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입장
부처님이 취한 입장이랄까 문제의식이라는 점에서 늘 언급되는 14무기(十四無記) 또는 12사치기(十二捨置記)라고 불리우는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한 해답거부이다. 여기서 '무기'라는 말은 어떤 문제에 대해 해설 또는 해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열 네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A) 세계는 ①상주이다 ②상주가 아니다 ③상주 또는 무상이다 ④상주도 무상도 아니다.
(B) 세계는 ⑤유변이다(공간적 한계가 있다) ⑥무변이다 ⑦유변 또는 무변이다 ⑧유변도 무변도 아니다.
(C) 신체와 영혼은 ⑨하나이다 ⑩별개이다
(D) 여래(인격적 완성자)는 사후에도 ⑪존재한다 ⑫존재하지 않는다. ⑬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 ⑭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열 네가지 문제는 한마디로 세계의 기원과 사후의 운명 등 모두 일상적 경험의 범위를 넘어선 문제들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그것들이 인생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답을 거부하고 있다.
아함 속의 《전유경(箭喩經)》에 따르면 제자 가운데 마룽가야푸타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이런 문제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늘 이상의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그 젊은 제자는 끝내 대답을 회피한다면 자신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존경할 수 없으며 수행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 부처님은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그를 깨우쳐 주었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찔렸다 하자. 즉각 의사가 왔는데 만일 화살에 맞은 사람이 '누가 이 화살을 쏘았는가. 그리고 그는 큰 사람인가 작은 사람인가. 피부는 검은가 흰가. 그가 사용한 화살은 어떤 것이며 활줄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이것을 알기 전에 치료해서는 안된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것들을 알
기 전에 죽어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독화살을 뽑고 응급치료를 하는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계가 유한이든 무한이든 현실적 인생에는 생노병사가 있고 우비고뇌가 있다. 그것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극복하느냐, 나는 그것만을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그런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 답을 하는 일이 수행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답으로써 고뇌를 극복하고 정각과 열반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목적하는 바는 현실적으로 인간이 안고 있는 고뇌를 어떻게 하면 극복하느냐 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고뇌의 현실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확인한 뒤, 그것을 끊고 고통이 없어진 열반의 실현을 위해 그에 필요한 수행을 하는 것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의 전부이다. 따라서 그 밖의 것은 부처님이 대답해야 할 임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기본자세는 '독화살의 비유'에서 응급치료를 하는 의사에 비교될 수 있다. 의사가 병상을 보고 원인을 확인하고 그것을 제거해서 병자의 건강을 회복시키고자 약을 주어 치료하듯이 부처님은 인간고통을 치료해 주는 의사이다. 부처님을 '대의왕'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또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약사여래'는 의사로서의 기능을 상징하는 부처님이다.
네 가지의 대답방법
부처님이 열 네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무기의 입장을 보인 것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 취하는 네가지 태도 중의 하나이다. 이를 '사답'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일향기(一向記)라는 것으로 단정적 대답이다. 예를 들면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단정해서 대답하는 것이다.
둘째는 분별기(分別記)라는 것으로 조건에 따른 대답이다. 예를 들면 '죽은 자는 모두 윤회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번뇌 있는 자는 윤회하고 없는 자는 재생하지 않는다'라고 조건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셋째는 반문기(反問記)로서 되물어서 대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월등한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무엇과 비교해서인가'라고 다시 묻고 '하늘과 비교해서'라고 질문자가 말한다면 '열등하다'하고, '짐승보다'라고 한다면 '월등하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넷째는 사치기(捨置記)로서 앞에서 예로 든 열네가지 질문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느 것에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논의 자체가 무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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