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를 찾게 하는 부처님의 무아(無我, an?tman)에 대한 가르침
이렇게 부처님이 다섯 수도승에게 ‘사제 팔정도’를 가르치자 그 중에서 하나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른바 아라한(阿羅漢), 혹은 줄여서, 나한(羅漢)이 된 것이다. 부처님은 나머지 네 명의 깨우침을 위해 계속해서 ‘무아’(無我, an?tman)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런 자아는 없다”고 공언한 셈이다.
그 당시 힌두교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我)가 결국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梵)과 동일하다는 ‘범아 일여’(梵我一如)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부처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나’란 결국 실체가 없다는 ‘무아,’ 혹은 그런 것은 진정한 나일 수 없다는 ‘비아’(非我)를 가르친 것이다.
부처님은 왜 무아의 가르침을 설파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윤리적 요청으로서, 둘째는 이론적 귀결로서 ‘무아’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첫째, 윤리적 요청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일상적인 이 ‘나’를 영구불변하는 실체로 보고 떠받드는 것이 집착이나 증오나 교만이나 이기주의 등 모든 윤리적 문제꺼리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나’라고 하는 생각, 그리하여 나를 떠받들려는 애씀이 결국 ‘괴로움’으로 이끄는 근본 원인이 되는 셈이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실 무아는 윤리적 출발점일 뿐 아니라 그 귀결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이기적 자기에서 해방된 상태가 결국 윤리적 여정에서 이를 수 있는 정점이라 여기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태복음16:24-25)라고 하였다.
지금의 자기, 지금의 자기 목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자기 없앰, 혹은 자기 비움은 불교나 그리스도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교에서도 사(私)를 잊어야 한다고 하고, 도가(道家)의 장자도 ‘오상아’(吾喪我, 나를 잃어버림)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논리적 귀결로서의 ‘무아’이다. 영원불변의 실체로서의 ‘나’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두 가지 기본 원리로 보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오온’(五蘊)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이른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존재 요소들의 일시적 가합(假合)일 뿐 그 자체로는 독립적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마차라는 것이 실제로는 판자, 바퀴살, 심보, 밧줄 등으로 이루어 진 것이고, ‘마차’라는 것은 그저 이런 것들이 합해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이름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자아란 잠정적으로 결합된 다섯 가지 요소에 붙여진 이름이나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이론으로 보면 삶이란 이처럼 다섯 가지 요소들이 순간적으로 합해졌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합해졌다가 흩어졌다가 또다시 합해지는 과정 사이의 시간이 너무나도 짧아 마치 연속적인 것 같이 느껴지지만 이것은 마치 영화 필름이 실제적으로는 한 조각 한 조각으로 끊어져 있어도 이것을 상영하면 연속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한편, 죽음이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합해지는 것 사이의 틈이 보통 이상이고, 또 다시 합해질 때 전과 같지 않은 배율과 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의 자아가 독립적 실체를 가진 무엇일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는 연기(緣起, prat?tya-samutp?da, dependent co-arising) 사상 때문이기도 하다.
연기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기본적인 원칙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예외 없이 다른 무엇에 의해 생겨난다는 가르침이다. 모두가 상호의존, 상호연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뿐 독자적인 실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있는 한, 독립적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따로 성립할 여지가 없게 되고 만다.
아무튼 우리의 자아(自我)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우리가 거기에 집착할 가치가 없는 것,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아중심주의가 모든 말썽과 사고의 근원임을 자각한 윤리적 판단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해 준 셈이다. 우리의 자아가 이처럼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스러워지는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사실 이 무아의 가르침이 ‘논리적 귀결’이라 했지만 그것은 불교 논리로 보았을 때 하는 이야기이고, 불교인이 아닌 사람이 더 큰 틀에서 볼 때에는 철학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내포되어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카르마(業)의 원리에 의하면 지금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나중 내가 그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인데 무아의 가르침처럼, ‘나’라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누구인가? ‘나’라는 것이 없다면 내가 행동한 과거를 기억하는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등등이다. 사실 ‘무아’와 같은 가르침이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화급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했다는 비유에 그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독화살에 맞았다. 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곧 의사를 불러 그 독화살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를 거절하고, 이들이 이 독화살을 자기 몸에서 뽑아내기 전에 이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활이나 화살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등을 미리 알아야겠다고 했다. 이 젊은이의 태도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논리적 적합성을 따지기 전에 우선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우선으로 다루는 실용적 태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부처님이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을 기피한 사실은 이른바 ‘부처님의 침묵’(the Silence of the Buddha)이라는 것에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부처님은 1) 세상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영원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원하지 않은 것이기도 한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아니한 것도 아닌가 하는 등의 14가지 질문을 ‘대답할 수 없는 질문’(avy?k?ta)이라 여기고 외면했다. ‘부처가 외면한 그 열네 가지 질문’인 셈이다.
왜 이런 질문을 외면했을까? 부처님이 무지했기 때문일까?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였기 때문일까? 학자들 중에는 부처님이 궁극 실재에 대한 이론적이나 사변적인 명제 속에는 어쩔 수 없이 내재할 수밖에 없는 모순율을 간파하고 대답을 기피한 것이라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하면 벌써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제한성 때문에 그 말은 이미 그 궁극적인 것에 대한 올바른 표현일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예수님도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했을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님도 제자들이 죽음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그는 “삶에 대해서도 아직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갚 했다. (『논어)11:11.)
결국 실재에 대한 이론 자체는 영원한 진리 자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필자가 지은 책 중 하나의 책명이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제목도 세계 종교사의 이런 보편적 사실에서 힌트를 얻어 붙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자유를 얻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이론이나 가르침이 있다. 이런 것들이라 하더라도 불교에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유를 얻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 혹은 불교 용어로 ‘방편’(方便)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이런 가르침도 결국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뗏목’이라는 것이다. 일단 강을 건넜으면 그 뗏목은 거기다 두고 우리의 갈 길을 계속해야 된다. 강을 건너게 해준 그 뗏목이 고마워 그것을 계속 지고 다니겠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했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도가 사상에서 장자(莊子)도 이런 경우를 두고 “물고기를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고 했다. 이른바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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