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소리없는 아우성 2013. 10. 21. 12:36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Radical Buddhism 

 

L. 프라이스 지음
         우철환 옮김

 

Leonard Price


(BODHI LEAVES NO. B 92)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레너드 프라이스 스님은 캔터키 주 루이즈빌에서 태어나 다모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배우이며 작가이기도 한 그는 여가를 독서와 선(禪)수행 그리고 불교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B.P.S.와 관련된 그의 저서로는 이밖에도  Bhikkhu Tissa Dispel Some Doubts(Bodhi Leaves B102),  To the Cemetery and Back (Bodhi Leaves B96) 등이 있다.

 


차 례

            근본주의 불교  7
            미끼 달린 낚시 바늘  19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37
            사월과 11월  47

     

     

    근본주의 불교


불교는 광대한 가르침의 체계로 서구권에 다가서고 있다. 또 불교를 받아들이는 우리들 서구인 역시 그 방대함에, 그 복잡함에, 그 정교함에 압도당하는 수가 많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부터 눈을 주어야 하고 무얼 붙잡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 정말 붙잡을 실체가 있기나 한 것인가?
역사에 비추어보면 불교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새로 생긴 신봉자들의 지각과 활력에 따라선 얼마든지 번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서구에서는 이 종교의 생명이 되는 진짜의 그 무엇 즉 불교의 근본주의적 성격을 포착하는 문제를 두고 바야흐로 우리의 지각과 활력이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모든 부처님들(주 1) 은 다만 길을 가리켜 주실 뿐이다. 그 길은 계    정    혜의 완성을 통해 고(苦)에서 벗어나는, 곧 열반에 이르는 매우 어려운 길이다. 그것은 실천도이다. 길이란 것은 그 길을 따라가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고, 아무리 의도가 좋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공허할 따름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정신적 오염원을 완전히 말려버려야 하고, 우리가 매여 살던 낡은 환상들은 산산이 부숴버려야 하며, 마음은 빛을 찾아 열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근본적인 길이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앞에 있는 것도 버리고, 뒤에 있는 것도 버리고, 또 그 중간에 있는 것도 버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릴 때에, 또 그 때만이 생사윤회의 바퀴는 축에서 튕겨져 나갈 것이다.

 

 

지칠대로 지치고 절망에 빠진 서구인들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진리의 울림을 듣는 우리들만은 그 가르침에서 `행동'에 옮기라는, 우리의 고질적인 게으름과 어리석음에 맞서 내면적 반란을 시작하라는 권유의 소리도 마땅히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 겨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또 행동에 돌입하는 일이 과연 지각있는 짓인지 재검토해보는 정도이다. 편하고 유혹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위험은 고라는 근본명제를 망각하고, 또 불교를 즐거운 사색놀이삼아 무기력한 상투어의 성찬으로 바꾸려 들기 쉽다는 점이다. 실천을 피하기 위해 찬미나 하면서 말이다. 참으로 불교는 합리적이고 끈기있게 기다려주고 지혜가 깊다. 그렇다고 우리가 겨우 불교의 반사광이나 쪼이고 있어야 할 것인가.

 

현상안주는 죽음이다. 만약 서구의 불자들이 관습과 소심함으로 자기들의 종교를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만든다면, 혹은 더 나쁘게 취미로 만든다면 그들은 본질을 놓치고 말 것이다. 우리 서구인들은 불교를 접하면 그것이 주는 최초의 선물, 즉 좀전처럼 헐떡이지 않게 된다든가, 조그마한 평정을 얻게 된다든가, 균형잡힌 삶에서 오는 쾌감을 누리게 되는 정도에서 만족하여 현상에 안주하게 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또 기왕에 먼 길을 나선이상 초장부터 무리하게 뛸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낡은 미망의 족쇄를 깨트리는 노력을 뒤로 미루어버리거나 아예 잊어버리게 되기 또한 매우 쉽다. 이처럼 우리가 개인적 또는 사회적 편의주의에 지나치게 순응하면 결국 우리는 이상을 값싼 것으로 만들고, 마음 흔들어 일깨우는 고성제(苦聖諦)의 깊은 뜻을 멀리 비켜나게 될 뿐이다. 심지어 불교의 업사상(주 2)  마저도 `세상사 그대로가 최선의 상태이다'라고 보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사 그 어느 것도 최선의 상태가 아니다. 만사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도 현상에 안주하고 있다면 이는 자신의 눈을 청맹과니로 만드는 짓이다. 청맹과니에게 안전(적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의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윤회란 우주적 회전목마를 타고 희희낙락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고통의 반복순환 가운데로 중생들을 끌고다니는 무서운 생사의 불가항력 그 자체이다.
"너 자신을 해방시켜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모든 삶과 사건들이 고라는 주제의 변주곡이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지속성도, 영구성도 없다. 공허하고 또 공허할 뿐인 허망의 그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란 것, 너나없이 모두가 그토록 많은 시간을 바쳐 지키고 키우는 그 자아란 순전히 허구다. "그것을 놓으라!"고 부처님은 이르신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주지 않는다. 바라는 대로 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노릇이다. 불제자는 세상에 그만 집착하고 고를 끝내는 길을 밟아나가야 한다. 문제의 근원은 갈애이고 그 근본적 해결은 지혜를 통해 갈애를 부수어버리는데 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성성한 진리는 우리가 정면으로 직시하면 당면문제가 무엇이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드러내준다. 모든 불자들이 집을 떠나 동굴속에서 끙끙거리며 깨달음을 얻고자 땀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길이 반드시 근본적 해결인 것일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 겁주는 양도논법이 아니다. 부처님은 상대가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가르치셨다. 궁극의 종점은 누구에게나 똑같겠지만 그 길을 나아가는 정도는 각자의 근기에 달렸다. 부처님의 법은 우리를 열반이라는 안전처로 이끌어 줄 것이며, 또 도중에도 우리를 격려    보호해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늘 명심하고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부처님의 철저한 근본주의를 이해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그러하지만 유독 서구인들에게 더 어려울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그 근본주의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쓰게 되는 이유는 그 가르침이 이제 막 서구 문화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고 또 그 앞날이 아직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서구불교로서는 중대한 국면인 셈이다. 이런 때인 만큼 우리는 불교를 기본 바탕에서부터, 즉 근본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하다가는 종교는커녕 난방용 슬리퍼를 신고는 꾸벅꾸벅 졸다 삼류 종교인으로 떨어져 버리기 십상이다. 올바로 이해하면 사성제(四聖諦)는 우리 마음을 밑바닥에서부터 온통 바꾸어 놓는다. 우리를 행동하도록, 해탈의 이상을 추구하도록, 여행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 되든 상관않고 나아가도록 만든다. 불교는 진실로 세속의 흐름을 거슬러 나아가는 것이기에 제자들은 비상한 정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정력을 얼마큼 발휘하는가는 결국 개인의 선택과 능력에 달렸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반응이 요청되고 `있다'는 점, 어떤 밟아야 할 길(도정, 道程)이 존재 `한다'는 점, 그리고 목표는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점 등을 인식하는 일이다.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서구 불자들은 불교를 한낱 세속 개혁의 도구로, 또는 철학적 희론의 놀이터, 또는 비교(秘敎)적 도락으로 전락시키는 추세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기 고가 있고 고의 멸(滅)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일시적 유행이나 현상안주, 또는 충동적 주지주의 즉 진리를 갈구하면서도 밥은 제쳐두고 차림표만 먹어대는 주지주의에는 안전함(적정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해탈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앞에 있는 것을 버리도록, 뒤에 있는 것을 버리도록, 또 그 가운데 있는 것도 버리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불교의 본질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덧없고 비참하고 허망한 현상들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짓거리를 멈추는데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이 충고를 받아들여 실천하는 불자는 이 허구적인 세계의 기반이 무너져내리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딱부러지게 말들은 안해도, 모든 인간은 행복이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다. 일견 자명해 보이는 이 피상적 믿음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모든 행위를 한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들을 손에 넣는 일에 전심전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우리에게 향락, 만족, 또는 성취감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더할 나위없는 소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서로에게 묻는다. `당신은 인생에서 무얼 얻고자 원하느냐'고. 이 질문에는 행복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고 그리고 그대로 좇아갈 수만 있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불행하게도 경험은 이론을 뒤엎기가 일쑤이다. 우리가 애타게 구하는 그 잡다한 것들이 도대체 손에 잡혀주지를 않으며, 어찌어찌 천신만고해서 붙잡아봐도 기대했던 만큼 즐거움을 주지도 않는다. 계속 붙잡고 있을라치면 점점 못쓰게 되고 말아 결국 비애만 안겨준다. 그러면 우리는 위안을 찾기에 급급하여 서둘러 다른 유혹 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리고, 이렇게 해서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는 이 만족감 탐색이 정확하게 이행되기만 하면, 올바른 대상만 골라내기만 하면, 또 행운이 조금만 거들어준다면, 그땐 우리를 비켜나가기만하는 그 영원한 행복을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으리라 믿어마지 않는 것이다. 번번이 운명에 호되게 당하면서도 우리는 끈질기게 되뇌인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어." 그리고는 새로운 재미를 찾아 눈을 부라린다.

 

 

하지만 정말 그 모든 고생이 보람있는 것일까? 연못 수면 바로 밑에서 먹음직한 벌레 한 마리가 까딱거리며 배고픈 물고기의 주의를 끌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눈깜짝할 사이에 물고기는 그 벌레를 삼켜버린다. 그리고나서야 낚시바늘을 발견한다. 바늘은 내장을 찢으며 파고들고 공포, 고통, 끝내는 죽음을 가져온다. 그 벌레는 매력적이지만 물고기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의 본질이 바로 그러하다. 눈    귀    코    혀    몸    뜻의 대상들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긴 하지만 행복보다는 불행을 안겨줄 뿐이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과오가 대상을 잘못 선택한데 있다기보다는 애시당초 선택행위 그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점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원래가 흠투성이고 고와 연관된 것이며 의지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이세상의 기만적인 감각적 쾌락, 술이니 재산이니 장미빛이니 하는 따위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해도 우리가 이런저런 감각적 대상물이 바람직하다는 그릇된 견해를 고집하는 한 안전한 곳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현상의 본질에 대한 명백한 이해가 없이는 우리의 추구는 처음부터 도로에 그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첫째 과업은 이 우주가 결코 우리들의 재밋거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상 거기서 끌어내는 류의 즐거움이란 것들이 헛된 것이고 무상하며 관심을 가질 거리도 못된다는 사실을 정시(正視)하는 일이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 즐거움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은 반면, 모든 세속적 쾌락은 고와 단단하게 맺어져 있고, 고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종당에는 고에 굴복하고만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따라서 쾌락을 얼싸안는다는 것은 바로 고를 끌어안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갈애가 이세상에 가짜 영상을 끊임없이 투사하는 바람에 우리가 주변의 유혹적인 대상을 실제로 소유할 수 있고 거기서 얼마든지 행복의 진수를 우려내어 만끽할 수 있다고 믿게끔 되기 때문이다. 지혜가 개입    차단시키지 않으면 갈애는 계속 우리를 이 실망에서 다른 실망으로 헤매게 묶어 둘 것이다. 감각적 쾌락이라는 미끼를 물다가 낚시에 꿰이고마는 고통을 벌써 수없이 겪어왔건만 물을 가르고 옴질옴질 다가오는 새 벌레를 볼 때마다 부주의한 우리는 매번 흥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쾌락과 고통이 한덩어리가 되어 끔찍하게 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 둘을 어거지로 갈라놓으려 무모한 노력을 하는데 있지 않고, 그 오염덩이 전체를 초연하게 멀찍이 바라보는데 있다고. 모든 현상은 한결같이 덧없음[無常]    만족스럽지 못함[苦]   실체가 없음[無我]이라는 특성을 공유하는 만큼, 어떤 것은 마음에 든다 어떤 것은 싫다고 가려내는 일은 소용없는 짓이다. 사물을 좋고 싫고의 관점에서 보는 마음가짐은 버리고, 대신 `마음챙김[正念]'이라 불리는 초연한 관찰이 그 자리를 메꾸도록 해야 한다. 미끼에 낚시바늘이 숨겨져 있는 한 식욕을 누르는 길말고 어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어야함은 사성제의 논리적 귀결이자 요청이다. 그런데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사람들조차 이론으로부터 실천에로 나아가는데 대해선 완강한 저항을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갈애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힘이 너무도 끈끈하고 질기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하면 진실과 환상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재빠른 철학적 희론의 발놀림으로 양다리를 걸치고 싶어지는 수가 많다.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니까 절도있게 즐기기만 하면 괜찮지 않느냐는 생각도 있을지 모른다. 그럴 법한 말이지만 그러고 있는 사이에 어떤 갈애가 마음속에 끼어드는 것을 정당화하기 일쑤일 것이다. 그 어떤 경험이든 그것을 인간적인 것이라거나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그 사람은 무지의 질곡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즐거운 느낌, 즐겁지 않은 느낌, 그 어느 쪽도 아닌 중립적인 느낌이 항상 일어나고 있다. 그것들은 수시로 왔다가 간다. 그것들은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지 추구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추구 또는 갈애가 바로 고의 바퀴를 계속 돌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예로 일반적 통념 한 가지를 들어야겠다. 불교를 잘못 이해하다보면 우주가 대단히 조화롭게 비쳐짐으로써 각 개인의 생을 미화시키게 되는 엉뚱한 경우이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사물에다 즐겁고 편안한 얼굴을 씌우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이 고에 지배되고 조건지워진 존재의 궁극적 무가치성을 각 개인에게 일깨우려 하셨기 때문이며, 또 지금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조화가 있다면 그것은 사정없고 비인간적인 인과의 법칙일 뿐, 시인들이 즐겨 말하는 저 지복의 `조화로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예로 들 수 있는 잘못된 관념은 감각적 쾌락이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나마 가치있는 노력, 가치있는 목표의 일부가 된다면 전속력으로 이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이는 이기적인 합리화이다. 비록 세속적 갈망이 개념상으로는 대단히 건전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은밀한 가운데 갈애를 실어나른다면 건전성은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합리화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로 통찰력을 키워 무언가를 누리고 소유하고 제것으로 삼는 자아란 개념 내지는 견해를 더이상 지속시키지 않고 끊어낼 필요가 있다. 고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아와 세계 그 두 가지로부터 공히 초연하다. 그는 어떤 보상도, 알아주기도 바라지 않고 자신과 남들의 안녕을 위해 행동한다. 그는 결과에 무관심하며, (과정에서도)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휘둘리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의 유혹과 위험성을 생각해보면 우리들 중 대다수가 쾌락에의 탐닉을 논리적 근거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다'는 맹목적 충동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순진무구한 측면이 없지도 않은 기쁨에 그다지도 해악이 들어있다는 말인가고 우리는 핑계를 댄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해악은 감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감각에 매달리고 그래서 사로잡힌듯이 집착하는 미혹된 마음 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지런히 정진하는 불자라면 마땅히 좋다 싫다하는 생각을 깡그리 넘어서고 물리쳐내고, 그런 생각은 품기조차 그만두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직관지(直觀智)의 그 풍요로운 장에 나아갈 작정이라면 더 일러 무삼하리오.

 

 

자, 그럼 우리가 미끼달린 낚시바늘의 위험을 인정하고, 그리고 들떠서 갈애하는 마음이 고의 원천이라는 데도 이의가 없다고 하자. 그런데 우리의 실제행동은 어떠한가. 흔히 "어쩔 수 없어!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구."라고 투덜대기가 일쑤이다. 쾌락을, 재미를, 만족감을 게걸스럽게 탐하는 자신의 식욕을 이겨보려고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무력감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집착에 오래 길들여진 마음은 단순한 이론적 납득만으로 집착을 그만두지는 못한다. 속절없이 행복을 찾아 이런저런 경험을 입질하면서 계속 제갈 데로 간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항용 그렇듯이, 이럴 때 문제는 바로 자기기만이다. 말로는 감각탐닉의 위험성과 절제의 이로움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지만 막상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건대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지혜는 결단코 마음의 때와 양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들과 타협하려든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이 설하신 실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인 것이다. 머리로는 갈애와 집착이 고로 이끌어간다고 인정하지만 아직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말로만 이해할 뿐 직접 체험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두손들고 자신의 나약함을 변명하고만 있을 일은 아니잖는가?

 

 

우리가 미끼달린 낚시바늘의 유혹에 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정말로 알고 있다면, 그 유혹을 물리쳐야 마땅하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굳이 완강한 금욕적 극기를 권장하신 것은 아니다. 불자는 이 문제를 재치있게 다루어야 한다. 고에서 벗어나는 길은 감각적 쾌락을 없애버리거나 부정하는데 있지 않고 체계적인 마음챙김 공부를 통해 감각적 쾌락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 있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대개 이해득실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그 일이 전개되는 과정의 이치와 역학관계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우리는 오로지 습관에 강요당하여 태고적부터의 파도에 계속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 곤두박질 걸음을 멈추려면 마음챙김을 계발    적용하는 것이, 그리고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습관과 욕망들에 대해서마저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훈련을 쌓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명상을 통해 강화된, 한결같이 고른 마음챙김은, 마음이란 것이 별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생각과 느낌과 인식과 정신적 접촉[意觸]의 폭류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고, 실제적이라거나 지속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안정성도 없는 폭류인 것이다. 우리가 막연히 `외부세계'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작도 끝도 없이 무서운 속도로 생겨났다 꺼져버리면서 온통 변하고 있을 뿐인, 무상한 현상의 흐릿한 얼룩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탐낼만한 대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라지고 없다! 이거다 싶은 순간 이미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다. 탐을 내는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없다! 생각이 생각을 잇고, 결과가 원인을 잇는 것이  속빈 거품의 뒤죽박죽 엉킴같을 뿐 탐욕내는 `자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진리들을 똑바로 분간해내는 것이 바로 마음챙김이 하는 일이다. 경험을 검토분석해서 마침내 `영원한' 것이 무상한 것으로 이해되고, `낙(樂)'이 고로 이해되며, `자아'는 공하고 비실재적인 것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모든 진리가 다 그러하지만 이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속성은 머릿속 궁리로만 깨달을 일이 아니고 반드시 직관지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참을성을 가지고 치우침없이 마음챙김 공부에 임하면 이 공부가 우리를 그러한 지혜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갈애를 즐기느라 정신 못차리는 사람은 거꾸로 오해한 고(苦)와 상상속의 낙(樂) 사이에서 계속 비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곧바로 알아차리는 사람은 미끼를 단 낚시바늘을 피할 것이며, 감각이 벌이는 현란한 요술쇼 이면에 감춰져 있는 실재의 맨사실들을 찾아나설 것이다.

 

 

감각적 쾌락이라는 미끼달린 낚시바늘을 피한다해서 ― 때때로 그런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인생에서 모든 살맛을 다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릇된 만족을 버리고 자유에서 생겨난 진정한 행복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세속적 즐거움도 떨어져 지켜보기에 중도적 입장에서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현명한 불자는 굳이 어둠속에 들어가 머물면서 모든 경험의 어두운 면을 확인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것이 즐거움이면 즐거움이라 알아차린다. 괴로움이면 괴로움으로 알아차린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으로 알아차린다. 그 보이는 외양이 어떠하든간에 그는 그것을 마음챙겨 주시할 뿐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다가오는 대로 생을 소박하게 즐긴다. 그러는 동안 그는 낚시바늘과 낚싯줄의 위험을 피하게 되고 고의 끝을 향해 거침없이 항해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거듭 마음챙김을 유지하라고 권유하신다. 세상은 탐    진    치로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解脫]란 쟁취되는 것이지 결코 부주의하여 마음을 챙기지 못한 채 빼앗기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성취하여 누리는 사람이란 바로 마음챙김, 정진력 그리고 장미에서 암종병(canker, 불교용어로는 번뇌)을 볼 용기를 지닌 사람일 것이다.

     

 

쉽게 믿는 경신과 허약한 낙관주의가 우리 삶의 어두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어디없이 정신적 쇠퇴의 징후가 두드러지고 있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여전히 새로운 장난감들에 넋이 빠져 있고, 여전히 허풍떠는 사기꾼들의 새로운 헛소리를 쉽사리 받아들이고 있고, 또 여전히 다음번 미끼를 위해서라면 현재의 지금 이 귀중한 순간을 내팽개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의 책이나 치료능력이나 종교가 신통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소문만 돌아도, 듣기가 무섭게 그 새로운 천지를 향해 달려가는 인파가 일으킨 먼지로 태양이 가려질 정도이지만, 곤혹스럽게도 결과는 뻔해서 여전히 우둔한 무리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따름이다. 정말 우리가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흥겨운 자극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대답이 쉽게 나올 리 없다. 문제를 검토할 수 있을 정도로 진득하니 고요히 앉아 있는 경우는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결국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 짚어보는 정도에서 재앙부터 피하고 볼 양으로 마냥 움직이고만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기를 잘한다고 해서 회의적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쉽사리 믿는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곧 싫증을 낸다. 오늘의 우상을 쓰러뜨리는가 하면 그 부서진 조각을 가지고 내일의 우상을 열심히 조립한다. 우리는 의심이라는 강기슭을 오르락내리락한다. 서로를 격려하는 고함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지만 막상 강물에 발을 담궈보니 물이 찬 것이다. 이내 저 아래쪽에 건너기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재빨리 결론내리고 발을 빼버린다.

 

강물은 언제나 차가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 지평선 너머로 어떤 환상을 보았다 하면 그 차가움에 잔뜩 움츠러든 무리들은 `이' 장소에서 더이상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여기 홀로 머물며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기를 거듭해야만 우리의 변덕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될 것이며 회한의 심정에서 자문할 것이다. `늘 이랬단 말인가?'하고. 우리가 불자라면 `그렇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고, 다시 비틀거리고 주저하며 회오하기를 되풀이하며 끝없이 버둥거려 온 풍경화를 두고 윤회라 부른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의 순환을 생성과 소멸이라는 아득한 우주적 체계의 일환으로 간주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윤회는 여기 이 지루한 순간에도, 여기 동요하고 남이 눈치채지 못하는 마음속에도 태풍처럼 격렬하게 회오리치고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무명(無明)에서 갈애가 생기며, 갈애에서 이 모든 불안과 고통이 생겨난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욕망에서마저 자기를 속이고 있다. 우리의 쾌락추구, 또는 `자아실현'이라는 것의 추구 역시 절망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악화일로의 현재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우리는 무분별한 탐욕심으로 미래를 향해 덤벼든다. 하지만 그 미래는 어디까지나 가공의 소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내 놓쳐버리고 예의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게 될 뿐이다. 그러나 거대한 윤회의 바퀴는 여전히 돌고 있고, 지금까지 돌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돌 것이다. 스승을 제대로 만났다거나, 절집을 제대로 찾았다고 해서, 또는 바른 수행법을 알게 되었다 해서 윤회로부터의 해방(구경해탈)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릇된 방편, 일시적 열광, 인습따르기, 상투적인 언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명부터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자기변명이야말로 윤회의 바퀴에 윤활유를 치는 짓이다. `아, 부처님을 직접 만날 수만 있었더라면'하고 우리는 한숨짓곤 한다. 이토록 헛되고 어리석을 수 있는가. 부처는 육 척의 육신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번뇌를 부숴버리는 데서, 변명과 회피와 고의적으로 무지하게 굴기를 그만두는 거기에서만 부처를 볼 수 있다. 거짓과 참을, 천박한 것과 심오한 것을 구별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한다면 부처의 길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툭하면 쉽게 믿음에 빠졌다가는 그보다 더 빨리 회의에 빠지며, 또 미적지근하게 수행이랍시고 하다말다 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다 보내고 나면 어떻게 그 차갑고도 쓸쓸한 무지의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차라리 거짓되고 하잘것없는 안락함을 벗어던져버리면 우리는 순수한 알몸이 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그러할 것이다. 정말 꼭 그런 상황이 되어야만 부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바로 버림의 종교이다. 옳지 못한 생각[邪見], 옳지 못한 말, 그리고 옳지 못한 행동의 버림말이다. 우리가 조잡하기 짝이 없는 환상들을, 그리고 마음속의 잡다한 도피처를 버릴 때 우리는 발가벗은 자신을 찾게 되고 비로소 일그러지지 않게 세상을 볼 준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는 무상    고    무아의 진실성을 말로만 받아들였던 반면, 이제 겨우 우리는 이들 진리를 똑바로 인식하고 우리가 당면한 곤경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별생각없이 항상 듣던 `부처님들[諸佛]은 길을 가리켜 주실 뿐이다'라는 말이 그제서야 참신한 의미로 우리의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불교는 스스로를 도울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우리가 그처럼이나, 그토록 빈번히 헤매어온 그 길고 텅 빈 이곳 강변에서 마침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 세상이 어리석고 사악해보일지 몰라도 미망에 빠진 우리 자신의 마음만큼 어리석고 사악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냉소라는 뼈다귀로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러니 만족을 모를 수밖에. 우리는 나쁜 짓을 새록새록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몰래 그것을 추구한다. 우리는 즐거운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끊임없이 손쉬운 길만 골라 따른다. 그런데 어쩌다 두려움에 휩싸이는 밤이면 어찌할 줄 몰라 사방을 돌아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나도 해볼 만큼 하지 않았던가?"라고. 하지만 밤의 적막은 침묵으로 답할 뿐이다. 어쩌랴, 새로운 행복의 유령을 찾아 비틀거리는 걸음을 떼어놓는 길밖에. 이래서 우리는 윤회의 바퀴를 한번 더 돌리고마는 것이다.

 

경신(輕信)은 믿음이 아니며, 회의주의는 지혜가 아니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는 세상사 다가오는 대로 깊이 숙고하면서 해로운 것은 피하고 유익한 것은 받아들이는 가운데 균형잡힌 마음을 결코 흐트리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를 대신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법의 뗏목을 타고 윤회의 강을 건너간다. 그 사람들이 여느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반드시 머리가 명석해서가 아니라 소박하고 단순한 견딜성, 설령 시간이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된 경로를 밟아나가겠다는 각오가 서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우리도 진리를 확실히 하면 얼마든지 그들처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체시키는 것은 무지가 부리는 사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고의 청정과 자유인 열반을 무한히 멀리 있고 도달하기가 끔찍이도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처님을 너무나도 오래 전에 떠나신 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열반이란 가깝게 두려는 자에겐 가까운 것이고, 부처도 우리가 참된 법을 참되게 지닐수록 그만큼 가까이 있다.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일은 부서져가는, 어차피 망가지고말 장난감을 놓아버리고 홀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포기의 긴 강변으로 내려서는 일이다. 그 상쾌한 고독에서 부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몸은 지혜이고 얼굴은 자비이고 손은 길을 가리키는, 우리 마음속 깊숙이 숨겨진 청정을 똑바로 가리키고 계시는 부처님 그 분을.

     

 


초봄은 죽음을 생각하기에 적절한 시기이건만 애석하게도 이런 건전한 시도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봄이면 제일 먼저 피는 크로커스와 앉은 부채꽃이 살금살금 햇빛을 향해 나올 때 우리의 따분하던 마음도 담대해지고 만물의 재생을 반기게 된다. 우리는 또 한번 겨울을 이겨냈고 다시 기회를 얻은 이상 맨발로 정원을 어슬렁거리게 될 것이다. 음울한 시절, 대지도 마음도 죽은 듯이 얼어붙는 불모의 계절은 갔다. 이제 우리도 만물의 신록대열에 참여할 것이다. 구구대는 공원의 비둘기들도 ― 지난 겨울에는 초라하니 귀찮기만 한 존재들이었는데 ― 우리 마음에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화씨 칠십도의 기온에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기대도 크게 부풀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턱을 치켜올리고 보도를 메우며 봄의 축전을 벌이지만 우리가 정작 봄이 오는 데에 무슨 도움을 주기라도 했더란 말인가. 여기엔 일종의 자기기만이 들어 있다. 이 계절에 태양이 더욱 따사롭게 비치게 된 것이 어디 우리가 한 일인가? 설사 태양이 더이상 빛을 내지 않게 된다해도 우리하고 의논이나 하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봄의 광상곡을 즉흥으로 연주하는 철학자의 환상에 빠질지 몰라도 실은 저 비둘기보다 자립성을 더 과시할 입장도 못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월이 우리 앞에 펼쳐주는 꽃들에 현혹되어 그 꽃들이 아름다운 것을 알아차린 것에 스스로 대견해한다. 우리는 계절의 아름다움속에서 진정으로 과거를 되돌아볼 계기를 보아야 할 터인데도 오히려 미래를 동경할 특권만 찾고 있다. 한가닥 뉘우침도 없이 우리는 탐닉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이 목전의 신성한 자연 진리에 일치되고 있다고 믿겠지만 실은 현재 순간으로부터 피하기를, 그리고 오지도 않은 미래, 언젠가 (꽃들이) 만개할 약속의 정원을 갈망하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차리리 이 찬란한 계절에 우리 마음을 소멸과 죽음 쪽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웬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친구 같으면 깊어가는 십일월에 한가로이 거닐며 생명력의 덧없음을 말할 것이 틀림없다. 아, 시들어버린 풀잎, 납빛 하늘, 덧없는 행복이여! 생각할수록 조락의 불가피성에 압도되면서 나름대로 감동에 젖는다. 그런데 바로 그 친구가 수선화가 피면 가장 정색하여 젊음과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봄의 한가운데 서서 바로 꽃봉오리가 꽃을 맺기 위해 죽어가며, 꽃은 다시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가는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는 그 늠름한 정신은 어디에서나 찾아야 할까? 한 해가 저물어갈 때 눈보라를 뒤집어쓴 장미를 보고도 위축되지 않는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맑을 때나 궂을 때나 항상 평온하게 지내는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 모든 것은 침울한 십일월에만 사라져가고 있는 게 아니라 신록의 사월에도 사라져가고 있다. 소중한 것이든 달갑잖은 것이든 관심없는 것이든 모두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계속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부패에 유예를 용인하지 않는다. 자연의 자기전개가 다름아닌 계절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따뜻하고 밝은 것만 좋아해서 이 달은 우울하다, 저 달은 즐겁다는 등 습관적 착각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사월을 사랑하는 것은 십일월을 그만큼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것이다. 좋아하다 이내 싫증내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다. 피할 수 없게 되면 마지 못해 진리를 한모금 들이켰다간 핑계거리가 생기자마자 대번에 내뱉어버리는 짓거리는 마치 포도주 감식가인 양 맛보기 삶만 살고 있는 꼴이다. 우리가 계절이라는 악기로 감미롭다가 잔인해졌다 하는 희망의 변주곡을 되풀이 타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우리 때문에 계속 불타고 있다. 미망의 횃불로 거기에 불을 지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길을 식히고, 우리의 계절타기 대신에 현상들이 제멋대로 내닫는 경주가 되도록 이 세상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현상들의 경주를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삶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 모든 현상들은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간다. 이 보편적 흐름에 마음챙겨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잠시의 평화조차 누리지 못할 것이다.

자, 때는 봄 파랑새가 지저귄다. 그렇다고 우리도 동화  파랑새 의 주인공들처럼 파랑새를 찾는답시고 패거리를 모아가지고 무덤이나 찾아다니고 있어야 하겠는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그저 숨만 계속 쉬고 있으면(호흡관) 된다. 공기가 달콤하다고? 그래 달겠지. 비가 그치고 따사로운 햇살이 버드나무 사이로 비스듬히 비쳐든다고? 그것도 좋겠지. 그러나 우리는 다만 감관을 제어하며(주 3) 성성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도록 하자. 괴로워 할 것도 전전반측할 것도 없다. 겨울을 탓할 것도 봄을 찬미할 것도 없다. 우리와는 무관한 저들의 오고감이 아닌가. 죽은 풀잎, 잠자리, 뇌우, 눈            . 그 모두 제 갈 데로 흘러가고 있는데 특히 그중에 어느 장면이 좋으니 궂으니 하고 있을 일이 아니잖는가? 실재는 지적으로 파악되는 게 아니다. 마음이 집착놀음을 그만두면 저절로 드러난다. 놓아버리는 사람이 길 위에 확고히 선 사람이다. 그 사람은 모든 계절을 실속있게 누리고 살지만 그 어느 계절에도 매이질 않는다.

     

 

주(注)

1) 석가모니 부처님뿐 아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을 일컫는 말. 과거 칠불(七佛)을 지칭.

2) 업사상은 강조되는 역점에 따라 다양한 사고방식을 유발하게 된다. 자업자득 쪽을 강조하게 되면 현실의 고를 합리화시키게 될 수도 있다(힌두교에서 카스트 옹호에 이용되듯). 또 관념화하면, 모든 것이 업보이므로 이세상 질서 자체가 더할 나위없이 정연한 업의 체계로 조화롭고 완벽한 상태의 구현으로 비치게 된다. 다시 실천적 입장에 서면 업은 의지행위이고, 인간은 업의 주체이므로 법을 바로 알아 올바르게 뜻을 세우고 실천하면 인간은 향상을 성취, 운명의 계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3) 원문은 Let us sit on the porch and be alive인데 sit on은 조사하다 억누르다의 뜻이 있고, porch는 현관인 동시에 스토아학파의 제논이 제자에게 극기주의(stoicism)를 가르친 곳임. 따라서 이 말은 불교의 감관제어를, 즉 육처의 입구(현관)를 조사하여 식의 출입을 억눌러 육근을 청정하게 지키는 마음챙김[正念]의 수행을 서구 전통을 빌려(격의, 格義) 표현하고 있다.

 

The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 잎    서른 하나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1996년 12월 10일 1판1쇄 인쇄
1996년 12월 20일 1판1쇄 발행

지은이  레너드 프라이스
옮긴이  우철환
펴낸이  한기호
펴낸곳  도서출판 고요한 소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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