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에 대하여
불교 공동체 승가는,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갈라진 후 상좌부는 그 자체 내에서 이루어진 계속적인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이어져 갔지만, 대중부는 그 후 얼마 못가서 없어지고 말았다. 대중부가 성행하던 카쉬미르, 간다라 등 인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기원전 1세기 경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출현하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사변적이고 개인적이고 소수 엘리트 중심적인 성향에 반대하고 나온 진보적 승려들이 일으킨 일종의 혁신 운동인 셈이다. 처음에는 대승불교를 세운다는 자각도 없이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가서 자기들은 여러 사람들을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실어 나르는 ‘큰 수레’(大乘, Mah?y?na)인데 반해, 부파불교는 ‘작은 수레’(小乘, H?nay?na)라고 불렀다. ‘소승’이라는 말은 이처럼 본래 경멸하는 뜻이 들어있던 말이기 때문에 이른바 동남아 소승불교 국가에서 온 스님을 상좌(Therav?da) 스님이라 하지 않고 소승(H?nay?na) 스님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옳은 일이 못된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생긴 대승불교의 가장 큰 종교적 특징이라면 이른바 ‘보살’(菩薩, bodhisattva)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승불교를 ‘보살승’이라 하기도 한다. ‘보살’이란 말은 ‘깨침을 위한 존재’ 곧 깨침을 구하거나 깨침 속에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대승불교 신봉자들에 의하면, 소승은 자기들의 ‘개인적 구원’에만 관심이 있어 모두 개인적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되려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비해, 자기들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보편적 구원’을 위해 자기들을 희생하는 ‘보살’이 되는 것을 종교적 이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보살은 열반에 들 자격이 충분하지만 중생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자비(慈悲, karu??)의 마음 때문에 나보다 남을 먼저 피안(彼岸)으로 보내려고, 자원해서 이 사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고 있는 존재이다. 그야말로 철저히 ‘남을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인 셈이다. (‘남을 위한 존재’라는 말은 독일 신학자 본회퍼가 예수님을 가리켜 쓴 말이다. 예수님을 보살 사상에 비추어 살펴본 책으로 길희성, 『보살예수』(현암사, 2004), 특히 187쪽 이하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보살 사상과 관련하여 얼마 전 필자가 어느 신문에 칼럼으로 썼던 글 하나를 덧붙인다.
지옥에 간 테레사 수녀
자기 고향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마다하고 인도 캘커타 빈민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친 마더 테레사 수녀가 죽어서 지금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테레사 수녀가 교회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일까? 그리스도교의 어느 복잡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성경에 보면 심판의 날 양과 염소를 가르는데 ‘네가 어느 교회에 속했었나’ ‘네가 삼위일체를 제대로 알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천당에 가는 일이라면 테레사 수녀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가 천당이 아니라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테레사 수녀의 사랑과 자비 때문이다. 사랑이란 남을 내 몸 같이 여기는 것이고 자비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로 가득했던 테레사 수녀가 어찌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을 외면하고 혼자 하늘나라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지옥행을 자원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야말로 뼈 있는 농담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은 결국 천당에 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이라면 나만 천당에 가겠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은 천당에 가야겠다는 마음이라면 오히려 그 마음 때문에 천당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천당에 갈 자격이 있겠는가.
이번 이라크전쟁에서 유명해진 페르시아만 해안도시 바스라에서 1,200년 전에 살았던 이슬람 성녀 라비아의 기도가 생각난다.
“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김이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면 저를 지옥에서 불살라 주옵시고, 낙원의 소망 때문이라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주님만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제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대승구속론
대승 불교가 보살 사상을 강조하면서 ‘보살의 길’이라고 하는 대승 불교 나름대로의 새로운 구속론(soteriology)이 생겨났다. 보살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상좌 불교에서 강조되던 ‘사제팔정도’나 ‘삼학’을 새로운 시대의 상황에 맞게 보다 정교하게 ‘확장한’ 수행법을 계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상좌 불교에서는 궁극 목표를 위한 수행이 기본적으로 승려들을 위한 것이지만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길은 승려 뿐 아니라 일반 평신도에도 해당된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면 ‘보살의 길’ 혹은 ‘보살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여러 단계의 발전을 거쳐 형성된 보살의 길은 대략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 진리를 들음, 2) 깨우치겠다는 마음을 일으킴, 3) 구체적인 결의를 다짐함, 4) 확신을 보장받음, 5) 여섯 가지 실천 사항을 완성함, 6) 열 가지 계단을 오름이다. 이제 이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첫째, 부처님이나 다른 보살이나 친구로부터 교훈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교훈을 들으면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등 마음에 덕의 씨앗을 심고 선이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런 훌륭한 교훈과 쌓아온 선업에 힘입어 둘째 단계로 넘어간다.
둘째, ‘깨침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이른바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위로는 자기 스스로의 깨침을 구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교화함’(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마음이다. ‘자신을 이롭게 함’(自利)과 ‘남을 이롭게 함’(他利)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결국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깨침을 얻어야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고,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깨침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자기와 남이라는 구별이 사라짐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것 자체로 과거의 모든 악업은 소멸되고 미래의 선업이 보장되는 것이다.
셋째, 서원(誓願, pran?idh?na)을 세우는 일이다. ‘서원’이란 일종의 맹세나 결의 같은 것으로 앞으로 나아갈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는 일이다. 서원에는
1. 중생 가없어도 모두 건지기 서원합니다.(衆生無邊誓願度)
2. 번뇌 끝없어도 모두 끊기 서원합니다. (煩惱無盡誓願斷),
3. 진리의 문 한없어도 모두 배우기 서원합니다. (法門無量誓願學),
4. 불도 더없어도 모두 이루기 서원합니다. (佛道無上誓願成)
요즘 한국 법회에서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고 하는 노래로 지어 부른다.
이를 ‘사홍서원’(四弘誓願)이라 하는데, 모든 보살이 공통적으로 세우는 일반적인 서원이다. 이외에 각각의 보살에 따라 나름대로 12서원, 18서원 등 구체적인 것들도 있다. 구체적인 서원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나중 아미타불이 된 법장( Dharmakara)비구가 세운 48서원으로 그 중에서도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모두 서방 극락 정토로 옮겨 나게 하겠다고 한 제 18 서원 같은 것이다. 서원은 힘이 있다고 보고 이 힘을 ‘원력’(願力)이라 한다.
넷째, 이처럼 서원을 세우고 수많은 부처님 중 한 분을 만나 그 앞에서 공표를 하면, 그 부처님으로부터 원을 세운이가 앞으로 몇 겁 뒤에 어느 불토에서 무슨 부처가 될 것이라는 확약을 받게 된다. 일종의 확신을 객관적으로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자기 당대에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위대한 보살이나 스승으로부터 이런 확약을 받을 수도 있다.
보살의 길 - 바라밀의 실천
다섯째는 이른바 ‘여섯 가지’나 ‘열 가지’ ‘바라밀’(波羅蜜, p?ramit?)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라밀’은 문자적으로 ‘저쪽으로 완전히 건너감’ (度彼岸)이라는 뜻으로, 깨침이라고 하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려는 보살이 완벽하게 이루어야할 구체적 실천 사항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 여섯 가지란 1. 보시(나눔), 2. 지계(계율을 지킴), 3. 인욕(참음), 4. 정진(힘씀), 5. 선정(깊이 명상에 듬_, 6. 지혜(눈 뜸)이다. 이중 특히 보시와 인욕에 대해 좀 살펴보기로 한다.
보시(布施, d?na) -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요즘말로 고치면 관대(generosity), 자선(charity), 기부(donation), 나눔(sharing) 등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보시에는 일반적으로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 진리의 말을 나누어주는 것, 남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것이다. 참된 보시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어지고, 우월감이나 열등감 같은 것이 개입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보시를 통해 내 속에 있는 ‘세 가지 해독’(三毒), 곧 탐욕(貪), 미움(瞋), 어리석음(癡 )중 특히 ‘탐욕’을 극복하는 법을 배운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혹은 교회에 헌금하거나 절에 시주를 드릴 때, 내가 복을 받기 위함이라던가, 남에게 관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라든가, 우쭐대어 보기 위함이라든가, 받는 사람이나 단체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 동기에서 나온 자선으로서, 삼독 중 하나인 탐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욱 탐욕스런 사람으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인욕(忍辱, ks?nti) - 참는 것이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娑婆, sabh?) 세계라고 하는데, ‘사바’란 산스크리트 원어를 음역한 것이고 본래 뜻을 따라서는 ‘인토’(忍土) 혹은 ‘감인토’(堪忍土)라고 번역한다. 이 세상이란 어쩔 수 없이 ‘참으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인욕을 통해 ‘삼독’ 중 특히 ‘미움’을 극복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참고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해서, 나쁜 짓하는 사람을 무조건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국가의 모든 사법제도나 감옥을 다 없애도록 촉구해야 할까? 어느 누가 내게 나쁜 짓을 했는데, 내가 무조건 참고 이해하고 용서했다고 하자. 여기에 용기를 얻은 그 사람이 내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계속 나쁜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하자. 그래도 무조건 참고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벌을 주고 감옥에 넣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 개인에 대한 증오 때문이나 복수심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용서나 사랑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할 수 없다. 병원에 격리수용하고 필요에 따라 자유를 억제해야할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물론 그 전염병 환자 개인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 때문이 아닌 것과 같다.
병든 사람의 몸을 째고 환부를 도려내는 일처럼 그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일시적 고통을 가하는 것은 인욕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런 일을 할 때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느냐 남 중심적으로 생각하느냐에 달린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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