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 : āhāra T : zas E : to eat Cs : 阿賀羅 | ‘먹다’란 표현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 일반적인 ‘밥을 먹다’뿐만 아니라 ‘마음 먹기 나름이다’ ‘나이를 먹다’ 등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이런 언어적 정감을 사용해 붓다는 유정이 존재하고 유지되는 조건으로 최소 세 부류, 특히 욕계에서는 네 부류를 먹는다고 설명했다. 《장아함》등에서 언급되는 단식(段食)·촉식(觸食)·사식(思食)·식식(識食)이 그것이다. 또《증일아함》에서는 이것에 선열식(禪悅食), 원식(願食), 염식(念食), 해탈식(解脫食), 법희식(法喜食)을 더한 9식(九食)을 말하기도 하는데, 앞의 4식이 존재론적 측면인 반면 추가된 5가지는 수행론적 측면에서 강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4식을 설명한다.
식(食)은 대상보다 행위측면에서 이해해야
한자상 식(食)은 명사로도, 동사로도 사용가능한 글자여서 종종 4식을 ‘네 가지 음식’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식(食)의 산스끄리뜨 아하라(āhāra)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면 음식이란 대상측면보다는 먹음이란 행위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하라(āhāra)는 ‘가까이’(near, towards)를 의미하는 ‘ā’와 ‘나르다(carry)’ ‘가져오다(fetch)’ ‘붙들다(seize)’ 등을 의미하는 ‘√hr.’로 구분되는데, 이것에서 ‘음식을 먹다’ ‘음식을 취하다’는 기본의미가 되고, 나아가 ‘끌어당기다’ ‘기르다’ ‘보존해 나가다’ 등의 의미를 갖게 됐다. 곧 중생의 육신이나 성인의 법신을 끌어당기고 양육해 그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대비바사론》129권(T27-674b29)에서는 “존재를 이끈다는 의미가 먹음[食]의 의미이다. 또 존재를 잇는다, 존재를 유지한다, 존재를 발생한다, 존재를 기른다, 존재를 늘린다는 의미도 먹음의 의미이다”라 하며, 《불지경론》1권(T26-295a16)에서는 “몸을 유지시켜 끊어지거나 부서지지 않게 해 유익한 것들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먹음이라 한다”라 한다. 그러므로 아하라는 미래의 존재를 끌어당겨 앞에 나타나 있게 하며, 지금의 존재를 맡아 지녀서 상속해 머무르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유정의 존속에는 4가지 먹음이 있다
이러한 ‘먹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음식의 섭취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것을 포함한다. 다른 대상과 접촉을 통해서, 무언가의 바람을 통해서, 결과 발생의 주체를 통해서 우리의 존재가 유지된다고 불교는 직시한다. 이것을 ‘4식(四食)’이라 한다. ①우리는 살아가면서 보통 세 끼니를 챙기며 여러 음식들을 씹거나 마시며 섭취하는데, 이것이 단식(段食 kavaḍiṃkārāhāra)이다. 냄새·맛·감촉을 본질로 하는 단식은 섭취한 영양소를 통해 모든 근(根)과 4대종을 양육시키는 가장 평범한 의미의 ‘먹음’이다. ②마음과 상응해 항상 발생하는 촉(觸)이란 마음작용을 본질로 하는 촉식(觸食 sparśākārāhāra)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계 대상을 포착했을 때 일어나는 주객의 접촉작용이다. 이때 발생한 기쁨과 좋음으로 마음과 마음작용에 도움이 되게 하고 나아가 모든 근과 대종을 양육시키는데, 이것은 유루(有漏)의 근·경·식(根境識)이 화합해 발생한 것이다. 예컨대 닭이 알을 품어 좋은 느낌을 내면 그 알은 이 따뜻한 온기를 받아 영양을 좋게 하는 경우이다. ③희망을 특징으로 하는 사식(思食 manaḥ-saṃcetanākārāhāra)은 제6의식에 상응하는 사(思)란 마음작용이 마음에 드는 대상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내 장차 올 결과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근들이 번성하고 생존상태를 계속하게 된다. 예컨대 배고프고 목마르더라도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생각해 사람이 죽지 않게 되는 경우이다. ④제8알라야식을 본질로 하고 굳게 붙잡음[執持]를 특징으로 하는 식식(識食 vijñāna-āhāra)은 단식·촉식·사식 3가지의 힘에 의해 미래의 결과를 만드는 주체로서, 유정의 육신과 생명을 유지해 부서지지 않게 하므로 ‘먹음’이라 한다. 마치 무색계와 지옥의 중생이 식(識)을 먹는 것과 같다. 인간을 놓고 보더라도 사실 주위의 모든 것이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관계를 맺고 있지만 앞서 말한 4식은 그 의미가 특히 월등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 가운데 단식은 현재 몸체를, 촉식은 마음과 그 작용을 증진시키는 힘을 갖는다. 또 사식과 식식은 후유(後有)를 이끌고 발생하는 의미에서 월등하다. 곧 미래의 발생에 있어서 사식이 이끌고 식식은 업의 훈습된 식의 종자세력에 의해 후유를 발생한다.
4식을 잘 관찰하면 아나함, 아라한이 된다
《잡아함》15권 《자육경(子肉經)》에서는 이러한 4식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①드넓은 황야를 건너기 위해 부모가 눈물을 머금고 아들의 살을 먹는 것처럼 단식도 그러함을 안다면 5욕락이 끊어져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될 그 속박이 소멸된 아나함[不還果]이 된다. ②가죽이 벗겨진 소가 가는 곳마다 여러 생물들에게 뜯어 먹혀 괴로움을 받는 것처럼 촉식도 그러함을 안다면 괴로운 느낌[苦受]·즐거운 느낌[樂受]·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捨受]이 끊어져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아라한(阿羅漢)이 된다. ③지혜로운 이는 숯불화로에 떨어지지 않으려 두려워하고 그곳을 피하지만 어리석은 이는 고통을 받다 목숨을 잃게 되는 것처럼 사식도 그러함을 안다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欲愛]·높은 세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有愛]·자아의 단멸에 대한 욕망[無有愛]이 끊어져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아라한이 된다. ④흉악한 도둑이 아침·점심·저녁으로 백 개씩의 창에 찔려 고통을 받는 것처럼 식식도 그러함을 안다면 명색(名色)이 끊어져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아라한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5욕락(五欲樂)이 사라지고, 촉식에서는 3수(三受), 사식에서는 3애(三愛), 식식에서는 명색(名色)이 끊어져 성인에 이른다는 것이다. 네 가지 먹음을 통해 나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에 먹어치운 각종의 것들에 대해 번뇌가 발생하지 않게 함으로써 그것이 사라진 경지, 열반(涅般)에 이를 수 있다는 강조는 불교의 지향점을 나타내는 것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욕계와 4생 모두에는 4식이 다 있지만 무색계와 색계에는 단식을 제외한 3식만 있다. 그런 가운데 각각의 처소에는 월등한 먹음이 다음처럼 있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