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을 위한 불교 이야기

6. 망설임에서 결단으로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3. 10:01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가르치러 나선 부처님

망설임 : 깨달은 진리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진리란 각자 스스로 체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절감했을까...

 

부처님은 7일간 (혹은 28일간, 혹은 49일간) 보리수 아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부처님은 자기의 깨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가르칠까 말까 망설이게 되었다. 망설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쁘거나 세상 쾌락에 빠져 있거나 탐욕과 노여움이 불타고 있어 그런 진리에 관심을 가질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자기가 깨달은 진리가 ‘세상의 흐름에 역행’할 정도로 너무나도 심오하고 정교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보아도 그들이 깨닫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깨달은 자의 실존적 고독’이다. 노자님, 공자님, 예수님 등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깨달은 이들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홀로됨의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조셉 캠벨에 의하면, 고대 영웅 신화에 나타나는 영웅들이 그들의 목적을 이룬 다음 다시 사람들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주저하는 것도 그들의 이야기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라고 한다. 이른바 ‘돌아감의 거절(refusal to return)’이다. ‘Why me? syndrome’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왜 사람들에게 돌아가 가르치기를 거절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진리란 의사전달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던 것이 아닐까? 영어로 표현하여, 진리는 “to be caught, not be taught”라는 것이다. 스스로 체득해야 할 것이지 남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단 : 그래도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부처님의 경우, 결국 사람들에게 가서 가르치기로 했다. 옛날 자기가 사람들을 돕겠다고 했던 서원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브라마 신(梵天)이 내려와서 부처님에게 그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못에 있는 연꽃들 중에 세 종류가 있음을 보았다.

첫째는 아주 흙탕물 밑에 있는 것들, 둘째는 흙탕물 표면에서 나왔다가 잠겼다 하는 것들, 셋째는 흙탕물 위에서 아름답게 핀 것들.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그 중 자기의 가르침으로 도움을 얻을 이들이 있으리라 보았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가 가르치리라 결심한 것이다.

누구에게 가서 가르칠까? 우선 자기가 처음에 모시던 두 스승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불안(佛眼)을 통해 처음 스승은 이레 전, 둘째 스승은 바로 전날 밤에 죽어 둘 다 천상에 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그와 함께 고행하던 다섯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자기를 떠나 베나레스(Benares),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외각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이라는 공원에서 고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이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약 200 킬로, 500 리 정도의 거리였다.



스스로 '여래(如來)'라 부른 부처, '인자(人子)'라 부른 예수

녹야원에 이르렀을 때, 다섯 친구들은 멀리서 부처님이 자기들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고행을 견디지 못하고 사치에 빠졌던 고타마가 자기들에게 오더라도 모두 모른 척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올수록 그에게서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발산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시하려던 마음이 자기들도 모르게 바뀌었다. 모두 일어나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발을 씻으러 물을 떠오는 등, 그를 따뜻이 맞아들였다.

영적으로 어느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은 특수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인가. 시내 산에서 신과 만나고 내려온 모세를 보고도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고, 변화산에서 예수도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스도교 성화(聖畵)에 보면 예수의 머리 주변으로 후광이 그려져 있고, 많은 불상 주위에는 불꽃이 함께 있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아무튼 이렇게 따뜻한 영접을 받은 부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더 이상 ‘고타마’나 친구라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이제 ‘여래(如來, Tath?gata)요, 참으로 ‘깨친 자’라고 했다. '여래'란 ‘이렇게 온 이’ 혹은 ‘이렇게 간 이’라는 뜻인데,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가리킬 때 ‘인자’라고 한 것과 같이, 부처님이 자기 스스로를 부를 때 쓰던 칭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