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교리

2-7 입멸과 사리분배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0:13

입멸(入滅)


80세가 된 부처님은 마지막 안거를 베살리의 죽림촌에서 지냈다. 이 우안거 기간중 부처님은 매우 위독한 병에 걸려 '죽음에 가까우리만큼 심한 아픔'이 있었다. 부처님은 이 고통을 참고 견뎌냈지만 아난다는 근심이 되어 부처님이 별세한 다음에는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답변했다.
"나는 안팎의 구별없이 모든 법을 설했다. 나의 가르침에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감추는 듯한 사권(스승의 꽉 쥔 주먹)이 없으며 '비구들이 나를 의지하고 있다'거나 '나는 비구들을 교도'한다는 생각도 없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다.
"비구들은 내가 입멸한다해도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신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며 진리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다."
부처님은 베살리를 떠나 입멸의 땅 쿠시나가라로 향했다. 부처님은 얼마 후 쿠시나가라 근처의 파바마을로 가서 대장장이의 아들인 춘다의 망고원에 머물렀다. 여기서 부처님은 춘다가 올린 수카라 맛다바(버섯의 일종)를 먹은 후 중병에 걸렸다. 경전에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음에 가까운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격렬한 설사를 겸한 병이었다고 생각된다. '수카라 맛다바'는 돼지고기 요리라는 뜻도 있으므로 이때의 공양식은 돼지고기 요리였으리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병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쿠시나가라에 이른 부처님은 말라족의 우파밧타나에 있는 사라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사라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라. 나는 피곤하다. 자리에 누울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가 깔아주는 자리에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고 발 위에 발을 포갠 자세로 선정에 든 채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유훈은 '모든 것은 변하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이었다. 그날은 2월 보름 한밤중이었으며 지극히 안락한 죽음이었다.

부처님의 죽음은 '입멸'이라고 한다. 이 말은 반열반을 번역한 것으로서 죽음으로 인해 육체를 버림으로써 부처님이 완전한 이상경, 평화, 적정의 세계(涅槃寂滅)에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당연히 정신적 고뇌가 없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한계는 있었다. 따라서 열반은 부처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육체적 제약을 벗어나는 행위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사리분배


부처님의 죽음은 날이 새자 아난다에 의해 쿠시나가라의 말라족에게 전해졌다. 말라족들은 모두가 놀라고 슬퍼했다. 그들은 이윽고 향과 꽃다발과 온갖 악기와 오백 겹의 천을 가지고 사라나무 주위에 모여 주악과 꽃다발로 부처님의 유체에 공양을 했다. 가무와 음악으로 죽은 사람에게 조의를 표한다는 것은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현재 힌두교의 장례Eo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의 장례일 경우에는 소리높이 성전을 외우고 악기를 연주하며 강변의 화장터까지 장례행렬을 지어가는 것을 볼 때 이 풍습은 고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부처님의 유체는 6일 동안 공양되었다.

부처님보다 일년 전에 죽은 장로 사리푸타와 목갈라나가 없는 교단의 장로는 마하카사파였다. 장례는 교화를 위해 유행하다가 뒤늦게 도착한 카사파의 착화로 화장으로 치러졌다. 부처님의 유신이 다 타자 마침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백골만 남게되었다. 말라족은 이 뼈를 수습해 집회당에 모시고 다시 칠일동안 공양을 올렸다. A.D.1세기 경의 유명한 불교시인 아슈바고사(馬鳴)는 《붓다차리타(佛所行讚)》에서 이 때의 감동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만물은 모두 불타 없어져도 위대한 덕행의 이 유골을 불태울 화염은 없을 것이다. 오직 헌신적인 믿음만이 이 유골을 보존하리라. 이 유골은 차다해도 그것은 얼마나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인가."

여기서 아슈바고사가 말한 유골이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리이다. 사리란 범어 살리라를 음사한 말로 신골·영골·정골 또는 유신이라는 뜻이다. 근본설일체유부가 전하는 《비나야잡사》39권에 의하면 부처님이 남긴 사리는 8곡4두(당시 인도의 도량형)였다고 한다.

부처님의 유골은 화장 후 여덟 나라가 나눠서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다. 《장아함경》24권, 《십송률》60권 등에 따르면, 부처님이 입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곱 나라에서 각각 사리를 받아 큰 탑을 세우고 공양을 하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왕과 베살리의 릿차비족들은 각기 사신을 쿠시나가라로 파견해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했다. 말라족도 이에 대항해 무력으로 사리를 지키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때 드로나라는 현자가 충돌직전의 사리전쟁 중재에 나서서 여덟 몫으로 나누었다.

이때 사리를 분배받은 곳은 ①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왕 ②베살리의 릿차비족 ③카필라바스투의 샤카족 ④알라캅파의 부디족 ⑤라마그라마의 콜라족 ⑥베타투비파의 바라문 ⑦파아의 말라족 ⑧쿠시나가라의 말라족 등이다.또 배분을 중재한 드로나는 그 공덕으로 사리를 담았던 그릇(병)을 받아갔고 뒤늦게 당도한 핍팔리아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져갔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여덟 개의 불사리탑과 한 개의 병탑 및 회탑이 세워졌다. 불교에서의 탑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 후 많은 사람, 특히 재가신자들은 부처님을 대신해 불탑을 공양하였다. 이를 불탑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정된 불탑만으로는 뜨거운 불탑신앙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불멸 후 이백년 경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왕은 처음에 세웠던 여덟 개의 불사리탑(근본 8탑이라 한다) 중 일곱 개를 헐어 불사리를 다시 나누어 팔만사천개의 탑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 사실은 《아육왕경》에 기록되어 있다.

1898년 카필라바스투 근교에서 영국의 고고학자 펩페가 고분을 발굴해 골호를 찾아냈는데 거기에는 브라흐미 문자로 샤카족이 부처님의 뼈를 담아 공양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유골분배의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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