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을 위한 불교 이야기

1. 종교간의 비교 문제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3. 09:51

 

철수네 집은 밥 먹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음식에는 단백질이 얼마나 들어있고, 무슨 음식은 비타민이나 철분이 얼마고 하는 것을 계산하면서 건강을 위해 밥 먹기를 계속했다. 말하자면 철수는 “밥 먹기 = 영양섭취”라고 하는 공식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철수의 친구집 방문은 '양자'가 되려는 것 아니다

어느 날 친구 영이네 집에 초대되었다. 그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그 집의 밥 먹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양섭취라기보다 화기애애한 가족 간의 대화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날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각자 자기들의 생각을 서로 나누고, 서로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는 등, 말하자면 영이네 집의 기본 원칙은 “밥 먹기 = 사귐”이라는 공식이었다. 철수에게 이런 것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친 김에 철수는 영수네 집에도 가 보았다. 거기서는 밥을 먹는데, 자세를 바로 하라, 입에 밥을 넣고 이야기하지 말라, 언제나 남을 배려하며 밥을 먹으라는 등 식탁 예의 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남에 대해 어떤 배려와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영수네 집은 “밥 먹기 = 예의범절”인 셈이었다. 이것도 철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또 한참 있다가 순이네 집에도 갔다. 이 집은 좀 특별했다. 여기서는 밥 먹을 때 이 밥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도움을 준 하늘과 사람과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마움을 느끼면서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순이네 집의 경우 “밥 먹기 = 고마워하기”였다.

철수가 이런 집들을 방문하는 것은 이런 집에 양자로 들어가려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집 아이들을 자기 집 양자로 데려 오려는 것도 아니다. 서로 누구의 밥 먹기가 더 훌륭하냐고 밥 먹기의 우열을 따지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서로간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찾아내고 분석하려는 것도 물론 그 주목적이 아니다.

이왕 한평생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삶에서 남이 밥 먹는 법에서 무언가 배워 나의 밥 먹는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영양에 관한 지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그들의 밥 먹기를 더욱 풍요롭게 도와줄 수도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철수가 영이나 영수 그리고 순이의 집을 보고 온 다음 혹시나 하고 자기 가문의 내력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오래 전에 자기 가문에도 밥 먹는 것을 사귐이나 예의범절 그리고 고마워함과 관계시켜 생각한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다만 근자에 와서 그런 것을 보지 못하고 마치 밥 먹는 것은 오로지 영양을 위한 것만이라 믿고 그렇게 주장해 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것도 생각지 못했던 수확이었다.

두 종교의 대화는 '서로 거울을 들어주는 것'

이런 경우를 두고 비교 종교학의 창시자 맥스 뮐러가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다. 이웃 종교를 알아보는 것은 결국 내 종교를 더욱 더 잘 알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여기 연재할 글에서는 독자들에게 불교인이 되거나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설득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두 종교 간의 진위나 우열을 따지는 것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교의 어느 점과 그리스도교의 어떤 점이 같다, 비슷하다, 혹은 다르다 만을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두 종교가 대화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을 들어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불교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이 글을 혹시 불교인이 읽는다면 그들 역시 그리스도교의 거울에 비친 그들의 모습 일부를 볼 수 있게 되기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좀 거창한 용어로 말하면, 이웃 종교를 읽고 내 속에 있는 무엇을 촉발시키는 ‘환기식 독법’(evocative reading)으로 읽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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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 편집자 주 : 아래의 "연재를 시작하면서"는 이번 연재글의 기획의도를 설명하고자 덧붙인 오강남 교수님의 글입니다.

불교는 동남 아시아 및 동북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다. 타일랜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중국도 수(隋)나라, 당(唐)나라 시대 불교국이었을 만큼 불교가 융성했음은 물론, 일본도 얼핏 신도(神道)국이라 오해할 수 있지만 역시 옛날부터 지금까지 불교가 가장 중요 종교로 내려오고 있다. 한국의 경우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불교가 국교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계속 불교가 중요한 종교로 내려왔고, 2003년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지금 한국 인구의 26.3%가 불교인으로 한국 종교 인구 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실정이니 불교를 이해하지 않고는 동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히 한국인이라면 현재 국보나 보물급 문화유산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지난 2천년 가까이 한국인의 중요한 정신적 뿌리의 하나로 한국인의 심성을 꼴 지워 왔던 불교를 모르고 진정으로 훌륭한 한국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조상은 어떤 눈으로 우주와 삶을 보았고, 지금 우리가 세계와 인생을 보는 안목이 어느 정도 그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인가를 아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요, 지적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신기한 사실은 오늘날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동양이나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쇼펜하우어, 니체, 와그너, 하이데거, 데리다, 푸코 등 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이 많고, 현재 불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대폭 수정하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아, 서양 현대 사상이나 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불교 사상의 이해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후대 역사가들이 20세기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고, 그 중에서 무엇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볼까 가상해 볼 때, 그것은 우주선이나 컴퓨터 같은 과학 기술 상의 사건이나 공산주의의 흥기와 몰락 같은 사회, 정치적 사건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처음으로 의미있게 만난 것을 지적하리라고 예견했다. 현재 불교는 아시아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서양에서 더욱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불교는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가? 좀 극단적인 예이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불교도들을 회개시키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팻말을 흔드는 이, 혹은 ‘불교 법당은 귀신의 종합청사’라 외치는 이, 심지어 불교를 박멸하겠다고 도끼를 가지고 나서는 이마저 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상당수 한국 그리스도인들 중에 불교는 각목 들고 싸우는 미신적인 종교일 뿐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현실 아닌가?

물론 불교에 이런 미신적이고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불교를 아들 낳기 위한 수단 이상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하는 불자들이 상당수 있을 수 있고, 마치 종권 다툼에서 이기는 것이 그들이 불교에서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과업인 것처럼 행동하는 불교 지도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계에서 발견되는 불합리하고 천박한 현상으로 그리스도교를 도매금으로 폄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드러난 이런 부정적인 현실로 불교 전체를 그대로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그 밑으로 들어가 보면 진주처럼 영롱한 가르침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종교간, 특히 그리스교와 불교 간의 대화와 화합을 위해,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었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을 가지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