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의 성불 체험과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와 부활 이해
싯다르타의 성불 체험
이제 싯다르타는 보름달이 밝은 밤, 보리수 밑에 다시 홀로 남았다. ‘보리수’(菩提樹, Bodhi-tree)란 그가 그 나무 밑에서 깨침을 얻었기에 ‘깨침’이라는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나무가 본래 무화과 나무였을 것이라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곳을 나중 ‘보드가야’(Bodhgāya), 곧 ‘깨침의 마을’이라 했다.
싯다르타의 성불 체험이야기도 경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서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바에 따라 엮어가 보면 이 깨침의 과정에서 그는 대략 ‘네 단계의 선정(禪定)’을 거치고 ‘세 가지 앎’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마군이 지나가고 싯다르타는 네 단계의 선정을 거쳐 “마음이 집중되고 깨끗하게 되고 티 없이 된” 상태로 초야(初夜)에 이르렀을 때 첫째 앎을 얻게 된다. 이른바 숙명통(宿命通). 전생(前生)을, 그리고 그 전생의 앞 생을, 그러다가 점점 더 많은 생, 모든 전생을 완전히 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자비심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종교학적으로 말해 ‘영원한 현재’(eternal now), ‘무시간성’(timelessness)을 체험한 것이다. 중야(中夜)가 되었을 때 두 번째 앎이 이르렀는데, 이른바 천안통(天眼通). 완전히 깨끗해진 ‘하늘 눈’을 가지고 모든 중생의 죽음과 새로 남, 그리고 ‘카르마’(業)나 ‘연기’라고 하는 인과율의 원칙을 깨달은 것이다.
중생들이 끝없이 윤회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자비심은 더욱 깊어졌다. 후야(後夜)가 되어 셋째 앎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을 누진통(漏盡通)이라 한다. 모든 중생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쾌락과 욕망과 무지와 사념(邪念)의 네 가지 누(漏, 煩惱, asrava)를 어떻게 멸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이 세 가지 앎을 삼명통(三明通)이라 부른다.
이제 강 저 너머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고오타마 싯다르타에게 이제 “무지는 사라지고 앎이 떠오르고, 어두움은 사라지고 빛이 떠올랐다.” 6년의 고행 끝에 35세의 나이로 최고의 진리를 터득하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그야말로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문자 그대로 ‘붓다,’‘깨친 이’가 된 것이다.
이것이 불교적 용어로 성불(成佛)이요, 성도(成道)요, 대각(大覺)이요, 활연대오(豁然大悟) 혹은 확철대오(廓徹大悟)요, 산스크리트어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의 체험이다. 실로 위대한 영웅 곧 ‘대웅’(大雄)이 된 것이다. (한국 절에서 ‘대웅전’은 이렇게 ‘위대한 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 이런 우주적 사건을 경축하기 위해서 땅은 술 취한 여인처럼 흔들리고, 마른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철도 되지 않았는데 나무에 꽃잎과 과일이 열리고 하늘에서는 온갖 꽃들이 쏟아져 내렸다.
석가의 성불 체험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교 평가
부처님이 한 이 성불의 체험은 영국의 불교학자 험프리(Christmas Humphrey)가 말한 것처럼 “불교의 태반이요 심장이요 그 존재 이유”라 할 수 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벌은 이 사건을 두고 “동양 신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이라고 했다. 실로 불교의 핵심적인 사건이요, ‘알파와 오메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보아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무엇이라 볼 수 있을까? 각자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 볼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이상으로 더 중요한 가르침이 어디 있을까?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4)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이런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어느 면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나는 것, 무지와 어두움의 옛 삶에서 깨달음과 광명의 새 삶으로 탈바꿈하는 성불의 체험을 가리키는 상징 체계로 볼 수 없을까?
한 가지 더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도 부처님과 비슷한 깨침의 체험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종교사를 통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필자가 즐겨 쓰는 용어로 ‘특수 인식 능력(特殊認識能力)의 활성화(活性化)’를 이룬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예수님도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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