해도 좋다. 이 탐과 방향적으로 반대의 극에 있는 것이 진(瞋)이다. 이것은 혐오하거나 증오하거나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애( )'라고도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좋은 것, 이를테면 아름다운 이성을 보면 마음이 끌려 함께 있고 싶다고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유욕에 도달한다. 이것이 탐이다. 이 경우 그같은 소원이 도달하면 즐겁지만 만일 그 사람과 헤어진다면 그것은 괴로움이다. 또 설사 일시적인 즐거움을 맛본다 해도 마지막에는 필경 헤어져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애별이고(愛別離苦)다. 그렇다면 즐거움도 결국은 괴로움의 씨앗이 된다는 얘기다. 이 모든 것은 탐심이 초래한 괴로움이다. 이같은 괴로움은 탐심을 버리지 않는 한 끝날 수 없다. 이것이 불교가 누누히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좋지 않은 것, 싫은 것을 보면 얼굴을 돌리고 싶어한다. 싫은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 원증회고(怨憎會苦)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가 사라지면 이것 역시 괴로움은 아니다. 이런 뜻에서 분노와 혐오는 중요한 번뇌의 하나다.앞에서 말한 두 가지는 심정적인 것인데 비해 '치(癡)'는 말하자면 지적인 번뇌다. 이것은 진실에 어둡고 무지(無明)한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모든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든가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諸行無我)'라는 진실한 사리에 어둡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자기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탐욕·애착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탐욕이 허망한 줄 알게 될 때 마음은 탐욕을 떠나 평온해진다. 이런 상태를 사제에서는 '멸(滅)'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진리에 대한 무지야말로 탐욕과 분노의 근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진리에 대한 무지는 여러 가지 잘못된 견해를 낳는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견(見)'이라는 이름으로 다섯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들고 있다. 즉 ①내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有身見) ②사물을 상단(常斷), 고락(苦樂), 동이(同異)이라고 하는 양극단의 입장에서 보는 것(邊見) ③선악의 과보 등을 부정하고 삼보(佛法僧)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邪見) ④자기 견해만을 옳다고 하는 것(見取見) ⑤다른 종교의 금계나 관행을 지키려 하는 것(戒禁取見) 등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지적인 이해에 문제가 있으므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비교적 쉽게 고쳐질 수 있다(思道所斷). 이에 비해 탐진치는 비교적 오랜 수행으로 단절되어 진다(修道所斷)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견(見)' 보다도 끈덕진 번뇌는 '의(疑)'와 '만(慢)'이다. '의'는 의혹 또는 유예의 뜻이다. 삼보라든가 업, 과보등에 대해 의혹을 갖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순지적(純知的)인 번뇌다. '만'은 심정적인 것으로 자기를 높이고 남을 경멸하는 마음이다. 즉 자만이다. '아만'도 그 하나인데 지나친 집착(이를 아견이라고도 한다.)이다. 이밖에도 비하만(卑下慢), 증상만(增上慢) 등이 있다. 비하만은 자기를 쓸데없이 낮추는 (卑下시키는 것) 것이고 증상만은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다. 이 만과 비슷한 것이 '교( )' 즉 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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