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
이렇게 따뜻한 만남이 이루어진 다음, 부처님은 다섯 수도승을 위해 처음으로 설법을 했는데, 이를 두고 제1차 ‘진리의 바퀴를 굴리심’(轉法輪, dharmacakrapravarta)이라고 한다. 팔리어 경전에 따라 그 가르침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다섯 수도승들에게 우선 지나친 쾌락과 지나친 고행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고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 중도의 내용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팔정도’(八正道) 곧 ‘여덟 겹의 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팔정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바탕이 되는 ‘사제’(四諦) 혹은 ‘사성제’(四聖諦), 곧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것을 가르쳤다. ‘사성제’를 간단히 ‘고(苦)·집(集)·멸(滅)·도(道)’라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한 가지 미리 알아두면 좋은 것은 사성제가 의학(醫學) 용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첫째 고제와 둘째 집제는 ‘진단(診斷)’에 해당된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아픔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셋째 멸제와 넷째 도제는 ‘처방(處方)’에 해당된다. 아프지만 걱정하지 말라. 나을 수 있다. 낫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지시를 따라 실천하라는 식이다. 이제 네 가지를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제: 괴로움에 관한 진리
첫째, 고제(苦諦): ‘괴로움’(du?kha)에 관한 진리[諦]이다. 삶이 그대로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生老病死)이 괴로움이요,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대해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존재 자체의 괴로움(五蘊盛苦)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고’(四苦) ‘팔고’(八苦)이다. 결국 이런 괴로움은 개별적으로 겪는 육체적이나 심리적 고통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구나 겪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함, 불안정함, 제한됨, 모자람, 불만족스러움 같은 ‘인간의 조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두카’(dukkha)라는 낱말은 수레바퀴 축에 기름이 쳐져서 부드럽게 돌아가야 할 곳에 모래가 들어가 삐걱거린다는 뜻이다. 이를 현대어로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학자들 중에는 이 말을 ‘괴로움’(suffering), ‘아픔’(pain), ‘스트레스’(stress), ‘근심’(distress), ‘불만족’(dissatisfaction) 등으로 옮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좀 거창한 말을 써서, ‘비극적 얽힘’(tragic entanglement), ‘끊임없는 좌절’(perpetual frustration), ‘인간으로서의 곤혹’(human predicament) 등으로 풀어 보기도 한다.
근래에 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생겨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자주 쓰는 용어로 불안, 절망, 출구 없음, 구토, 이방인 됨, 집 없음(실향성), 의미 없음, 낙원을 잃음(실낙원), 소외 등등도 우리 삶의 현실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이렇게 삶을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보았다고 하여 불교를 ‘비관적인’ 종교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이것은 비관적이냐 낙관적이냐 하고 따질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realistic)인 관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병이 있다고 진단할 경우 우리는 그 의사를 보고 왜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만 보느냐고 따질 수가 없다.
사실 거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적 삶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병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병을 고치려는 노력의 시발점인 것처럼, 인간의 조건, 혹은 고통에 대한 자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자 하나의 특권이다.
예수님이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태복음11:28)했을 때, 여기서 우리는 그가 ‘괴로움’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없을까? 여기서 예수님은 “만약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거든...”하는 가정법을 쓰고 있지 않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이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직설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얻기 위해 그에게 오라는 말씀아닌가?
아무튼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 속에 쑤셔 박고 현실을 도피하는 데서 안위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 거기서 해방의 길을 모색하는 태도를 가짐이 마땅함을 일깨우는 분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집제 :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
둘째, 집제(集諦):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 ‘일어남’(samudaya)의 원인에 대한 진리이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목마름’(산스크리트어 tanh?, 팔리어 tanha)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 ‘갈애’(渴愛)라 번역되는 이 목마름이란 집착, 정욕, 애욕, 욕심, 욕정으로 목마름을 뜻한다. 우리에게 이런 ‘타는 목마름’이 있기에 우리에게 괴로움이 따르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팔리어 본문에 보면 집착에는 ‘쾌락’에 대한 집착, ‘있음’에 대한 집착, ‘있지 않음’에 대한 집착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이를 우리 나름대로 다시 정리하면, 첫째, 감각적 쾌락, 재물, 명예, 권력 등에 집착하는 것, 둘째, 사상이나 견해나 이론이나 관념이나 신념이나 이데올로기 등에 집착하는 것, 셋째,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쾌락에 집착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자기의 고정관념에 집착하는 것이고, 더욱 더 크고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런 자기중심적, 이기적 태도 때문에 다른 모든 잡다한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집착이란 결국 절대적인 아닌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잘 못 알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을 갖는 것이다. 돈이나 이성(異性)이나 권력 같이 상대적인 것에 ‘궁극 관심’(ultimate concern)을 가지고 달라붙는 것이다. 이를 종교적 용어로 바꾸면 ‘우상 숭배’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떠받들고 살아가는 노예적 삶이다.
남양군도나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를 잡으려 할 때 나무에다 줄을 메고 그 끝에 코코넛 열매를 묶어 놓는다. 코코넛에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속살을 파낸 다음 거기에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땅콩 같은 것을 넣어 둔다. 원숭이가 와서 그 구멍에다 손을 집어넣고 땅콩을 움켜쥔다. 그러면 손이 그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원숭이 사냥꾼이 유유히 다가가서 그 원숭이를 잡는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모두 이 원숭이들이다.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와서 이렇게 천재일우(千載一遇)로 땅콩을 잡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그냥 포기하고 주먹을 편단 말인가. 무지와 욕심에서 오는 이런 집착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노예 신세에 떨어지게 한다.
멸제 : 괴로움을 없을 수 있음에 관한 진리
셋째, 멸제(滅諦):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음’(nirodha)에 관한 진리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우리가 지금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이제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선포하는 셈이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이 고해의 세상에서 열반 혹은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다는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 ‘니르바나’(nirv??a, 涅槃이라 음역)는 어원적으로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이다.
‘열반’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처럼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는 무슨 특별한 ‘장소’ 가 아니라 우리 속에 타고 있는 욕심과 정욕의 불길을 ‘훅’하고 불어서 끈 상태, 그리하여 괴로움 대신에 시원함과 평화스러움과 안온함과 놓임과 트임을 느끼는 상태, 바로 이런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올라 정상에서 그 짐을 벗어놓을 때처럼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맛보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말하자면, 불교에서 표방하는 지고선(至高善, summum bonum)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일까?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불교든 어느 종교든 이런 지고의 경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음’이라는 표현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가르친다. 마치 물고기에게 마른 땅을 걷는 것에 대해,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모기에게 얼음에 대해, 음치에게 교향곡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들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열반이라는 구경의 경지는 말이나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직관과 체험의 대상이라는 것. 부처님은 우리가 직접 이런 경지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 것이고 이것이 바로 다음에 말하는 넷째 진리다.
도제 :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말하는 진리
넷째, 도제(道諦): 괴로움을 없애는 ‘길’(m?rga)을 말하는 진리이다. 이 길의 구체적 내용을 말하는 것이 바로 ‘팔정도’로서, ‘여덟 겹의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이제 그 여덟 가지 구성요소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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