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백일법문

[스크랩] 백일법문 [제1장 서] 2.중도사상 (2) 선종에서의 중도사상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8:36
2) 선종에서의 중도사상

 

세존사이트 / 성철스님 법어집 / 장경각 / 불기 2536.4.

 

그러면 선종(禪宗)은 또 어떠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입적(入寂)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최후 유촉으로서 누가 묻지 아니하는데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니 내가 입멸하고 난 뒤에도 각각 한곳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법문하는 방법을 가르쳐 선종의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겠노라. 모름지기 삼과법문(三科法門)과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어서 말하리니 나고 들어감에 양변을 떠나고 일체 법을 설할 때에 자성을 여의지 말라. 혹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하되, 모두 쌍(雙)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 마 침내는 두 법을 모두 없애어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나오든지 들어가든지 간에 양변을 떠나라'하신 그 근본 뜻은 법문을 하든지 양변을 떠나서 법문을 해야지 양변에 머물러서 법문해서는 안된다고 하신 말씀이며 한쪽에 치우치면 불법(佛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쌍(雙)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한다'고 하신 것은 누가 법을 물어모면 예컨대, 누가 있음〔有〕이 있고, 없음〔無〕이란 있음〔有〕이 있기 때문에 없음〔無〕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세간의 법은 모두가 상대법이어서 독립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상대법이란 결국은 생멸법입니다. 생멸법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에 가서는 두 법〔二法〕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곧 양변을 떠나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하신 뜻은 그래서 상대법이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을 완전히 버릴 것 같으면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서 중도(中道)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중도이므로 한쪽에 머문다면, 있음에 머물든지 없음에 머물든지간에 한쪽으로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변견이라고 합니다. 변견이란 세간의 생멸법이지 불법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양변을 떠나 중도를 성취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설법을 할 때에도 중도에 의거해서 설법을 해야지 중도를 벗어난 설법을 하면 불법의 종지(宗旨)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육조단경」가운데서도 돈황본(敦煌本)이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데 글자는 몇자 틀리는 것이 있어도 그 뜻은 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의 최후 유촉이 중도에 있다는 것은 어느 학자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후 선가에서도 역사가 흘러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져, 조사스님네가 많이 나오고 깊은 법문이 많았지만 그 표현방법은 틀려도 육조스님의 유촉과 같이 중도라는 근본 종지를 벗어나서 설법을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육조스님의 유촉을 충실히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은 경 율 론 삼학에 해통하고 지식이 넓은 선지식인데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누가 감히 화답하리오.
不落有無誰敢和
일체의 있음〔有〕과 없음〔無〕등의 견해가 전혀 없고 또한 없다는 견해도 없는 것이 불법 을 바로 보는 견해라고 한다.
都無一切有無等見 亦無無見 名正見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아니하면 곧 바로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느니라.
不見有無 卽時見佛眞身

있다〔有〕, 없다〔無〕고 함은 있다, 없다는 한쪽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말하는 것으로 변견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왜 하필이면 있음과 없음을 말하느냐 하면 이 있음과 없음이라는 것은 모든 견해가 이 두 가지에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견을 말할 때 있음과 두 견해 등이 없다고 하면 또 없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니 없다는 그 생각이 있으면 그것도 변견이므로 없다〔無〕는 견해도 또한 굳이 고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조 스님의 제자되는 대주(大珠)스님의 말씀입니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中〕도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다만 이렇게 얻은 것을 중 도(中道)라 이름하니 참으로 여래의 길이니라.
心旣無二邊 中亦何有哉 但得如是者 卽明中道 眞如來道

내가 법문할 때마다 중도, 중도하니 어디 말뚝 박히듯이 박혀있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자로 선을 긋듯이 분명하게 한 가운데라는 것은 아닙니다. 표현하자니 '가운데〔中〕'라 하는 것입니다. 가운데서도 설 수 없는 그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가운데라 하는 것이지 가운데에 설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도 집착이며 변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조대사 백장선사 대주선사 등 선종의 대표스님들의 어구를 인용했는데, 이런 큰스님들도 불법(佛法)의 근본을 말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를 밝히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禪)과 교(敎)를 통해서 중도(中道)가 불교의 최고 원리라고 함에는 일치하나 중도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선과 교가 차이가 있습니다. 즉 쳔태종은 양변을 다 막고〔雙遮二邊〕두 법을 다 비친다〔雙照二諦〕고 하고, 청량스님은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했고, 현수스님은 쌍민쌍존(雙泯雙存)이라고 표현했는데 선문(禪門)에서는 양변을 떠나는 것만 얘기하고 있으니 쌍차(雙遮)만 말하고 쌍조는 말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 중도를 반만 표현한 것이지 전체를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쌍차(雙遮), 즉 양변을 막는다는 것은 양변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쌍조(雙照), 즉 양변을 비춘다는 것은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변이란 모두 변견인데 변견을 버리면 중도(中道)입니다. 비유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에 해가 그대로 드러나고, 해가 완전히 드러나 있으면 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났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말과 같습니다. 쌍차(雙遮)란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이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고, 쌍조(雙照)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것이니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즉 해가 드러난 것이며, 해가 드러났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가 즉 쌍조며 쌍조가 즉 쌍차입니다. 부처님이나 예전 조사스님들이 쌍차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고, 쌍조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어 그때그때의 입장에 따라 그 표현방법이 틀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쌍차라 하면 쌍조의 뜻이 내포되어 있고, 쌍조라 하면 또한 쌍차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출처 : 고전 취미 붙이기
글쓴이 : 無爲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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