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교리

4-5 연기의 진리와 공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1:05

법성(法性) - 연기의 이치


한역의 연기(緣起)에 해당하는 범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프라티탸사무트파다와 프라티탸사무트판나가 그것이다. 앞의 것은 '의해서 생기는 것' 또는 '생기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고 뒤의 것은 '의해서 생긴(과거분사)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한번 무명과 행의 관계로 예를 들면 무명이 '의해서 생기도록 하는 것'이고 행은 '의해서 생긴 것'이 된다. 이 경우 의해서 생긴 것(연기된 것, 연생한 것)은 또한 별개의 연으로써 없어진다는 (소생한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이해가 전제된다. 따라서 무상 한 것, 무아한 것, 괴로움을 가져 오는 것은 이렇게 생
멸이 있는 것이며 '연에 의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대해 '연에 의해 생기시키는 것'을 뜻하는 앞의 것에는 인이 되는 삼스카라와 같은 의미로써 연기의 법칙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율장>의 12연기 설명부분에는 없지만 한역과 범어 문헌(四衆經)에는 12연기 설명에 앞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형구가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그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그것이 생기며(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므로 그것이 없고(此務故彼無)
이것이 없어지므로 그것이 없어진다(此滅故彼滅)"



이것은 연기의 법칙을 제시한 것이다. 연기를 설명하는 아함경 가운데는 '연기라는 법칙'은 '연기한법'과 대비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제법에 대한 규칙이다. 여래가 출연하든, 하지 않든 이 기본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법으로서 확립돼 있고 결정돼 있다. 즉 그것은 '연기에 의한다'는 것이다."


'연기에 의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명을 연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의 고뇌가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연기설의 기본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연기란 '행' '유위'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결부돼 있으며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는 연기의 이법을 나타내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연기가 '제법에 대한 규칙'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규칙이라고 번역한 다르마타는 단독적으로는 '법성(法性)'이라고 번역된다. 법성이란 '법의 본성'이라는 뜻으로 연기된 제법에 적용되는 보편적 성질, 즉 '연기되는 것'을 지칭한다. 이를테면 진리로서의 법(이법)은 법성이다. 법성은 연기의 이법을 그 내용으로 한다. 불교의 교리인 '무상이라는 것(무상성)'과 '무아라는 것(무아성)'도 역시 진리의 본성(법성)일 뿐이다.

그런데 전혀 똑같은 연기의 이법, 무아에 대해 대승불교에서는 새롭게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공성이란 '일체개공(모든 법은 비었다)'이라는 명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자성이란 존재자체가 항상 동일한 성질을 유지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
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불교는 무아, 즉 무자성이다. 동시에 '자성이 없다'는 판단은 '법에는 나름대로 고유한 성질(자성)이 있다'는 소승불교 유부의 주장에 대한 대승 불교의 반대입장까지도 포함돼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법성은 또한 법계·진여·실제·진실등이라고도 부리운다. 여기서 '법계'란 제법의 근원 또는 본질을 말한다. 제법의 근원이란 곧 연기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교법)의 근원이 되었다는 뜻에서 '성법(聖法) 출생의 인'이라고 한다. 제법의 본질이라는 것은 법성의 경우와 같이 '계(界)', '본
성(本性)', 자성(自性)'과 같은 뜻이다.또 '진여'는 '여래'에서 설명했듯이 '그렇다는 것'이란 뜻으로 사물의 진실을 자세, 즉 연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진실한 자세란 허망하지 않는 것, 전도되지 않는 것, 체성(諦性)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연기밖에 없다.
실제(實諦)는 '존재의 구극'이라는 뜻이다. 구극적인 상태, 절대성이라 해석해도 좋다. 마지막으로 '진실(眞實)'은 '그것이라는 것'이라는 뜻으로 진여와 거의 동의어라고 해도 좋으나 '진실을 본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진실을 본다'라고 하면 곧 부처님은 가리킨다. 또 '진실의 특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법성과 동의어다. 한역불전은 이것을 '제법(諸法)의 실성(實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진리

대승불교는 이상과 같은 용어에 의해서 그 구극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한다. 즉 대승불교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사물을 이해하는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것도 실재로 인정할 수 없지만 그와 같은 진리(일체개공) 자체를 절대적 가치(일종의 종교적 실재)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소승불교에서 볼 수 없는 대승의 독자성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 실재관은 이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을 '진리와 일체가 된 자'라 하여 법신이라 부르게 된다. 또 '법계'를 동일시하는 점에서 부처님에게 절대성, 구극적 실재성을 부여하게 된다. 아울러 법계에는 '법의 요소'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라는 의미가 포
함돼 있다. 이것은 부처님쪽에서 말하면 부처님이 곧 전우주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된다.
한편 법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모든 존재는 진리의 현으로써 실유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단 후자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눈을 통해서 본 전존재·우주·세계·중생이며 결코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제일의제와 세속제

대승불교 진리관의 두 번째 특색은 진리표현에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깨달음의 체험은 타인에게 전할 수 없다. 그것은 언어 표현을 초월해 있다. 교훈으로서의 법은 그 자내증의 체험을 언어로 표헌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방편이고 알려 주기 위한 수단이다. 즉 언어로 표현된 법은 이의적(二義的)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깨달음 그 자체를 최고의 진리라는 뜻으로 제일의제(第一義諦)라 부르고 교법을 언설제(言說諦) 즉 세간적 진리라고 칭한다.

그러나 '세속'이라는 말은 나중에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세간적 진리는 진실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교설이라도 진실의 가르침과 방편의 가르침을 나누어 앞의 것을 제일의제라고 하는 해석도 생겼다. 제일의제라고 하는 것은 진여·법계 등의 말과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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