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불교 이야기

3-4 고(苦)(1)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5:56

3-4 고(苦)(1)


고란 무엇인가

부처님이 그 제자들인 비구들에게 했던 설법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세 가지였다. 그것은 이미 여러번 언급했듯이 ‘무상인 것은 고다. 고인 것은 무아이다’라는 설법의 내용에서도 간파된다. 이제부터는 그 가운데 ‘고’라는 문제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갖기로 한다. 고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먼저 생각나는 경전*(남전 상응부경전(38ㆍ4). 한역 잡아함경(18ㆍ1) 難等) 이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장로 사리풋타(舍利弗)가 마가다국의 나라카(那羅迦)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잠부카다카(閻浮車)라는 한 유행자가 장로 사리풋타를 찾아와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친근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잠부카다카는 장로 사리풋타 옆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친애하는 벗이여, 당신은 무슨 이익을 얻고자 부처님을 따라 수행하는 것인가요?”

“친구여, 나는 고다 다 알고자 부처님을 다라 수행하고 있지요.”

“그러면 벗이여, 그 고를 다 알기 위한 길이 있는 것일까요?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요?”

“친구여, 그 고를 다 아는 길이 있고말고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지요.”

“그러면 친구여, 그 길은 무엇인가요? 그 방법은 무엇인가요?”

“친구여, 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八正道) 이야말로 고를 다 알 수 있는 길이지요. 그것은 바로 정견ㆍ정사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이지요. 친구여, 이것이 그 고를 다 알게 하는 길이고 그곳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지요.”

“친구여, 당신이 말한 고를 다 아는 길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거리데 이르는 방법도 참으로 훌륭합니다. 친애하는 벗 사리풋타여, 그것을 닦고 닦는 데 힘써야겠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나라카라는 마을은 라자가하의 동쪽으로 하루쯤 걸리는 거리에 있는 마을로 그곳은 사리풋타의 출생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잠푸카다카라는 외도의 유행자는 사리풋타의 가까운 친구였던 듯하다. 그는 가끔 나라카 마을로 사리풋타를 찾아가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대해 묻곤 했다. 이런 사실은 다른 여러 경전의 기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이 경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그는 이 경에서 사리풋타에게 ‘당신은 무슨 이익을 얻고자 부처님 밑에서 수행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사리풋타는 ‘친구여, 나는 고를 다 알기 위해서 부처님을 따라 수행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 사리풋타가 ‘고를 다 알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고의 진상을 통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목적이라는 것을 불교도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늘상 ‘고’라는 말은 입에 담는다. 그러나 문득 멈춰서서 ‘그러면 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그것을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알지 못한다’하고 말했지만 이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아함부의 여러 경전을 펼쳐보면 가끔 새삼스럽게 ‘고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예를 먼저 두 세 가지의 경전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오온은 고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 (23ㆍ15) 苦. 한역은 없음)은 라다(羅陀)라는 제자의 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라는 형식으로 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사밧티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계셨다. 그때 장로 라다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와서 예배를 한 뒤 이렇게 여쭈었다.

“스승이시여, 고 소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고라고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색은 고다. 수는 고다. 상은 고다. 행은 고다. 식은 고다. 라다여, 이렇게 보고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색을 열미하고 수ㆍ상ㆍ행ㆍ식을 염리한다. 그리하여 탐욕을 떠난다. 탐욕을 떠나면 해탈하게 된다. 그리고 해탈을 얻게 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그리하여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행은 이미 성취했다. 더 이상 이같은 미혹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라다라는 인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사리풋타나 목갈라나 또는 마하카사파와 같은 제자들처럼 걸출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른바 10대 제자들 속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아함부의 여러 경전을 읽다보면 그 가운데는 ‘라다상응(羅陀相應)’이라는 것이 있다. 부처님이 대고중 즉 설법의 상대로 라다를 삼은 것이 무려 46가지 경전에 집록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로라든가 무아라든가 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술어가 그에 의해 노골적으로 질문되고 있다. 이런 뜻에서 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라다상응’에서 라다라는 비구는 이런 질문을 서슴없이 던진다.

“대덕이시여, 무상, 무상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떤 것을 무상이로고 합니까.”

“라다여, 색은 무상이다. 수는 무상이다. 상은 무상이다. 행은 무상이다. 식은 무상이다.”


이런 식이다. 이것은 매우 간단명료하고 솔직한 답변이다. 잘 알다시피 불교에는 어려운 술어가 많다. 그것을 모조리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후대의 주석을 갖다 놓고 보아도 오히려 이해가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우리는 언제나 부처님 그분에게 묻고 싶어진다.

철학자 니체는 무엇인가 철학적인 문제로 벽에 부딪힐 때마다 언제나 소크라테스에게로 간다고 말한 것이 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니체가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해답을 거기서 구한다는 것은 그이 철학하는 태도에 어떤 시사를 던져준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부처님 그분에게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 ‘라다상응’을 펼쳐보면 언제나 눈 앞이 밝아진다. 거기에는 불교의 기본적인 술어에 대해 라다의 단도직입적이면서 노골적인 질문이 던져지고 부처님이 간단명료하고 솔직한 대답이 나온다. 이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라다상응’을 읽다보면 이 라다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매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인물은 필시 청순한 마음을 가진, 솔직한 성격의 청년 수행자가 아닐까 하는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 보면 그는 젊은이가 아니다. 사밧티 출신의 바라문으로 늙은 나이에 늦게 출가해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청년과 같은 청순함과 솔직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체면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로 물어보지 못하는 문제, 즉 불교의 기본적인 술어에 대해 솔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앞에서 부처님에게 질문을 했던 것도 그런 내용의 일부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명쾌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주석을 단다는 것이 오히려 사족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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