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무아(無我)(1)
무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부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체계에서 세 번째 항목은 무아이다. 이 무아란 말은 불교의 기본적 술어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나오는 것 가운데 하나로서 보다 정확한 이해가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무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것을 ‘무아의 황홀한 경지’로 이해하는 사람도 없지 않은데 그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또 자신을 억제하고 자아(自意識)를 없앤 상태를 무아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만약 이렇게 무아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담마파다(法句經)》의 ‘자기품(自己品)’에 나오는 게송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근본(지주)은 자기뿐이다.
자기 외에 어떤 근본이 있겠는가.
자기가 잘 조어될 때,
사람은 얻기 어려운 근본을 얻게 된다.
이 게송에서는 결코 자기를 망각하라거나 자기를 없애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인간형성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인간형성의 완성이 되었을 때 인간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근본을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본래 하나의 인간형성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범부인 인간이 자기의 인간을 잘 조어하고 형성해서 끝내 부처님이 가르친 이상적 인간성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것이 불교의 전도정(全道程)인 것이다. 이 길은 요즘말로 표현한다면 자기확립의 길이다. 결코 자기망각의 길도 아니고 자기압살의 길도 아니다. 그런 것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아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그것을 이해해야 바른 이해일 수 있을 것인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에 대해 부처님의 설법을 곰곰이 되씹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소(我所)ㆍ아(我)ㆍ아체(我體)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15) 無常<1>. 한역 잡아함경(1ㆍ9) 厭離)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색(육체)은 무상이다. 무상한 것은 고다. 고라는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나의 것(我有)이 아니다. 나의 나가 아니다. 도 나의 본체도 아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올바른 지혜로 보도록 하여라.
또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49) 한역 잡아함경(1ㆍ31) 輸屢那)에서는 소나(輸屢那)라는 제자와 함께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소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은 상인가 무상인가.”
“스승이시여, 무상이옵니다.”
“무상이라면 고인가 낙(樂)인가.”
“스승이시여, 고입니다.”
“그러면 무상이고 고이고 변화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보고 이것은 나의 소유이다. 이것은 나(我)다. 이것은 나의 본체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스승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설법이나 문답 속에는 부처님이 어떤 의미에서 무아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하는 하나의 정형적인 표현이 잘 나타나고 있다.
“무아라는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고 나의 내가 아니고 또 나의 본체도 아니다.”
“무상이고 고이고 변화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보고 이것은 나의 소유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본체다 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 두 개의 인용문은 부처님이 ‘무아(無我)’라는 말로써 부정하는 것이 세 가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1)아소(我所)의 부정
2)아(我)의 부정
3)아체(我體)의 부정
이러한 용어는 한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어서 이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아소의 부정이다. 여기서 아소란 본래 'mama'를 번역한 ‘아소유(我所有)’란 말인데 그것을 생략해서 ‘아소’라고 한 것이다. 이 용어를 현대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나의 소유’라는 정도의 말이다. 즉 나에게 소유되고 나의 집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 ‘이는 아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그러한 소유의 항구적 고정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불교는 연기의 존재론에 의해 성립되고 무상의 존재론에 의해 성립된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한 그 같은 ‘나의 소유’란 있을 수 없다. 즉 ‘이는 아소가 아니다’라는, 우리들의 상식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자기의 소유에 관한 고정적인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소유에 관한 고정적인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소유에 관한 집착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아의 부정이다. 여기에서 ‘아’란 본래 ‘asmi'또는 ’attan'을 번역한 말로 현대어로 바꾼다면 ‘자아(自我)’ 또는 ‘자기(自己)’란 말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것을 지칭해 ‘이는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 문제는 대단히 미묘한 것이지만 여기서도 부처님은 사람들의 상식적 세계에서 지배적인 자아에 관한 고정적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자기 육체와 정신의 영위를 주체적으로 통일하는 무엇인가 항상하고 변하지 않는 객체적인 자기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연기의 이법 아래 놓여 있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나’ 또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은 이 아(我)의 부정은 과거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믿어져 온 자아에 대한 사고방식까지를 부정하는 것이란 점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부처님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개야(個我)를 뜻하는 아트만(ātman)에 보편적 실재자의 지위를 부여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바라문적 자아관도 역시 연기의 존재론 입장에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설명으로 가르침을 폈다.
셋째, 아체(我體)의 부정이다. 여기서 아체란 본래 ‘me attā'를 번역한 말로 현대어로 바꾼다면 ’나의 본질‘ 또는 ’나의 본체‘라는 정도의 의미다. ’me attā'라는 말을 직역하면 ‘나의 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중국의 역경가들이 ‘아체’라고 번역한 것은 그 속에 자아의 항구불변 하는 본체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불변하는 본체ㆍ본성 또는 본질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아의 본질 또는 본체를 고정하는 일은 부처님이 말하는 무상의 존재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영혼이라는 사고방식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다. 그것은 육체가 소멸해도 다시 영속되는 나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무상의 존재론은 그러한 사고방식까지도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아체가 아니다’라는 말은 곧 항구적인 본질 또는 본체를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부정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애당초 무아(anattā)란 아(attan)의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 ‘a'를 붙여 만들어진 말이다. 이것에 의해 부정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사유와 행동의 주체인 자기 그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무아란 그 시대의 상식과 사상세계에서 지배적이었던 자아에 관한 고정적 사고방식을 부정하는 의미다.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게 된 연기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확인된 인간존재의 참모습이기도하다. 말하자면 무아란 인간을 대상으로 한 부처님의 사상적 입장의 표백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부처님이 말하는 자기확립의 길은 당당하게 그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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