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백일법문

[스크랩] 백일법문 [제1장 서] 2.중도사상 (4) 중도사상의 독창성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10. 08:37
4) 중도사상의 독창성

 

세존사이트 / 성철스님 법어집 / 장경각 / 불기 2536.4.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근본불교 원시불교 대승불교를 일관하는 중도사상이라는 것이 불교만의 독특한 진리인지 아니면 다른 종교나 철학에 있어서도 이 중도 사상이 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학문이나 무슨 이론이든지간에 그 시대상을 떠나서는 그 학문이나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큰 학설이라 해도 평지돌출한 것은 있을 수 없고 오직 과거 학설의 영향을 받거나 그것을 조금 발전 시키거나 변형시킨 것으로 생각하여 신학설이란 것도 시대적 변형과 시간적 발전이라고 봅니다.

불교연구가 깊지 못하였을 때는 세계의 불교학자들도 (중도사상)이란 것이 인도사상의 하나의 발전과정이지 부처님이 독창적으로 새로 발견한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연구가 깊어짐에 따라서 고대 인도에 있어서 부처님 앞에도 중도사상은 없었고, 당시에도 중도사상이 없었으며 오직 부처님만이 발견하고 성립시킨 새 진리가 중도사상이라는 것이 연구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우정백수와 인도의 바루아(B. M. Barua)의 공적이 제일 크다고 보겠습니다. 그럼 인도사상에서 어떻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처님 당시까지의 인도사상을 크게 나누면 하나는 바라문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여기에 반대하여 일어난 일반사상, 이것을 불교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도 합니다. 인도의 정통사상인 바라문교에서는 전변설(轉變說)을 주장합니다. 우주의 최초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근본적인 범(梵), 즉 브라흐마(Brahma)를 인정하고 이것이 전변하여 순차적으로 잡다함이 생겨서 우주만물이 나왔다고 생각하며, 또 그 개개 물체 가운데 유일무이한 브라흐마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아트만(Atman)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재신(內在神)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은 말하자면 범신(梵神)사상으로 유신적(唯神的)입니다. 우리가 생사를 해탈하여 참으로 영원한 자유를 얻으려면 부정과 죄악에 물들여진 내재신으로서는 해탈할 수 없으므로 마음을 제어하는 명상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육체적인 어떤 노력보다도 정신적 수양을 하는 수련방법을 택했던 것이니 이것을 보통 수정주의(修正主義)라고 합니다.

다음 일반사상, 즉 육사외도에서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합니다. 이 허공 중에 독립하여 상주하는 많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체만물은 이들 제 요소가 서로서로의 결합과 집적에 의해 성립하는 것으로서 결코 유일무이한 근본적인 무엇으로부터 만물이 생겨난다고 하는 단일한 근본체를 부인합니다. 이 설은 기계관에 빠지기 쉽고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으며 종교적 정취도 결여되어 있다고 봅니다.
적취설에 있어서는 물질과 정신을 이원론(二元論)적으로 보아서 정신이 물질인 육체에 속박되어서 생사를 해탈하지 못하므로 육체의 세력을 약하게 하면 그만큼 더 정신이 자유로와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행주의(苦行主義)를 택했습니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전변설이란 종교적 유신적(唯神的)이며 적취설은 과학적 유물론적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상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하는 것인데 상세히 설명하려면 끝이 없고 간단히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 바라문계층의 수정주의자인 아라라 선인과 웃다카 선인에게 가서 공부하여 그들이 체험한 궁극을 증득했으나 실지의 해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전변설을 주장하는 수정주의를 버리고 다음에 적취설을 주자하는 고행주의자로 가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육년동안 갖은 고행을 다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어서 고행을 버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공부하여 새벽별을 보고 정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인도 수행방법의 양대 조류인 전변설의 수정주의나 적취설의 고행주의를 다 버리고 중도에 입각한 연기설이라는 자기의 독특한 새 입장을 개척한 것입니다.

부처님 전의 모든 인도 사람들은 참으로 우주의 근본원리를 바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중도를 몰랐으며 부처님만이 우주의 근본원리를 바로 깨쳐 중도사상을 천양한 것인 만큼 그 이전 인도사상의 시대적 변형이라든가 시간적 발전이라고 볼 수 없고 부처님이 처음 제창하신 새 출발의 사상입니다.

중도사상이 인도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동 서양을 통해서 중도와 같은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유교의 중용(中庸)과 불교의 중도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말하는데 전혀 틀리는 사상입니다. 중용(中庸)이란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인데 그 책 속에서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고 하고 희·로·애·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바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이 중(中)이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중도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누누히 설명해 왔지만 중도란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므로 중용과는 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쌍조(雙遮雙照)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바로 알게 되면 동서양의 모든 종교나 철학이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보면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불교나 유교나 도교나 예수교나 혹은 헤겔철학이나 칸트철학과 같지 않느냐고 혼동시켜 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럼 중도사상이란 다른 어떤 종교나 무슨 이론과도 타협할 수 없는 고립된 사상인가? 예수교나 유교나 도교나 회교나 또는 어떤 철학이든지 간에 각기 자기의 독특한 입장이 있으면 그 입장을 고집하여 타협할 줄 모릅니다. 그것은 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사을 알고 보면 일체 만법이 불교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도사상을 모를 때는 유교는 유교, 불교는 불교, 무슨 철학은 무슨 철학, 유신론이든지 유물론이든지 각각 다 다르지만 중도사상을 바로 알게되면「금강경」에서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중도란 일체만법, 일체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보면 예수교도 우리 불교요, 유교 도교도 우리 불교입니다.
결국 불교를 바로 알려면 부처나 마구니를 함께 다 버려야 합니다. 부처와 마구니가 서로 옳다고 싸우면 양변에 집착했기 때문에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우리 불교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부처와 마구니를 다 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한 대원리입니다. 이 사바세계의 현실은 모순 상극이어서 곳곳에 언제나 싸움이 그칠 사이 없습니다.
그 싸움 때문에 고(苦)가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순 상극인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걸림없는 자유의 세계, 해탈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원통자재한 중도에 입각하여야 합니다. 양변을 떠나 가운데〔中〕도 머물지 아니하는 중도사상만이 오직 참다운 극락세계를 이 현실에 실현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수(賢首)대사가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오교장(五敎章)」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화엄종의 개종선언서(開宗宣言書)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정념(情念)을 버리니 정리(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정리(正理)를 따르니 정념(情念)이 스스로 없어진다.
反情에 理自顯이요 據顯理에 情自亡이니라

일체 차별 망견(望見)을 버리니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체 차별 망견을 버린다 함은 모든 일체 양면을 다 버리는 쌍차(雙遮)를 말하며, 정리(正理)가 나타난다 함은 모든 양변을 버려서 모든 양변이 융합하여 중도원리가 드러난다는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 함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雙照)의 중도원리에서 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쌍차(雙遮), 즉 양변을 버리고 나니 쌍조(雙照), 즉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쌍조(雙照), 즉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雙遮), 즉 양변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표현입니다.

앞에서 말한 '정념을 버린다'함은 차(遮), 즉 막는다 버린다 이며 '정리를 따른다'함은 표(表), 즉 드러난다 융합한다고 하여 화엄종에서는 차(遮)와 표(表)를 가지고 중도를 많이 표현합니다. 차(遮)란 쌍차(雙遮)를, 표(表)란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쉽게 표현하자면 구름이 흩어졌다 하면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났다 하면 구름이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망견을 다 버리고 나면 자연히 쌍조(雙照)의 바른 이치가 드러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바른 이치가 드러나면 양변의 일체 망견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란 말이 본래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영락경(瓔珞經)」에서 나오며 부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천태종의 지자(智者)대사가 중도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그대로 인용해 썼습니다. 그 뒤 화엄종의 현수(賢首)대사가 같은 중도원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쌍차쌍조를 그대로 쓰려고 하니 지자대사를 추종하는 것 같아서 쌍차쌍조란 말 대신에 쌍민쌍존(雙泯雙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또 어디서 연유되느냐 하면 쌍비쌍역(雙非雙亦)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열반경」에서 불성을 얘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佛性은 非有非無며 亦有亦無니 有無合故로 名爲中道니라

불성(佛性)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亦有亦無〕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中道)라 하는 것입니다.

비유비무에서 유(有)와 무(無)란 모순 상극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으로써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서로 고집해 있으므로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 통하지 않고 고집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쌍차가 되어서 비유비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가 되면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합하고, 서로 통하는 역유역무의 쌍조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쌍비쌍역이라고 합니다.
양쪽을 다 버리고 양쪽이 다 살아나는 것이니 쌍비(雙非)는 부정이고 쌍역(雙亦)은 긍정입니다. 부정을 하고 부정하여 철저하게 부정하면 영(零), 즉 공(空)에 떨어져 버리지 않느냐고 의심을 하거나 부정만 하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로 나가는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을 참으로 바로 알 것 같으면 대긍정(大肯定)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온누리를 비추듯이 철저하게 부정해가면 대긍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쌍비쌍역이라 하며 그것이 중도원리입니다.

이렇게 중도원리를 쌍차쌍조, 쌍비쌍역, 쌍민쌍존으로 설명하여도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이를 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眞空)이란 양변을 완전히 버린 쌍차(雙遮), 쌍민(雙泯), 쌍비(雙非)입니다. 이 진공이란 유(有)에 상대적인 공이 아닌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면 공에 떨어진 외도〔落空外道〕가 되고마니 그것도 변견입니다.
그러한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妙有)가 됩니다. 묘유(妙有)란,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으로서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묘유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조(雙照), 쌍존(雙存), 쌍역(雙亦)입니다.

대부정(大否定)하여 대긍정(大肯定)이 된다 하니 그 긍정을 차별적인 긍정으로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묘한 있음〔妙有〕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고 공과 있음이 서로 통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통하고 마구니와 부처가 서로 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공이 쌍차이며 묘유가 쌍조이니, 진공 묘유를 바로 알 것 같으면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雙融〕하여 진공하면 묘유요 묘유하면 진공이며, 진공 내놓고 따로 묘유 없으며 묘유 내놓고 따로 진공 없으니 이것을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합니다. 쌍차가 즉 쌍조요 쌍조가 즉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극본 공식입니다. 이렇게 중도에 대한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꼭 같은 것입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종 종파 가운데서도 임제종을 제일로 하는데 그 개조(開祖)인 임제스님은 중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참다운 부처이며 참다운 법이며 참다운 도인지 대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함이요, 법이란 마음이 광명함이요, 도란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다.
如何是眞佛眞法眞道乞垂聞示하소서. 師云 佛者는 心情淨是요 
法者는 心光明是요 道者는 處處無碍淨光是이다 [ 臨濟錄 ]

임제대사가 불 법 승 (佛法僧) 삼보를 설명하기를 마음 청정함이 부처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 법이요,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 도, 즉 승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일체 차별 망견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니, 쌍차로써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란 망상의 구름이 다 걷히면 거기에 무한한 광명이 비칠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쌍조입니다.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은 청정할 때 광명이 나타나고 광명이 나타날 때 청정하여 청정과 광명이 서로 둘이 아님을 말하며 차조동시(遮照同時)입니다.

도(道)란 승(僧)을 말하며 승이란 본래 화합(和合)을 뜻하니 서로서로 합심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을 말하지만 근본은 청정과 광명이 걸림 없음을 중득한 사람만이 승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도를 깨치지 못하면 승이 아니니 모든 차별 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육조스님의 유촉하신 바대로 중도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이 설하신 근본적인 가풍(家風)으로 사료간(四料揀)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고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有時엔 奪人不奪境이오 有時엔 奪境不奪人이오 有時엔 人境俱奪이오 
有時엔 人境俱不奪이니라 [ 臨濟錄 ]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주관으로, 경계는 객관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관을 버리고 객관은 버리지 않고, 어떤 때는 객관은 버리고 주관은 버리지 않는다. 어찌하기 위해서 그러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면 또 어찌되느냐 하면 주관과 개관을 다 버리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완전히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는다는 것은 쌍차이며,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는다는 것은 쌍차이며, 구관과 객관을 다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쌍조이니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융합 자재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설명하려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진실로 사료간의 법을 호호탕탕하게 쓰려면 중도사상을 알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깨쳐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알아야만 사료간을 알 수 있고 임제정법을 알 수 있고, 거기서 봉(棒)도 쓸 수 있고 할(喝)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변견에 떨어져 집착하게 되면 임제스님과는 영원히 등지고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은 경전의 교학에서 뿐만 아니라 선종에서도 분명하게 중도원리를 천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도를 터득키 위해서는 마음을 깨쳐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하고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이 중도원리는 어느 종교나 어느 철학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입장이니 만큼 선과 교를 통해서 또 남전(南殿) 북전(北傳)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진리는 중도원리에 잇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명심하여야겠습니다. 좀 쉽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얼마나 이해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중도원리를 깨쳐야만 진실한 불교도인 만큼 열심히 정진합시다.

 

 

 

출처 : 고전 취미 붙이기
글쓴이 : 無爲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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