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8대 성지를 찾아서

② 붓다의 탄생지 - 룸비니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1. 27. 10:16

 

② 붓다의 탄생지 - 룸비니
바위 속 붓다 발자국 앞에 금박 바르며 기도하는 순례객


지난달 14일 인도의 쉬라바스티를 떠난 버스는 룸비니를 향했다. 붓다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은 지금 네팔 영토다. 울퉁불퉁한 도로에는 소와 자전거와 행인들이 엉켜 있었다. 그런 길을 비뚤비뚤 6시간 달린 끝에 국경을 넘었다. 숙소는 룸비니 동산 근처였다. 캄캄한 밤, 밖에선 앙칼진 목청으로 여우가 울었다. 이튿날 아침 룸비니로 갔다. 안개가 자욱했다. 그 속을 걸었다. 2500년 전, 붓다는 여기서 태어났다. 이쯤일까, 아니면 저쯤일까. 붓다는 여기 어디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도 안개가 끼었을까. 당시의 나무와 꽃들은 간 곳이 없다. 대신 마야 부인이 출산 후 목욕을 했다는 연못과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보리수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룸비니의 마야데비 사원과 아소카 석주 앞에서 순례객들이 108배를 하고 있다. 안개 너머로 아름드리 보리수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메시지=사람들은 연못의 물을 떠서 얼굴을 적셨다. 또 두 손을 모은 채 보리수 둘레를 빙빙 돌았다. 무엇을 위해, 또 어디를 향해 기도를 하는 걸까. 보리수 근처 한적한 곳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고타마 붓다, 그는 신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다. 뱃속에서 열 달을 채웠을 것이고,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태어났을 터이다.


그런데 탄생 설화는 다르다. 붓다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을 차례로 둘러본 뒤,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손은 하늘,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천상천하 유아독존)”고 말했다는 것이다.


 


마야 부인이 목욕을 했다는 연못의 물을 순례객들이 머리에 뿌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꼬집는다. “붓다는 참 거만하다. 어떻게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설화의 메시지는 뭘까. 안개 자욱한 연못 위로 바람이 불었다. 보리수 가지 위에선 새가 울었다. 안개와 바람, 그리고 새 울음이 서로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됐다. 그랬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거만한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비운 자만이 던질 수 있는 ‘자기 고백’이었다.


왜 그럴까. 붓다는 ‘무아(無我)’를 설했다. 유아독존의 ‘나(我)’와 붓다가 설한 ‘없는 나(無我)’는 둘이 아니다. ‘나’가 없는 자리, 거기에 붓다가 있다. 그러니 붓다는 안개가 되고, 바람이 되고, 새 울음이 된다. 그게 둘이 아니다. 이 우주에서 끊임없이 생멸하는 만물만상의 바탕 없는 바탕, 거기에 붓다가 있다. 그 밖에 달리 없다. 그러니 붓다는 “나 없는 나, 오직 그만이 존귀하다”고 외친 것이다.



◆붓다의 유년, 붓다의 시선=연못 뒤에는 마야데비 사원이 있었다. 그 안에 갓난아이 붓다의 발자국이 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에 발자국 모양이 찍혀 있었다. 생각보다 컸다. 사람들은 “진짜냐, 아니냐”를 따졌다. 태국 불자들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가져온 금박을 꺼내 주위 벽돌에 바르며 기도를 했다. 순례객들은 무엇을 찾는 걸까. 2500년 전의 흔적일까. 아니면 지금도 살아 있는 붓다의 숨결일까.


밖으로 나왔다. 붓다는 커서도 룸비니를 찾았을까. 여기서 어머니를 그리워했을까. 그의 유년이 궁금했다. 자신을 낳고 1주일 뒤 어머니 마야 부인이 숨졌다. 당시의 관습대로 새 어머니가 된 이모가 그를 대신 길렀다. 그는 삶의 결핍, 세상의 결핍을 느끼며 자랐을까. 그런 상실감이 그에게 고독과 통찰의 촉수를 안겼을까.


초기 불교의 ‘팔리어 경전’에는 ‘붓다의 유년’에 대한 스케치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왕궁 밖으로 나간 그는 잠부나무(열대과일 나무) 아래서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경전에는 “농부의 쟁기질로 죽은 벌레, 햇볕과 먼지에 그을리고 더럽혀진 농부의 얼굴, 무거운 짐으로 헐떡이는 소를 보며 그(싯다르타)는 가슴 가득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슬픔을 새기면서 천천히 걸었다”고 기록돼 있다.


연못 주위를 걸었다. “슬픔을 새기면서 천천히 걸었다”는 대목을 곱씹으며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그랬다. 유년의 붓다에겐 생명을 향한 연민, 삶의 슬픔, 존재의 고통을 바라보는 깊은 눈이 있었던 것이다. 붓다의 탄생지에서 붓다의 유년도 보였다.


◆어떤 문을 열 것인가=해가 높이 올랐다. 룸비니 동산의 안개도 서서히 걷혔다. 동·서·남·북을 바라봤다. 붓다는 나자마자 사방을 돌아봤다고 한다. 그리고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했다.


왕자인 붓다에겐 출가의 계기가 있었다. 그는 왕성의 동문 밖 나들이에서 늙음을, 남문 밖에서 병듦을, 서문 밖에서 죽음의 풍경과 마주쳤다. 그리고 인간의 생로병사에 절망했다. 그런데 북문 밖 나들이는 달랐다. 수행자로부터 “늙고 죽음이 없는 경지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출가를 작정했다.


그랬다. 그게 북문이다.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북쪽을 향해 걸었다. 그것도 북문이다. 삶은 허무하고, 세상은 고통이다. 그걸 뛰어넘는 길, 그게 바로 북문이다. 수행의 길, 구도의 길,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다.


붓다만 길을 택한 게 아니다. 우리의 삶도 길을 택한다. ‘동·서·남·북, 당신은 어떤 문을 열 건가.’ 룸비니에 울리는 붓다의 메아리는 그걸 묻고, 또 물었다.



◆룸비니 동산=인도와 네팔의 국경지대에 있다. 예전에는 인도의 영토였으나 지금은 네팔 땅이다. 그래서 인도에선 “붓다는 인도 사람”이라 하고, 네팔에선 “붓다는 네팔 사람”이라고 말한다. 붓다는 주로 인도 북부에서 활동했다. 8대 성지 중 나머지 7곳은 모두 인도땅이다.



아소카왕의 석주 붓다의 실존 보여주다


오랜 세월 룸비니 동산은 ‘묻힌 동산’이었다. 초기 불교 경전 속에 ‘붓다의 출생지가 룸비니’란 구절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 그래서 룸비니는 ‘설화 속의 땅’이었다. 일부에선 고타마 붓다까지도 ‘설화 속 인물’로 볼 정도였다.


1877~1946년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갠지스강 북부는 정글이 많고 호랑이와 말라리아도 득실대는 곳이었다. 당시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붓다의 유적을 좇아 이 지역을 뒤졌다. 그러다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가 인도 북부에서 아소카 석주를 발견, 비로소 룸비니의 위치를 확인했다. 붓다가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임을 밝히는 ‘확고한 증거’를 찾은 셈이었다.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왕(기원전 269~232년)은 기원전 249년에 룸비니를 방문, 탑 4기와 석주 1개를 세웠다. 벼락을 맞아서 부러진 룸비니의 아소카 석주(약 7.2m만 남아 있음)에는 ‘아소카왕은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여기가 붓다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룸비니 마을은 조세를 면제하고, 생산물의 8분의 1만 징수케 한다’는 내용이 인도 북부의 지방언어로 새겨져 있다. 붓다 입멸 후 250년, 지금으로부터 2250년 전의 기록이다. 그러나 룸비니는 힌두교의 왕들과 이슬람의 침략으로 인해 오랫동안 흙속에 묻혀 있었다.

백성호 기자

2009.03.12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