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얻은 나무 아래는 깨달음 구하는 스님들 행렬
‘나는 누구인가’ 간절한 수행
2월17일 라즈기르를 떠났다. 길 옆에는 카스트(인도의 계급제도)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 천민’의 허름한 움막이 줄지어 있었다. 그들의 일상은 처참하도록 가난했다. 반면 그 뒤로 펼쳐진 목가적 풍경은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노랗게 흐드러진 유채꽃과 푸르디푸른 밀밭, 그 너머로 노을이 졌다. 인도의 가난과 인도의 풍광, 둘은 그렇게 엉켜 있었다. 그 사이로 뽀얀 먼지를 날리며 버스가 달렸다. 밤이 돼서야 도착했다. 붓다가 깨달은 땅, 보드가야였다. 숙소는 네란자라(니련선하) 강변에 있었다. 강 건너편이 바로 붓다가 깨달았던 장소였다.
마하보디 사원의 자투리 공간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승려와 불자들이 오체투지를 하듯이 절을 하고 있다.
◆보드가야, 인도의 계룡산=짐을 놓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강으로 갔다. 바닥은 온통 모래뿐이었다. 우기 때만 물이 흐른다고 했다. 저벅 저벅, 그 위를 걸었다. 2500년 전, 붓다도 이 위를 걸었겠지. 수행과 좌절, 수행과 절망을 되풀이하며 이 모래밭을 걸었겠지. 강둑 위로 숱한 밤별이 올랐다. 붓다는 새벽별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 별일까. 붓다의 깨달음, 그 완전한 순간을 목격했던 별은 지금 어디쯤 떠 있을까. 2500년 전, 이 일대는 ‘인도의 계룡산’이었다.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고행자와 구도자들이 주위의 숲과 산에서 수행을 했다고 한다. 붓다도 2만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인도인들은 이 숲을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렀다고 한다.
팔리어 경전에 기록된 붓다의 수행은 처절했다. 붓다는 처음에 하루 한 끼,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끼를 먹었다. 묘지에서 사람의 뼈를 베개 삼아 잠도 잤다. 좌선하는 그에게 목동들이 와서 침을 뱉고, 오줌을 갈기고, 흙을 던지고, 귀에다 나뭇가지를 쑤셔 넣기도 했다. 훗날 붓다는 “그래도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지 않았다. 내 마음은 평정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온전한 깨달음에 닿은 건 아니었다.
붓다는 목숨을 걸고 수행했다. 한때는 하루에 쌀 한 톨과 깨 한 톨만 먹었다. 경전에는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만지면 뱃가죽이 만져졌다’고 기록돼 있다. 붓다는 그렇게 고행의 극한까지 갔다. 무려 6년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6년 고행’을 통해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리라의 현(絃)이 울 때=붓다는 고행의 한계를 절감했다. 고행은 ‘에고’를 잠 재우고, 잠 재우고, 잠 재우는 수행법이다. 그러니 끝이 없다. 잠을 자던 ‘에고’는 조건만 되면 다시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풀 위에 돌멩이를 얹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풀뿌리는 여전히 뽑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붓다는 고행에 “굿바이!”를 선언했다. 그리고 비쩍 마른 몸으로 이 강에 내려와 몸을 씻었다. 맞은 편 강가, 저 어디쯤이었을까. 몸을 씻은 붓다는 다시 강둑 위로 올라갈 기운조차 없었다고 한다. 붓다는 그렇게 6년의 고행을 접었다.
서운했을까, 아님 절망했을까, 아님 낭패감에 젖었을까. 고행의 끝자락, 그건 붓다에게 막다른 골목이었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까.’ 붓다는 차분히 지난날을 돌아봤다고 한다. 그리고 어릴 적 잠부나무(열대과일 나무) 아래서 명상에 잠겼던 때를 떠올렸다. 우주의 운행을 바라보며 법열에 젖었던 시간이었다. 붓다는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리라(하프의 일종)의 현(絃)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기운을 차린 붓다는 너무 조였던 마음의 현을 조율했다고 한다.
네란자라강의 밤은 시원했다. 멀리 별똥별이 떨어졌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깨닫고자 하는 강렬한 나’는 수행자에게 늘 걸림돌이다. 그런 ‘나’를 놓아야 한다. 그럴 때 소리가 난다. 리라 뿐만 아니다. 가야금도 그렇고, 거문고도 그렇다. 내가 우주를 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녹고, 우주는 드러날 뿐이다. 그럴 때 거문고는 “두웅~기~둥”하며 울음을 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튿날 아침이었다. 강을 건너 마하보디 사원으로 갔다. 붓다가 깨달았던 장소다. 신발을 벗어야 했다. 맨발로 사원에 들어갔다. 높다란 대탑이 보였다. 2250년 전, 아소카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마하보디 사원은 세계 각국의 순례객으로 북적거렸다. 자투리 공간마다 수행자들이 앉아 있었다. 티베트 승려들과 서양인들은 오체투지를 하듯이 절을 하고 있었다. 좌선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루 3000배씩, 1주일간 2만1000배를 하는 한국인 순례팀도 있었다. 모두 ‘나’를 찾으려는 이들이었다.
대탑 뒤로 가지를 길게 드리운 보리수가 서 있었다. 그 아래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가까이 갔다. 보리수 아래 금강좌가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 붓다가 앉았던 자리다. ‘아아, 여기였구나. 붓다가 온전히 우주와 하나가 된 곳이 바로 여기구나.’ 그 앞에서 수백 명의 동남아 스님들이 줄지어 좌선을 하고 있었다.
붓다가 깨닫던 밤(인도력 기준)은 보름이었다. 보름달 아래 보리수,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붓다는 선정에 들었다. 밤이 내렸다. 그리고 새벽녘, 붓다는 별을 보며 깨달았다. 6년간 목숨을 건 고행으로 잠 재우려 했던 ‘나’, 그래도 잠들지 않던 ‘나’, 그 ‘나’가 실은 ‘없는 나(無我)’구나. 그걸 온전히 깨쳤던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우주’가 됐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
아무나 뱉고, 아무나 토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란 외침은 이미 ‘영원한 생명’ ‘영원한 에너지’로 사는 자만이 던질 수 있는 말이다. 더 이상의 태어남(生)도, 더 이상의 죽음(死)도 없는 자리. 거기서 붓다는 그 말을 토했다. 눈을 감았다. “마지막 탄생!”의 메아리가 보리수도 흔들고, 순례객도 흔들고, 나도 흔들었다.
글·사진=백성호 기자
2009.04.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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