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교리

2-8 경전의 결집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0:14

결 집


부처님이 입멸하자 제자들이 가장 서둘러 한 것은 가르침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부처님이 45년간 여러 곳에서 행한 설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잘못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 교단의 계율문제도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해석하고 행동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계율문제는 부처님이 입멸한 지 일주일만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어났다. 장로 마하카사파와 함께 유행을 하던 제자들은 부처님의 부음을 전해듣고 한결같이 비통해 했으나 한 늙은 비구는 '슬퍼할 것 없다. 지금까지는 이것은 해도 된다. 저것은 해서 안 된다는 식으로 억압을 받았지만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해도 좋게 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원래 비구는 출가자이기 때문에 엄격한 수행생활을 각오하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단이 커지고 수행자가 많아지게 되자 개개인의 자각만으로는 통제가 어렵게 되었다. 개중에는 수행이 부족하고 자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부처님은 그것을 금지하는 규제조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반했을 때는 벌칙조항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계율은 수시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제자들 모두가 부처님이 정한 계율을 알 수도 없었고, 어떤 사람은 계율자체를 번거롭게 생각했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교법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성자의 가르침을 귀로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는 것이 전부였으며 기록으로 남겼던 것은 아니었다. 경전이 확실하게 문자로 쓰여진 것은 B.C.1세기 중엽의 일이었다고 스리랑카의 자료는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장례가 끝난 뒤 장로 마하카사파의 주재로 법과 율에 대한 정리·종합·확인하는 결집을 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결집은 불멸 후 네차례가 행해졌는데 첫 번째는 부처님이 열반에든지 백일이 채 못되어 라자그리하(왕사성)의 칠엽굴에서 있었다. 이때 마하카사파는 사회자가 되고 아난다는 '법'에 대해, 우팔리는 '율'에 대해 각각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해 냈다. 참가자들은 아난다와 우팔 리가 외워낸 법과 율을 정정하여 확인한 후 모두 함께 합송했다. 결집을 상기티라고 하는데 이는 대중이 함께 '합송'했다는 뜻이다.

불교역사상 최초로 행해진 이 1차 결집에서 어떠한 교법이 결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문헌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뒤에 '구분경'이나 '5부'로 경전이 정리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원래의 소재가 모아졌다는 사실만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최초로 결집된 교법과 계율은 워낙 방대한 분랸이므로 모두가 암송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를 암송하는 전문화된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를테면 지율자, 지법자, 설법자, 지모론자, 지론자, 지경자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법과 율을 전문적으로 암송하고 해설하고 봉지한 사람을 지칭한다.



불멸(佛滅)연대


부처님의 생애를 논급하면서 한가지 더 유념할 것은 생몰연대가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의 발견을 기대할 수 없는 현재로서는 백가지도 더 되는 학설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를 가려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부처님이 활동했던 기간에 대해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6∼5세기, 또는 5∼4세기 설이 대체로 유력하다. 앞의 것은 남전의 자료에 의한 것으로써 그 기준은 아쇼카왕의 즉위가 불멸 후 이백여 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뒤의 것은 북전자료로써 유부의 전승에 의하면 아쇼카왕의 즉위가 입멸 후 1백16년이라는 것이다. 아쇼카의 즉위 연대는 그가 남긴 비문에 희랍왕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비정(比定)해 기원전 2백 68년으로 산정되었으며 그로부터 2백 년이나 백년 정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써 불멸연대는 1세기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

이외의 현재 남방불교가 쓰고 있는 불멸기년에 의하면 다시 1세기를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남방불교에서는 1956년을 불멸 2천 5백년으로 계산해 그 해에 성대한 축제를 가졌다.)한편 중국에서는 이보다 훨씬 연대가 올라간 B.C.10세기 설이 있어 왔다. 한국에서도 60년대까지는 이 설을 따르고 있었다. 이는 《주서이기(周書異記)》라는 책에 의한 것인데 이에 따르면 '주소왕 24년 (B.C.1029) 갑인년 4월 8일 강하천지가 홀연히 팽창하고 우물이 모두 넘쳤는데 그날 밤 다섯 가지 색깔의 빛이 서쪽 하늘에서 빛났다. 왕이 태사 소유에게 이유를 물으니 대성인이 서방에서 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같은 책에서 목왕 52년(B.C.950) 임신 2월 15일에 기서가 나타난 일을 기록하고 이를 입멸년과 일치시켰다. 그러나 오늘의 사가들은 이를 불교와 도교의 우열논쟁 과정에서 부처님이 노자보다 먼저 태어났고 노자는 부처님의 재생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한 조작설로 해석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1967년부터 세계 불교도 유의회(W·F·B)의 결의에 따라 2천 5백년설을 따르고 있다.

부처님의 탄생과 열반일에 대해서도 한국·중국·일본에서는 4월 8일(일본서는 양력4월8일)을 탄생일, 12월 28일을 성도일, 2월 8일을 출가일, 2월 15일을 열반일로 하고 있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다. 탄생일은 문헌상으로 크게 나누어 남방불교 전승에 의하면 바이샤카달의 보름날로 정하는 것(자타카·대당서역기)과 인도력의 춘분에 해당되는 2월 8일로 정하는 것(붓다차리타·佛本行集經), 그리고 4월 8일로 정하는 것(修行本起經·佛所行讚)등 세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남방불교 전승에 따르면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적은 모두 바이샤카달 만월일(보름날)로 되어 있다. 《반니반경》에도 '부처님은 4월 8일에 태어나, 4월 8일에 출가했으며, 4월 8일에 정각을 얻고, 4월 8일에 입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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