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불교 이야기

3-6 열반 (涅槃)(2)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6:01

3-6 열반 (涅槃)(2)

모든 강물은 바다로

그 경*(남전 상응부경전(45ㆍ102)海)<6>)은 부처님이 제자들을 위해 설법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를테면 여러 개의 큰 강이 있다고 하자. 그 강의 이름은 강가강(恒河) ㆍ야무나강(耶符那河)ㆍ아치라바티강(阿致羅符底河)ㆍ사라브강(舍牢那浮河)ㆍ마히강(摩企河) 등이다. 그것들은 모두 바라로 향하고, 바다로 기울어져 바다로 들어간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들 또한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발은 도((八支聖道)를 닦고 배우고 수행을 거듭한다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어져, 마침내 열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비유로 든 다섯 개의 큰 강은 모두 중인도로 흘러 내려와 강가에 합치게 되고 마침내 벵갈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부처님은 가끔 이 여러 개의 큰 강을 비유해 설법하곤 했다. 여기에서도 부처님은 출가수행자들이 팔정도를 열심히 닦으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조금도 신비하거나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예로 든 경에서도 말했듯이 수행자들이 청정행을 닦는 까닭은 모두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열반이야말로 그 목표이고 종극이다. 그리고 그 목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말한 여러 가지 실천항목 중에서도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八支聖道)이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다시 그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것들은 원리*(遠離:detachment, viveka. 멀어지는 것. 厭離와 같은 말)와 이탐과 멸진*(滅盡:destruction, nirodha. 해탈과 같은 말)을 수습하게 하고 이윽고 그것이 평안한 심경*(平安한 心境:maturity of surrender which is the zero point between joy and sorrow, vossaggapariṇāmi. 해탈의 심경. 기쁨과 슬픔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닌 마음의 평안한 상태)으로 바뀌어 갈 때 성취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용어는 다르지만 앞에서 라다를 위해 말했던 염리ㆍ이탐ㆍ해탈ㆍ열반의 길과 다르지 않다. 어쨌든 부처님이 제시한 방법(道)에 따라 수행하는 청정한 행은 모두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면 부처님은 그런 열반의 경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욕망을 자유자재로

먼저 한 경*(남전 中部經典 72婆蹉衢多喩經. 한역 잡아함경(34ㆍ24)見)을 읽어보자. 부처님이 사밧티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그곳에 어느 날 밧차구타(婆蹉衢多)라는 외도수행자가 찾아와 부처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이 경은 약간 장문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 토론을 하다가 이야기는 해탈이란 어떤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이 대목의 질문과 답변은 이렇다.

“고타마여, 그와 같이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니는 도대체 어디를 향해서 태어나는 것입니까.”

“밧타여, 어디를 향해서 태어난다는 것은 부적당한 표현이다.”

“그러면 어디를 향해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지요.”

“밧차여, 그것도 부적당하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란 말씀이신지요.”

“밧차여, 그것도 부적당한 표현이다.”

그러자 그 외도수행자는 구만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머리가 이상해졌다.’며 실망을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에게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밧차여, 그럼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네가 생각한 대로 대답해 보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네 앞에 불이 타고 있을 때 너는 그것을 ‘내 앞에 불이 타고 있다’고 알겠는가.”

“그렇지요. 나는 ‘내 팡에 불이 타고 있음’을 알겠지요.”

“그때 만약 너에게 이 불은 무엇에 의해 타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 불은 풀과 장작이 있으니까 타고 있다,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그럼 네 앞에 불이 꺼졌다면 그것을 보고 불이 꺼진 줄 알겠는가.”

“그렇지요. 불이 꺼진 줄 알겠지요.”

“그럼 그때 만약 너에게 네 앞의 불은 꺼졌지만 그 불은 여기에서 어느 쪽으로 사라진 것인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아니면 남쪽인가 북쪽인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어찌 대답할 것인가.”

“고타마여, 그 질문은 부적당합니다. 글 불은 풀과 장작이 있었으니까 탔던 것이고 그런 것들이 없어지면 다시 장작을 넣지 않으면 불탈재료가 없으니까 꺼지는 것입니다.”

밧차가 이렇게 대답하자 부처님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했다.

“밧차여, 정녕 그와 같은 것이다. 그처엄 저 색(육색)으로 인간을 나타내는 자에게는 그 색이 사라지고 그 뿌리가 끊길 때, 그 사람은 이미 없고 또 생길 수 없게 될 것이다.

밧차여, 그때 그 사람은 색에서 해탈한 것이다. 그것은 심심무량(甚深無量)해서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아서 어디를 향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밧차여, 그것은 저 수(감각)ㆍ상(표상)ㆍ행(의지)ㆍ식(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니라.“

여기에서 부처님이 밧차에게 설명했던 내용은 이렇다. 즉 사람들에게 괴롭고 불안한 생활이 있는 것은 반드시 갈애 즉 지나친 욕망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지나친 욕망이 없을 때 사람들의 불안하고 괴로운 생활은 없어진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어디로 향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변화가 없덨던 것도 아니다. 즉 열반과 해탈은 어디 다른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거나 그곳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리라는 것이다.

밧차가 부처님에 의해 깨닫게 된 인간의 이상적 상태 즉 열반의 경지는 지극히 구상적(具象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이 밧차를 위해 비유적 표현으로 그려낸 인간의 이상적 상태 즉 열반은 아직까지 이른바 ‘회신멸지(灰身滅智)’의 경지를 지칭한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여기서 ‘불이 꺼지듯’ 멸했다는 그것은 갈애이고 탐욕이고 번뇌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 그 자체는 여기로부터 멸해버려 어디로 ‘향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직 이 지상에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결코 본래 그대로의 그가 아니다. 일찍이 불안하고 괴로웠던 인생을 살았던 그는 이제 갈애와 번뇌를 멸함으로써 완전히 평안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게송*(남전 상응부경전(1ㆍ18) 無諍)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문은 이 세상의 욕망을 다 알고 나서

항상 자유의 인간으로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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