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 진리(法)의 성품은 원만히 융통되어 두 모습이 없으니
2. 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 ) 모든 법(法)은 흔들림이 없어(不動) 본래 고요하여라
3.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네 모두가 끊어졌구나
4.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그것은 깨달아 안 것이지 다른 경계가 아닐세
5. 眞性甚案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참 성품은 깊고 깊어 더 없이 미묘하구나
6.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개체의 실존적 성질(自性)을 지키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이루어 지는 것이지
7.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하나에 모든 것이 담겨있고, 또 여러 것 가운데 하나가 있고
8.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는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은 곧 하나이다.
9.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한 티끌에 우주가 들어있고
10.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그 모든 티끌들이 다 그러하여라
11.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헤아릴 수 없는 긴긴 세월(劫)이 곧 한 생각이요,
12.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한 생각이 곧 무량한 겁이어라
13.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십세호상즉) 시간의 세계(九世)는 곧 영원의 세계(十世)요,
영원의 세계는 곧 시간의 세계이니
14.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란격별성) 그래서(오히려) 뒤죽박죽 혼란 되지 않고
홀로 서게 되네
15.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처음 (입문의) 마음을 낸 때가 그대로 바른 깨달음이며
16.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열반상공화) 나고 죽는 상태(윤회)와 거기에서 해방된 열반은
늘 함께 화하도다
17. 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보편적 이상(理)과 개별적 현실(현상)(事)이 아득히
깊이 연관되어 분별이 없으니
18. 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큰 사람의 경지일세
19. 能人海印三昧中 (능인해인삼매중) 능력 있는 사람(부처님)이 바다와 같이 두루 펼친 삼매에서
20. 繁出如意不思議 (번출여의부사의) 때마다 뜻하는 데로 이루어지게 하나니 불가사의 하도다
21. 雨寶益生滿虛空 (우보익생만허공) 보배의 비가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 허공에 충만하나니
22.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중생은 자기 그릇 따라 이익을 얻노라.
23. 是故行者還本際 (시고행자환본제)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가 근본 자리로 돌아감에
24. 파息妄想必不得 (파식망상필부득) 망상을 그치지 않고서는 필연코 얻지 못하리라
25.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착여의)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교묘하게 잘 인도되어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나니
26. 歸家隨分得資量 (귀가수분득자량) 집으로 돌아감에 분수 따라 재산과 양식을 얻노라
27. 以陀羅尼無盡寶 (이다라니무진보) 다라니로 고갈되지 않는 보배 삼아
28. 莊嚴法界實寶殿 (장엄법계실보전) 진리의 세계의 참다운 보배 전당을 장엄하나니
29. 窮坐實際中道床 (궁좌실제중도상) 마침내 참된 세계, 치우침이 없는 가운데 길 자리에
평안히 앉아
30.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명위불) 예로부터 흔들림(동요함)이 없으니 그 이름 부처로세
제 목 : [화엄일승법계도 해제 1 ] 최치원, 부석존자전에서
최치원(崔致遠)의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에서
**부석존자전은 현존하지 않고 균여(均如)가 [一乘法界圖圓通記]에 인용함.
의상이 스승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華嚴)을 수학할 때다. 꿈 속에 서 형상이 매우 기이한
神人이 나타나 의상에게 '네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베풀어 줌이 마땅하다'고
했다. 또 꿈에
선재(善財)가 총명약 십여제(十餘劑)를 주었다. 그리고 또 꿈에 청의 동자가 세 번째로 비결을 주었다. 스승 지엄이 이것을 듣고, "신인이 신령스러운 것을 줌이 나에게는 한 번이었는데 너에게는 세 번이구나. 널리 수행하여 그 깨우친 것을 곧 표현하도록 하라"고 했다.
명에 따라 그 터득한 바 오묘한 경지를 순서에 따라 부지런히 써서 [大乘章] 10권을 엮고, 스승에세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청했다. 지엄은 "뜻은 아름다우나 문사(文詞)가 오히려 옹색하다"고 했다.
이에 물러나 번거롭지 않게 하고 어디에나 걸립이 없도록 하였다.
바꾸어 뜻을 바로 세우고 그윽함을 숭상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 대게스승이 지은 [搜玄分齊之義]를 존숭한 것이다.
지엄과 의상이 더불어 불전(佛前)에 나아가 그것을 사르면서 "부처님의 뜻에 계합함이 있다면 원컨데 타지 말기를 바랍니다"고 서원했다. 그래서 타고 남은 나머지 210字를 얻었다. 의상으로 하여금 그것을 줍게해서 다시 간절한 서원을 발하면서 맹렬한 불길 속으로 던졌다. 마침내 그것은 타지 않았다. 지엄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여 칭찬하였다. (의상이) 연결하여 게(偈)가 되게 하려고 며칠 동안을 문을 걸고 지냈다. (마침내) 삼십구를 이루니 三觀의 오묘한 뜻을 포괄하고 十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원문은 [一乘法界圖圓通記] 卷上 (韓國佛敎全書 4, p.1))에 있음.
제 목 : [화엄일승법계도 해제 2 ] 그림에 대한 설명
그림과 글에 대한 (義相스님 자신의)* 설명
* 의상스님은 그림으로 된 게송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저술하였으나 일부러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음. 이에대해,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다는 연기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때문"이라고 스스로 해명함. ([大正藏] 45권, p.716 a.)
시를 읽는 방법은 응당 가운데 法자로부터 시작하여 구불구불한 굴곡을 따라서 佛자에 이르러 끝난다.
印*의 길을 따라서 읽는다. 54개의 각이 있으며, 210자로 되어있다.
┃ 讀詩之法 宜從中法爲始 繁廻屈曲 乃至佛爲終 隨印道讀
┃ --五十四角二百十字
* 印: 표상, 상징 등등의 의미임.
문: 무슨 까닭으로 印에 의하였는가? [印이란 형식을 취하였는가?]
답: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은 세 종류의 세간[세계]을 포섭하여 해인삼매를 좆아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이른바 세 종류의 세간이란
1. 물질의 세계, 2.중생의 세계, 3.참된 깨달음(智正覺)의 세계이다.
智正覺이란 것은 부처,보살이다. 세 종류의 세계는 법칙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논하지 않는다.
┃ 問何以故依印 答欲表釋迦如來敎網所攝三種世間 從海印三昧槃出現故
┃ 所謂三種世間 一器世間 二衆生世間 三智正覺世間 智正覺者佛菩薩也
┃ 三種世間攝盡法故 不論餘者
1문: 어찌하여 印의 글이 오로지 한 길로만 되어 있는가?
답: 여래의 한 목소리(一音)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하나의 선교방편* 이다.
구불구불한 굴곡이 많이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중생의 근기(根機)[자질]와 바라는 것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즉, 이는 삼승**의 교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 一問 何故印文唯有一道 答表如來一音故 所謂一善巧方便
┃ 何故多有繁廻屈曲 以隨衆生機欲不同故 卽是當三乘敎
* 善巧方便: 중생을 잘 인도하는 교묘한 방편
** 三乘: 聲聞(Sravaka)·緣覺(Pratyekabudda)·菩薩(Boddhisatva)
-- 소질과 바라는 바에 따른 수행,실천의 차이임. 후술함.
이 한 길에 시작과 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잘 인도함(善巧)이 나타나는 데는 (정해진) 방향이 없으니, 응당 진리의 세계(法界)라
칭하여, 영원성(十世)이 원융하고 만족됨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즉, 그 뜻이 둥근 가르침(圓敎:화엄일승의 가르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네 면*과 네 모가 있는가?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何故一道無有始終 顯示善巧無方 應稱法界 十世相應圓融滿足故
┃ 卽是義當圓敎
┃ 何故有四面四角 彰四攝四無量故
* 四面:
┌─┬─┐
│②│③│
├─┼─┤
│①│④│
└─┴─┘
** 四攝: 네 가지 교화의 방법
布施:물질적,정신적으로 베푸는 것,
愛語:다정한 말,
利行:이롭게 해 줌,
同事:고락을 같이 하는 것.
*** 四無量(4 Brahma-vihara):
慈(metta):모든 중생에 대한 보편적 사랑.
悲(karuna):남의 고통에 대해 마음을 함께 함.
喜(mudita):남의 기쁨,성공에 대해 함께 기뻐함.
捨(upekkha):삶의 부침에 대하여 흔들림없이 평온하게 대함.
불상이나 탱화에는 아미타불 왼쪽(左補處)에 慈悲의 상징으로 관세음보살을,
오른쪽(右補處)에는 喜捨의 상징으로 대세지(大勢至)보살을 안치하여
사무량심을 나타냄.
이와같이 삼승에 의해서 일승을 드러내는 뜻으로 印의 모습이 그와 같은 것이다.
┃ 此義依三乘 顯一乘 印相如是
[법계도]의 이해를 위해서 "삼승"에 대해서 좀 덧붙이자면,이 세 가지 행태는
사실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공부하는 사람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성문승(聲聞乘)은 원래는 석가여래로 부터 직접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우리 주위에 보면 다른 사람의 말을 잘도 줏어 듣는 재주가 있고
창의력은 없어서 그대로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문에 속합니다
연각승(緣覺乘)은 정등각자(正等覺者) 즉 부처가 세상에 없을 때 스스로 이치를
헤아려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연각은 창의력은 있지만 독각(獨覺),벽지불(벽支
佛)이라고도 하듯 고독하게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실천의지가 빈약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살승(菩薩乘)은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경지에 있지만 중생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열반을 보류하고, 중생들을 위하여 윤회하면서 중생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간 사람들의 행태를 말합니다.
결국 의상스님은 세 가지 지성(三乘)이 편벽됨이 없도록 하나(ㅡ乘)가 되어야
하고, 또 원래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力說)하고 있는 것입니다.
2문: 어찌하여 글자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답: 수행*의 방편에 따른다면 원인과 결과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글자 중에 굴곡이 많은가?
삼승의 근기와 바라는 것에 차별이 있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어찌하여 첫 글자와 끝 글자를 가운데에 두었는가?
원인과 결과가 둘 다 법성의 집 안에** 있어서 진실한 덕으로 작용하며 그 성품이 중도***에 있기 때문이다. 글자의 모습은 이와 같은 것이다.
┃ 二問 何故字中有始終耶 答約脩行方便 顯因果不同故
┃ 何故字中多屈曲 顯三乘根欲差別不同故
┃ 何故始終兩字 安置當中 表因果兩位法性家內眞實德用 性在中道故
┃ 字相如是
* 脩行 = 修行
** 法性家內: 모든 진리와 법칙(萬法)의 본래 성품을 한 집안으로 표현한 것.
*** 中道(Madhyamika): 치우침이 없는 가운데 길.
---이상 [韓國佛敎全書[ 2권 p.1에서 뽑음.
제 목 : [화엄일승법계도]를 찬술한 동기
대저, 큰 성인(부처)의 좋은 가르침은 (정해진) 방법이 없으니 기틀에 응하여, 병에 따라서 가르치고 획일적으로 하지 않는다.
미혹한 자는 자취만을 키우고, 알지 못하며 알맹이를 잃어버렸다. 부지런히 힘쓰면 마침내는 근본에 돌아가게 될터이니, 이치에 의하고 가르침에 근거하여 간략히 반시*를 지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로 하여금 이름붙일 수 없는 진정한 근본**에 돌아가게 하기를 바라노라.
夫大聖善敎無方 應機隨病非一 迷者字迹 不知失體
懃而歸宗末日故 依理據敎 略制槃詩 冀以執名之徒 還歸無名眞源
제 목 : [의상, 화엄일승법계도] 게송의 해석
(1∼18) 자신을 위한 실천 (自利行)
1~4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가름 [現示證分]
1. 法性圓融無二相 진리(法)*의 성품은 원만히 융통되어 두 모습이 없으니
2.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法)은 흔들림이 없어(不動)** 본래 고요하여라
3. 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네 모두가 끊어졌구나
4. 證智所知非餘境 그것은 깨달아 안 것이지 다른 경계가 아닐세
* 法: dharma. 여기서는 "진리"라고 옮겼으나, 가르침, 교리, 올바름, 도덕, 자연법칙 등등,
불교용어 중에 가장 넓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임.
** 不動: "움직이지 않음" 또는 고정불변이란 의미가 아니라, "동요되지 않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이란 의미임.
'흔들림이 없음'은 앞의 '성품'을 가리킨다.
'성품'이란 머무름이 없는 법의 성품이다.
────────────
不動者, 指前性也. 性者無住法性也.
[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 [大正藏45.721c]
5~18 연기(緣起)*를 드러내는 가름 [顯緣起分]
연기의 실체(緣起之體) 5~6
5. 眞性甚深極微妙 참 성품은 깊고 깊어 더 없이 미묘하구나
6. 不守自性隨緣成 개체의 실존적 성질(自性)을 지키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이루어 지는 것이지
* 緣起: paticca-samuppada. 조건에 따라서 생성됨.
==> 연기를 위의 不守自性隨緣成 보다 더 간명하게 잘 표현한 것은 아마 없을 것임.
다라니*의 이치와 작용에 관한 법의 범주(陀羅尼理用 辨攝法分齊) 7~8
7. 一中一切多中一 하나에 모든 것이 담겨있고, 또 여러 것 가운데 하나가 있고
8. 一卽一切多卽一 하나는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은 곧 하나이다.
* 陀羅尼: dharani. 總持,能持,能遮. 원래 의미는 한 없는 이치를 배워서 지니고 상실하지
않는 정신적인 능력을 말한다. 일종의 기억술과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후대에는 기억술로서의 다라니의 형식이 송주(誦呪)와 유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주(呪)와 혼동하여 주문을 모두 다라니라 부르게 되었다.
의상은 7,8구를 "다라니의 이치와 작용"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암시적인
말로서 명확히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대승경전에서 언제나
다라니를 법문의 정수로 하듯이, (핵심적인)"오묘한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華嚴一乘法界圖叢髓錄] [大正藏45.723c]에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현상계(事)에 관한 법의 범주(事攝法分齊) 9~10
9.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에 우주*가 들어있고
10. 一切塵中亦如是 그 모든 티끌들이 다 그러하여라
* 十方(시방): 동서남북 + 四維(북동,북서,남동,남서) + 위,아래.무한한 공간을 나타냄.
12.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곧 무량한 겁이어라
13. 九世十世互相卽 시간의 세계(九世)는 곧 영원의 세계(十世)요, 영원의 세계는 곧 시간의
세계이니***
14. 仍不雜亂隔別成 그래서 (오히려) 뒤죽박죽 혼란되지 않고 홀로서게 되네****
* 一念: 머리카락 한 올을 세로로 열 등분 내지는 백 등분, 천 등분으로 가른다. 그리고
그 가른 것 하나를 옥판(玉板) 위에다 놓고, 날카로운 칼날을 갖다 대어서 자른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옥판에 이를 때까지의 시간이 "한 생각"(一念)이다.
竪析一髮爲十分乃至白分千分 以其一分置玉板上 擧利刃斷 約其利
刃至板時爲一念也 <<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大正藏45.725a]
** 겁(劫): kalpa. 일반적인 시간의 단위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시간.
*** 九世: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어서의 과거·현재·미래+ 현재의 과거·현재·미래 +
미래 의 과거·현재·미래 = 9
十世: 위의 구세를 한 생각(一念)을 통해 영원으로 파악하여 시간을 넘어선 세계,
영원의 세계.
한 밤중에 꿈을 꾼 것과 같다. 이미 죽은 아버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을 보았다. (나까지) 세 사람이 각각 그렇게 보아서 아홉 사람이 있었다. 깨어나서 보니, 다만 한 생각 속에 있을 뿐이다.
이 마음 중에 한 조각은 아버지이고, 또 한 조각은 나이고, 다른 또 한 조각은 아들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마음에 있다.
如一夜中夢 已過父及未生子各三有九 覺時見之 但在一念心中 非
此心中片分爲父 片分爲我 片分爲子 總在一心 [華嚴一乘法界圖
記叢髓錄] [大正藏45.725c]
**** 仍不雜亂隔別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주석을 인용하면,체(體)가 있으면 뒤섞이게
되고, 모습(相)이 있으면 어지럽게 된다. 체가 없으면 곧 상이 없기 때문에
작용(用)이 없는 것으로 그 작용을 삼고,
작용이 없는 것으로 작용을 삼기 때문에 그 작용은 다함이 없게된다.
有體卽有雜. 有相卽有亂. 無體卽無相. 故無用爲用. 無用爲用.
故其用不窮. [大華嚴一乘法界圖註] (梅月堂別集 卷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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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화엄일승법계도기총수록] 돼지와 부처님
*** 1997년 10월 2일 새로 고침.
신라국의 승려 지통(智通)은 의상화상의 십대제자(十聖弟子)의 한 사람이다. 태백산 미리암 굴에 들어앉아 화엄관을 닦고 있었다.
하루는 홀연히 큰 돼지가 굴의 입구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지통은 평상시대로 나무 불상에 정성을 다해 예불을 올렸다. 그 불상이 지통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굴 앞을 자나간 돼지는 네 과거의 몸이다. 나는 네가 미래의 과보인 부처니라." 지통은 이 말을 듣고 그 즉시 과거·현재·미래(三世)가 하나로 어울어져 있다는 뜻을 깨달았다.
나중에 의상화상을 찾아가 이 이야기를 하였다. 의상화상은 그 그릇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마침내 법계도인을 그에게 전수하였다.
又新羅國僧智通乃相和尙十聖弟子之一也. 居太白山彌理암*穴修花嚴
觀. 忽一日見大猪過穴門. 及通衣常禮木刻存像盡具誠懇. 像語通曰.
過穴之猪是汝過去之身. 我卽是汝當果之佛也. 通聞此語卽悟三世一際
之旨. 後詣相和尙서**之. 和尙知其成器. 遂以法界圖印授之也.
[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 [大正藏45.725a-b]
* 암: 品 (岩의 仝字)
** 서: 示 + 又 (敍의 仝字)
경지(位)를 개괄한 법의 범주(位以彰攝法分齊) 15~16
15.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입문의) 마음을 낸 때가 그대로 바른 깨달음이며*
16. 生死涅槃常共和 나고 죽는 상태(윤회)와 거기에서 해방된 열반은 늘 함께 화합하도다**
* 初發心時便正覺:
(우리 중생은) 옛 부터 그대로 부처이다. 그러나 마음을 내었을 때야 비로소 그대로 부처임을
아는 것 뿐이다. 마치 꿈에서 뛰어 다니는데 그대로 꿈은 고요한(잠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이 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뛰어다닌 것은 누워 있었을 따름이라고.
從古是佛. 而發心時方知是佛耳. 如夢走馳. 自夢卽寂. 而悟朝方知
走卽臥耳. [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 [大正藏45.726b-c]
** 生死涅槃常共和:
의상 스님의 후배인 화짱(法藏)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 같이 말함.
色이 곧 空임을 보아 큰 지혜를 이루어서, 삶에도 죽음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空이 곧 色임을 보아 큰 자비를 이루어서, 열반에 머무르려 하지도 않는다.
色과 空의 경계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큰 지혜와 큰 자비의 생각이 다르지 않고,
머무름이 없는 실천을 이룬다.
* 色: rupa; 물질성.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것.
空: sunyata; 비어있음.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가짐.
二見色卽空, 成大智以不住生死; 見空卽色, 成大悲以不住涅槃. 以
色空境不二, 悲智念不殊, 成無住處行. [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大正藏33.553b]
지금까지의 의미를 총괄하여 논함(總論上意) 17~18
17. 理事冥然無分別 보편적 이상(理)과 개별적 현실(현상)(事)이 아득히 깊이 연관되어
분별이 없으니
18. 十佛普賢大人境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큰 사람의 경지일세
* 十佛: 부처가 열 명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습과 작용을 열 가지로 나타낸 것임
(화엄경). 열(十)이란 전체를 의미함.
1.무착불(無著佛): 속세에 안주하여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2.원불(願佛): 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으로 출생하기 때문이다.
3.업보불(業報佛): 인과의 도리를 믿기 때문이다.
4.지불(持佛): 순리에 따르기 때문이다.
5.화불(化佛): 깨달음의 세계로 영원히 건너 갔기 때문이다.
6.법계불(法界佛):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7.심불(心佛): 평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8.삼매불(三昧佛): 무한하고,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다.
9.성불(性佛): 결정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10.여의불(如意佛): 모든 것을 두루 감싸고 덮기 때문이다.
所謂十佛如華嚴經 一無著佛 安住世間 二願佛 出生故 三業報佛 信故 四
持佛 隨順故 五化佛 永度故 六法界佛 無處不至故 七心佛 安住故 八三昧
佛 無量無著故 九性佛 決定故 十如意佛 普覆故 何故十數說 欲顯多佛故.
[華嚴一乘法界圖] (韓國佛敎全書, 2-5c)
**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 Visvabhadra
행원(行願:실천의 서원)을 상징하는 보살. 화엄경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애독되는
장(章)은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으로서 거기에 열 가지의 행원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은 깨달음을 구하는 일과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중심을 이루며, 나눔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19∼22) 남을 위한 실천 (利他行)
19. 能人海印三昧中 능력있는 사람*이 바다와 같이 두루 펼친 삼매**에서
20. 繁出如意不思議 때마다 뜻하는 데로 이루어지게 하나니 불가사의 하도다***
21. 雨寶益生滿虛空 보배의 비가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 허공에 충만하나니
22.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은 자기 그릇따라 이익을 얻노라.
* 能人:
판본에 따라서 能入, 能人, 能仁 등으로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속장경(續藏經)본 에는 능입(能入)이라되어 있고, '능입'이라 할 때 의미가 더
명확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법계도 주석의 집대성인 [화엄일승법계도기총수록]에는 항상 능인(能人)이
라되어 있고, 能人,能仁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이므로 能人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能入(입)海印三昧中: 능히 해인삼매 속에 들어가서
** 海印三昧: 화엄경을 설하려 할 때 부처님이 들어가신 선정. 삼매(三昧)는
samadhi의 음역, 고도의 정신 통일.
해인삼매는 조용한 곳에 고립된 정신통일이 아니라 바다와 같이 두루 펼쳐져
무한히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삼매를 말한다.
*** 繁出如意不思議:
'번'이라 한 것은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출'이라 한 것은
솟아나와 그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의'라는 것은 비유에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여의보왕(如意寶王=轉輪聖王)은 무심히 보배의 비를 뿌려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인연따라 끝이 없다.
석가여래의 선교방편(중생을 잘 인도하는 교묘한 방편) 역시 이와 같다.
한 음성이 퍼져나가는 것에 중생계가 응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낳아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 어디든지 작용하는 곳에 따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여의'라 이름한다.
繁者熾盛義故 出者涌出無盡故 如意者從喩得名 如意寶王無心而雨寶益
生 隨然無窮 釋迦如來善巧方便 亦復如是 一音所暢應衆生界 滅惡生善
利益衆生 隨何用處 無不如意 故名如意 <<華嚴一乘法界圖>>[韓國佛敎
全書 2.3c-4a]
[번출여의]라는 것은 '바다와 같이 두루펼친'(海印) 선정에서 일어난 가르침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부처님의 뜻에 맞기 때문이고,
둘째는 중생의 뜻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의(뜻대로 이루어짐)라 이름한다. ..[중략]..
부처님의 서원이 중생의 감응에 미침으로써 해인의 가르침은 중생에 응하게 된다.
繁出如意者. 從海印定所起之敎爲如意也. 此有二義. 一稱於佛意故. 二
稱於衆生之意故. 名爲如意. ..[云云].. 以佛誓願及衆生感. 海印之敎
應衆生也. [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 [大正藏45.72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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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0) 수행자의 방편 및 이익을 얻음(脩行者方便及得利益)
23~26 수행의 방편을 밝힘(明修行方便)
23. 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가 근본 자리로 돌아감에*
24. 파息妄想必不得 망상을 그치지 않고서는 필연코 얻지 못하리라**
25. 無緣善巧捉如意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교묘하게 잘 인도되어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나니 ***
26. 歸家隨分得資量 집으로 돌아감에 분수 따라 (마음의) 재산과 양식을 얻노라****
* 本際; bhutakoti 존재의 궁극, "근본 자리"
"근본 자리"란 내면으로 증험한 해인이다.
本際則內證海印也.
** 파(ㄷ+口)息妄想必不得
속장경 본에는 "忘想"이라고 되어있으나 [총수록]에 의하여 "妄想"이라 하였음.
두 가지 자아의식으로써 집착하는 것이 "망상"이다.
以二曖琿糖崑竟. [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 [大正藏45.728b]
"두 가지 자아 의식"(二我)이란
1. 내가 실존하고, 내가 소유한다는 이기적인 의식(自愛,人執)
2. 나 이외의 사물과 법칙, 교리, 이데올로기 등이 절대적으로 실재한다고 보아,
거기에 구속되는 강박관념(法愛,法執)
이른바 망상 끊는다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망상을 끊으려는 망상"이라 부른다. 즉, 망상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근본 자리에) 들어감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망상을 끊으려는 마음을 끊어 없애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법계도에 있는 "망상을 그침"(息妄想)이라 부른다.
謂斷妄想之心禦儷. 其謂斷妄想之妄想. 則以不息妄想故必不得入也
然則斷妄想之心斷除不起. 是名此中息妄想也. [같은 책, 729b]
*** 無緣善巧捉如意:
분별을 등지어 무분별을 얻으므로 조건에 구애됨이 없다(無緣)고 말한다. 이치에
따르면서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교묘하게 잘 인도함"(善巧)이라 부른다.
말한 바와 같이 수행을 마치어 거룩한 이의 뜻을 얻은 까닭에 "뜻대로 이루어짐을
붙잡음"(捉如意)이라 부른다.
背反分別 得無分別 名曰無緣 順理不主 故名善巧 如說終行得聖者意
故楙塗드凞
**** 歸家隨分得資量:
앞에서와 같이 "집에 돌아온다"(歸家)는 것은 본래 성품을 증험했기 때문이다. "집"이란 것은 무슨 뜻인가? 아늑하게 감싼다는 뜻이고 사는 곳이란 뜻이다. ..[중략]..
"분수에 따른다"(隨分)는 것은 아직 완전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재산과 양식"(資糧)이라는 것은 보리(菩提)를 돕는 덕목들이기 때문이다. 화엄경의 이세간품 중에 2000 답 등이 그것이다.
如前歸家者 證本性故 家者何義 陰覆義 主處義故 ..[云云].. 隨分者
未滿義故 資糧者 助菩提分故 如下經離世間品中二千答等是也
[華嚴一乘法界圖] [韓國佛敎全書 2.5b]
27~30 이익을 얻는 것에 대하여 밝힘(辨得利益)
27. 以陀羅尼無盡寶 다라니로 고갈되지 않는 보배 삼아
28. 莊嚴法界實寶殿 진리의 세계의 참다운 보배의 전당을 장엄하나니
29. 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참된 세계, 치우침이 없는 가운데 길 자리에 평안히 앉아
30. 舊來不動名爲佛 예로부터 흔들림(동요함)이 없으니 그 이름 부처로세
* 의상 찬 [화엄일승법계도]의 끝 부분.
총장원년(서기 668년) 7월 15일에 적는다
묻는다.
어찌하여 글을 모은 사람(책을 불에 던져 타지 않은 글자를 모아 법계도를
지었으므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가?
답 : 연기(緣 起)에 의해 생기는 모든 법에는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 묻는다. 어찌하여 날짜가 있는가?
답: 일체의 모든 법은 연기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 묻는다.
연기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뒤집힌 마음 가운데에서 온다.
뒤집힌 마음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시작도 없는 무명(無明:무지, 어둠)으로부터 온다.
시작도 없는 무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여(如 如:본래 그 자체, 있는 그대로)에서 온다.
여여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여함은 법의 성품 자체에 있는 것이다.
법의 성품은 어떤 모습을 가 지는가?
무분별로 모습을 삼는다. 그러므로 찾으려는 모든 것은 언제 나 치우침이 없는 가운데 길(中道)에 있다. 그렇지 않음이 없고 차별이 없다. 이것으로 뜻을 삼기 때문이다.
글 머리의 詩(법계도를 말함)에 <법성원융무이상>으로부터 <구례부동명위불>은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詩에 의거하여 허(虛)는 곧 실(實)임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서원하노라.
일승보법(一乘普法:승의 대소를 떠니 하나된 보편적인 진리)의 이름과 글자와 뜻을 보고, 듣고, 닦고, 모아서, 이 선한 자질을 모든 중생에게 되돌려 베풀어, 두루 훈습하고 닦게하여,중생계가 남김없이 일시에 성불하여이다.
마침.
總章元年七月十五日記
問何故不看集者名字 答表緣生諸法無有主者故 又問 何故在年月名 答示
一切諸法依緣生故 又問 緣從何處來 答從顚倒心中來 顚倒心從何處來 從
無始無明來 無始無明從何處來 從如如來 如如在何處 如如在自法性 法性
以何爲相 以無分別爲相 是故一切尋常在中道 無非無分別 以此義故 文首
詩 法性圓融無二相 乃至舊來不動名爲佛 意在於此 所以依詩卽허(범호엄
+丘=虛)顯實 故誓願 見聞修集一乘普法名字及義 以斯善根廻施一切衆生
普重修盡衆生界 一時成佛 法界圖章 一乘法界圖終 <<華嚴一乘法界圖>>
[韓國佛敎全書 2.8b]
법성게(法性偈)해설 ( 성철 큰 스님의 백일법문 중에서.)
신라시대 의상(義湘)스님이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예로부터 화엄사상의 정수를 간명하게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법이 부동하여 본래 적적하도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끊으니, 증득한 지혜로 알 바요 다른 경계가 아니니라.
.
.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 법계의 실보전을 장엄하여
궁극에는 실제의 중도상(中道床)에 앉으니 예로부터 부동하여 부처라 이름하도다.
法性圓融無二相하니 諸法不動本來寂이로다
無名無相絶一切하여 證智所知非餘境이라.
. . .
以陀羅尼無盡寶로 莊嚴法界實寶殿하여
窮坐實際中道床하니 舊來不動名爲佛이로다. (大正藏 45, p. 711 上)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음'은 법성이 원융해서 시비의 상도 없고 선악의 상도 없이 양변을 완전히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완전한 쌍차로서 유무(有無), 시비(是非), 선악(善惡), 중생과 부처 등 차별적 양변이 완전히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일체만법이 다 부동하여 본래가 적적합니다.
천가지 만가지로 움직여도 두 가지 모습이 없어 그 본자리는 항상 본래부터 그대로이므로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지을 수도 없어서 일체가 다 끊어져 버립니다. 이 끊어진 자리는 오직 깨친 지혜(證智)로서만 알 바여서 깨쳐야 가능한 것이지 깨치기 이전에는 결코 모르는 것입니다. '
다른 경계가 아니다'함은 중지한 사람, 즉 구경각(究竟覺).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한 부처님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지적하는데 법성 원융한 근본자리는 십지보살(十地菩薩)과 등각(等覺)도 원만하게 모른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법성을 깨쳐 증지를 완전히 성취하면 거기에는 무진한 보배가 꽉 차 있으며, 이러한 무진보(無盡寶)로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을 장엄합니다.
그런데 실보전이라 하니 무슨 특이한 법당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진찰찰 일체불찰(一切佛刹)이 실보전 아닌 것이 없어 참으로 법성의 다라니보(陀羅尼寶), 무진보로서 시방 법계의 실보전을 다 장엄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처소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형상을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처소가 있고 형상이 있어 흙덩이. 쇠덩이도 모두 실보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긍극적으로 실제(實際)의 중도상(中道床)에 앉게 되는데, 그 실제라는 것은 법계진여, 즉 법계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계의 중도상(中道床)에 턱 앉는다는 것은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도를 정등각한 자리에 가서 보면 그 근본 자리는 예로부터 아무리 요동해도 요동한 일이 없습니다. 방편으로서 편의상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는 부처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요즈음의 말로 표현하면 화엄종의 엑기스입니다. 화엄경의 근본 골자를 총망라해 가지고 만든 것이 이 법성게(法性偈)인데, 법성게의 총 결론은 중도를 성취한 사람이 부처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화엄경의 근본도 중도에 있지 중도를 제외하고서는 따로 주장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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