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시민운동에 보내는 불교의 고언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1:22


시민운동에 보내는 불교의 고언
김성철

- 목 차 -
들어가는 말
참여의 패러독스
하나의 분별
동체대비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현실참여. 왠지 불교와는 거리가 먼 개념같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불전에 쓰여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현실을 떠나 수행하는 구도자를 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행위의 구체적인 지침으로 제시되는 계율의 경우에도 세속적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탈속적 구도행(求道行)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며 재가(在家) 오계(五戒)의 경우에도 적극적 행동 지침이 아니라 그릇된 행위를 제약하는 소극적 규범일 뿐이다. 즉, 불전에서는 세속적 삶으로부터의 이탈을 권장한다.

벽지불의 원리행(遠離行)을 칭송하고, 숲 속에서의 명상을 권유한다. 세속적 난국에 직면하는 경우 극복보다 포기를 가르치는 것 같아 보인다. 이를 소승(小乘)이라고 한다. 소승불교의 경우 불교 수행자가 세속인의 현실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신자가 봉양한 시주물을 받아 주는 것이었다. 수행자는 공양물을 기꺼이 받아 줌으로 인해 시주자에게 복을 주게 된다. 수행자의 법력이 클수록 시주자가 받는 복도 크다. 그래서 불교신자들은 지계청정한 스님들을 복전(福田)이라고 부르며 공경한다.

그러나 대승(大乘)은 이와 다르다.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여기서 대승과 소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소승적 수행자를 폄하(貶下)하던 과거 북방 불교의 오만을 답습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대승과 소승이라는 용어를 종파적 개념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의 방식에 대한 조망으로서 대승과 소승을 구분 짓고자 한다. 우리가 공경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현생도 위대했지만 《본생담(本生譚:Ja?aka)》에 기술된 그 전생 역시 위대했다.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tha)의 성도(成道) 전 구도행을 재현하여 살고자 하면 소승이고, 승속(僧俗)에 관계없이 《본생담》에 등장하는 보살의 무량한 이타행을 실천하고자 하면 대승이다.

두 가지 모두 위대한 삶이다. 따라서 여기서 필자가 사용하는 대승이라는 술어는 소승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불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전통적 불교에 내재한 이타적 측면을 부르는 말이다. 대승적 삶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의 삶의 모습을 추구하는 삶인 것이다. 《본생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의 인격체에 대한 호칭으로 쓰였던 ‘보살’이라는 고유명사는, 대승의 시대가 되자 모든 불교인들에 대한 호칭으로 전용된다. 즉, 보통명사가 되는 것이다.

모든 대승불교인, 즉 대승보살의 삶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많은 전생의 삶과 같이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삶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濟度)한다. 그리고 하화중생하는 삶은 현실참여의 삶이다. 십수 년 전부터 불교의 기치를 내건 다양한 성격의 시민운동 단체가 설립되어 대승적 이타(利他)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불교 단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실참여는 불교다워야 할 것이다. 즉, 상구보리를 통해 얻어진 불교적 조망이 하화중생적 현실참여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불교적 안목을 갖추지 못한 채 하화중생하는 무모한 현실참여는 반향 없는 외침이 되거나 평지풍파로 귀결되기 쉽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화중생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불교적 현실참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또, 지금 수많은 시민단체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현실참여에 대해, 불교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떠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 사회를 향한 이타행은 참여주체의 권위와 명예를 향상시킨다. 속되게 표현하면, 참여주체로 하여금 ‘잘난 체’를 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타심에서 시작된 현실참여가 결국은 지극히 이기적인 성취로 귀결되고 마는 것 아닌가? 또, 현실참여는 언뜻 보기에 불교의 궁극적 가르침과 상치되는 것 같아 보인다. 시비와 선악을 분명하게 판가름해야 하는 현실참여는 일체를 무차별하게 부정하고 일체를 무차별하게 긍정하는 듯한 반야(般若)와 화엄(華嚴) 사상과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 아닐까?

또,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이 위선이 되지 않고 억압하는 자에 대한 비판이 증오가 되지 않기 위해서 참여주체가 갖추어야 될 마음자세는 무엇일까? 필자는 본 글을 통해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불교적 조망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참여의 패러독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진술이나 행동이 패러독스(paradox)에 빠지는 상황을 종종 체험한다. 차량이 붐비는 시내에서 짜증을 내는 운전자. 담벼락에 쓰여 있는 ‘낙서금지’라는 글귀. 한국 사람을 욕하는 한국 사람. 서양의 철학 사상 중에서도 패러독스적 성격을 갖는 사상이 비일비재하다.

순수이성의 능력을 비판하는 칸트(Kant)의 순수이성.1) 모든 철학을 비판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철학.2) 서구의 로고스(logos) 중심주의적 전통을 비판하는 데리다(Derrida) 자신의 로고스.3) 인류의 정치사 역시 패러독스의 연속이었다. 전제군주제를 몰락시킨 프랑스 혁명정신의 수호자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황제로 추대되는 나폴레옹. 지배계급을 타도하자는 집단이 다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게 되는 공산주의.4) 과거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작금의 현실에서도 정치적 활동은 철저하게 패러독스적이다.

국민을 위하겠다며 결국은 자신의 명예를 드날리게 되는 정치인. 평생을 남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다 간 슈바이처 박사와 마더 테레사가 얻게 된 명예. 인류의 구원과 중생의 제도를 위해 일생을 희생하신 예수와 부처에 대한 우리들의 지극한 공경. 그 당사자들의 선의와 무관하게 패러독스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심지어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는 선가(禪家)의 명제 역시 패러독스의 발생을 면하지 못한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不立文字)’며 문자를 세우게 되고,5) ‘입만 열면 그르친다(開口卽錯)’며 입을 열게 되며, ‘마음을 비운다’는 생각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패러독스적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런 발화나 행동을 하는 당사자들이 우매해서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우리의 사유와 세계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에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생각을 해도 그르치고 만다. 심지어 ‘그 어떤 생각을 해도 그르친다’는 이 말도 ‘생각’의 일종이기에 ‘그르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다.6) 대승불교의 아버지, 또는 제2의 부처라고 칭송되는 용수(龍樹:150∼250C.E.頃)에 의해 완성된 ‘공(空)의 논리’는 인간의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는 반논리(反論理)이다.

용수는 《중론(中論)》이나 《회쟁론(廻諍論)》 등을 통해 ‘공의 논리’를 구사하고 있는데,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사태에 내재하는 패러독스를 지적하는 논법7)도 ‘공의 논리’에 속한다. 그리고 ‘공의 논리’는 불교의 중심 교설인 연기설(緣起說)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연기를 위배할 때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해 줌으로써 연기와 공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하게 해 주는 논리가 바로 공의 논리인 것이다. 공의 논리 중 ‘패러독스를 지적하는 논법’과 ‘연기설’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사유는 개념과 개념, 사태와 사태를 ‘분할’함으로써 구사된다. 그러나 이 세계는 한 덩어리이다. 모든 것은 얽혀 있다. 즉 분할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연기적(緣起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긴 것과 짧은 것, 나와 남, 주관과 객관, 삶과 죽음 등은 서로 의존하여 발생한 개념(槪念:concept)과 사태(事態:fact)들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 우리는 그런 개념과 사태들의 의존적 기원(起源)을 망각하고 분별(分別:vikalpa)이라는 생각의 가위에 의해 특정한 개념과 특정한 사태를 오려내야 한다. 즉 세계를 분할해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얽혀 있기에 생각이나 행동의 분할에 의해 유리된 일방(一方)에는 다른 일방의 흔적이 잠재하는 것이다. 분할하여 배척된 것은 순수 타자가 아니라 자기를 내함(內含)한 타자이다.

그래서 ‘분할’ 이후의 언행은 ‘자기지칭(自己指稱:self-reference)’을 초래한다.8) 그래서, 한 생각만 내어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낙서금지라는 낙서’는 ‘다른 낙서’와는 다르다고 생각(분할)되기에 담벼락에 쓰여졌지만 그것 역시 낙서의 일종(자기지칭)이기에 패러독스가 초래되는 것이다. 또, 지배계급을 타파하기 위해 모인(분할) 집단 역시 혁명의 주도권을 쥔 지배계급(자기지칭)이 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남을 위한(분할) 행동은 결국은 자신을 위하게(자기지칭) 된다.

따라서 ‘동정의 대상’과 ‘동정하는 자’ ‘비판의 대상’과 ‘비판하는 자’의 ‘분할’을 전제로 하는 시민운동과 같은 참여 행위에서도, 그 행위 중에 던져진 ‘떡’, 또는 ‘돌팔매’가 결국 그 행위의 주체를 향해 되돌아오는(자기지칭) 패러독스가 초래된다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참여는 이타심과 비판 정신에 토대를 둔 사회적 활동이다. 고통을 받는 계층에 대해 도움을 주는 것과 고통을 주는 집단을 비판하는 것이 현실참여의 양대 목표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비판하고 도움을 주는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 속에서 그 활동 주체들의 정체와 언행이 부각되어야 한다. 비판과 봉사가 성공적일수록 활동 주체들의 권위와 명예는 그에 비례하여 상승한다.

남을 위한 활동이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되고 만다. 환경운동가와 시민운동가는 그 이타적, 비판적 활동으로 인해 명예를 날리게 된다. 또, 비판을 위해 쏘아 댄 화살은 마치 부우메랑과 같이 참여의 주체를 향해 날아온다. 엄정한 도덕성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참여의 주체들은 자신들이 쏘아 댄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어떤 참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시적(可視的)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참여 주체의 ‘개인적 성공과 명예’가 수반되는 패러독스가 발생되는 법이라면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무주상(無住相)의 정신으로, 티를 내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참여는 모두 비난받아야 할 것인가? 많은 불교인들은 지금까지 현실참여에 내재하는 이상과 같은 패러독스를 직감하고, ‘유별나게’ 행동하는 참여의 주체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견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 참여 행위 자체가 비판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참여 행위에서 발생하는 패러독스는, 분할(=분별)을 통해서만 구사되는 우리의 ‘생각’과, 연기적(緣起的)으로 얽혀 있는 ‘세계’의 본질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독스를 초래하는 참여 행위가 죄악이라면 인류 역사상 이름을 날린 모든 위인들은 ‘불후의 명예’라는 개인적 소득을 얻었다는 점에서 모두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로, 현실참여는 절대적 선(善)이기에 무조건 권장되어야 할 것인가? 이 역시 옳지 않을 것이다. 참여는 패러독스를 야기한다. 남을 위한 행동이 결국은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증대시킨다. 따라서 참여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남을 위함’과 ‘자신을 위함’의 선후 관계는 결코 뒤바뀌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세계의 패러독스적 구조로 인해 참여의 주체들이 얻게 된 ‘자신을 위함’이라는 소득은 남부끄럽고 성가신 부산물일 뿐이다.

또, 비판적 활동을 하는 참여의 주체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비판 대상의 정체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이다. ‘낙서금지’의 예를 통해 이에 대해 설명해 보자;만일 어떤 집의 담벼락을 깨끗한 페인트로 새롭게 단장한 후 그 집의 주인이 담벼락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써 놓는다면, 이는 패러독스에 빠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아무도 낙서하지 않은 담에 주인 스스로 낙서금지라는 낙서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서금지라는 글귀가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는 상황이 있다. 새롭게 단장해 놓은 담벼락에 동네 어린아이들이 죄책감 없이 낙서를 하는 것을 본 집 주인이 그 담 한 구석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써 놓을 경우 그 글은 패러독스에 빠진 낙서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발생할 다른 낙서를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하기에 유용한 낙서가 된다.9)

‘불립문자’나 ‘개구즉착’이라는 선가(禪家)의 명제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자를 통한 불교 공부에만 매달리고 말에 의한 불교 공부만이 성행하는 경우 불립문자와 개구즉착이라는 금언은 패러독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공부 풍토를 시정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이 있는 경우에 한해 그 병에 알맞은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다(應病與藥). 그러나 불립문자와 개구즉착이라는 표어가 도그마와 같이 항구불변의 행동 지침으로 신봉되는 경우에는 설사병에 걸린 사람이 해열제를 장기 복용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에게 해를 끼칠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현실참여의 경우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킬 위험이 내재한다.10) 비판의 대상이 되는 문제점에 대한 진단이 잘못된 경우 그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적 선언은 사회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즉, 아무 낙서도 되어 있지 않은 담벼락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쓰는 꼴이다. 그러나 마치 의사가 병명을 명확히 진단해내듯이 사회 현실의 문제점이 명확히 파악된 경우, 또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악이 반드시 개선될 수 있는 경우, 대사회적(對社會的) 비판은 패러독스를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비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를 진정으로 개선하는 참여가 되기 위해서는 참여적 언행 이전에 당면한 현실적 문제의 정체에 대한 전문적이고 치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낙서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하나 남는다. 비판적 참여의 경우, 참여의 주체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엄밀한 도덕성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파악이 명확하다면, 그런 비판 활동은 모두 성공적일 수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참여의 범위에 걸맞는 참여 주체의 권위가 확보되어 있어야 대사회적 비판 행위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11) 예를 들어 동네 어린아이들에 의해 담벼락에 낙서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권위를 가진 어른이 아닌 그 집 어린아이가 나와 ‘낙서금지’라는 글을 쓸 경우, 그 글은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참여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참여주체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노력 역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3. 하나의 분별

불교인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조언을 하고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를 가르친다. 그러나 지혜와 자비의 현실적 구현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화해, 사랑, 평화, 평등과 같은 단어를 남발하는 상투적 조언은 설득력을 상실한 공허한 외침이 되기 쉽다. 무조건적인 자선(慈善)은 수혜자(受惠者)의 자활 능력을 해칠 수도 있다. 지혜와 자비가 현실 속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무궁무진한 응용이 요구된다. 또, 불교 내의 많은 금언(金言)들은 작위적인 행동에 대해 냉소적이다.

‘분별을 버려라’ ‘시비를 가리지 말아라’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라’……. 반면 참여는 문제가 되는 현실에 대한 치밀한 분별과 시시비비(是是非非)의 간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시시콜콜 분별이나 짓고 조목조목 시비를 가리는 참여는 반(反)불교적인 행동으로 배척되어야 하는 것일까?

불교인들은 수많은 사회적 문제점들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방관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비와 분별을 배격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제적(眞諦的) 가르침일 뿐이다. 모든 불교 교리는 진리의 차원에서 교시된 진제(眞諦:para-ma?tha satya)와 일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속제(俗諦:sam.vr.ti satya)로 양분된다.

진제란 엄밀한 이치에 토대를 두고 발화되는 불교적 진리를 말하고, 속제란 일반인들의 관습적 인식에 순응하여 발화되는 불교적 진리를 말한다. 진제의 차원에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노래하듯이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을 뿐 아니라 불교적 진리랄 것도 전혀 없지만 속제의 차원에서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귀도 있으며 선행을 닦고 수도하여 해탈을 추구해야 한다.

진제의 차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없지만 속제의 차원에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존재한다. 진제의 차원에서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으며, 선악(善惡)도 없고, 보시도 공(空)하고, 계율도 공하지만 속제의 차원에서는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보시와 계율이 엄연히 존재한다.

시비를 가리지 말라든지, 분별을 버리라는 불교적 금언(金言)은 진제의 관조를 위해 수용되는 경우에 한해 유용할 수 있다. 그런 금언들이 속제적 행동의 지침으로 강요되는 경우 우리는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되는 악취공(惡取空)의 나락에 빠지기 쉽다.1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공과 무분별과 무차별을 말하는 진제적 교설을 속제 내에서의 행동 지침으로 혼동한다.

진제적 교설은 깨달음을 구현하는 과정에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참여란 일반인들의 관습적 인식의 차원, 즉 속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속제의 차원에서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엄정히 가려내야 하고, 문제가 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치밀하게 분별해내야 한다.

불교 교리 중 화엄(華嚴)의 절대긍정이나 반야(般若)의 절대부정과 같은 사상은 결코 세속에서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다. 당사자로 하여금 현실적 문제에 대한 최상의 해결 방안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게 해 주는 진제적 사상이다. 즉, 참여의 지침이 아니라 수행의 지향점이다. 이는 선(禪)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언어와 문자의 세계를 희롱하는 선가의 명제가 그대로 현실적 문제의 해결 방안이 될 수는 없다. 이 역시 진제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흘려진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분별과 간택이 요구되는 속제의 세계이다. 원효는 《열반종요(涅槃宗要)》 서두에서 ‘실상무상고무소불상(實相無相故無所不相)’이라고 말한다.13) ‘참 모습은 모습이 없기 때문에 띄지 못할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반야의 절대부정의 사상과 화엄의 절대긍정 사상을 혼합한 선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원효의 취지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원효의 말은 절대부정 혹은 절대긍정이라는 진제의 세계를 노래한 금언(金言)이다. 속제인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 대하는 것은 그러한 ‘무상(無相)’과 ‘일체상(一切相 = 無所不相)’의 중간에 위치한 ‘하나의 모습(一相)’일 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지금 내 눈 앞에 놓여 있는 컵은 엄밀히 말해 그 본래적인 모습이 없다. 위에서 보면 동그란 모습이고, 옆에서 보면 네모난 모습이며, 내 눈앞에 마주 대면 컴컴한 벽이 되고, 저 멀리 멀어지면 하나의 점이 되며, 더 멀리 멀어지면 그 모습이 자취를 감추어 허공과 동화된다. 보는 각도와 떨어진 거리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그 중 어떤 것도 컵의 모습이 아니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 모든 모습들이 컵의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컵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이냐고 물을 경우 반야적(般若的) 견지에서 ‘무상(無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고 화엄적(華嚴的) 견지에서 ‘일체상(一切相 = 無所不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파의 발상이 바로 이와 유사한 것이었다. 입체파의 화가들은 형태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하나의 시점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통적 화법을 비판하면서 인물의 정면도와 측면도를 동시에 그리는 해괴한 그림들을 그려내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피카소의 이러한 작업은 넌센스(nonsense)이다. 입체의 진실을 평면 위에 나타내려면 정면도와 측면도뿐만 아니라 무수한 조감도가 동시에 그려져야 할 것이다. 물론 내 눈앞의 컵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一切相)을 표출하며 그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컵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말 할 수 없다(無相).

일체상과 무상이 컵의 모습에 대한 진실이지만, 이는 단 한 번도 내 눈에 의해 확인될 수 없는 관념상의 진실이다. 실제로는 매 순간 나는 내 눈으로 그 중 단 하나의 모습(一相)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사물의 입체적 진실을 평면 위에 나타내고자 한다면 어느 한 시점에서 포착된 그 사물의 형태(一相)를 충실하게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일체의 분별을 부정하는 반야의 지혜와, 거꾸로 일체의 분별을 긍정하는 화엄의 지혜는 진제의 차원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고, 컵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속제인 현실에서는 매 상황마다 단 하나의 분별만 가능한 것이다. 즉, 불교의 진리를 진정으로 터득한 사람은 분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매 순간 그 상황이 요구하는 최상의 분별을 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최상의 분별을 낼 수 있기 위해서는, 간경(看經)과 수행을 통해 반야와 화엄의 진리에 대해 체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반야적 공성(空性)과 화엄적 다면성(多面性)에 대한 철저한 조망을 체득해야 한다. 반야와 화엄의 세척을 거치지 않은 치우친 사고(思考)에 의해 고안된 정책은 악순환을 야기하기 쉽다. 수행의 도상에서 터득되는 반야와 화엄의 지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되는 ‘하나의 분별’이 최선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식의 정화제이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하는 경우, 화엄과 반야의 세척을 거친 참여주체의 이성(理性)만이 문제가 되는 매 사안에 대해 최상의 해결 방안을 창출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화엄과 반야의 이치에 비추어 보면 갈등하는 다양한 사안들을 모두 해결하는 하나의 지침이 반드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상(萬相)은 일상(一相)으로 수렴하고 일상은 만상으로 확장된다. 실례를 들어보자. 수년 전부터 등산객들이 자주 찾는 사찰에서 무료로 점심을 대접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일에도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설거지물이 계곡 물을 오염시킨다. 무료로 식사하려는 등산객들이 너무 많아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설거지 인력이 부족하다. 돈을 받으면 그런 문제들이 일부 해결되겠지만 산 정상에 식당이 하나 더 생긴 꼴이 되어 오히려 비난을 받기 쉽다. 이 경우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 발우공양하는 사람에 한해 식사를 제공한다’는 ‘하나의 지침(一)’을 만들게 되면 ‘많은 문제(多)’가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다.

등산객들에게 생활불교를 가르치게 되고, 불교의 자비정신을 느끼게 하며, 설거지물이 거의 필요 없게 되어 환경이 보전되며, 식사하는 인원도 어느 선에서 제한될 것이다. 이 경우 ‘발우공양’이라는 ‘하나의 분별’이 ‘많은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준다. 상호 갈등하는 그 어떤 사안(事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해 주는 하나의 분별은 반드시 존재한다. 만법(萬法)이 일법(一法)으로 수렴한다는 화엄(華嚴)의 진리는 이 세상 그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안에 대한 분석이 치밀하지 못하고, 그 해결을 위한 숙고가 부족하며, 정책을 입안하는 당사자가 타성적 사고에 젖어 있기에 최적의 분별을 고안해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현실적 문제에 대한 불교적 대안의 제시는 무분별과 무차별을 가르치는 진제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별과 차별을 담고 있는 속제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진제적 교설은 상구보리적 수행에만 소용되는 교설일 뿐이며, 대사회적인 선언이나 정책의 제시는 속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면한 사안에 대해 무차별과 무분별로 대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분별, 즉 최적(最適)의 분별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인이다. 그리고 화엄과 반야의 세척을 거쳐 모든 편견에서 해방된 이성(理性)만이 당면한 사안의 문제점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최상의 해결 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마치 진리당체(眞理當體)이신 관세음보살께서 천만억 화신(化身)으로 나타나시듯이.

4. 동체대비

현실참여는 이타심과 비판정신에 토대를 둔 사회 활동이다. 참여의 주체들은 억압받는 자와 고통받는 자에 대해 도움을 주고, 억압하는 자와 고통을 주는 사안에 대해 비판한다.

그러면 이러한 선행과 비판 활동은 모두 지고선(至高善)인가? 그렇지 않다. 불교적 견지에서는 동체대비적(同體大悲的) 조망과 심성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지는 동정과 비판만이 진정한 선행이라고 불릴 수 있다.

불교에서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가르친다. 영원하고, 단일하며, 자발적인(常一主宰)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내가 없다.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온 우주와 온 생명이 모두 나의 몸이라는 말이 된다. 즉, 온 세상은 한 몸이다(同體).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싫어하고 안락을 추구한다(離苦得樂). 따라서 동체의 진리를 자각한 보살은 모든 중생에 대해 발고여락(拔苦與樂)의 자비행을 시현한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이러한 보살의 마음을 외아들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에 비유한다.14) 모든 중생에 대한 동체적 조망은 불교적 수행을 통해 체득되며, 대비심은 그렇게 체득된 동체적 조망의 자연적 귀결이다.

즉, 무아의 체득을 지향하는 상구보리의 수행을 거쳐야 우리는 진정한 동체대비적 조망과 심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참여의 주체는 현실참여적 활동과 아울러 참회와 기도와 좌선과 간경(看經) 등으로 이루어지는 상구보리적 정진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동체대비적 조망과 심성에 토대를 둔 동정이 아니라 나와 남을 분할한 이후의 동정은 동정 받는 자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 동체대비적 선행이 아닌 경우 동정 받는 자는 한없는 모멸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동정 이후에 시여자(施與者)가 느끼는 삶의 보람은 자칫하면 열등한 수혜자(受惠者)를 밟고 일어선 추악한 자기 만족이 될 수가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이러한 베품을 ‘청정하지 못한 베품(不淨施)’이라고 규정한다. ‘청정한 베품(淨施)’인 동체대비적 베품은 티가 나지 않는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이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말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15)는 예수(Jesus)의 명령은 이런 무주상보시의 정신에 비교된다. 그런데 불교적 견지에서 보면, 이때 오른손의 선행은 그 오른손 자신도 몰라야 한다. 오른손이 하는 선행을 남들이 모르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몰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진정한 선행이다. 다친 자식의 상처를 치료해 준 어머니가 선행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할까? 다만 다친 자식이 안쓰러울 뿐이다.

동체대비적 선행은 자기 자신에게도 티가 나지 않는 법이다. 이는 비판활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남을 분할한 이후의 비판은 증오심에 가득 찬 공격이 되기 쉽다. 억압하는 자에 대한 비판 역시 동체대비심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증오와 공격은 또다른 증오와 공격을 초래한다.

역사적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발생하는 것이다.16) 따라서 어떤 특정 인격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비판활동을 하는 경우 우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행위를 시정하도록 준엄하게 요구하되 상대방의 인격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압제하는 권력자도 사실은 무명(無明)에 싸인 가련한 중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와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비폭력 운동이 이런 동체대비적 참여를 예증한다.

5. 맺는 말

필자는 지금까지 현실참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을 불교적 견지에서 조망해 보았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이루어지는 현실참여에 대해, 불교인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이 일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런 행위가 초래하는 패러독스를 직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의 폭거(暴擧)에 대해 항거하던 집단이 또다른 권력을 형성하게 된다.

권력자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집단의 도덕성 역시 문제가 된다. 현실참여로 인해 참여주체의 명예와 권위가 향상되기에 참여의 순수성이 의심받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교인들은 티를 내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현실참여를 지향해 왔다. 사실, 불교의 경우 기독교에 비해 고아원이나 양로원과 같은 사회복지 시설이 많이 눈에 띠지 않는 이유는 사회복지에 대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이를 겉으로 드러내놓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집이 없는 사람은 절에서 받아 주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도 수많은 사찰이 고아원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인들의 대사회적 비판활동의 경우에도 이런 무주상의 정신이 작용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가시적(可視的)인 현실참여가 초래하는 패러독스는 죄악이 아니다.

당면한 문제가 해결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패러독스의 발생에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현실적 문제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히려 현실참여로 인해 얻어지는 명예와 권위를 이용하여 발언권을 강화함으로써 참여 효과의 극대화를 도모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명예와 권위가 참여의 제일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참여의 주체는 현실의 문제점이 진정 해결되기만 한다면 심지어 자신의 개인적 불명예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비판 활동을 통한 현실참여의 경우, 그 비판의 화살은 반드시 그것을 쏜 참여주체를 향해 되돌아오게 된다. 사회적 인과응보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쏜 비판의 화살에 의해 다치지 않기 위해 참여주체는 언제나 엄정한 도덕성으로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또, 불교인들의 현실참여란 다른 시민단체의 장단에 맞추어 덩달아 이루어지는 참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안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거친 후, 문제점이 확실히 드러난 경우에 한해 그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마련하여 참여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무분별한 참여는 반향 없는 공허한 외침이나, 평지풍파가 되기 쉽다. 또, 가시적인 현실참여에 대해 비판적이고 소극적인 불교인들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반야나 화엄, 선에서 말하는 무차별적인 교리가 그대로 현실참여의 지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반야(般若)의 절대부정과 화엄(華嚴)의 절대긍정, 선(禪)의 언어도단의 교리는 이제(二諦) 중 진제를 구현하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현실은 분별과 간택(揀擇)으로 영위되는 속제의 세계이다. 따라서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은 무차별과 무분별이 아닌 ‘하나의 분별’의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산적한 많은 문제들을 일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체적인 ‘하나의 분별’을 가장 잘 구성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불교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참여의 장(場)인 현실의 세계는 무분별과 무차별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절박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매 순간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체적인 분별을 발견해내야 한다. 반면에, 실상(實相)의 절대긍정적 측면과 절대부정적 측면을 일깨워 주는 화엄과 반야의 진리는 우리가 현실에서 매 순간 최적의 분별을 찾아낼 수 있도록 우리의 인식을 정화시켜 준다.

나의 주관적 기호에 따라 치우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사물과 사태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안목을 키워 주는 것이다. 이렇게 진제는 나의 관(觀)을 향상시키고 속제는 나의 행(行)을 인도한다. 또,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이나 고통을 주는 자에 대한 비판 모두 그 바탕에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이 깔려 있어야 한다.

동체대비의 정신을 망각한 동정은 고통받는 자에 대한 모욕이 되고, 동체대비의 정신을 망각한 비판자는 억압하는 자를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참여의 주체는 진정한 동체대비적 심성을 체득하기 위해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불교인들의 현실참여는 반드시 불교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무주상의 참여, 즉 티 안 나는 잠행적(潛行的) 참여만이 불교적 참여인 것은 아니다.

가시적(可視的) 참여, 적극적 참여 역시 불교적일 수 있다. 명예와 권위를 추구하지 않고, 엄정한 도덕성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비판의 대상에 대한 파악이 명확한 참여는 가시적 참여라고 하더라도 불교적 참여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당면한 매 사안에 대한 최적의 해결방안을 분별해 냄으로써 이루어지는 참여, 동정과 비판의 대상에 대해 동체대비의 자세로 대하는 참여에 대해 우리는 불교적 참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끝>

김 성 철
서울대 치의학과 및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불교문화대 교수. 논문으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역설과 중관논리>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중론>화쟁론><불교의 중심철학>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