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8대 성지를 찾아서

①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1. 27. 10:15

 

인도의 붓다 8대 성지를 찾아서

①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
입멸한 뒤 2500년, 변치 않는 금강경 소리
24년간 안거하며 설법했던 곳
걷던 길 따라가니 ‘여래의 향기’


머나먼 땅이었다. 붓다 입멸 후 숱한 사람이 인도로 갔다. 살아남은 이는 적었다. 중국에서 인도로 갔던 승려 중 살아서 돌아온 이는 10명 중 2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길이 험했다. 신라의 승려 혜초는 바닷길로 인도에 갔다. 그 역시 집채만한 파도를 넘고, 목숨을 건 여정을 통과했을 터이다.

 

인도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는 붓다가 ‘금강경’을 설한 곳이다.
14일 이곳을 찾은 장적 스님(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오른쪽에서 둘째)과 토진 스님(조계사 부주지·오른쪽에서 셋째)이 『조계종 금강경 표준본』을 봉정하고 있다. 붓다가 앉았던 자리에는 꽃이 뿌려져 있었다
.

 

 

붓다 입멸 후 2500년이 흘렀다. 인도는 이제 머나먼 세월, 그 너머의 땅이 됐다. 12~22일 불교 조계종 총무원 주관으로 그 땅을 밟았다. 인도의 구석구석을 돌며 ‘붓다의 8대 성지(聖地)’를 찾았다. 이유는 오직 하나. 고타마 붓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스스로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라고 읊었던 이. 그에게 욕망과 수행, 구속과 자유, 삶과 죽음을 물었다.


붓다는 답을 했다. 태어난 동산, 깨달은 나무 그늘, 처음 설법한 터, 숱한 경전을 읊은 곳, 누워서 열반한 자리 등 붓다의 8대 성지에서 살아서 꿈틀대는 메아리로 답을 던졌다. ‘8대 성지’를 도는 내내 그 답에 흠뻑 젖었다.


12일 아침에 출발한 비행기는 홍콩과 방콕을 경유, 자정쯤 인도의 수도 델리에 도착했다. 인도땅은 넓었다. 이튿날 새벽 기차로 7시간, 다시 버스로 5시간을 달린 끝에 쉬라바스티에 도착했다. ‘쉬라바스티’란 지명도 흥미롭다. 신라 때 ‘서라벌(徐羅伐)’로 음역됐고, 다시 지금의 ‘서울’이 됐다는 설이 있다. 그곳에 기원정사(祈園精舍)가 있었다. 붓다는 여기서 24회나 안거를 났다. 인도에선 우기철에 석 달간, 1년에 한 번만 안거를 지낸다. 그러니 붓다는 여기서 24년의 안거를 보낸 셈이다. 그래서일까. 쉬라바스티는 붓다가 가장 많은 경전을 설한 곳이기도 하다.

 


◆2500년 전 붓다가 설한 자리=14일 아침, 기원정사로 갔다. 새가 지저귀고, 원숭이가 뛰어놀았다. 깔끔한 정원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붓다는 여기서 ‘금강경’을 설했다. 당시 이 앞에서 1250명의 승려가 ‘금강경’을 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육조 혜능대사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이란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깨침의 문턱까지 달려갔다. 그래서 ‘금강경’은 붓다가 설한 ‘최상승의 법문’이라 불린다. 깨달음을 향한 징검다리가 ‘금강경’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저만치서 경전 읽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갔다. 야트막한 벽돌 건물 위에서 미얀마 스님과 신자들 40여 명이 ‘금강경’을 읊고 있었다. 가부좌를 한 그들 앞에는 붉은 장미 꽃잎으로 덮인 공간이 있었다. 거기가 바로 붓다가 ‘금강경’을 설한 자리였다. 가슴이 뛰었다. 신발을 벗고 그 위로 올라갔다.


2500년 전, 붓다는 이곳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자아(自我)가 있다는 생각, 몸이 있다는 생각은 모두 헛된 것이다. 여래의 몸이 여래의 몸이 아님을 알 때 바로 여래를 보리라.” 붓다는 정확하게 말했다. 그리고 줄기차게 말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나의 몸이 있다’는 생각을 놓아라. 그럼 그 너머의 붓다를 보리라.”


사람들은 묻는다. ‘나를 놓으면 어찌 사나?’ ‘존재가 없으면 뭐가 남나?’ ‘몸이 없으면 뭐로 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겐 수행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주먹은 세게 쥘수록 펴기가 힘들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틀어쥔 집착이 강할수록 내려놓기가 힘이 든다. 결국 ‘수행=고통’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붓다는 말했다. “집착을 놓으면 여래를 보리라.” 집착을 끊는 길, 그게 고통의 길이 아님을 붓다는 역설했다. 오히려 여래를 보는 길임을 설파했다. 붓다는 “그걸 온전히 이해하라”고 했다. 그럴 때 수행이 두려움의 길이 아니라, 즐거움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붓다의 발자국에 포갠 순례객의 발자국=꽃잎으로 덮인 자리에 책이 한 권 놓였다. 동행한 장적 스님(총무원 기획실장)과 토진 스님(조계사 부주지)이 『조계종 금강경 표준본(한글본·한문본)』을 봉정했다. 건너편에 앉은 한국인 순례객들은 『금강경』을 읊고 있었다. 2500년의 세월을 가르는 붓다의 메시지가 여기선 한국어로, 저기선 미얀마어로, 또 저기선 태국어로 흘렀다. 그렇게 붓다가 설(說)한 자리에서 붓다의 설(說)이 흘렀다.


30m쯤 내려가니 붓다가 걸으며 수행했던 경행처가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맨발로 경행처에 올랐다. 천천히 발을 뗐다. 그 옛날 이곳에 지붕이 있었겠지. 우기 때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겠지. 그때도 붓다는 이곳을 걸었겠지. 내가 딛는 발자국 아래 붓다의 발자국도 놓였을까. 한 걸음만이라도 온전히 포개지긴 했을까. 우안거 때 지붕에선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가 들렸겠지. 그 아래서 붓다는 발의 느낌에 마음을 모았겠지. 그렇게 깨어있었겠지.


맞은편에 ‘여래향실’이 보였다. 붓다가 머물던 방의 터다. 인도 현지인 가이드 아진트 신하는 “당시 사람들이 밤낮으로 찾아와 부처님 방 앞에 꽃을 바쳤다고 한다. 덕분에 부처님 거처에선 늘 꽃향기가 날렸다. 그래서 ‘여래향실’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그앞에서 눈을 감았다. 여래의 향기, 그건 코를 적시는 향기가 아니었다. 적셔진 코, 적셔진 귀, 적셔진 눈, 적셔진 몸, 적셔진 마음을 비우고 비우게 하는 향기 없는 향기였다. 



붓다 8대 성지=고타마 붓다가 탄생한 룸비니,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처음으로 설법한 사르나트, 열반한 쿠시나가르를 4대 성지라고 부른다. 이에 숱한 경전을 설했던 쉬라바스티, 붓다가 도리천에서 내려왔다는 상카시아, 최초의 승원을 세운 라즈기르, 붓다가 열반길에 들렀던 바이샬리 등을 합하면 8대 성지가 된다.



“아이 가졌다” 모함 받은 곳, 쉬라바스티


붓다가 설법할 당시, 쉬라바스티(사위성)에는 이교도가 많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기원정사에서 붓다가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할 때였다. 한 여인이 벌떡 일어서더니 붓다를 향해 말했다. “어찌 법만 설하시고 우리 사이에 태어날 아이는 돌볼 생각을 안 하십니까?” 여인의 배는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여인의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나무바가지가 툭 하고 배에서 떨어졌다. 여인은 이교도들이 보낸 첩자였다.


불교 신자로 가장해 기원정사에 들어왔던 그녀는 일부러 새벽녘에 기원정사에서 나가곤 했다. 남들로부터 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배가 조금씩 부르게 만들었다. 결국 붓다의 아이를 가졌다고 모함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2500년 전 인도는 다양한 사상가와 수행자들이 출현하던 시기였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도의 ‘베다경전’과 ‘우파니샤드’ 등이 이들에겐 더 이상 절대적 진리의 잣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때였다.


불교와 함께 당시 인도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자이나교(자이나교 수행자는 철저한 고행을 통해 업을 제거, 순수한 해탈의 상태에 이르고자 함)도 이 시기에 생겨났다.


당시 쉬라바스티 일대에는 자이나교 등 서로 다른 수행법과 교리를 가진 이교도가 많았다. 붓다의 가르침이 더 넓은 북인도 지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왔던 것이다. 붓다는 그 견제를 뚫고 삶의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는 법을 설했다.


백성호 기자
2009.02.26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