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죽음
부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며 45년의 생을 보내고 80세가 되었을 때였다. 그때 그는 베살리 지역에서 걸식을 하며 가르치고 있었는데, 석 달 후면 자기가 열반에 들 것이라고 했다. 죽음을 예고한 것이다. 거기에서 가까운 곳에 금세공을 하는 춘다라는 이로부터 음식을 받아먹고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음식이 무엇이었을까?
경전에 나오는 음식 이름의 문자적 뜻 그대로 돼지고기였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돼지가 밟고 다니던 밭에서 나온 채소나 버섯 종류라는 사람도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물론 채식을 주로 하되 완전 채식을 의무화하지 않고, 걸식 도중 주어지는 대로 다 먹었다고 한다. 따라서 돼지고기를 먹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통증을 느끼면서 ‘쿠시나가라’라고 하는 곳으로 옮겼다.
가까운 강으로 가 목욕을 하고 난 후 잠깐 쉬면서, 아난다에게 춘다가 자기가 준 음식 때문에 부처님이 편찮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잘 말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후 쿠시나가라 성 밖에 이르러 큰 나무 사이에 자리를 정했다. 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오른 쪽 옆으로 누웠다. 나무에 갑자기 꽃이 피고 꽃잎이 부처님 위에 떨어졌다. 하늘에서부터는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하늘의 신들도 이 순간이 슬퍼서 울었다. 그는 이런 것도 좋지만 그의 제자들이 진리를 올바로 실천하는 것보다 그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성경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한3서4절)고 한 사도 요한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부모된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승단의 장래, 장례식 절차, 제자들의 계속적인 수행 등에 관한 지시와 위로의 말을 했다. 아난다는 너무나 슬퍼 잠시 자리를 떠나 울음을 터뜨렸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불러 “모든 것은 변하고 후폐할 수밖에 없느니라. 아난다야, 어찌 무엇이든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위로했다. 그에게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완전한 자유를 얻으라고 용기를 주고, 그동안 아난다가 자기에게 보여준 사랑스럽고 진심어린 보살핌에 대해 칭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스승의 가르침이 끝났구나. 이제 우리에겐 스승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난다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 설명한 것, 진리와 계율이, 내가 가고 난 후, 바로 너희의 스승이 되리라.”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불·법·승 어느 것에든 의심되는 것이나 불확실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세 번씩이나 말했다. 아무도 물어보는 이가 없자, 그는 드디어,
“모든 것은 덧없다. 게을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성불할 때 들었던 것과 같은 선정에 들었다가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큰 지진이 나고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렸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죽음을 ‘대열반(mah?parinirv?na)에 드셨다’고 하거나 ‘입멸(入滅)하셨다’고 표현한다.
제자들 중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 아직도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은 부처님의 죽음이 너무나 빨리 온 것이라 여기고 슬퍼하며 통곡했다. 깨달음에 이른 제자들은 “만사는 덧없는 것. 어찌 없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며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특히 부처님의 사촌이며 지도자 격이던 아누룬다(Anurunddha)는 “형제들이여, 이제 되었소. 그만 울고, 그만 통곡하시오. 세존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소? 우리 주변 원근에 있는 모든 것의 본성 자체에 따라 우리는 그런 것들과 갈라서고 이별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라고.”
죽음에 대한 불교의 기본 태도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교의 기본 태도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이나 깨달음에 이른 제자들의 경우 죽음은 인간이 거쳐야 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긴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교의 태도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키사 고타미(‘가녀린 고타미’)라는 여인이 있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여인은 죽은 아기를 허리에 끼어 차고 사방을 다니며 아기를 살릴 수 있는 약이 있는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아기를 살릴 약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 밖에 없으니 부처님께 가보라고 했다.
자기를 찾아온 여인을 본 부처님은 “약을 구하러 여기까지 잘 찾아 왔소. 이제 동네로 가서 겨자씨를 얻어오도록 하오. 단 가족 중에 죽은 이가 없는 집에서 얻어 와야 하오.” 여인은 기쁜 마음으로 동네로 가서 겨자씨를 구했다. 겨자씨를 얻고 돌아서서, “이 집에서 죽은 사람이 없나요?” 하고 물어보면 모두 전에 누구 누구가 죽었다고 대답했다. 동네를 다 돌고 여인은 결국 죽음에 대한 실상을 보게 해준 부처님의 자비심을 깨닫게 되었다.
아기를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서 눕히고 그의 손을 잡은 채, “아기야, 나는 너만 죽은 줄로 알았다. 그러나 너만이 아니구나.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아기를 두고 부처님에게로 돌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로 중국에서는 이 부분을 한문 경전으로 번역할 때 그 여인이 마을로 돌아가서 집집을 방문하면서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므로 사별의 슬픔을 이긴다는 뜻으로 풀이해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부처님 뿐 아니라 소크라테스, 장자 같은 성현도 죽음이 모든 것에 내재한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이라 보고 그것을 그대로 담담하게 수납하거나 심지어 환영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장자의 경우 죽음을 사철의 바뀜처럼 자연스런 현상으로 끌어안으므로 죽음을 이기는 ‘안명’(安命)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 모두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예수님의 처절한 절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이 가장 인간적이었기 때문일까? 물론 예수님의 이 울부짖음도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 하버드 대학교 하비 콕스 교수가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고 느낀 그 절망감에 대한 반응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입멸하고 난 다음 날 아난다는 주위 성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별을 전했다. 사람이 모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고, 꽃다발과 향을 바쳤다. 시신을 새 천과 솜으로 겹겹이 싸고 향유통에 모신채 6일간 애곡한 다음, 7일 되는 날 화장을 하고, 그 재는 열 나라에 나누었다.
부처님의 지시대로 그것을 봉안하기 위해 ‘네거리’에 각각 봉분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스투파’(stupa)라 하였다. 여기에서 한문의 탑파(塔婆)라는 말이 나오고, 줄여서 탑(塔)이 되었다. 스투파는 처음 둥그런 무덤 형태였으나 그 후 여러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곧 일반 신도들의 순례와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산치와 바르후트에 있는 것들이다.
학생들에게 "이 stupa라는 말도 기억하지 못하면 ‘stupid’라"고 말한 후 시험 문제로 내면 틀리는 학생이 거의 없다. 중국에서는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이, 한국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石塔)이, 일본에서는 나무로 된 목탑(木塔)이 많다. 부처님의 유골을 봉안한 것으로 믿어지는 것을 진신 사리탑,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담고 있는 것을 법신사리탑이라 한다.
‘사리’(?ar?ra)는 몸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부처님의 몸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뜻하였지만, 요즘은 일반적으로 고승들의 몸을 화장한 후 찾아내는 작은 구슬모양의 결정체를 일컫기도 한다. 엄격하게 구별해야 할 경우 스님들의 몸에서 나온 이런 사리는 진신 사리, 법신 사리와 달리 ‘승 사리’(僧舍利)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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