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불교 이야기

3-6 열반 (涅槃)(1)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6:00

3-6 열반 (涅槃)(1)


구극의 목표는 열반

그러면 그 열반이란 어떠한 경지인가. 여러 가지 해석보다 먼저 부처님의 설명을 기록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3ㆍ1)魔. 한역 잡아함경(6ㆍ10)魔)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언젠가 부처님은 사밧티의 제타 숨인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계셨다. 그때 장로 라다(羅陀)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와 부처님을 찾아 뵙고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마라(摩羅) 말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마라라고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색이 있으면 거기에는 마라가 있다. 죽이는 자*(죽이는자(殺者):killer. mēretā, māra와 뜻이 비슷한 말)가 있고 또 죽는자*(죽는 자(死者):to die. mīyati, māra와 뜻이 비슷한 말)가 있다. 라다여, 그러므로 색을 마라라고 보아야 한다. 색을 죽이는 자로 보고 또 죽은 자로 보며 또한 병이고 종기이며 가시이고 아픔이고, 아픔의 근본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아야 그것이 올바른 관찰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시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 똑같이 관찰할 것을 가르쳤다. 글자 라다가 가시 물었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바르게 관찰해야 합니까?”

“라다여, 염리하기 위해서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무엇 때문에 염리*(厭離:weariness, nibbidā. 싫어함)해야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해탈하기 위해서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열반해야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그것은 훌륭한 질문이 아니구나. 너는 질문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라다여, 출가수행자가 청정의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오직 열반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열반이야말로 구극적인 것이며 수행의 마지막 목표이니라.”


이 내용은 남전의 ‘라다상응’이라는 경전군의 앞머리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 질문에 나선 라다 비구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여기서 질문에 나선 라다 비구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에서는 라다가 악마(摩羅)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오온, 즉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을 들고 그런 것을 악마로 보는 것이 바른 관찰이라고 가르친다. 후반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바른 관찰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그것은 ‘염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탐하기 위해서’ 그리고 ‘해탈하기 위해서’라고 답변하고 마지막으로 왜 해탈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열반하기 위해서’라고 답변한다.

그러면 라다는 다시 ‘그러면 왜 열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라다의 질문을 가로막고 말한다. 이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다여, 그것은 훌륭한 질문이 아니구나. 너는 질문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라다여, 출가수행자가 청정의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오직 열반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열반이야말로 구극적인 것이며 수행의 마지막 목표이니라.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말할 것도 없이 열반이야말로 구극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곳에 도달되었을 때 청정의 삶 즉 불도(佛道)의 수행은 성취되는 것이다.


무엇이 열반인가

열반이란 말은 그 원어를 살펴보면 팔리어로는 ‘닙바나(nibbāna)' 범어로는 ’니르바나(nirvāṇa)'다. 중국의 역경가들은 이것을 의역해서 ‘멸도(滅度)’라든가 ‘적멸(寂滅)’ ‘원적(圓寂), 또는 단순히 ’멸(滅)‘이 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그 본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음사한 ’열반‘이란 말을 썼다. 이것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이다. 열반이란 말의 원뜻을 굳이 풀어보면 ’불이 꺼진 상태‘ 즉 ’연소의 괴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으로 원뜻이 충분히 이해 되지 않으므로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38ㆍ1)涅槃. 한역 잡아함경(18ㆍ1) 難等)을 읽었으면 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언젠가 장로 사리풋타(舍利佛)가 마가다(摩揭陀)의 나라카( 那羅迦) 마을에 있었다. 그때 잠부카다카(閻浮車)라는 유행자가 장로 사리풋타를 찾아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정중하게 질문을 했다.

“사리풋타여, 열반, 열반 하는데 도대체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벗이여, 탐욕의 소멸, 진에의 소멸, 우치의 소멸, 이것을 가리켜 열반이라 한다.”


잠부카다카는 외도수행자였다. 그의 질문은 열반이란 개념이 그 당시로서는 아직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던 듯한 인상을 준다. 아마 부처님에 의해 새롭게 주창된 개념이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쨌거나 이 질문에 대한 사리풋타의 답변은 매우 명쾌한 것이었다. 잠부카다카도 사리풋타의 대답으로 일단 열반이란 말의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그런데 사리풋타여, 그 열반을 실현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벗이여, 열반을 실현하는 데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正道)이다.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란 정견ㆍ정사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이다. 벗이여, 이것이야말로 열반을 실현하는 바른 길이여,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다.”

“사리풋타여, 당신이 일러준 열반을 실현하는 길은 참으로 좋고 훌륭한 방법이다. 그것은 역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카마을은 라자가하에서 동쪽으로 하루쯤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사리풋타는 종종 이 곳에 머물렀던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잠부카다카라는 외도수행자도 종종 그 마을로 사리풋타를 찾아가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었다. 이런 사정은 상응부경전 38 ‘염부차상응(閻浮車相應)'이라는 경전에 집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16경이 집록되어 있는데 앞에서 인용한 것은 그 첫 번째 경이다.

이 경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예로 든 부처님이 라다의 질문에 대답한 경전*(남전 상응부경전(23ㆍ1)魔. 한역 잡아함경(6ㆍ10)魔)과 비교하면 거기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이 경에서는 사리풋타가 잠부카다카를 위해 열반을 실현하는 길, 열반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팔정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라다를 위해 제시했던 길은 염리→이탐→해탈→열반의 체계였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 또한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다시 한 경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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