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가르치심을 시설할 때에 근기에 따라서 베푸셨으니 근기에 세 종류가 있어서 같지 않으므로 가르침도 세 시기를 따라 또한 다르니라. 모든 중생의 무리가 무명에 눈이 멀 어 혹(惑)과 업(業)을 지어서 일으키고 미혹하여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여 생사의 바다에 빠져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대비하신 부처님이 처음에 정각을 이루어 선인녹원(仙人鹿苑)에서 사제(四諦)의 법륜을 굴려 아급마(아함경)을 설하고 아집을 제거해서 하근기들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성인 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사제(법문)를 듣고 비록 아집의 어리석음은 끊었으나, 모든 법에 미혹하여 (법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였느니라.
부처님이 가르침을 시설할 때에,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설하셨는데 그 근기를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누고 가르침도 여기에 맞추어 세 시기로 나누어 일대시교(一代詩敎)를 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중생들은 무명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미혹한 업을 짓고, 하근기의 중생들은 나〔我〕의 실체가 있다는 아집(我執)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여 해탈의 길을 밟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 정각을 이루어 선인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려 「아함경(阿含經)」을 설해서 최하근기의 중생들로 하여금 아집을 버리고 점차적으로 성위(聖位)에 들도록 하여 마침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의 법문을 듣고 아집을 버렸지만 모든 법에 대해서는 법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법집(法執)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아공(我空)은 됐지만 법공(法空)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공법유(我空法有)로서 이들은 유견(有見)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알아둘 것은 선인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렸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위해서 설법한 것을 말하는데, 그러면 부처님은 녹원에서 사제를 설하실 때 아공만 설하고 법공은 설하시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교판입니다.
녹원에서 부처님이 사제를 설하든 팔정도(八正道)를 설하든 혹은 무엇을 설하든지 간에 그것은 분명히 중도를 근본으로 삼아 설법하셨지, 어느 것 하나 중도를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즉 중도 이것이 팔정도라고 선언해 놓고 사제법문도 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을 말할 때도 아(我)나 아소(我所)의 공인 아공(我空)만이 아니라 법공(法空)도 또한 설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부파불교(部派佛敎)이후로 소승불교라는 것이 흥기하여 아(我)가 공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법에 집착하여 유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승의 부파가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사제법문을 순전히 유견에 의지해서 해석하면서 이 견해가 널리 퍼져서 마침내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부파불교 이후 소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아집(我執)과 유견(有見)의 사제, 즉 생멸사제(生滅四諦)를 전제로 하여 주장하는 것이지 실제로 부처님이 설하신 중도정견(中道正見)에 입각하여 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즉 부처님이 녹원에서 설하신 것은 중도이지 소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생멸사제는 아닙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녹원설법을 순전히 생멸사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부처님의 녹원설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린 것은 순전히 아공법유이지 실제 중도는 아니다'라는 것은 잘못된 견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위의 견해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파불교 이후에 생겨난 소승불교의 유견(有見)을 상대로 한 말일 뿐으로 엄밀히 말하면 녹야원에서 초전법륜한 것을 대상으로 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녹야원의 초전법륜에서는 중도를 가지고 설한 것이지 아집과 유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