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교리

4-1 교리의 기본구조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3. 11:02

법이라는 것


삼보의 두 번째인 '법'은 다르마의 번역으로써 '지킨다' '의지한다'는 뜻이다. 다르마라는 말은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진리 또는 종교적 규범(즉 종교), 사회적 규범(법률과 관습·제도), 행위적 규범(윤리·도덕·의무)등의 뜻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선 또는 정의로 해석되는 것에 적
용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에 대해 그들은 단지 다르마라고만 말한다. 또 때로는 힌두 다르마(힌두의 법)라고 부른다. 이 경우 다르마는 종교라고 해석해도 되며 힌두 다르마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회적 규범이란 《마누법전》과 기타의 법전에서 규정된 여러가지 조항이다. 이 법전들은 '카스트와 인생의 주기에 관한 법'이 기본으로 되어 있다. 카스트에 관한 법은 소속된 카스트에 따른 규정으로써 그것은 또한 구성원에 행위규범, 즉 의무와 권리이기도 하다. 카스트에 관계되는 다르마와 같이 법전류에는 불살생 또는 자민과 보시 등 힌두교도로서(인도적인 말로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도덕이 가르쳐져 있다. 인도사람(힌두교도)의 인생관은 이 두 가지가 합해져서 기본을 이룬다.

이처럼 여러가지 측면을 가진 다르마는 근원을 신들이 계시한《베다성전》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영원불변의 법(사나 다나 다르마)'이므로 지켜야 하는 '정의'이며 또한 그것을 지킴으로써 사후에는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도 기본적으로는 힌두교와 같은 뜻으로 '다르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힌두(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붓다 다르마, 즉 부처님의 법으로써 부처님을 통해 계시된 진리다. 그것은 힌두 다르마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힌두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힌두의 법이 카스트와 기타의 규제를 포함해, 그것을 통해 실천된 '인도적'인 법에 있는 것에 대해 불교의 법은 카스트를 초월한 보편적인 법이며 인류보편의 진리이다. 바꿔 말하면 힌두의 법, 카스트의 법이 세속적·세간적인 법인데 반해 불교의 법은 출세간적 법이라고 자부되어 왔다. 불교가 사성평등을 설한 근거도 여기에 있다. 즉 출세간법으로서의 평등성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불교가 인도라는 틀을 벗어나 세계적 종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서 '법'은 부처님에 의해 깨달아진 진리인 동시에 그 내용이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설해졌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말했다. 이같은 '법'의 정의를 경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은 ①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으며 ②(듣는 자가) 스스로 볼 수 있는 것 ③시간에 구애됨이 없이(非時) 왔으며, ④와서 보라는 것 ⑤(理想, 즉 열반에) 인도하는 것 ⑥지자(智者)가 스스로 깨달은 것(自內證)이다."
여기서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이란 '처음에도 좋고 중간에도 좋으며 마지막에도 좋은'뜻(義;의미내용)과 문(文;표현형식)을 구비하고 있어서 완전원만하고 청정한 것을 말한다. 이같은 정의는 '깨달은 진리→ 설해진 가르침→ 깨달음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원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의 기본구조를 설명하는 논리일 뿐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이 법의 내용을 나타낸 것으로써 우선 다음의 시를 들 수 있다.

"모든 것(제법)은 원인에서 생긴다.
진리의 체현자는 그 원인을 설법하신다.
또 그것을 멎게 하고 멸하는 '법'도 설하신다.
위대한 수도자는 이렇게 설법하신다."

이것은 뒤에 부처님의 오른팔이 되었던 장로 사리푸타(舍利佛)가 과거에 회의론자 산쟈야의 고제로 있을 때 길에서 만난 부처님의 제자 아시바지트(馬勝)에게서 듣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기연을 만들었다는 시(詩)다. 이 전설을 사실여부에 대한 보증은 할 수 없으나 불전과 경전의 편집자들은 이 시에서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찾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는 법의 원의(原意)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옛부터 학자들은 해석해왔다. 일반적으로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불리우는 이 시는 한문으로는 이렇게 번역되었다.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여래설시인(如來說是因)
피법인연진(彼法因緣盡)
시대사문설(是大沙門說)"

이 시는 모든 현상이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생기며 그 인연이 없어지면 그같은 현상은 있을 수 없다는 연기설(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말했다)을 말해주고 있으므로 '법신게'라고도 한다. 연기설은 부처님이 설한 법의 근원이며 부처님이 입멸한 뒤에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존숭된 법신(교법의 전체)의 기본인 깨달음의 내용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법이라고 하는, 앞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새로운 용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 시에서 '모든 현상(諸法)'으로 표현되는 말로써 힌두의 용법에는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의미이다.

팔리성전에 대한 주석《법집론주(法集論註)》에 의하면 불교의 법에는 네가지 뜻이 있다. ①교법(敎法) ②인(因) ③덕(德) ④무아(無我)한 것 등이다. 첫 번째 교법은 '배워서 그것을 통달하는 것'이 원뜻이다. 이는 깨달음과 가르침이라는 불교의 기본 구조를 나타내는 '법'에 해당된다. 또한 그것은 종교로서의 불교 전체를 가르키는 것으로써 '성스러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둘째의 인은 앞에서 말한 법신게가 의미하는 도리로써 연기의 법, 인과의 이치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불교가 주장하는 진리, 즉 '참다운 것'이다. 세 번째 덕은 가치있는 것, 필요한 것, 착한 것 또는 도덕적 규범 등을 뜻한다.

불교는 사람을 보리열반에 인도하는 바른 행위, 실천수행 해야 할 덕목을 가르치고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불살생, 자비, 보시 등 힌두교가 가르치는 것과 공통된 것도 많다(덕에 반대되는 법은 '비법'이라고 불리우며 그것은 不善이고 잘못된 것이며, 나쁜 과보를 가져오게 된다). 덕은 이와 같이 착하고 가치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원뜻이지만 인도원어로 말하면 일반적으로 '성질' 또는 '속성'을 지칭한다. 속성은 실체에 부속되어 있으나 그것을 통해 실체를 나타내는 특색도 있다. 즉 어떤 실체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은 성질, 말하자면 그것을 보존하고 있는 것, 받치고 있는 것이 즉 다르마이다. 다르마의 일반적 용법으로서는 이 성질·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본뜻에 가깝다.

불전 중에서도 이 용법은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생멸법'하면 '태어나면 멸한다는 성질'을 의미한다. 이 경우 선악과 미추는 관계없다. 이 성질이라는 의미와 관련해서 발달된 것이 앞에서 말한 '물질' 또는 '현상'이라고 하는 법의 의미다.한역불전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법의 정의는 '자성을 임지하고 궤로서 물을 이해한다(任持自性 軌生物解)'는 《구사론》의 설명이다. 여기서 '자성을 임지한다'는 것은 고유의 성질을 보지(保持)하는 것을 뜻하며 실체라는 것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물질 또는 심리현상 그리고 추상개념에 있어서 결정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가 '법'으로 불리우고 있다. 결정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불(火)은 '따뜻한 법'이며 그것은 결코 차다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것이 불(火)이라고 하는 것(개념)의 내용이다.
불교에서는 의식의 대상이 된, 일정한 내용이 따르는 개념을 법이라고 한다. 또한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이 인연에 의해서 생기하는 것(緣起)이며, 끊임없이 생멸변화 하는 것(無常),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無我)을 가르친다. 이 의미는 앞에서 말한 팔리주석서의 '무아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어 니사타 닛지바타를 직역하면 '실체 있는 생명은 없다는 것' 또는 '중생이나 목숨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이다. 이것은 무아를 의미하는 말로 '성질' 또는 그같은 도리, 진리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어쨌거나 이상과 같은 많은 뜻을 한마디로 포함하고 있는 말이 불교에서 쓰는 '법'이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법이라는 말은 현대식 용법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①가르침(교법·종교) ②진리(깨달음의 내용) ③성질 특히 착한 성질(공덕) ④존재(유형 무형의, 심적, 물적인 세현상, 개념)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이 같은 모든 것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 성전을 또한 법이라고 한다. 이 용법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 결집을 할 때 '법과 율은 구분했다'고 할 때의 '법'의 의미로서 나중에 붙여진 말로 경장에 해당된다. 이것은 다섯 번째의 의미로 덧붙여도 좋으나 첫 번째의 '가르침'을 능전의 경과, 소전의 가르침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법이다.

연기와 사제법


불교의 기본은 부처님이 법(진리)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 깨달은 법을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 - 즉 가르침이라는 법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체험이 말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에 있다.
이 깨달은 진리(所證의 법)를 말해진 가르침(所證의 법)의 관계와 그 내용을 불전에서는 부처님이 연기의 이치를 관해서 법을 깨닫고 초전법륜에서 4제8정도의 가르침을 설했다고 하는 형식으로 정식화하고 있다. 팔리성전의 《율장》에서는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의 행동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세존은 처음 깨달음을 얻은 이래 칠일간 보리수 아래서 좌선하고 있었다. 칠일이 지난 뒤 초저녁에 세존은 연기를 순역의 순서로 생각했다....'무명(無名)에 의해 행이 있고, 행(行)에 의해 식이 있으며, 식(識)에 의해 명색이 있고, 명색(名色)에 의해 육입이 있으며, 육입(六入)에 의해 촉이 있고, 촉(觸)에 의해 수가 있으며, 수(受)에 의해 애(갈애)가 있고, 애(愛)에 의해 취가 있으며, 취(取)에 의해 유가 있고, 유(有)에 의해 생이 있으며, 생(生)에 의해 노사와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생긴다. 이와 같이 하여 이 고의 적취(積聚)가 모두 집기(集起)한다. 그러나 완전히 탐욕을 떠난 결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한다. …생이 멸하면 노사와 우비고뇌가 지멸한다. 이와같이 하여 이 고의 적취가 모두 지멸(止滅)했다….'
그리고 세존은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열심히 명상하는 바라문에게
제법이 나타났을 때
그 의심은 모두 사라졌다
그것은 유인(有因)의 법을 알았기 때문――.

다음에 세존은 한밤중에 같은 연기를 순역의 순서로 생각하고 다시 즉흥의 시를 읊었다.

열심히 명상하는 바라문에게
제법이 나타났을 때
그 의심은 모두 소멸한다
그는 제연(諸緣)의 멸을 알았기 때문에.

또다시 세존은 새벽녘 무렵 연기의 순역을 순서에 따라 생각한 후 다음의 시를 읊었다.


열심히 명상하는 바라문에게
제법이 나타났을 때
그는 마군을 쫓아버리고 일어나서
태양이 하늘을 비치게 되었다.


《율장》은 다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처님이 길을 따라서 다섯 비구가 있는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도착했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비구들이여, 출가자로서 해서는 안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욕락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어느 것도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아무 소용이 없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가까이 하지 않고 중도를 깨달았다… 비구들이여,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이다. 즉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 이것이 여래가 깨달은 중도이며 적정·신통·정각·열반을 향하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고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고이며,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죽는 것도 고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갖고자 해도 갖지 못하는 것, 싫은 사람과 만나는 것, 그리고 집착의 소재로서 오온(五蘊)이 치성(熾盛)한 것이 모두 괴로움이다.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윤회로의 재생을 가져오는 것, 기쁨과 탐착을 가져오는 것, 여기 저기서 기쁨을 구하는 것, 즉 갖고자 하는 갈애 생존에의 갈애, 모든 삶으로부터 떠나려는 갈애이다.

괴로움의 지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이미 말한 갈애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다. 즉사·방기·해탈·무집착이다.

괴로움의 지멸에 이르는 도라고 하는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이다…
고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성제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야 한다… 고성제는 널리 알려졌다. 고집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집성제라는 것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 고집성제는 반드시 끊어졌다. 고집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집고집멸성제라는 것은 현증되어야 한다…고집멸성제는 현증되었다.고멸도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멸도성제라는 닦아야 한다… 고멸도성제는 닦아졌다.
비구들이여, 또 이 사성제를 이상과 같이 삼전(三轉)과 십이행상(十二行相)에 의해 여실히 지견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들은 무상정등각을 지금 현재에서 깨달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성제를 삼전십이행상을 통해 깨닫게 될 때 우리들은 신들과 아수라와 브라흐만을 포함한 사문과 바라문, 인간과 중생들 중에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다음의 지각이 생겼다….
"내 마음의 해탈은 부동이다. 이것이 윤회로서는 최후의 생존이다."


이 《율장》의 기록이 정리하고 있는 바를 요약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연기(十二支)이며, 초전법륜에서는 고락의 두 변을 떠난 중도로서의 팔정도와 그것을 포함한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이같은 견해가 교단에서 정설화된 것은 물론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의 일이겠지만 '연기'의 이치와 '사성제'로 현실을 분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팔리어 율장의 이러한 기술과 견해는 기본적으로 한역된 불전에 전해지고 있는 것과 같다.
사제의 교설을 보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 '사제를 깨달아' 위없는 정등각을 얻었다고 말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제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의 제시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연기의 이법(理法)이 보다 포괄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연기설은 십이지설이 나중에 연기설의 대표가 되지만 《율장》에서는 그것을 증득함으로써 부처가 되었다고는 확실히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정각자가 되어서 십이지연기를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제설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진리에 대한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사제와 십이연기가 서로 틀린 것은 4제는 교설로서 부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십이지연기는 부처님의 내관으로만 멈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십이지 연기에는 보다 오랜 형식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에 의하면 고찰의 출발점이 무명이 아니고 노사(老死)등의 고(苦)라는 사실이다. 즉 팔리어 성전《상응부경전》과 한역의 《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직 보살이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생노병사를 계속한다. 그뿐이랴. 그 고통에서 떠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노사가 있는 것인가. 태어남(생)을 인연해서 노사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가.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행이 있는가.
무명에 의해서 행이 있다."
여기에서는 고(苦)에서 소급하여 그 생기의 원인을 추구한 끝에 무명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은 4제설에서 고성제로 시작하여 고집성제→고집멸성제→고집멸도성제에 이르는 것과 같은 틀(형)이다. 이러한 틀은 부처님 사고방식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고 있다.
12지연기가 완성되기 이전에는 노사의 괴로움에서 시작하여 갈애로 끝나는 오지 연기, 식과 명색의 상호관계에서 끝나는 10지 연기, 또는 9지 연기설도 있었다. 더욱 간단하게는 고와 고의 원인을 갈애에서 찾는것도 있고 이밖에도 여러 가지로 고의 원인이 추구되고 있다, 앞에서 말한 4제설의 고집이제(苦集二諦)는 말하자면 이같은 여러 가지 종류의 연기설을 포함하는 가장 간단한 도식이라고 할 수 있다. 12지연기는 다만 그 한 유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노사등의 고가 멸한다'는 관찰도 세 번째 고집멸성제를 추가함으로써 그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나 4제설은 그 후에 12지연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고의 멸을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을 도성제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고락 양극단을 떠나 중도의 가르침으로 구체적으로는 8정도가 그것이다. 이 실천방법을 가르침으로써 불교는 불도 즉 깨달음을 향한 도가 되었다.
'고를 알고 고의 원인을 알고 이것을 끊는 것' 즉 고의 멸은 도를 닦음으로써 현증된다. 고의 멸을 현증하는 것만이 목적이며(부처님은 이미 그 목적에 도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향하는 길(실천적 수단)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권하는 것이 부처님 설법의 목적이다.
이같이 4제의 가르침에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독특한 방법론이 그속에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그 전체가 연기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즉 부처님이 깨달은 법, 진리라는 것은 '고(苦)는 연생(緣生)'이라는 것이다.사제설이 가진 교리상의 무게는 그것이 최초의 설법(초전법륜)이며 '설하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제는 법의 틀이며 연기는 그 내용인 것이다.

부처님의 입장
부처님이 취한 입장이랄까 문제의식이라는 점에서 늘 언급되는 14무기(十四無記) 또는 12사치기(十二捨置記)라고 불리우는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한 해답거부이다. 여기서 '무기'라는 말은 어떤 문제에 대해 해설 또는 해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열 네가 지 무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A) 세계는 ①상주이다 ②상주가 아니다 ③상주 또는 무상이다 ④상주도 무상도 아니다.
(B) 세계는 ⑤유변이다(공간적 한계가 있다) ⑥무변이다 ⑦유변 또는 무변이다 ⑧유변도 무변도 아니다.
(C) 신체와 영혼은 ⑨하나이다 ⑩별개이다
(D) 여래(인격적 완성자)는 사후에도 ⑪존재한다 ⑫존재하지 않는다. ⑬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 ⑭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열 네가지 문제는 한마디로 세계의 기원과 사후의 운명 등 모두 일상적 경험의 범위를 넘어선 문제들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그것들이 인생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답을 거부하고 있다.
아함 속의 《전유경(箭喩經)》에 따르면 제자 가운데 마룽가야푸타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이런 문제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늘 이상의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그 젊은 제자는 끝내 대답을 회피한다면 자신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존경할 수 없으며 수행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 부처님은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그를 깨우쳐 주었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찔렸다 하자. 즉각 의사가 왔는데 만일 화살에 맞은 사람이 '누가 이 화살을 쏘았는가. 그리고 그는 큰 사람인가 작은 사람인가. 피부는 검은가 흰가. 그가 사용한 화살은 어떤 것이며 활줄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이것을 알기 전에 치료해서는 안된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것들을 알기 전에 죽어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독화살을 뽑고 응급치료를 하는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계가 유한이든 무한이든 현실적 인생에는 생노병사가 있고 우비고뇌가 있다. 그것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극복하느냐, 나는 그것만을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그런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 답을 하는 일이 수행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답으로써 고뇌를 극복하고 정각과 열반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목적하는 바는 현실적으로 인간이 안고 있는 고뇌를 어떻게 하면 극복하느냐 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고뇌의 현실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확인한 뒤, 그것을 끊고 고통이 없어진 열반의 실현을 위해 그에 필요한 수행을 하는 것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의 전부이다. 따라서 그 밖의 것은 부처님이 대답해야 할 임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기본자세는 '독화살의 비유'에서 응급치료를 하는 의사에 비교될 수 있다. 의사가 병상을 보고 원인을 확인하고 그것을 제거해서 병자의 건강을 회복시키고자 약을 주어 치료하듯이 부처님은 인간고통을 치료해 주는 의사이다. 부처님을 '대의 왕'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또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약사여래'는 의사로서의 기능을 상징하는 부처님이다.

네 가지의 대답방법
부처님이 열 네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무기의 입장을 보인 것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 취하는 네가지 태도 중의 하나이다. 이를 '사답'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일향기(一向記)라는 것으로 단정적 대답이다. 예를 들면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단정해서 대답하는 것이다.

 

둘째는 분별기(分別記)라는 것으로 조건에 따른 대답이다. 예를 들면 '죽은 자는 모두 윤회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번뇌 있는 자는 윤회하고 없는 자는 재생하지 않는다'라고 조건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셋째는 반문기(反問記)로서 되물어서 대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월등한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무엇과 비교해서인가'라고 다시 묻고 '하늘과 비교해서'라고 질문자가 말한다면 '열등하다'하고, '짐승보다'라고 한다면 '월등하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넷째는 사치기(捨置記)로서 앞에서 예로 든 열네가지 질문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느 것에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논의 자체가 무익하기 때문이다.

법인(法印) - 불교의 기치
부처님의 입장, 즉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바가형이상학적 탐구보다 현실적 고통의 해결에 있다고 한다면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법)의 성격 또한 저절로 분명해진다.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 중에 3 법인 또는 4 법인이라는 것이 있다. '법인(法印)'이란 법, 즉 가르침의 표지 또는 슬로건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논전에서는 '법의 요약'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명제의 형태에 따라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네 개의 명제는 다음과 같
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행은 무상하다)
(2) 제법무아(諸法無我 : 제법은 무아이다)
(3) 일체개고(一切皆苦 : 일체는 다 괴로움이다)
(4) 열반적정(涅槃寂靜 : 열반은 적정이다)


이러한 명제가 단순히 철학적인 판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네 개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사이에는 매우 순수하게 철학적 판단에 가까운 것에서 체험적, 주관적 판단으로 보이는 것까지 포함돼 있다. 네 개의 명제를 놓고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1) 제행무상 =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도 무상이 무엇인지는  안다. '세월이 무상하다'든가 '무상한 인생'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다. 이 때의 무상은 인생의 영고성쇠랄까, 이 세상 모든 현상의 필연적 변화를 나타낸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한번 발을 씻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강물도 흘러가고 나도 그만큼 변하기 때문에 설령 그 물에 다시 발을 담근다해도 그 때의 그것과는 같을 수는 없다. 이렇게 변하고 유전하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무상이 보다 실감나는 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다. 어제 웃으며 헤어진 친구가 오늘 부고를 보내왔다는 얘기는 흔하다.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한 것도 유년시절에 있었던 어머니의 죽음이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은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무상이라는 것은 '과연 그렇구나'하고 실감한다 해도 실제로는 절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자신의 죽음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는 있지만 '나도 죽는다'라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인간은 공포에 떨게 된다. 죽음은 이때 인간에게 무엇보다 큰 고통이 된다. 무상이 무상으로 인식되지 않는 곳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이점이 불교가 제행무상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인생의 진실이다.


(2) 제법무아 = 불교의 슬로건이 '무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무아는 인도 정통파 철학사상인 우파니샤드 이래 '아(我)'라는 윤회와 해탈의 주체적 실재(實在)를 전제로 하는 유아설(有我設)에 대한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 '아'라는 것은 원래 나 자신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다. 세상에서 이만큼 자명한 것도 없다. 물론 철학적으로 그 본질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시끄러운 문제가 많다. 데카르트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옛부터 서양철학에서도 중요 과제가 되어 왔다. 특히 근대유럽은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새로운 인류문화를 전개시켜 왔다. 이처럼 실감에서나 철학적 사고에서나 자아의 부정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아'라는 말을 일상어로까지 채택하고 있다.

이 경우의 무아는 이를테면 '무아의 경지'라고 말할 때처럼 정신없이 어디에 열중하는 것, 또는 자기망각, 멸사봉공적(滅私奉公的) 인생태도를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적 자아확립과 거기에 근거한 인생관과는 반대의 자세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견해는 불교를 근대적 자아관에 저촉된다고 보기 쉬운 요소다.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무아를 철학적 견해가 아니고 단순한 실천적 문제로서 파악하고 있는 한에서는 어느 정도 정당한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보다 깊은 뜻이 있다. 불교에서 무아설의 범형(範型)이 되고 있는 것은 오온무아라는 것이다. 팔리어 율장의 한 구절은 무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색(色 : 형태 있는 것, 즉 육체)'은 아(我 : 자기)가 아니다. 만약 색이 자기라면 이 색이 병에 걸리는 일은 없으리라. 또 색에 대해서 '나의 색은 이러하라(이를테면 건강하여라) 그렇게 되는 일 없어라(늙지 말라, 죽지 말라)'하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은 아가 아니기 때문에 병에 걸리고 이렇게 저렇게(자유로이) 할 수가 없다…

이 '수 (受 ;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각)'가 자기란 말인가…

이 '상(想 ; 이미지를 생각에 떠올리는 작용, 표상화)'이 자기란 말인가…

이 '행(行 ; 의지의 작용)'이 자기란 말인가…

이 '식(識 ; 인식, 판단의 작용)'이 자기란 말인가…"


이렇게 육체와 네 가지 대표적 정신작용을 제시한 다음 그 중 어느 것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따로 어느 곳에 있는 것도 아니므로 자기라는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 경우 '아'는 '자유로운 것' '병 따위에 걸려서 변화하지 않는것'이라는 견해가 전제되어 있다. 이 점을 취해서 한역불전은 '아(我)란 상일주재(常一主宰)의 뜻'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오온외에 눈·귀·코·혀·몸·뜻의 '육입(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드는 경우도 있다. 육입이란 요컨대 자기라고 생각되는 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가 실체가 아님은 물론이다. 제법무아란 이렇게 우리가 자기라고 생각하거나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는 내가 아니며 따라서 어디에도 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설득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다.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집이다. 바로 바로 이런 아집에서 부처님은 여러 가지 죄악의 근원을 찾아냈다. 아집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낳는다. 그것이 달성되지 않으면 고통을 받는다. 구부득고(求不得苦)가 그것이다. 우리는 통상 '나'란 상주영원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
한다면(無常). '나'라고 불변일 수는 없다. 생로병사가 있다는것은 변하지 않는 자아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무아의 증거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완전히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마는 않다.
'진리를 등불 삼고 자신을 등불 삼으라(法燈明 自燈明)'는 부처님의 유훈은 분명히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제행은 무상이다. 결코 태만해서는 안된다'라고도 했다. 모든 것이 무상하므로 열심히 수행해야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실천의 주체'를 전제하는 것이다.

(3) 일체개고 = 고는 감각이다. 감각으로서의 고(苦受)는 낙과 대비된다. 다시 말해 고는 낙이 있으므로 있는 것이다. 고가 없으면 낙도 없고 즐거움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그러니까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고 괴로움은 즐거움의 씨앗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삶을 모두 괴로움이라고 보기에는 저항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삶은 즐거움을 향한 진보이다. 많이는 아니라도 우리는 그것을 조금씩 성취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째서 고인가.

불교에서는 현실의 삶을 고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상이고 무아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출발점은 이 고에 있다. 고가 없다면 불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제(四諦)의 가르침은 현실을 고로 보고 그것을 벗어나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고인가. 부처님은 이 고의 원인을 찾았다. 그 구극에서 발견한 것의 하나가 '갈애'라 불리우는 욕망 또는 집착(아집)이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무명'에 이르게 된다. 무명이란 진실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즉 모든 것이 무상이 고 무아라는 진실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그것이 고의 원인인것이다.
고는 인생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로 놔두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없애야 하는 것이다. 일체개고가 앞의 두 가지 명제와 다른 점은 일체가 고이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고의 상대개념으로서의 낙이 아닌 고락을 떠난 이상으로서의 낙, 즉 열반적정이다.

(4) 열반적정 = 경전에 이런 유명한 시가 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 그것은 생멸법이다(是生滅法) 생멸 그것마저 다 지멸해 버리면(生滅滅已)
그것(적멸)이 바로 낙이다(寂滅爲樂)."
이 시에서 제행무상을 깨닫는다고 쓰여져 있지는 않다. 생멸의 지멸이란 문자 그대로 생멸이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앎으로 해서 그것을 초월할 때 거리에 모든 고가 없어진 상태 즉 열만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정 또는 적멸이라고 부르며 이상으로서의 낙(열반락)이라고 한다. 이 열반락의 획득이 불교의 목적이다.


이상의 사법인은 사제설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연기(緣起;유래)라는 것은 말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연기는 이러한 사법인의 명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제행과 제법의 연기
지금까지 사법인을 말하면서 주어가 되는 제법·제행 또는 일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체'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뒤에서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행'과 '법'이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행(行)은 불교용어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 가운데 하나다. 원어로는 삼스카라라고 하는데 '함께' '완전한'등의 의미를 가진 삼스카라 이라는 접두어와 '만든다', '한다'라는 뜻은 '함께 모여서 만드는 일'이라 한다. 앞서 오온을 얘기할 때도 행이라는 말이 나왔다. 거기서 행의 뜻은 의지작용으로 설명되었다. 원어는 지금의 경우와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마음이 다른 것에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 뜻에서 오온에서의 행도 일종의 형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광범하
게 말한다면 무엇을 낳게 하는 힘과 작용이며, 그러한 작용을 가진 것 즉 결과를 탄생시키는 인이라 할 수 있다.
'인(因)'을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서 설명한다면 브라흐만(梵)과 같은 창조주가 된다. 그리고 이 창조주는 변하지 않고 항상있는 상주불변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존재를 부정한다. (이런 경우 무아는 무엇이든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철학적 해석을 수용한다.) 그렇다고 모든 현상이 아무런 인도 없이 성립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불교는 연기(緣起 = 緣生)라는 것을 내세운다.

부처님에게 어느 이교도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괴로움은 자재천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인가. 괴로움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괴로움은 연생(緣生)이다."


이 겨우 괴로움을 낳게 하는 인은 연생이다. 연생이란 지금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는 '행'이며 또한 그 작용인 것이다. 12지연기를 예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12지연기의 첫머리는 '무명에 의해 행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행은 무엇인가 만드는 힘이다. 신·구·의 삼업 또는 복(福)·비복(非福)·부동(不動)의 삼행이란 것이 이것이다. 신구·의 삼업은 업(갈망)=행=작용(만드는 힘)이다. 삼행의 경우는 복(하늘에 태어나는 것 등)으로 인도하는 작용, 비복(즉 불행 직옥 등에 떨어지는 것)을 초래하는 행위자체를 나타내는 동시에 결과를 나타내는 힘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이 즉 업이다.
행에는 이같이 카르카의 뜻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그것이 무명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고 다음의 식(識)을 낳게 하는 작용이 된다. 다시말해 만드는 작용인 원인이 되는 것은 동시에 다른것에 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원인만이 된다든가 결과만이 된다든가 하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는 이론이다. 12지연기에서 무명은 인이 되는 것을 상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마치 절대적인 인 같지만 이것은 지(知)의 부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환가능한 상태로써 브라흐만과 같은 절대인은 아니다. 괴로움도 또한 항상 결과로써 브라흐만과 같은 절대인은 아니다. 괴로움도 또한 항상 결과로써 논의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없애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연기의 논리는 이렇게 모두 가변한 것이다.

이렇게 인(因)은 과(果)이며 그 관계는 무한하게 계속된다. 이 경우 인은 상스카라(行)라고 불리우고 과는 똑같은 동사의 과거분사형을 따서 '상스크리타'라고 한다. 다시 예를 들면 무명과 행 사이에는 무명이 삼스카라이고 행이 상스크리타이다. 행과 식 사이에는 행이 상스크리타가 된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유위(有爲)'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으로 '유위법'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유위란 행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인연소생의 법, 또는 연기된 것인 것이다. 이것이 제법무아라고 할 때의 제법이다. 따라서 제행 = 유위법은 일체로서 그것들은 모두 무상이며, 무아이며, 괴로움(을 가져 오는 것)인 것이다.

법성(法性) - 연기의 이치
한역의 연기(緣起)에 해당하는 범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프라티탸사무트파다와 프라티탸사무트판나가 그것이다. 앞의 것은 '의해서 생기는 것' 또는 '생기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고 뒤의 것은 '의해서 생긴(과거분사)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한번 무명과 행의 관계로 예를 들면 무명이 '의해서 생기도록 하는 것'이고 행은 '의해서 생긴 것'이 된다. 이 경우 의해서 생긴 것(연기된 것, 연생한 것)은 또한 별개의 연으로써 없어진다는 (소생한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이해가 전제된다. 따라서 무상 한 것, 무아한 것, 괴로움을 가져 오는 것은 이렇게 생멸이 있는 것이며 '연에 의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대해 '연에 의해 생기시키는 것'을 뜻하는 앞의 것에는 인이 되는 삼스카라와 같은 의미로써 연기의 법칙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율장>의 12연기 설명부분에는 없지만 한역과 범어 문헌(四衆經)에는 12연기 설명에 앞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형구가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그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그것이 생기며(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므로 그것이 없고(此務故彼無)
이것이 없어지므로 그것이 없어진다(此滅故彼滅)"


이것은 연기의 법칙을 제시한 것이다. 연기를 설명하는 아함경 가운데는 '연기라는 법칙'은 '연기한법'과 대비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제법에 대한 규칙이다. 여래가 출연하든, 하지 않든 이 기본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법으로서 확립돼 있고 결정돼 있다. 즉 그것은 '연기에 의한다'는 것이다."
'연기에 의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명을 연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의 고뇌가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연기설의 기본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연기란 '행' '유위'라는 말과 본질 적으로 결부돼 있으며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는 연기의 이법을 나타내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연기가 '제법에 대한 규칙'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규칙이라고 번역한 다르마타는 단독적으로는 '법성(法性)'이라고 번역된다.
법성이란 '법의 본성'이라는 뜻으로 연기된 제법에 적용되는 보편적 성질, 즉 '연기되는 것'을 지칭한다. 이를테면 진리로서의 법(이법)은 법성이다. 법성은 연기의 이법을 그 내용으로 한다. 불교의 교리인 '무상이라는 것(무상성)'과 '무아라는 것(무아성)'도 역시 진리의 본성(법성)일 뿐이다.
그런데 전혀 똑같은 연기의 이법, 무아에 대해 대승불교에서는 새롭게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공성이란 '일체개공(모든 법은 비었다)'이라는 명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자성이란 존재자체가 항상 동일한 성질을 유지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불교는 무아, 즉 무자성이다. 동시에 '자성이 없다'는 판단은 '법에는 나름대로 고유한 성질(자성)이 있다'는 소승불교 유부의 주장에 대한 대승 불교의 반대입장까지도 포함돼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법성은 또한 법계·진여·실제·진실등이라고도 부리운다. 여기서 '법계'란 제법의 근원 또는 본질을 말한다. 제법의 근원이란 곧 연기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교법)의 근원이 되었다는 뜻에서 '성법(聖法) 출생의 인'이라고 한다. 제법의 본질이라는 것은 법성의 경우와 같이 '계(界)', '본성(本性)', 자성(自性)'과 같은 뜻이다. 또 '진여'는 '여래'에서 설명했듯이 '그렇다는 것'이란 뜻으로 사물의 진실을 자세, 즉 연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진실한 자세란 허망하지 않는 것, 전도되지 않는 것, 체성(諦性)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연기밖에 없다.

실제(實諦)는 '존재의 구극'이라는 뜻이다. 구극적인 상태, 절대성이라 해석해도 좋다. 마지막으로 '진실(眞實)'은 '그것이라는 것'이라는 뜻으로 진여와 거의 동의어라고 해도 좋으나 '진실을 본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진실을 본다'라고 하면 곧 부처님은 가리킨다. 또 '진실의 특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법성과 동의어다. 한역불전은 이것을 '제법(諸法)의 실성(實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진리
대승불교는 이상과 같은 용어에 의해서 그 구극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한다. 즉 대승불교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사물을 이해하는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것도 실재로 인정할 수 없지만 그와 같은 진리(일체개공) 자체를 절대적 가치(일종의 종교적 실재)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소승불교에서 볼 수 없는 대승의 독자성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 실재관은 이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을 '진리와 일체가 된 자'라 하여 법신이라 부르게 된다. 또 '법계'를 동일시하는 점에서 부처님에게 절대성, 구극적 실재성을 부여하게 된다. 아울러 법계에는 '법의 요소'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이것은 부처님쪽에서 말하면 부처님이 곧 전우주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된다. 한편 법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모든 존재는 진리의 현으로써 실유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단 후자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눈을 통해서 본 전존재·우주·세계·중생이며 결코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제일의제와 세속제
대승불교 진리관의 두 번째 특색은 진리표현에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깨달음의 체험은 타인에게 전할 수 없다. 그것은 언어 표현을 초월해 있다. 교훈으로서의 법은 그 자내증의 체험을 언어로 표헌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방편이고 알려 주기 위한 수단이다. 즉 언어로 표현된 법은 이의적(二義的)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깨달음 그 자체를 최고의 진리라는 뜻으로 제일의제(第一義諦)라 부르고 교법을 언설제(言說諦) 즉 세간적 진리라고 칭한다. 그러나 '세속'이라는 말은 나중에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세간적 진리는 진실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교설이라도 진실의 가르침과 방편의 가르침을 나누어 앞의 것을 제일의제라고 하는 해석도 생겼다. 제일의제라고하는 것은 진여·법계 등의 말과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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