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백일법문

[스크랩] 백일법문 [제4장 유식사상] 5. 유식중도설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9:05
5. 유식중도설

 

세존사이트 / 성철스님 법어집 / 장경각 / 불기 2536.4.

 

법상종에서 주장하는 중도설을 찾아보면 먼저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거론하는 바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성유식론에서는 '아(我)와 법(法)은 있는 것이 아니며 공(空)과 식(識)은 없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유식설이 중도교(中道敎)이지 공견(空見)이나 유견(有見)에 집착한 변견(邊見)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이 뜻을 이어받아서 「성유식론술기」에서는 그 의미를 상세히 논하여 유식종의 중도설을 선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하에서 먼저 유가사지론의 중도설을 소개한 후 성유식론의 주장과 그에 대한 술기의 해석을 참조하여 법상종에서 말하는 중도설을 해명하겠습니다. 

있음과 있지 않음의 두 가지를 함께 멀리 떠나는 것은 법상(法相)이 포섭하는 진실한 성품 의 일이니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이름한다. 둘이 아니므로 중도라 이름하며 양변을 멀리 떠 남을 또한 위없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有及非有의 二俱遠離는 法相所攝의 眞實性事니 是名無二니라 由無二故로 說明中道요 遠離二邊을 亦名無上이니라. [瑜伽論 ; 大正藏 31, p. 487 상]

유식학이 소의경전인 유가론(唯伽論)에서 무엇을 최고 원리로 삼았느냐 하면 있음〔有〕과 없음〔無〕의 두 변을 떠난 둘이 아닌 중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수승하고 위없는 이치라고 하였으니 유식학에서 주장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두 변을 여읜 중도에 있는 것입니다. 그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뒷날 유식학의 큰 비중을 차지한 성유식론에 의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증·감 양변을 여의어서 유식의 뜻을 성취하고 중도를 깨닫느니라. 
由斯遠離增減二邊하여 唯識義成하고 契會中道니라. [成唯識論 ; 大正藏 31, p. 39 상]

'증·감의 양변'이란 양변이 늘거나 줄어드는 등 생멸(生滅)이나 유무(有無)의 양극단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양변에 집착하면 이는 유식을 모르는 사람이며, 이 양변을 여의어야 유식의 근본 뜻인 중도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식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도를 성취하는 것이라는 성유식론의 주장은 유가론의 사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식에 대하여 응당 깊이 믿어 받아 들이라. 아(我)와 법은 있는 것이 아니며, 공(空)과 식(識)은 없는 것이 아니다. 있음을 떠나고 없음을 떠나므로 중도에 계합하느니라. 
故於唯識에 應深信受하라 我法은 非有요 空識은 非無니라 離有離無일새 故契中道니라. [成唯識論 ; 大正藏 31, p. 39 중]

유식에 대하여 마땅히 깊은 신심을 내어 유식의 도리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자아와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非無〕, 또 자아와 법이 공하다고 해서 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니〔非無〕, 있음도 떠나고 없음도 떠나서 비로소 중도에 계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식에서 주장하는 중도의 내용입니다. 성유식론의 이 구절에 대한 유식술기의 해석은 아래와 같습니다. 

술기에서 말하였다. 마음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헤아리는 자아와 법은 있는 것이 아니요, 진여(眞如)의 공리(空理)와 능연(能緣)의 진식(眞識)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니, 혹 공은 그 이 치며 식은 세속의 일이다. 처음에는 있음을 떠나고 나중에는 없음을 떠나므로 중도에 계합하느나라. 
述曰謂心外所計實我法은 非有오 眞如理空과 及能緣眞識은 非無라 하니 或空卽其理며 
識卽俗事라 初離有後離無하여 故契中道니라. [唯識述記 ; 大正藏 43, p.489 하-p.490 상]

'술(述)' 이라는 것은 유식술기를 말합니다. 마음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계량(計量)되는 자아니 법이니 하는 것은 다 공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非有〕, 진여공리와 능연진식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非無〕.

아집이나 법집의 경계 전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아와 법이 다한 진여공(眞如空)도 아주 없는 것이 아니며 이를 반연하는 능연의 진식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있고 없음을 떠난 이것이 유식법상종에서 말하는 중도의 근본원리입니다. 

자존(慈尊)이 이것에 의지하여 두 게송을 말하셨다. '허망한 분별이 있으나 여기에는 둘이 모두 없으며, 이 가운데는 오직 공만이 있으며 저 것에도 또한 이것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일체법은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며, 있고 없음과 함께 있음으로 이것이 곧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라 하였느니라. 
慈尊이 依此說二頌言호대 虛妄分別有이나 於此二都無라 此中唯有空하며 於彼亦有此하니 故說一切法은 非空非不空이며 有無及有故로 是則契中道니라. [成唯識論 ; 大正藏 31, p.39 중]

이 구절은 「성유식론」의 앞부분 본문에 계속해서 설해지는 것인데 편의상 이렇게 나눈 것입니다. '자존(慈尊)'은 미륵보살을 말합니다. '이것에 의지하여'에서 이것은 앞에서 해설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를 말합니다.

허망분별이 있는데 여기에는 능(能)과 소(所), 즉 주체와 객체 두 가지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허망분별이란 객진번뇌, 망상 등을 말하는데, 허망한 분별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그 자체에 있어서는 공하기 때문에 능·소(能所)가 다 공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이 가운데에는 공만이 있고, 저것에도 또한 이것이 있다'고 하는 데에서 '이 가운데'에서는 허망분별이고 '저것'은 공을 말합니다. 즉 허망분별이 있는 이 가운데 오로지 공(空)이 있으며 그 공 속에 또한 분별의 유(有)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이다 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무이면서 유이므로 중도에 계합되는 것입니다. 이 게송은 중요하기 때문에 이하에서 이 게송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한 술기의 해석을 계속 덧붙여 설명하겠습니다. 

술기에 말하기를, 허망분별이 있다는 것은, 곧 삼계에 허망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요. 
述曰虛妄分別有者는 卽有三界虛妄心也요 [大正藏 43 p.490상]

허망분별은 삼계에서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윤회할 때에 허망하게 분별하는 망상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둘이 모두 없다는 것은, 능위와 소취의 둘이나, 혹은 아와 법의 둘이 허망한 마음 위에는 없음을 말함이다. 
於此二都無者는 謂能取所取二나 或我法二가 於妄心之上에 都無라.

능취나 소취, 또는 자아나 법 할 것 없이 모두가 허망한 마음 가운데서 실제로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마음 가운데에 능취와 소취가 없게 되면, 이 마음은 생멸망견(生滅妄見)이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됩니다. 진공묘유라는 것은 유는 유인데 진공의 유이고, 공은 공인데 묘유의 공을 말합니다. 

이 가운데 오직 공만 있다는 것은, 이 허망한 마음 가운데 오직 진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진여는 공성이다. 공에 의지하여 나타나므로 앞의 긴 행에서 공과 식이 있다고 말한 것 도 또한 이를 가지고 알 것이다. 오직〔唯〕이란 결정하는 뜻이니, 의타기성 중에 결정코 오직 공이 있기 때문이니라. 
此中에 唯有空者는 謂此妄心中에 唯有眞如이니 眞如는 是空性이라 依空所顯故로 前長行에 言空識是有도 亦惟此知니라...... 唯(者)는 是定義니 以依他中에 決定唯有空故이니라.

허망한 마음 가운데 진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명의 실성이 곧 불성'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무명 즉 분별하는 망심(妄心)자체가 근본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고, 허망한 분별망심 이대로가 진여입니다. 그러므로 진여 밖에 망심 없고 망심 밖에 진여가 없는 것입니다. 

저것에도 이것이 있다는 것에서, 저것이란 저 공성(空性)중이요, 또한 이것이 있다함은 허 망한 분별이 있다는 것을 말함이니 곧 허망분별은 속제니라. 허망한 분별에 공이 있다는 것 은 곧 속제 가운데 진제공이 있다는 것이고, 곧 진제공 가운데 또한 허망한 분별이 있다는 것이니, 곧 진제공 가운데 또한 허망한 분별이 있다는 것이니, 바로 진제 중에 또한 속제가 있는 것이니라. 이제(二諦)는 반드시 서로 있고 없어서 하나가 없을 때는 또한 둘도 없으므로 서로 형태가 있느니라. 
於彼亦有此者는 彼者는 彼空性中이요 亦有此者는 謂有妄分別이라 卽虛妄分別은 是俗諦니라 妄分別有空者는 卽俗諦中에 有眞諦空하고 卽眞諦空中에 亦有妄分別이니 卽眞中에 亦有俗諦라. 二諦必相有無하여 一無時亦無二故로 相形有也니라.

저것에도 이것이 있다는 것은 공성(空性) 가운데에 허망한 분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분별심은 속제(俗諦)이고 공성은 진제(眞諦)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제 가운데 진제가 있는 것은 색즉시공이요, 진제 가운데 속제가 있는 것은 공즉시색이니 이것은 진공묘유의 내용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을 설한다는 것은, 유위와 무위를 말함이다. 이 둘이 없음에 의지하여 이를 공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일체법을 다 포섭한다. 유위는 곧 허망한 분별이요 무위는 곧 공성이니, 반야경 중에서 일체법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다만 삼계의 마음마음 법을 밝혔기 때문에 오직 망심만을 말하니 이는 속제요, 망심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니라. 
故說一切法者는 謂有爲無爲라 依此二無하여 名之爲空이라 故此二는 攝法盡이라. 有爲卽妄分別이요 無爲卽空性이니 謂般若經中에 說一切法이라 此中에 但明三界心心法故로 唯言妄心이니 是俗諦요 非無不妄心이니라.

'둘이 없다'라는 것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없다는 뜻이고, 이 유위와 무위의 '둘이 없음을 의지한다'는 것은 공을 가지고 근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유위법과 무위법 이 둘은 일체만법을 다 거두어들이는데, 유위라는 것은 허망한 분별을 말하는 것으로 속제(俗諦)이고, 무위는 공성(空性)으로서 진제(眞諦)인데, 이것을 반야경에서는 일체법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는 다만 삼계(三界)의 마음 마음법〔心心法〕을 밝혔기 때문에 망심은 속제로서, 망심 아닌 것〔不忘心〕즉 무루법(無漏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공(空)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는 것은, 공성에 말미암은 까닭이며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제(二諦)가 있기 때문이요, 공 아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능취와 소취의 둘, 혹은 아와 법의 둘이니 둘이 모두 없으므로 공 아님이 아니니라. 
非空非不空者는 謂由空性故며 及妄分別故라. 言非空은 以二諦有故오 非不空者는 謂所取能取나 或我法이라 二皆無故로 非不空也라.

분명히 공하면서 허망한 분별이 있고 허망한 분별이 있으면서 분명히 공하므로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이 아님〔非空〕은 진속 이제(二諦)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니, 즉 유무든지 진속이든지 이사(理事)라든지 이런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공 아님도 아님〔非不空〕이라는 것은 능취와 소취 또는 아와 법, 이 두 가지가 전부 다 공한 것이므로 공 아님도 아닌 것입니다. 

있고 없음과 함께 있음이란, 있음은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요, 없음은 이취(二取)나 자 아와 법이 없기 때문이며, 함께 있음〔及有〕은 허망한 분별 가운데에 진공이 있기 때문이며, 진공 가운데에도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땅히 세 번이나 때문〔故〕이란 글자를 말하니, 있기 때문이란 곧 허망한 분별이요, 없기 때문이란 곧 능취와 소취요, 함께 있기 때문이란 곧 세속과 공이 서로 있는 것이니라. 
有無及有故者는 有는 謂妄分別有故요 無는 謂二取我法無故며 及有者는 謂於妄分別中에 有眞空故며 於眞空中에 亦有妄分別故라 此中에 應言三故字하니 謂有故는 卽妄分別이요 無故는 卽能所取요 及有故로는 卽俗空互有니라.

여기서는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 전체를 총합하여 결론짓고 있습니다. 있음〔有〕은 허망한 분별심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없음〔無〕은 능취와 소취, 자아와 법이 없다는 것이며, 그 가운데 함께 있음〔及有〕은 허망한 분별심 가운데 진공(眞空)이 있고, 진공 가운데 또한 허망한 분별심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이면서 역유역무(亦有亦無)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진(眞)중에 속(俗)이 있고 속 중에 진이 있어서 진과 속이 서로 무애(無碍)가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속과 공이 서로 존재하여 색즉시공·공즉시색과 같이 허망한 분별 자체가 진공이요, 진공 이대로가 허망한 분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공이 묘유이고 묘유가 진공으로 묘유 박에 진공이 따로 없고, 허망분별 밖에 진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식에서 주장하는 것은 생멸변견(生滅邊見)이 아니고, 유와 무를 떠나고 그러면서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중도에 입각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중도에 계합이 된다 함은 이제(二제)가 있다는 것은 청변(淸辯)의 주장과 같지 않고 이취(二取)가 없다는 것은 소승부파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중도에 머무른다고 하느니 라. 
是則契中道者는 ......謂二諦有는 不同淸辯이요 二取無는 不同小部라 故處中道니라.

청변(淸辯)은 공을 주장하는 중관파(中觀波)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제와 속제의 이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을 주장하는 청변의 견해와 다르다는 말이고, 능취와 소취의 이취가 없다는 것은 법유(法有)를 주장하는 소승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므로 중도에 계합된다는 점을 다시 부연한 것입니다.

 

 

 

 

 

출처 : 고전 취미 붙이기
글쓴이 : 無爲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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