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만든 감옥
The self-made private prison
Lily de Silva
전채린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 차례
신체의 무기
느낌의 무더기
지각의 무더기
의지적 행위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
지은이 소개
지은이 릴리 드 실바는 스리랑카 페리데니야 대학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장부경 복주석서(Digha Nikāya Aṭṭhakathātikā)』를 감수하여 런던의 빠알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에서 세권으로 간행하였고 『Paritta:스리랑카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불교법어집』을 저술했다. 그 밖에도 학술지와 대중지에
꾸준히 기고하였다. 1978-1979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센터에서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1976년에는 동국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세계불교학술회의(주제:불교와 현대세계)에 참석, 「관능적 사회풍조와 현대불교」를 발표하였다.(이 논문은 법륜·다섯의 마지막에
수록됨)
〈고요한 소리〉에서 『한 발은 풍진 속에 둔 채』(법륜·다섯)와 『오계(五戒)와 현대사회』(보리수 잎·스물 여섯)가
출간되었다.
부처님께서 인간 개개인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로 이루어져있다고 가르치셨다. 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는 빠알리어로 빤차 우빠다나
칸다(pañc'upādānakkhandhā 五取蘊)라 불리는데 신체의 무더기[色蘊], 느낌의 무더기[受蘊], 지각·인식의
무더기[想蘊], 의지적 행위의 무더기[行蘊], 의식의 무더기[識蘊]들이다.
부처님께서 왜 더도 덜도 아니고 다섯 가지만을 말씀하시고
계신지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나날이 겪는 일상 경험 중 하나를 들어 그 전말을 꼼꼼히 짚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가령 길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 소리나는 현장에 달려가서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난 것을 목격한다고 하자. 희생자에 대해
불쌍한 느낌이 일어나면서 병원에 빨리 데려가야 할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사로잡힌다. 이 일련의 경험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내포된 물리적·정신적
현상들을 분석해 보면 이 현상들이 다섯 집착 무더기에 바로 들어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개개인의 몸, 즉 물질적
측면쯤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사고 현장에 다가간 것은 바로 그 몸[色蘊]인 것이다. 소리를 듣고 사고 장면을 보았으니
그것은 이식(耳識)과 안식(眼識)이 있어 작용했다는 것[識蘊]을 뜻한다. 오토바이 사고라고 확인한 것은 지각 및 관념작용의 무더기[想蘊]인
것이다. 희생자에게 불쌍한 느낌을 일으켰는데 불쌍해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느낌의 면[受蘊]이 드러난 것이다. 병원에 데려가고
싶어한 것은 의도라는 면[行蘊]이 발동한 것이다. 이처럼 한 토막의 경험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이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갖 다양한 경험에 관여하는 물질적·정신적 현상들도 이렇게 다섯 무더기로 분류될 수 있으며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부처님께서 다섯 집착 무더기를 발견하신 것도 객관적 알아차림[念]과 직관적 지혜[慧]로 실제 경험을 분석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왜 그들을 무더기, 빠알리어로 칸다(khandha)라 부르는 것일까? 칸다는
‘더미’ 또는 ‘축적’을 의미한다. 이 몸이 물질적 요소들의 더미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몸이 줄곧 성장하는 것은 그만큼의 많은 음식이라는
물질을 그 속에 계속 채워주기 때문이다. 정신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온갖 경험을 통해 느낌, 지각과 관념, 의도, 의식을 축적해 나간다.
그러므로 개개인을 구성하는 다섯 측면 모두가 더미, 축적 또는 쌓임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다섯 가지는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행과정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주석서에서 비유하고 있듯이 이들 다섯은 다섯 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의
물만큼이나 복잡하게 섞여 있다. 그 물을 한 움큼 떠서 이 물이 어느어느 강줄기에서 온 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들 쌓임들은 계속
뒤섞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해가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와 같은 활기차고 가변적인 성질 때문에 엉뚱하게도 ‘나’라든가 ‘내 것’이라는
관념이 생길 소지가 마련되는 것이다. 마치 불이 붙은 나무를 빠르게 빙빙 돌리면 불의 원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되듯이 물질적·정신적
에너지의 힘찬 전개과정들이 나·자신·자아·영혼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이들 다섯을 ‘나’ 또는 ‘내 것’이라 일단 착각하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강렬하게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집착 더미라 부르는 것이다. 사실 이 더미들을 자기자신이라 간주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들 더미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뿐만 아니라 그 더미들을 언제나 따라다니는 고통, 실망, 걱정에서도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
모양을 비유하자면 견고한 말뚝에 맨 줄에 묶인 동물이 그 말뚝 곁을 빙빙 돌고, 서고, 앉고, 눕는 꼴과 꼭 같은 것이다. (『상응부』Ⅲ,
150)
이 다섯 더미가 우리에게 진짜 스스로 만든 사설 감옥이 되고 있다. 우리가 이 감옥에 애착하고 그것에 거는 기대들이 큰 그만큼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바깥세계를 인식하거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이 감옥이라는 특성이 개입하여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서로들간의 일체관계나 의사소통이 극도로 복잡해지고 술수에 차고 문제투성이로 변해버린다. 문제들이 복잡해지고 또 복잡해지다 보니 이제 이
사설감옥이 감옥이 아니라 자기자신인 양 동일시하기에까지 되고 만다.
경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상적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얼마나 이
무더기들 하나 하나를 ‘나’ 또는 ‘내 것’으로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스스로 감옥을 짓고서는 그 속에 갇혀 계속
고통받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신체의
무더기[色蘊]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즉각 “나는 아무개입니다”하고
이름을 댈 것이다. 하지만 이름이란 하나의 호칭일 뿐이어서 무엇이라 하든지 다 이름이 될 수 있다. “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답은 단지 우리가 속해있는 종(種)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남자입니다, 또는 여자입니다”라 했다면 그 사람의
성(性)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무개의 딸, 누이, 부인, 어머니입니다” 등등의 대답은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을 뿐, 여전히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신분을 밝히기 위해서 신분증명서를 내보일 수 있지만, 신분증명서에는 단지
호칭인 이름과 몸을 찍은 사진 한장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했다고 믿는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나는 키가 크다, 나는 뚱뚱하다, 나는 살결이 희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몸의 크기나 상태, 색깔일 뿐이니, 몸과 자신을 그만큼 동일시하고 있다는 표시를 낸 것밖에 안된다. 심지어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치장하고는 “내가 이 비단옷을 입으니까 아름답지?”라고 말하면서, 이 몸이 아름다운 자기자신이라고 여긴다. 또 “내 얼굴, 내 머리카락, 내
이” 등등 우리는 몸을 귀중한 소유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마치 육신이 자기자신인 듯이, 우리가 거기에 매달리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동일시는 너무나 널리 또 철저하게 받아들여졌기에 그것은 어느덧 일상의 말투에 스며들어버리기도 했다. 영어의 ‘somebody(누군가)’,
‘everybody(모두)’, ‘nobody(아무도)’ 등의 단어에서 보듯이, ‘body(몸)’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어쨌든 부처님께서는 마음챙김을 통해 이 몸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샅샅이 분석하여 그 참된 성질을 깨달으셨고 아름답다느니
어쩌니 할 아무런 소지가 없음도 밝게 아셨다. 몸은 살, 담, 침, 피, 오줌과 똥 등 모두 불쾌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머리카락, 치아, 손톱 등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 예를 들어 먹는 음식에 들어있거나 할 때에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미인대회에서 일등을 한 여인도 아침 일찍 세수 안한 얼굴을 자세히 보면 또한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몸이 어떻게
찌드는지, 죽어 몸이 썩을 때 어떠한지, 더 이상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몸이란 ‘나’니 ‘내 것’이니 하며
집착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짐, 오물 주머니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육신은 단단함-땅, 응집성-물, 열기-불, 움직임-공기와
같은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요소 중에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몸 이외에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데도 우리는 한길 남짓한, 이 작은 물질 덩어리를 ‘나’인줄, ‘내 것’인줄 알고 여기에 집착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육신, 혹은 ‘색(色)’을 두고 재형성되었다 망가졌다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신다. 육신은 더위, 추위, 해충 따위로 괴로움을 당한다. 육신이란
것은 몸이 지어져가는 작용, 바로 그것 이외의 다른 어느 것도 아니다. 현대의학은 몸이 수 억만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세포들은
끊임없이 성장과 소멸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하나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비’라는 명사를 써서 우리는 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가 오는 작용만 있을 뿐 비라고 부를 ‘것’은 없다. 물방울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과정을 우리는 비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비’라는 명사를 쓰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비가 오는 작용만 있을 뿐이니, 동사로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몸이라고 부르는 것도 몸이 지어져가는 작용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형상(rūpa)’이라는 명사를 그것에 상응하는 동사, ‘형상 짓다, 변화하다 (ruppati)’로 정의한
것이다. 이 몸을 지어가는 작용은 쉬지 않고 계속되며, 그래서 항시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형상은 무상한
것(anicca)으로 간주된다. 이 몸을 지어가는 작용의 변화무쌍한 과정 속에는 결코 자아·불변하는 에고·나·영원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커다란 망상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육신은
영아기·유년기·사춘기·청춘기·중년기·노년기의 단계를 거친다. 이 모든 과정에 걸쳐 각 단계마다 각기 다른 유형의 고(苦)가 있다. 젖니가 날
때의 아픔과, 몸을 움직이고 의사소통을 하는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 등은 영아기의 괴로움을 크게 가중시킨다. 유년기에 운이 좋아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면 비교적 고통을 모르고 지낼 수 있지만 그 시기의 넘치는 힘을 건전한 유희나 창조적인 일 쪽으로 쓰지 못할 경우, 자라나는 육신이 곧
괴로움이 될 수가 있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어리지 않고,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미처 성숙하지 못한 사춘기는 특히 힘든 시기이다. 청년기는 성적
에너지가 절정에 이른 시기여서 육신은 꽤나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불법한 일에 빠지지 않고, 분별심과 승화력으로 스스로를 억제함으로써 그
에너지가 건전하게 발산되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청춘기의 젊은이는 매우 비참한 신세가 되기 쉽다. 중년기에는 스트레스에 관련된 질병에 걸리기 쉽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기는 근심걱정의 시기이다. 가지각색의 고통을 겪는 노년기가 되면 육신은 그 자체를 끌고 다니는 것조차 너무나 부담스러운
짐이 된다. 이처럼 일생 어느 단계에서도 육신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육신은 고(苦)의 원천이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오감(五感)의 쾌락을 다 동원하여 채워준다 하더라도 그 육신은 절대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자주 씻어도 몸은 금방 더러워지고 만다. 음식을 아무리 많이 먹여도 배고파하고 피곤해한다. 육신은 병이
들고, 늙어가고, 아름다움과 힘을 잃어간다. 우리는 결코 우리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나’니, ‘내
것’이니 하면서 갈망할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육신은 오취온이라는 스스로 지은 감옥 중에서 만져 알 수 있게 모양새를 갖춘
벽에 해당한다. 사람의 육신은 특수한 생화학적, 생체전기적 성분을 지닌 요소들이 모여서 이룬 독특한 조합체이다. 사람에 따라 육신은 그
나름대로의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특정 종류의 질병에 유달리 잘 걸리는 경향이 다르다. 한 평생 내내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없다.
천식을 앓는 사람도 있고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호흡기관이 약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소화기관이 약하다. 이처럼 각 개인은
제각각 다르게 타고 난 몸 때문에 혼자, 남 모르게 고통을 당한다.
우리 신체는 크기, 모양, 피부색, 겉모습이 각각 다르고, 이렇게
서로 같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콤플렉스를 가지고 괴로워한다. 우리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만스러워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어릴 적에 시력을 잃었던 한 여인이 추락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충격 끝에 30년만에 시력을 다시 찾은 경우가 있었다. 그 여인은 시력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지만 그 기쁨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이 아름답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이 우리의 기대를 따라주지 못할 때 그로 인해 생기는 실망의
본보기라 할 것이다.
육신은 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한다. 한때 아름답고 튼튼하던 육신은 여위어 약해지고, 그로 인해 괴로워한다.
육신을 아름답고 튼튼하게 만들려고 우리는 각종 방법을 동원한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에 물을 들이고 틀니를 끼고 가발을 쓴다. 또
비타민, 강장제, 불로장수약이라는 것을 먹는다. 그러나 육신은 이에 아랑곳없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괘씸한 육신의 감옥을
뛰쳐나오지 못한 채 계속 고통을 당하기만 한다.
내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어떤 어린아이가 주차해 있는 자동차의 뒷 범퍼에 매달려
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차 주인이 차를 운전하기 시작하자 그 아이는 뒷 범퍼에 매달린 채 비명을 지르면서 질질 끌려가더라는 것이다. 그
아이가 차를 잡은 두 손을 놓기만 하면 고통은 멈췄을 터인데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기 몸에 매달려서는 몸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제
갈 길을 가는 것을 슬퍼하고 한탄한다. 우리가 몸을 놓아버리는 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우리의 고통도 그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놓아버려라. 집착의 오취온은 너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느낌의 무더기[受蘊]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주변의 다른 사물로부터
육신을 구분시키고, 그 육신을 자기자신이라고 믿게 한다. 온상응(蘊相應 Khandhasaṁyutta『상응부』Ⅲ, 46)에
따르면,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무명이 촉하여 생긴 느낌[無明觸所生受]에 사로잡혀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나’는 이것(몸)이다”라고
생각한다.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온통 정교하게 짜여진 복잡한 신경조직망으로 뒤덮여 있어서 접촉에 반응하지 않는 부분이란 하나도 없다. 이 민감한
덩어리 전체가 나라고, 자아라고, 그리고 에고라고 자처한다.
“나는 편안하다, 행복하다, 슬프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느낌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 사람은 ‘나’의 행복에 관심 없어, 그이는 ‘나’의 느낌에 상처를 줘”라고 하는 말도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자기의 소유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느낌에는 세가지가 있다. 곧, 즐겁거나 행복한 느낌, 불쾌하거나 괴로운 느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세 가지이다. 어느 한 순간에 두가지 느낌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다. 즐거운 느낌이 있을 때에는 다른 두가지 느낌은 없고,
괴로운 느낌이 있을 때에는 즐거운 느낌과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은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하니다나경(Mahānidāna Sutta 大緣經 『장부』15경)은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느낌이란 것이 이렇듯 복잡한데 어떤
느낌을 자기의 자아로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수상응(受相應 Vedanāsaṁyutta 『상응부』Ⅳ, 217)에 따르면,
대기 속에서 크고 작은 바람들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어지럽게 부는 것과 같이 우리 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느낌들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그 하나하나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느낌들을 다 알아차릴 수가 없다. 단 몇 분간만 자신이 얼마나 자주
몸을 뒤척이고 팔 다리를 놀리는지를 관찰해본다면, 우리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자세를 바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조롭게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편안해지려고 몸을 움직이고 자세를
바꾼다.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은 대체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괴로운 느낌은 거부하며, 더욱더 즐거운 느낌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느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은 욕망이, 괴로운 느낌은 혐오가,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은 무지가 그 잠재적
성향이다.(『중부』I, 303) 이와 같이 모든 종류의 느낌은 불선근(不善根)의 동기를 일으키며 또 그 어느 느낌의 체험이든 모두 고통의 성질을
띠고 있다.(『상응부』Ⅳ, 216) 우리는 평생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지만 쾌락은 신기루처럼 항상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느낌이란
것은 극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것이다. 누군가가 머리가 깨지는 듯한 두통을 느끼고 있다 해도 그의 고통을 바로 옆 사람이 전혀 모를 수가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그의 얼굴 표정이나 행동, 또는 말을 통해 단지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 타인이 무슨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느낌에 대한 경험은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더위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추위에, 모기에, 또는 벼룩에 민감하고, 또
어떤 사람은 특정한 꽃가루에 민감할 수도 있다. 누구는 고통에 민감하고 누구는 상당히 둔감할 수가 있다. 이처럼 각 개인의 감수성에 관한 한
어느 모로도 남과 공유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느낌이라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은 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독방 수인의
신세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느낌’을 ‘느끼는 행위’라고 정의하신다. 느끼는 행위를 떠나서는 느낌이라고 불릴 ‘어떤 것’도 없다.
그러기에 느낌들은 동적이고 항상 바뀌고있으며 무상하다. 게다가 느낌들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이러저러한 느낌을 느꼈으면, 혹은 느끼지
않았으면”하고 바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느낌들은 제 좋을 대로 오고 간다. 우리로서는 그들을 다스릴 통제권도 소유권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권고하신다. “너의 것이 아닌 것을 붙잡으려 하지 마라.” 덧없이 지나가는 것,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굳이 내
것으로 만들려들면 슬픔만 불러들일 뿐이다. 단념하면 슬픔도 사라질 것이다.
지각의
무더기[想蘊]
빠알리어의 ‘산냐(saññā)’라는 말은 ‘지각’ 혹은
‘관념작용’이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지각이라는 것은 곧 지각하는 행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하나의 역동적인 과정, 하나의 행위일
뿐이다. 그러면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파랑, 노랑, 빨강, 하양과 같이 색깔을 지각하는 행위이다. ‘산냐’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인간의 언어능력이라는 것이 ‘산냐’와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산냐’라는 단어는 또 상징을 의미하기도 하며 상징화는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관념을 형성하도록 돕는 것이 언어이고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산냐’를 때로 관념작용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각자의 지각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관점, 하나의 개념을 형성한다.
우리는 우리의 관념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것이 ‘나’의
관점이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이 ‘나’의 의견이다, 이것이 ‘내’가 뜻하는 바이다”와 같은 말들은 우리자신을 우리의 관념이나 이념 및
지각과 동일시하는 표현들이다. 때로는 이 동일시가 아주 공고해서 사람들은 어떤 관념이나 이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다. 세상에서는 어떤
이념을 선전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전형적인 집착의 모습인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가려내어 견취(見取
diṭṭh'upādāna) 즉 자기가 믿기로 작정한 특정 견해에 대한 집착이라 부르셨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관점과
자기 정체성을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상론자(常論者)니, 단멸론자니, 또는 실증주의자니 하고
있다.
관념이라는 것은 정서적 변화, 주변 사정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친구가 원수가 되고, 적이 동지가 되며, 낯선 사람이
배우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관념작용에서도 역시 불변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그러한 관념을 ‘나’ 또는 ‘내 것’으로
붙들고 있으면서 고통받지 않을 도리는 없다.
기억 또한 ‘산냐’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에 한번 만났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이런저런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존재했었음을 회상한다. 우리는 같은 유(類)의 경험을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우리가 미래에 존재할 것임을 예측한다. 이렇게 ‘산냐’의 한 측면인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가 과거, 현재, 미래 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환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실제로는 모두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산냐’가 어떻게 우리 스스로의 감옥에 우리를 가두는 벽을 만들게 되는가? 우리는 각각 선입견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주변 세상을 인식한다. 비근한 예를 들면, 세상에 관한 의사(醫師)의 인식은 정치가나 사업가의 인식과 많이 다르다. 사과 하나를
놓고, 의사는 그 영양가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고, 정치가는 수입허가의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며, 사업가는 상업적 가치를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관계나 이념 여하에 따라 매우 다르게 조건지어져 있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성장과정 중에 흡수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우리가
접촉한 문화로부터, 또 어떤 것은 학교교육이나 직업훈련 과정에서 배운 것일 수도 있지만, 단 두 사람도 똑같은 인식을 할 수는 없다. 어찌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개괄적이고 표면적인 일치를 이루게 해주는 공통인자들이 충분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세세한 면까지 모두 감안한다면, 지각에
있어서도 우리는 각각 스스로의 감옥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내면에서 솟아나는 지혜와 행복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관념에 집착하기를 단념해야 하고, 오랜 세월을 바쳐 배운 바들을 고쳐 새로이 공부해야 하며, 우리자신을 조건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하고,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의지적 행위의
무더기[行蘊]
우리의 의지 행위에는 세가지가 있으니, 곧 몸으로 하는 것, 말로 하는 것, 그리고
마음으로 하는 것, 이 셋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러한 의지 행위와 동일시한 나머지, 그 행위 뒤에 행위자, 말하는 자, 생각하는 자를
설정하고, “‘나’는 걷는다, 선다, 앉는다, 일한다, 쉰다, …, ‘나’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행위에 자기중심성이
크게 작용하여 무슨 일이든지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려 하고, 나아가 남들을 능가하고자 애쓴다. 오늘날 기록갱신의 열망은 광적일 정도여서
‘기네스북’에 한자리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국제적 수준에서 서로 겨루는 경쟁자들이 무수히 많다.
의지 행위를 일삼다 보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준비과정에 매몰되어버리고 만다. 갓난아기일 때는 어린애가 되기 위한 준비로 몸을 움직이고 말하기를 배우느라 버둥거린다.
어린애는 소년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그 다음에 다시 성공적인 청년이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술, 기예, 과학 지식 등을 습득한다. 청년이
되면 또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마지막으로 노년이 되어서도 우리는 준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노년기가 되면, 천국에 갈 준비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인간 개체의 이와 같은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서 ‘쩨따나(cetanā)’ 즉 ‘의도’와 같은 용어들도
쓰는데, 이 ‘의도’에는 다시 생명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밀어붙이는 도덕적 힘인 업(Kamma)을 이룬다는 뜻도
있다.
거듭되는 행동이 누적되면 마침내는 성격을 바꾸기에 이를 만큼 큰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의지적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다듬어갈 수 있다. 인도의 어떤 고전에 실려있는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느 날 숲에서 길을 잃은 두 젊은이가 운 좋게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한 은둔자를 만났는데, 그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은둔자와 헤어지기 전에 두 젊은이는 자기들의 운명을 점쳐달라고 졸랐다. 그는 마음내키지는 않았지만 두 젊은이가 몹시 간청하자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나서, ‘위뿔’은 일년 안에 왕이 될 것이고 ‘위잔’은 암살자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위뿔’은 한껏 의기양양해졌고
‘위잔’은 몹시 슬펐다. 집으로 돌아가서 ‘위뿔’은 자신이 곧 왕이 된다는 생각에서, 사람들에게 몹시 방자하게 굴었다. 한편, 직업이 선생인
‘위잔’은 성실히 자기 의무를 수행하면서 아주 덕이 높은 사람이 되어, 명상을 하며 소박하게 살았다.
반년쯤 지나서, ‘위뿔’이 그
친구를 찾아와 왕궁을 지을 터를 찾으러 가자고 하여 어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한참 좋은 자리를 물색하던 중에 ‘위뿔’은 금이 가득 든
항아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의 운명이 드디어 열리는구나 싶어서 몹시 기뻐했다. 두 친구가 들뜬 기분으로 금을 살펴보고 있는데 돌연 강도가
달려들어 그 금 항아리를 빼앗았다. ‘위잔’이 강도와 싸워 금을 되찾기는 했으나 강도의 칼에 어깨를 찔려 상처를 입었다. ‘위뿔’이 ‘위잔’에게
금을 나누어 가지자고 했지만, ‘위잔’은 자기는 몇 달 안에 죽을 것이라면서 사양했다. 혼자서 금을 다 차지하게 된 ‘위뿔’은 앞으로 자기는
왕이 될텐데 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그 금을 탕진했다. 반면 ‘위잔’은 명상과 겸손한 처신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일년이
지났는데도 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위뿔’과 ‘위잔’ 두 사람은 그 은둔자에게 다시 가서 왜 그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은둔자는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위뿔’은 방자한 처신으로 그의 좋은 운이 단지 한 항아리의 금으로 줄어들었고, ‘위잔’의 덕을 쌓는 훌륭한 처신은 큰
위력을 나타내서 그의 타고난 불운을 단지 강도의 손에 어깨를 다치는 정도로 줄어들게 했다는
것이다.
‘상카라(sankhāra)’라는 명사가 무슨 뜻을 나타내는지는 그와 짝을 이루는 동사의 의미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 뜻은 “의지적 행위가 육신을 이렇게, 느낌들을 이렇게, 그리고 지각들과 의지적 행위들과 의식을 이렇게 짓고, 형성하고, 형상화하거나
준비하는 것들(정신적 힘)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될 것이다. 개인과 개인을 구분하는 육체적·정신적 특징은 이 의지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 희망, 열의, 야심, 결심 같은 것들이
이러한 의지 행위의 범주에 드는 것이며, 우리는 ‘나’의 희망이니, ‘나’의 야심이니 하여 자기를 이러한 행위의 주체로 드러낸다. 어떤 두
사람도 이 점에 있어서 똑같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더 많이 얻으려고 애를 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비교적 무심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돈 챙기기를 더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교육에 돈 쓰기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또 이 두 가지가 다 무의미하다고 보고 권력과
명예와 명성을 좇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의지 행위라는 울 안에 갇혀서 우리는 홀로 자기 운명의 틀을 짜고 있다. 우리가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이 감옥의 울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또한 단념해야 한다.
의식의
무더기[識蘊]
의식이란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의식하게 되는 행위라고 정의하는 바, 이에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있다. 이 인지과정은 대단히 신속하고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기관의 기능을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 ‘나’는 냄새 맡는다, ‘나’는 맛본다, ‘나’는 느낀다, ‘나’는
생각하고 상상한다” 하는 식으로 자기와 동일시하게 된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어떤 감각대상물을 인지하고 또 즐기는 나·에고·자아·영혼이란 것은
없다. 감각의식[六識]이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으로 인하여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인과적 현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각 개인마다 감각기관은
다르게 만들어져 있다. 어떤 이는 장님이거나 시력이 약한가 하면, 어떤 이는 시력이 아주 좋다. 어떤 이는 청각장애인이거나 청력이 떨어지는가
하면, 어떤 이는 청각이 예민하다. 감각기관의 성능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능력 또한, 그 차이가 적다 할지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리의 감각경험은 같은 것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과거 경험과 기억의 차이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의 갈망과 포부에
따라서 다르게 조건지어진다. 이와 같이,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감각경험을 신용한다 해도, 어느 두 사람이 동일한 감각대상을 정확히 동일하게
경험하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두 소년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우연히 세 사람이 보고 있다고 하자. 만약 그 세 사람이 싸움을 하는 두 소년
중의 어느 한 쪽의 친구이거나 원수, 또는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라면, 그 세 사람은 그 싸움에 관해서 서로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게 해준다. 의지는 우리가 매일 겪는 모든 경험 배후의 의식을 형성하는 조건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펜을 찾을 경우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상 위에서 펜을 보고 바로 집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펜
바로 옆에 있던 컵은 보지 못하고, 다시 컵을 찾기 위해, 펜이 있던 옆이 아니라 엉뚱하게 다른 곳을 두리번거릴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가 무엇을 찾고자 할 때 우리의 의지가 그것을 미리 작정하는데, 그 때 의지는 미리 작정된 대상이 아닌 것들을 어느 정도 우리의 주의와
시계(視界)에서 배제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는 관심을 유발할만한 물건 한두 가지만이 우리의 기억 속에
기록된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관심사가 천차만별이어서, 동일한 상황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사물이 각기 다르다. 우리는 각자 심리적으로 특이하게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에, 감각대상에 대한 경험이 동등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감각경험에 있어서도 역시 우리는 자기만의 독방에 갇혀서 외롭게
자기만의 삶을 영위한다.
사람들은 개별적 인격이라는 감옥에 갇혀 격리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지극히 어렵고
또 복잡하다.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가둔 이같은 상태에서 헤어나려면 인격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개별적으로 또는 집합적으로 ‘나’나 ‘내
것’으로 간주하기를 그만 두어야 한다.
온상응(蘊相應 Khandhasaṁyutta 『상응부』Ⅲ, 137-138)을
보면, 강에 빠져 세찬 물살에 떠밀려가는 사람이 강에 드리워져 있는 풀이나 나무 잎새를 잡지만, 그것들은 쉽게 뿌리가 뽑히기 때문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자신인 줄로, 또는 자아인 줄로 잘못 알고 거기에 매달린다. 그러나
오온 그 자체가 덧없으며 견고하지 않아 그 사람을 지탱해주지 못한다. 오온에 매달리는 사람은 다만 비탄과 미망에 빠지게 될 뿐이다. 우리는 이
인격의 다섯 요소가 무상하고, 변화무쌍하며, 조건적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고, 그로부터 떨어지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개체성이라는 스스로
만든 사설감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 ‘떨어져 나옴’에 의하는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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