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2)

二. 근심과 괴로움으로 힘겨울 때...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2:23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행복과 즐거움으로써만 세상을 살아가려 합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앞만 보고 살아갑니다.
근심과 곤란이 내 앞에 놓이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금새 괴로워하며 좌절하고 맙니다.

왜 이런 괴로움이 내게만 오는 것일까 하며
인생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고 운명을 탓하기 일수입니다.
행복과 즐거움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며
근심과 곤란은 우리가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크게 세상을 바라 봅시다.
오히려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 봅시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이 모든 경계는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결국에는 그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내 안에서 모든 것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결코 내 앞에 다가오는 경계를 둘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근심과 곤란에 쩔쩔매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있기에 온갖 경계가 있는 것이며
나아가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지난 과거에 몸으로 지은 행동 하나 하나
입으로 내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뜻으로 지은 생각 하나 하나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되어 하나도 남김없이 저장되어 있다가
현실이라는 경계 속에서 하나씩 풀려 나오는 것입니다.

즐겁고 괴로운 이 모든 경계는
지은이가 나이기에 그것을 풀어 나갈 사람도 오직 ''나'' 하나 뿐입니다.
근심과 곤란에 부딪혔을 때
''왜 이런 어려운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날까''
하며 답답해하는 이도 있지만
''나를 이끌어 줄 새로운 수행의 재료가 왔구나'' 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생각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내 앞의 미래가 좌우될 것입니다.
수행자와 중생의 차이는 이 한 생각의 차이에 있습니다.
똑같은 경계를 밝게 돌려 나갈 것인가, 어둡게 만들고 말 것인가!
이 한생각의 차이가 이 세상을 천상으로 또 지옥으로 만들 것입니다.

근심과 곤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생은 전생 그 전생
억겁을 이어온 삶의 자취 속에서
수없이 많은 악업과 선업을 지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그 악업과 선업을 과보가 되어 하나씩 풀려 나오는 곳입니다.

수없이 많은 선업과 악업을 지었기에
끊임없는 즐거움과 괴로움의 과보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오직 즐거움 만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내가 지은 악업은 지워버리고
선업만을 짊어지고 살아가려는 욕심에 불과합니다.
지은 것(원인)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도 말입니다.

근심과 곤란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근심과 곤란이 없이 모든 일이 잘 되어 간다면
나에 대한 자만심과 상대에 대한 업신여기는 마음이 커지고
경계에 닦쳐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로 인해 몇 배 더 큰 근심과 곤란이 또아리를 틀고
내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근심과 곤란 없이 모든 일이 순조로워
부와 명예와 권력 등을 쉽게 쉽게 얻게 되면,
나 잘났다는 아상이 커지며 또한 상대방을 낮춰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커지고,
동시에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그에 대한 댓가를 받아 써 본 사람은
쉽게 사치스러울 수 없지만,
부모님의 돈이라든가, 한바탕 대박으로 번 돈에 대해서는
살뜰한 마음없이 쉽게 쉽게 사치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는 교만과 사치가 늘다보니 아만심과 자기자랑을 늘어놓기 바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은근히 모든 말에 자기자랑과 자만을 늘어놓는 사람 말입니다.
자기자랑을 많이 하면 자기가 높아질 것 같고 대단해 질 것 같지만
실은 한없이 초라해지며 상대방에게서 고립되고 소외되기 쉽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높이고 칭찬하며 찬탄하는 가운데
진정 나의 가치는 한없이 높아지는 법입니다.

‘나 못난’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잘났다는 아상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상대방을 높이고 나를 낮추게 되면
모든 이들이 그를 따르고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상이 없어, ‘나’라는 울타리를 깨고 사니
너도 나도 그 어떤 사람이라도 나와 하나될 수 있는 연유입니다.
‘나’라는 울타리는 나와 상대를 구분짓는 선이기에
나를 깨고 살아야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될 수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세상살이 순탄하기만을 바라서는 안될 일입니다.
반드시 근심과 곤란이 있어야
때로는 고개 숙여 하심 할 줄도 알고 상대방 높여 줄줄도 알며,
내가 그랬듯 힘겨운 이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도 생기고,
힘든 때를 거울삼아 더욱 치열하게 정진할 줄도 알게 됩니다.

이렇듯 교만심과 사치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심하게 되면,
저절로 근심과 곤란의 경계들이 줄어들게 됩니다.
무릇 경계는 순역이 따로 없어
마음 짓는대로 같은 경계가 순도 되고 역도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심하여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고자 마음 낸 수행자에게
어찌 근심 곤란이라는 분별이 따라붙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만 내려 놓으면(下心)
일체 모든 경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경계가 됩니다.
근심과 곤란이라는 경계 또한 그대로 부처님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과 곤란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밝게 이끌어 주는 참된 부처님이십니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근심과 곤란 속에서 밝게 피어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가올 내 앞의 근심 걱정, 괴로움을
그저 힘없이 받아들이며 괴로워하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계에서도 당당하며 떳떳하게
그리고 걸림 없이 여여(如如)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네 어리석은 중생은 선업의 즐거운 과보가 오면 좋아하고
악업의 괴로운 과보가 오면 슬퍼하며 안절부절하게 되지만
당당한 수행자는
즐거운 과보가 오더라도 담담하게 맞을 수 있고
괴로운 과보가 닦치더라도 ''허허'' 하고 웃어 넘길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로 수행자의 가치는 근심과 곤란이라는 경계에 닦쳤을 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과 같기에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근심과 곤란은 그 성품 자체가 공(空)하여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나는 물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경계 자체가 꿈같아 허망할진데
어찌 꿈에 놀아난다면 수행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근심과 곤란을 마음속에서 거부하지 말고
당당히 받아들이며 걸림 없이 그 경계에 놀아나지 않음이
수행자의 묵연한 자세인 것입니다.

다가오는 모든 경계가 바로 ''나''의 다른 모습임을 굳게 믿고
내 안에 ''참 나 주인공''
그 맑고 향기로운 뿌리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방하착(放下着)!!
이는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입니다.
근심과 곤란 그 자체를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붙잡고 있으면 얽매이게 됩니다.
근심도 놓아버리고 걱정도 놓아버리고
오직 마음은 평안에 머물면 됩니다.

진정 모든 것을 놓았을 때
이전에 지어 온 모든 업장은 자연스레 녹게 됩니다.
세상 모든 문제에 닥쳐 밖을 탓하지 말고
오직 나의 문제로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문제로 돌리고 내 안에서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참 나''의 부처님 마음 자리에 모든 것을 놓고 나면
이미 경계는 사라집니다.
문제가 그 자리에서 나왔으니 해답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방하착...
''놓음''의 방편 수행으로 우리는 ''염불''을 합니다.
방하착 염불수행,
이것이 바로 염불로써 올리는 참된 마음공양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어떤 상황에서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그 마음 가운데 ''놓음''이 있습니다.

집착을 놓기 위해 염불하는 것입니다.
지극한 염불은 모든 경계를 녹여 버립니다.
근심과 걱정거리란 경계가 닦치는 순간,
근심 걱정되는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
그 안팎의 모든 경계에 대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내 밖에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살아 생동하는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도 좋고 그저 ''방하착'' 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참 마음'' ''주인공'' ''불성''
이름이야 어떻든 그 근본이 내 안으로 향하면 될 것입니다.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는 법문은
근심과 곤란을 내 밖으로 밀쳐내려 하지 말고,
벗어나려 발버둥치지 말고,
내 안에서 다 받아들여 다 녹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체를 자성부처님 자리, 본래 나온 자리에
턱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