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이상은 혹→업→고의 순서에 따라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면서 윤회를 이루는 것을 관찰한 것이다. 이같은 삼단계의 인과관계를 인간존재의 현실에 맞춰보다 상세하게 도식화하여 설명하는 것이 12지연기, 즉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에 이르는 12항목으로 된 연기설이다. 12지의 항목은 윤회생존을 구성하는 요소 또는 지분이라는 뜻으로 '유지(有支)'라고도 한다. 12지 연기는 혹→업→고의 3단계 설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2지연기는 역사적으로는 4제에서 고←고의 인(苦集)이라는 공식과 마찬가지로 현상을 결과로 보고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고←생←유←취←애라는 5지연기를 기본으로 해서 점차로 광범하게 식과 명색의 상호 의존관계를 최후에 두고 9지, 또는 10지를 거쳐 최종적으로 그 앞에 행←무명을 두는 12지로 발전한 것이다. 이런 각 항목의 연결은 연기설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이해하기 쉽도록 A∼E군(群)으로 묶어 설명키로 한다.
(A) : ①무명(無明)→②행(行)→③식(識)
이 3지는 혹→업→고의 삼단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경우다. 여기서 ③식은 현재의 생존활동을 대표하는 것이다. 식은 마음이라 해도 좋고 인식, 주관이라 해도 좋다. 아함경에서는 이것이 태어나는 동시에 기능하는 것으로 설명하여 인간존재의 가장 중핵을 이루는 기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식은 단순히 출생한 이후만이 아니고 수태하는 순간부터 기능한다 하여 '결생(結生)의 식(識)'이라 부르고 있다. 이 식에서 더듬어 올라가 고찰할 때 식의 성격을 결정한 것은 과거의 신·구·의 삼업이며 이 업을 야기시킨 인은 근원적인 무지(無明)이다.
무명이 하나의 번뇌이고 일종의 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이것은 마땅히 품어 봄직한 의문이다. 그러나 불전은 여기에 대해 뚜렷하게 언명한 바가 없다. 더욱이 윤회는 '시작이 없다(無始)'라고 하고 있다. 즉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진실을 모르고 무명의 암흑에 휩싸여 있는가 하는 이유는 인지(人知)를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도 대답하고 있지 않다(無記). 불교의 설명은 시초도 모르는 옛부터 그러한 무명의 암흑에 휩싸여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자된다. 필요충분한 것은 그 무명을 없애면 즉 어두움(無明)이 밝음(智)으로 전환하고 거기에 괴로움의 소멸이 실현되고 그 목표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결코 세계성립의 원인을 탐색한다거나 창조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B) ③식(識)→④명색(名色)→⑤육입(六入)→⑥촉(觸)
이 네개 항목의 관계는 (A)의 경우와 달리 단순히 우리의 인식 작용의 성립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다. 상호관계는 동시 의존관계다. 여기서 명색이라는 것은 원래 명칭과 형태로서 개념과 그것에 대응하는 존재를 말한다. 불전에서는 정신과 물질, 마음과 신체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5온에서 말하는 색온이 '색' 즉 물질, 신체이다. 그리고 수·상·행·식의 4온은 여러 가지 정신 현상으로 '명'에 해당한다. 명색이 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식의 작용, 즉 인식판단의 결과로써 '이것은 물이다', '이것은 나무다'하는 물건과 명칭의 대응관계가 확정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명색은 통틀어 식(識)의 대상으로서의 육경(六境)을 가리킨다.
인도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물을 인식할 경우, 인식은 그 근원(所緣)이 되는 대상이 있어 비로소 성립한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는 명색에 의해서 식이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때문에 10지 9지의 연기설은 식과 명색사이에서 상호로 연(緣)이 되는 것을 규정하고 이것은 갈대의 묶음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똑바로 서는 것에 비유되어 왔다. 10지설은 이렇게 해서 인과관계가 식과 명색 사이에서 순환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이상 거슬러 올라갈 필요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아함경에서는 '근과 경과 식과의 삼사가 화합해서 촉이 있다'면서 '촉에 의해 수가 있고 수에 의해 애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맞추어 보면 명색이 경(境), 식(識)은 식이니까 근(根)에 해당되는 것으로 육입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9지와 10지의 상위(相違)는 이 육입을 넣느냐 아니냐에 따른 것이다. 아마도 9지연기가 먼저이고 나중에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는 틀에 맞추어 육입의 항목이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명색이 있으므로 육입이 있다'고 하지만 식을 포함한 삼자는 이론상으로는 동시에 상의(相依)관계가 아니면 안된다. 아울러 다음의 '촉'이라는 것도 삼사화합을 조건으로 해서 마음이 대상과 접촉하고 그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접촉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뜻이다. 그러니까 촉도 또한 이론상으로는 동시인 것이다. 다만 근경식의 삼사와 상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식을 '결생의 식' 즉 수태순간의 생존상태로 생각한다. 그리고 태아의 성장과정에서 3주뒤에 육체와 정신기능이 구비됐어도 아직 6근이 구비되지 않을 때를 '명색', 6근이 구비되면 그것이 '육입'이고 출태(出胎)해서 바깥과 접촉했을 때를 '촉'의 위치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근대학자들은 태생학적(胎生學的)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B)의 네 개 항목은 그것만으로는 인식구조를 제시하는 것으로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유루(有漏)의 경우도 무루(無漏)의 경우도 있는 논리구조다.
하지만 12지의 경우는 그전에 무명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결국 다음 과정의 어리석음을 야기시키게 된다.
(C) ⑥촉(觸)→⑦수(受)→⑧애(愛)
여기에서 수는 감각작용으로 불전(佛典)은 낙과 고와 불고불락의 세가지 종으로 나누는 것이 통례다. 이 대상과 접촉하면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것인가의 감각이 생긴다. 이것은 번뇌부분에서 고찰한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과의 관계와 비교할 수 있다. 좋은 것과 접촉하면 낙수(樂受, 즐거움과 행복감, 쾌감)가 생기고 그 대상에 대하여 애착이 일어난다. 이것이 이 세가지 항목이 기본적으로 뜻하는 바다. 번뇌론적으로 설명하면 좋지 않은 것과 접촉하면 고수(苦受, 싫증, 불쾌감)가 생기고 그 대상을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된다. 이같은 진에(瞋 )는 이 경우 욕망으로써 ⑧의 갈애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세 살 경에 감각이 갖추어지고 사춘기가 되면 애착이 생기고 그것이 점차 증대한다고 본다.
(D) ⑧애(愛)→⑨취(取)→⑩유(有)
애(갈애)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찾는 것은 가장 오래된 형(型)의 연기설이다. 또한 욕망에서 모든 악의 근원을 발견하고자 하는 일은 뒷날 불교에서도 가장 일관되고 변함없는 설명이다. 여기에서도 혹·업·고(惑業苦)의 구조가 나타난다. '유'라는 것은 윤회생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취'는 '업'에 해당한다. 즉 '취'는 번뇌임에 틀림없지만 '애'를 바탕으로 현재 작용하고 있는 집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취는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 아어취(我語取)라는 사취(四取)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이다. 그중 견취에 계금취는 자아라는 말에 집착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아견(我見), 유신견(有身見)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보는 가장 나쁜 견해이다. 여기에 대해 욕취는 심정적 번뇌다. 동시에 이것은 실제로는 신·구·의 삼업을 통해서 나타난다.
'애'와 '취'로 인한 결과로서 '유'는 윤회의 생존이다. 이유는 미래의 생을 이루게 된다. 이 해석이 마침내 12지 전체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는 과정으로 보는 생각을 낳았다.취→유라는 관계는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유(윤회)'의 대립개념인 열반에 대해서 경전은 '취하는 것 없이 열반한다'는 표현이다. 이 경우 취라 번역된 원어 우파다나는 취한다는 행위를 나타낼 경우와 취해지는 것, 소재, 질료인(質料因)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아'라는 관념에 있어 그 관념을 성립시키는 소재는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이다. 오온은 개인존재의 요소로서는 '오취온(五取蘊)'이라고 부른다. 이 오온이, 죽음으로 인해 산산히 흩어졌을 때 부처님도 완전히 열반에 들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죽음을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 부른다. 즉(윤회의 소재가 없이 열반에 들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취→유는 고가 되는 것이고 무취(無取)→열반은 고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가 제시하는 교리의 기본이다.
이 경우 취는 장작의 비유로 설명된다. 즉 장작은 연료로써 불의 소재라는 의미다. 아무리 불씨가 있다 하더라도 연료가 없으면 탈(燃) 수가 없다. 또 연료가 다 타면 불이 꺼지듯 갈애의 불꽃도 그 애착의 대상인 재료가 계속 나타나지 않는 한 탈 수가 없다. 즉 불꺼진 상태에 비교되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 경우 갈애의 재료란 오취온(五取蘊)이다. 오온은 식의 대상으로서의 명색과 같은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애→취→유는 식→명색…고와 대비되고, 애와 취와의 사이에는 식과 명색의 경우와 같아 상의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애 = 취(취는 작용)와 취(取) = 소취(所取)로 생각하면 더욱 명료해진다.
(E) ⑩유(有)→⑪생(生)→⑫노사(老死)
'유'는 윤회하는 생존이다. 윤회생존이란 생→노사의 반복이다. 따라서 '유'는 생노병사(生死)가 성립하는 토대라 해도 좋다. 생노병사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것은 무상이며 이 무상은 우리에게 근심과 걱정, 슬픔과 같은 고통을 가져온다. 즉 근심·걱정은 노사(老死) 때문에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근심과 걱정의 소멸은 생노병사의 근원이 되는 무명이 없어져야 한다. 전통적인 설명으로 말한다면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은 윤회이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윤회가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윤회와 고는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해석은 또 여기서 불가사의한 해석을 내린다. 즉 '유'를 미래의 생을 낳는 업유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애와 취는 현재의 '혹'이고 유가 '업'이고 생노병사가 미래의 '고'라는 형태로 혹업고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아함경전에서 12연기를 말할 때 결코 그것이 삼세에 걸치는 인과의 연쇄를 나타낸다고는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혹→업→고의 삼단계로 한 바퀴의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사고방식이 확립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①∼②를 과거의 인, ③∼⑫를 현재의 과로 저 삼세에 걸치는 이중구조의 인과관계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12연기의 여러 항목을 태생학적인 발달단계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실체적인 사고방식은 특히 유부학설의 특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승불교는 근저에서부터 이같은 생각을 반복시키기에 이른다. 단 나가르쥬나(龍樹)를 대표로 하는 공관(空觀)의 철저한 부정적 견해 뒤에 나타난 유식설에서는 기본적 견해는 용수와 마찬가지의 공판에 서면서도 12지연기설에서 재차 그것을 얻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 근거로 아뢰야식이라는 근원적인 식을 상정하고 그곳에 윤회가 생기는 모든 원인을 구조적으로 부담시켰다.
12지연기설은 원래 윤회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물며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설이 불설(佛說)의 정당한 해석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현실인 인생이 고뇌이기 때문에 그 근원을 찾아내는 것, 그 근원을 절단함으로써 고뇌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제교설의 테두리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연기설은 무명에서 점차 제법이 연기해서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성립에 이르는 관찰과 함께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없으면 식이 없다는 식의 순차적 방법으로 제거해 가서 마지막에 생사고(生死苦)의 소멸에 이른다는 관찰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방면은 각각 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 또는 유전(流轉)의 연기와 환멸(環滅)의 연기로 불러온다. 우리가 이 방향에서 십이연기를 관찰한다면 우리의 태도에 관한 인과의 도리에 대한 무지에서 유래됨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거기에는 이미 고뇌가 없다. 따라서 윤회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무명(無明)이 소멸되어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종종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말해진다. 무지가 계속되는 한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나 일단 무지(無知)가 지(智)로, 무명이 명으로 전환하면 윤회는 멈추고 열반이 실현된다. 그런 뜻에서 윤회는 유종(有終)이며 또한 끝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함이나 한역경전은 다만 '윤회의 시초는 알 수가 없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윤회를 종식시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이요, 목적이다. 어떻게 하면 무지를 지로 전화시키고 윤회를 환멸의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기나긴 도의 실천이 요구된다. 이것도 도제(道諦)의 내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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