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무아(無我)(2)
꽃과 향기의 비유
여기서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89)差摩. 한역 잡아함경(5ㆍ1)差摩)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무아라는 말이 갖는 미묘한 의미를 잘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언젠가 수많은 장로 비구들이 코삼비의 고시타(瞿師羅) 동산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장로 케마(差摩)는 바다리카(跋陀梨) 동산에서 병이 들어 중태였다.
코삼바라는 곳은 바라나시에서 멀리 서쪽에 위치한 발사(跋사)라는 나라의 수도였다. 거기에는 불교의 비구들을 위해 세워진 3개의 정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하나인 바다리카 동산의 정사에 있던 장로 케마라는 비구가 병을 얻어 매우 위중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그러자 다른 한 곳인 고시타 동산의 정사에 있던 장오 다사카(陀娑)가 문병을 가게 되었다. 바다리카 동산으로 문병을 간 다사카는 병든 비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가, 견딜 수 있는가 좀 괜찮은가.”
그러나 케마의 병세는 절망적이었다.
“아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점점 나빠질 뿐이야.”
문병을 갔던 비구니는 그 상황을 고시타 동산의 장로들에게 알렸다. 그들은 장로 케마를 위로할 생각으로 문병갔던 비구로 하여금 그를 찾아 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위로했다.
“벗이여, 부처님이 오온에 대해 설법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오온은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장로 케마는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오온을 설법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 오온에서 조금은 나를 보고 나의 것을 보고 있다.”
즉 케마는 아직 내(我)가 있고 나의 것(我所)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런 답변을 들은 장로들은 웅성거리며 소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마자 마침내는 장로 케마가 지팡이에 의지해 고시타 동산을 찾아가서 그곳 비구들과 한바탕 토론을 주고 받게 되었다. 여기서 케마의 논지를 소개하면 대충 이렇다.
“벗들이여, 내가 ‘아가 있다’고 한 것은 색(육체)이 나라는 것은 아니다. 색을 떠나 내가 있다는 것도 아니다. 수(감각)ㆍ상(표상)ㆍ행(의지)ㆍ식(의식)이 나라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을 따라서 내가 있다는 것도 아니다. 벗들이여, 나는 오온에서 ‘아가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나(我)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벗들이여, 그것은 즉 청련(靑漣)ㆍ홍련(紅蓮)ㆍ백련(白蓮)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끛잎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또는 줄기나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옳겠는가.”
“벗이여 그 말은 옳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다만 꽃에 향기가 있다고 해야 한다.”
“벗들이여, 그와 같다. 나는 색이 나라거나 색을 떠나서 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이 나라거나 그것을 떠나 내가 있다는 것도 아니다. 벗들이여, 오온에서 ‘내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나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로 케마가 말하는 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 해야할까. 그것은 대단히 미묘한 것이지만 지금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그는 오온이 나라고 하는 그런 고정적 사고방식은 물론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떠나 그런 것의 유동하는 통일체에서 ‘내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나(我)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로 케마는 다시 이런 설명을 계속했다.
벗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미 사람을 세속적 삶에 결박시키는 다섯 가지 번뇌를 끊어도 아직 그들 가운데는 이 삶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를 따르는 미묘한 잔재로서의 자마과 아욕(我欲)이 아직 단절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뒤에도 다직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해서 그 생명을 계속 관찰해 나간다. 그리고는 ‘이것이 색이다. 이것이 색의 생기(生起)다. 이것이 색의 멸진(滅盡)이다. 이것이 수ㆍ상ㆍ행ㆍ식이다. 이것이 식의 생기다. 이것이 식의 멸진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해서 그 생멸을 관찰해 가고 있노라면 이 다섯 가지 요소에 따르는 미묘한 잔재로서 아직 남아있던 자만이 야욕이 마침내는 영원히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케마의 비유적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벗들이여, 그것은 즉 더럽고 때묻은 옷과 같은 것이다. 그 주인은 그것을 세탁소에 맡길 것이다. 세탁소는 그것을 소금ㆍ잿물에 넣어 골고루 비벼서 맑은 물에 헹굴 것이다. 그래서 그 옷은 깨끗하게 되지만 아직 거기에는 소금냄새와 잿물냄새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탁소는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준다. 그러면 주인은 이것을 향기좋은 장롱 속에 넣는다. 그리하여 거기에 묻었던 냄새들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장로비구들은 그가 말하는 뜻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장로 케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설명하고 가르치고 명석하게 분석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실천으로의 연결
그러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무상→고→무아의 체계로 설법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제자들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이런 설법을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체계를 설명한 경전들의 결론부분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부처님은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59) 五比丘. 한역 잡아함경(2ㆍ2) 五比丘)에서 5명의 비구들을 위해 무상→고→무아의 체계에 관해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와 같이 관찰하고 색을 염리하고 수를 염리하고 식을 염리한다. 이렇게 염리하게 되면 탐욕을 염리하게 되고, 탐욕을 염리하면 해탈을 하게 된다. 해탈을 하게 되면 해탈했다는 자각이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의 행은 이미 이룩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미 다했다. 이제 더 이상 미혹의 삶을 되풀이하는 일은 없다’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여기서 존재(五蘊)의 무상→고→무아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염리(厭離)→이탐(離貪)→해탈(解脫)하게 되는 체계를 나란히 제시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무상→고→무아는 이론적 사상체계이고 염리→이탐→해탈은 행위적 실천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상체계는 실천체계로 연결되고 있으며, 이 가르침대로 관찰하고 깨닫게 되면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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