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8대 성지를 찾아서

④ 첫 비구니의 탄생지 - 바이샬리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1. 27. 10:30

 

④ 첫 비구니의 탄생지 - 바이샬리
“깨달음에 남녀 없지요” 이모에게 출가 허락하다

지난달 16일 쿠시나가르를 떠나 바이샬리로 향했다. 2500년 전 바이샬리는 북인도의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였다. 북인도 최초의 공화국도 여기였다. 아쉽게도 붓다의 유적은 많이 소실됐다. 그러나 붓다의 생애에 얽힌 애틋한 일화들이 바이샬리를 배경으로 흘렀다. 당시 바이샬리는 새로운 사상과 자유로운 토론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붓다의 진신사리를 넣었던 스투파(왕릉처럼 생긴 벽돌탑) 앞에 아소카 석주가 서 있다.


그래서일까. 인도불교사에서 바이샬리는 ‘여성’과 ‘재가자’에 방점이 찍히는 도시다. 붓다의 내로라하는 제자들도 ‘일합(一合)’을 꺼렸던 유마 거사의 고향도 여기다. 승단에서 첫 비구니(여성 승려)가 탄생한 곳도 여기다. 버스로 6시간을 달렸다. 보고 싶었다. 붓다의 진보, 붓다의 평등, 붓다의 열림, 그 뿌리를 보고 싶었다.

 기원전 250년에 바이샬리의 붓다 진신사리탑 앞에 세워진 아소카 석주. 높이는 6.6m며 꼭대기에 사자상이 앉아 있다. 현존하는 아소카 석주 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그럼에도 석주 기둥에는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새긴 영어 낙서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붓다의 설법=한국의 선사들에겐 ‘부모 장례식에 가느냐, 마느냐’가 고민거리 중 하나다. 성철 스님은 부모상 때 집에 가지 않았다. 시자를 대신 보내 문상했다. 속가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좌인 원택 스님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몇 번이나 “내 말 알겠제. 꼭 대구 가거라. 어~잉”하며 갈 것을 신신당부했다.


가든, 말든 정답은 없다. 다만 마음에 ‘응어리’가 남는가, 아닌가의 문제다. 부모 장례식에 가더라도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그만이다. 반면 장례식에 가지 않은 아쉬움을 평생 가슴에 꽂고 산다면 더 큰 응어리가 남고 만다. 물론 출가자가 속가의 장례식장에서 애착에 휘둘리는 것도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조계종의 큰스님 중에는 열반 직전에 “아쉬움은 없다. 다만 하나, 스승의 조언대로 어머니 장례식 때 안 갔던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남겼던 이도 있다.


그럼 붓다는 어땠을까. 2500년 전, 당시 39세였던 붓다는 이곳 바이샬리에 머물 때 ‘부친이 위독하다, 아들을 그리워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붓다는 부친(숫도다나왕)의 상실감을 꿰뚫고 있었다. 왕위를 이을 아들(붓다)과 손자(붓다의 외아들 라훌라)까지 출가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붓다는 고향으로 갔다. 그리고 부친의 마음을 위로하고 임종을 지켜봤다. 아버지의 다비식에서 붓다는 말했다. “이 세상은 무상하고, 고통만 가득하다. 영원한 것이란 없다. 삶은 환상과 같고, 타오르는 불꽃과 같고,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다. 잠시 그렇게 있어 보이는 것뿐이다.”


파격적인 설법이었다. 부친의 육신을 화장하는 자리, 불타는 장작 앞에서 붓다는 “이 불을 보라. 욕심의 불길은 이 불보다 뜨겁다. 무상한 몸으로 잠시 살다가는 것이니 부지런히 수행하라”고 말했다.


붓다는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도 ‘달 그림자’가 아니라 ‘달’을 보라고 했다. 그림자의 기쁨, 그림자의 영광, 그림자의 욕망, 그림자의 슬픔이 결국 무엇인가.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니 보라고 했다. “삶의 희로애락, 그림자의 희로애락이 실제로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없다면 그 ‘없음’을 정말로 보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물 속의 달 그림자, 타오르는 불꽃에서도 ‘진짜 달’을 본다고 했다. 당시 사캬(석가)족 남자 500명이 붓다를 좇아 출가했다고 한다.



◆여성의 출가를 허하소서=버스는 바이샬리의 콜후아라는 시골마을로 달렸다. 붓다의 진신사리가 나온 스투파(왕릉처럼 생긴 둥근 벽돌탑) 앞에 아소카 석주가 서있다. 석주 위에는 사자상이 있었다.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가라”고 했다. 그랬다. 나를 흔드는 소리, 나를 울리는 소리, 세상의 그 모든 소리가 실은 ‘빈 소리’임을 깨칠 때 우리는 사자가 된다.


붓다 당시에는 승단에 여성이 없었다. 비구(남성 승려)뿐이었다. 불교뿐이 아니었다. 힌두교도, 자이나교도 그랬다. 2500년 전의 인도는 남성 위주의 지독한 가부장적 사회였다. 그런데 붓다의 이모이자 새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출가를 청했다. 언니 대신 29년간 붓다를 키웠던 여성이다. 붓다는 세 번이나 거절했다. 노숙과 탁발의 연속인 수행자의 삶이 여성에겐 위험천만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숫도다나왕)의 장례식을 치른 고타미는 사캬족 여성 500명과 함께 바이샬리로 왔다. 그리고 문 밖에서 울며 출가를 청했다. “여성도 출가하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라는 시자 아난다의 물음에 붓다는 “그들도 성취할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출가를 허락했다. 어디일까. ‘여성도 깨달을 수 있다’는 붓다의 시선, 그 뿌리는 대체 어디일까.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자 진보였다. 여자와 남자, 그걸 둘로 보면 불가능한 결정이었다. 그러니 남자란 형상과 여자란 생김새, 그 너머에 붓다의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상(相)이 상(相)이 아닐 때 여래를 보리라.” 붓다는 여자를 보면서도, 남자를 보면서도, 세상 모든 풍경을 보면서도 오직 ‘여래’를 봤던 것이다.


붓다의 속가 아내였던 야소다라도 고타미와 함께 출가했다. 팔리어 경전에는 “야소다라는 출가 후 사리붓타(사리불)와 목건련(목갈라나) 등 붓다의 수제자들과 맞먹는 지혜를 성취했다”고 기록돼 있다. 불성(佛性)에 남녀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글·사진=백성호 기자


2009.03.26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