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붓다의 열반지 - 쿠시나가르
45년 설법한 그 “나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내 생각, 내 욕망 허물고 오로지 정진하라 가르침
한 손 베고 두 발 포개고 흔들림 없이 마지막 맞아
지난달 15일 룸비니를 떠난 버스는 쿠시나가르를 향했다. 붓다의 출생지에서 곧장 열반지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차창 밖, 인도의 시골 풍경은 아름다웠다. 흐드러진 유채꽃 들판과 초라한 움막,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어찌 보면 원시의 삶이었고, 어찌 보면 자연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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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붓다의 다비식 때 장작에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한다. 수제자 가섭이 도착하자 비로소 불이 붙었다. 당시 가섭이 다가가자 붓다의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왔다. 가섭은 거기에 이마를 댄 뒤, 관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았다. 요즘 순례객들도 열반상 주위를 세 바퀴 돌면서 가섭처럼 이마를 댔다. |
2500년 전 붓다가 마주했을 풍경이 떠올랐다. 붓다는 저렇게 생긴 오솔길을 걸었겠지, 저렇게 생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겠지, 저렇게 생긴 사람들에게 설법을 했겠지. 또 날이 저물면 저토록 푸른 들판에서 잠도 청했겠지. 그렇게 구도의 길을 걸었겠지.
버스는 꼬박 6시간을 달렸다. 룸비니에서 쿠시나가르까지, 붓다에겐 80년의 여정이었다. 35세 때 우주와 하나가 된 그는 45년간 설법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 자(字)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궁금했다. 80년 세월을 돌아보는 붓다의 소회는 어땠을까. 그의 최후는 또 어땠을까. 삶의 마지막 순간, 그는 어떤 말을 남겼을까. 덜컹덜컹, 이리저리 흔들리던 버스는 해질녘에야 쿠시나가르에 도착했다.
◆사라나무 숲의 꽃비=버스에서 내렸다. 열반사(涅槃寺)로 갔다. 붓다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다. 동그란 지붕, 사원은 아담했다. 맞은 편으로 석양이 내렸다. 신발을 벗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열반당에 붓다가 누워 있었다. 1500년 전에 조성한 6.1m 길이의 열반상이었다. 머리는 북쪽으로, 한 손은 머리를 베고, 두 발은 포갠 채 붓다는 숨을 거두었다. 열반상도 그렇게 누워 있었다.
고타마 붓다가 열반한 장소에 세워진 열반사. 내부에 열반상이 누워 있다. |
붓다는 쿠시나가르에 오기 전 “여래의 열반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 그런 후에 공양받은 음식(돼지고기 혹은 버섯)을 먹고 짐작컨대 식중독에 걸렸다. 팔리어 경전에는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피가 나오는 설사병을 앓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 고통 속에서 80세의 붓다는 최후를 맞았다.
파바 마을에서 쿠시나가르까진 20㎞에 달한다. 붓다는 그 길을 걸으며 무려 25회나 쉬었다고 한다. 고통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그러나 흔들림은 없었다. 붓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쿠시나가르의 사라나무(‘단단한 나무’라는 뜻. 인도에선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숲에 도착했다. 지금의 열반사가 있는 곳이다. 붓다는 가사를 깔고 자리에 누웠다. 그때 사라나무 꽃잎이 비처럼 내렸다고 한다. 꽃비를 맞으며 붓다는 말했다. “사라나무의 신들이 꽃으로 내게 공양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를 진정으로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시봉을 들던 아난다가 물었다. “그럼 어떤 것이 여래를 공양하는 것입니까?” 붓다는 답했다. “수레바퀴만한 아름다운 꽃을 붓다에게 뿌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공양이라 할 수 없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다.”
그랬다. 붓다의 가르침은 명쾌했다. “나에게 꽃을 바치라”가 아니라 “꽃을 든 너를 여의라”였다. 꽃도 허물고, 나도 허물고, 붓다마저 허물라고 했다. 왜 그럴까. 그제야 ‘여래’를 만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형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여래를 보기 때문이다.
인도인 순례객들이 열반사로 들어왔다. 그들은 열반상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그러다 열반상의 발치에서 멈췄다. 두 손을 모으더니 붓다의 발바닥에 이마를 댔다. 다시 한 바퀴 돌고 이마를 대고, 다시 한 바퀴 돌고 이마를 댔다. 그렇게 세 바퀴를 돌았다.
◆붓다의 마지막 한 마디=열반당은 고즈넉했다. 2500년 전, 여긴 사라나무 숲이었다. 붓다는 여기서 유언을 남겼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그의 유언은 간결했다. 마지막 호흡의 순간, 붓다는 아무 것도 잡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우주의 이치’를 설했다. 자신의 죽음조차 그 이치 속에서 바라봤다.
열반당 구석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붓다의 간절함이 밀려왔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진다.” 그건 붓다의 육신만 가리킨 게 아니었다.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을 겨냥한 외침이었다. 그러니 목숨이 살았을 때 상(相)을 허물라는 메시지였다. 내가 있다는 생각, 나의 욕망이 있다는 생각, 그 욕망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이 상(相)이다. 그걸 허물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그 모든 상(相)이 실은 ‘없는 상(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되묻는다. “그럼 무엇이 남나?” “그럼 무엇으로 사나?” “행여 지독한 허무주의가 되는 건 아닌가?” 붓다의 대답은 달랐다. “그곳에 청정함이 있다”고 했다. 물들지 않는 삶, 충돌하지 않는 삶, 부족함이 없는 삶, 우주와 함께 흐르는 삶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숙소로 갔다. 밤이 됐다. 저녁을 먹고 열반사 근처를 다시 거닐었다. 쿠시나가르의 밤하늘에 숱한 별이 올랐다. ‘후두둑, 후두둑’ 당장 쏟아질 것만 같았다. 붓다가 열반할 때도 밤이었다. 그날(인도력으로 2월 보름)은 보름달이 떴다고 한다. 사라나무 숲, 보름달 아래서 붓다는 숨을 거두었다.
붓다가 간 곳은 어디일까.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며 그곳을 찾는다. 그러나 붓다는 지금도 말한다. “너를 허문 곳, 거기에 내가 있다.”
글·사진=백성호 기자
2009.03.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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