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의 소승 폄하에 대한 반론
조준호
1. 들어가는 말
- 목 차 -
들어가는 말
대승에 의한 초기불교의 폄하
초기 부파불교의 대승 비판
대승의 불설론
대승 불설론의 문제
초기불교의 침묵
마치는 말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를 소승(小乘)이라 한다. 특히 대승불교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소승이라는 말을 아주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소승이라고 얕보고 스스로 대승이라는 우월 의식을 과시하려 하는 경우까지 볼 수 있다. 그러한 정도가 매우 무모하거나 또는 일종의 폭력처럼 느껴질때도 있다.
나아가서 이 말이 학문적으로 보편 타당한 지위라도 확보하고 있는, 매우 객관적인 용어인 양 불교 관계 전문 서적이나 논문에서조차 남용되고 있다. 대승에서 소승은 보리(菩提)·열반(涅槃)·해탈(解脫)로 갈 수 없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의(眞意)가 모두 드러나지 않은 예비적인 가르침으로서 열등한 근기를 위한 졸렬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대승에 의해 소승이라고 폄하된 초기불교 부파에서는 대승불교를 역사적인 부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비불설(非佛說)로 본다.
그러한 비불설에 근거를 둔 대승의 소승이라는 오명(汚名)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왜 이와 같은 폄하가 있게 되었는가? 과연 소승이라고 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는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또는 원론적인 측면에서 소승이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2. 대승에 의한 초기불교의 폄하
1) 소승이라는 말의 의미
흔히 불교 관련 책자에서 초기불교 부파 혹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먼저 소승이라는 말부터 살펴보자.
팔리(Pa?i)나 산스크리트(Sanskrit) 모두 히나야나(H沖naya?a)로 쓸 수 있는 것으로 반대어는 마하야나(Maha?a?a)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렇지만 H沖na는 ‘큰 것’에 대한 ‘작은’ ‘적은’이라는 뜻도 있지만 낮은, 열등한, 부족한, 비열한, (비)천한, 하층의 뜻이 더 강하다.
즉, 객관적인 의미에서 큰 것에 대한 작은, 많은 것에 대한 적음, 높은 것에 대한 낮은, 길이가 긴 것에 대한 짧음을 나타내기보다 저속한, 열등한, 비열한, (비)천한 등과 같이 어떤 나쁜 속성이나 가치를 나타내는 데 주로 쓰였다. 그래서 한역에 있어, 소승이나 영역의 Small vehicle이라는 말은 원래 H沖naya?a가 함축한 뜻을 충분하게 담고 있는 역어라고 볼 수 없다.
Maha?a?a의 maha貶? 대한 긍정적인 의미로의 반대어나 상대어는 ks.udraka(팔리. khuddaka)나 ks.ulla(팔리. culla나 cu?.a)를 들 수 있다. 모두 ‘작은’것을 의미하지만 전통적으로 불교 경전에서 maha貶? 대한 상대어로 ks.ulla(culla)가 더 많이 쓰여졌다.
예를 들면 초기불교 경전의 품(品)을 분류하는 데 있어 maha? vagga에 대한 culla vagga는 매우 흔한 경우이다. 또 경명에 있어 Maha?沖ddesa에 대한 Cullan沖ddesa와 같은 경우나, 인명에 있어서나 사람에 있어 동명이인일 때 이름 앞에 maha膨? culla를 붙여 구분하기도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ya?a는 수레를 뜻하는 승이나 vehicle로 직역되었지만, 오히려 가르침의 교(敎)나 길을 나타내는 말로서 도(道)라는 말이 더 적합함은 불교 경전 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대승이 대승 이전의 불교를 Ks.udrakaya?a나 Ks.ullaya?a가 아닌 H沖naya?a로 사용한 저의는 단순히 ‘작은 수레’를 뜻하는 말이 아닌 ‘저속한 또는 비천한 가르침이나 도’라는 매우 경멸적인 명칭으로 사용하였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쓰임새에 대해서는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대승경전 내에서도 초기불교를 어떻게 천시하고 폄하하고 있는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대승에서 초기불교를 경멸과 폄하를 통해 적대적, 대립적 형국으로 받아들였는가는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지만, h沖na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대승은 단순한 반대의 차원을 벗어나 대승 흥기 이전의 불교에 대한 그 어떤 사무친 원한(?)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2) 소승의 대상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 소승이라고 한 것은 사원 중심으로 이기적인 행태에 빠져 있는 부파불교의 출가승을 비판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집단을 ‘소극적 출가 중심주의적인 성문승가(聲聞僧伽)’라고도 하는데, 과연 소승이라는 말이 성문승과 같은 출가자 집단만을 한정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례하게도 초기경전에 나타낸 부처님의 가르침까지 포함한 것인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흔히 부파불교 교단의 출가자들이 자신의 해탈에만 힘을 쏟고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것(利他)은 등한시한 채 이기적·은둔적 행태와 풍요로운 승원에서 경전의 주석적인 연구에만 몰두했던 현학적인 태도에 대해 소승이라고 폄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교리의 해석적인 면으로는 법공(法空)이 아닌 법유(法有)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른 기회에 언급하겠지만 만약 초기불교의 입장이 전적으로 법유라는 것이 대승의 입장이라면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경전적 입장과 주석적 입장, 즉 부파적 입장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설일체유부와 같은 특정한 부파의 입장에 한정된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견지에 따라서 대부분이 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하고 초기불교나 근본불교는 대승이 지칭했던 소승의 범위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최근의 한 학회에서 대승에서 소승이라 지칭했던 것은 부파불교와 함께 초기불교였다고 하자, 이에 대한 많은 이의가 제기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초기불교를 소승이라고 했을 때, 근본불교라고 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까지 소승이라고 폄하되는 것과 같은 곤혹한 문제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래에 들어 부파불교를 초기불교, 원시불교 또는 근본불교와 다른 불교로 설정한 결과이거나, 아니면 초기불교의 가치가 개선된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실제로 대승에서 소승이라 지칭했던 대상은 위에서 말한 부파불교 집단이나 그들이 양산했던 논서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소지했던 경전, 즉 초기불교 경전의 부처님 가르침까지도 소승이라고 폄하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찍이 성립된 대승 문헌의 하나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삼장(三藏)은 성문(聖聞)의 법이고, 마하연(摩訶衍)은 곧 대승의 법이다.” 하여 대·소승의 경전 구분을 확실히 하고 있다. 여기서 삼장은 불설(佛說)로서의 경장·율장 등이 포함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즉, 부파불교라는 것은 초기불교 부파로서 경전은 한역 아함경이나 팔리 니카야와 같이 대승 흥기 이전까지 전승되어 왔던 불설(佛說)을 두고 한 말이다. 이처럼 대승경전에서 소승의 다른 말은 성문이다. 따라서 성문이라는 말은 소승을 대신해 초기불교를 폄하하기 위해 매우 다양하고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성문장(聲聞藏:S.ravaka-pit.aka)의 다른 말은 소승삼장(小乘三藏)으로 부파 논사들의 논서나 주석서보다는 아함경이나 니카야와 같은 초기경전에 나타난 불설(佛說) 자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에 반해 대승경전은 마하연장(摩訶衍藏:Maha?a?a-pit.aka)이나 보살장(菩薩藏:Bodhisattva-pit.aka) 또는 방등경(方等經:Vaipulya su?ra)이라 하였다.
초기경전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은 성문벽지불경(聲聞퇳支佛經)이다. 대승경전에서 성문과 벽지불을 소승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며, 보살이 대승의 반야바라밀을 저버리고 성문벽지불경을 따르면 마라(Ma?a, 악마)의 일로 알아야 한다고 경계시키고 있다. 그리고 성문벽지불경으로는 일체지(一切智)를 얻을 수 없다거나 나아가서 그것을 읽고 외우는 것조차 지혜롭지 않은 일로 주의시키고 있다(《소품반야경》 〈마사품〉).
궁극적으로는 초기경전에 나타난 불설은 참불교나 완성된 가르침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을 지칭하는 성문벽지불경과 관련하여 기존의 초기불교와의 대립적 형국을 보여주는 것은 대승경전에서도 그 성립 시기가 가장 이르다고 평가받고 있는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다.
초기불교가 진정한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또 다른 유명한 경은 《법화경》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으로 잘 알려진 십이연기법과 그 실천법인 사성제를 각각 벽지불과 성문의 법 이외는 아니라고 격하하면서 모두 《법화경》에서 말하는 일불승(一佛乘)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은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법으로서는 궁극적인 경지를 얻을 수도 중생을 제도할 수도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서품〉 〈상불경보살품〉).
그래서 초기불교 최고의 경지인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인 사리불까지 등장시켜 그의 경지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수치스러운 고백을 연출시키고 있다(〈비유품〉). 이어서 마하가전연과 마하가섭과 마하목건련 같은 또 다른 아라한들까지 가세시켜 그들의 경지가 불완전했던 것으로 고백시키고 있다(〈신해품〉). 극단적으로 《법화경》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설해진 최고의 경지인 열반까지도 진정한 열반이 아닌 한낱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경지까지도 부정하고 있다(〈방편품〉).
이처럼 《법화경》이 작성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승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이고 그 이전의 초기불교는 소승으로, 참불교나 완전한 또는 완성된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법화경》이 대승경전의 꽃이나 정수로까지 일컬어진다. 《법화경》보다 그 성립 시기가 늦은 《유마경》에 이르러서는 모든 성문들은 해탈의 법문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대승에 있어 패종(敗種)과 같음을 대가섭이 사리불을 향해 길게 탄식하게 하고 있다.
나아가 대승의 가르침을 성문이 듣게 되면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킬 정도로 모두 대성통곡할 것이라고까지 하여 초기불교의 가치를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불사의품〉). 여기서 패종이란 패근(敗根)의 다른 말로 부패한 종자라는 뜻이며, 싹을 트일 가능성까지 이미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대승경전에서 쓰고 있는 가장 극단적인 폄하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아라한 격(格)과 초기불교의 최악의 실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능가경》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선정이 언급되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성문·연각의 선정은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이라 하여 말 그대로 어리석은 사람이나 닦는 선정법이라고 초기불교 선정 자체를 천시하고 있다(〈집일체불법품〉).
우부소행선은 외도의 선정으로도 이야기되는데, 극단적으로 말하면 초기불교를 외도와 별 차이 없이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초기나 중기 대승경전에서의 초기불교에 대한 폄하의 몇 가지 예만 살펴보았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초기불교를 실추시키고 부정하는 데 대승경전은 열중해 있다. 대승의 기반이 공고해지는 경전으로 갈수록 그 수위는 더욱 높아진다.
이렇게 대승경전에 의해 융단폭격을 받고 있는 성문장이나 성문벽지불경, 또는 성문의 법이 이른바 소승경이다. 그 중의 하나가 한역되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다름 아닌 아함경이며, 팔리 니카야는 이제야 점차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3. 초기 부파불교의 대승 비판
1) 대승 비불설
이러한 소승 폄하를 담은 대승경전은 초기불교 부파에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초기불교 부파에서는 그것을 후대의 시인(詩人)에 의한 창작에 지나지 않는 비불설(非佛說)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초기불교 부파의 경전은 대승경전이 나타나기 전부터 새로운 불법의 형태, 즉 상법(像法)의 출현을 미리부터 예고하고 있었다.
즉 여래의 정법(正法)이 쇠퇴해지면 이와 비슷한 상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비슷한 금이 순금처럼 보여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팔리 《상윳타 니카야》 뿐만 아니라 유부(有部)의 한역 《잡아함》이나 또 다른 부파의 《별역 잡아함》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초기불교 부파들은 이러한 경구(經句)에 의해 새로운 경전의 출현과 유통을 미리부터 경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불교 부파는 대승경전이 후세의 시인들에 의해 불설로 날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시인(詩人:kavi)이라는 말로서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그 역사성이나 정당성을 부정하였다. 이것은 대승경전에서 가장 오래된 《소품반야경》의 산스크리트본(As.t.asa?asrika? prajn?paramita? su?ra, 17장)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대승경전 스스로 말해 주고 있다.
더 나아가 마라(Ma?a)는 사문의 모습으로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지금 들었던 어떤 것도 믿지 말라. 나아가 그로 인해 증득했던 어떤 것도 버려라.
만약 당신이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시금 당신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바로 지금 당신이 들었던 어떠한 것도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구(ka?ya)이며, 시인(kavi)의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초기불교 부파의 사람들은 대승경전은 불설이 아니고 한낱 시인들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던 것임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며, 이와 비슷한 구절들이 대승경론의 《대보적경(大寶積經)》이나 《대지도론》 등에도 나타나 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출가한 비구가 시를 짓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 할 일로 점쟁이와 같은 유(類)로 취급하였으며, 생계를 위한 비천한 (직)업으로 금지되었다. 정확히는 kavi를 시인보다는 가인(歌人)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인도문학에서 ka?ya 양식의 문학은 서사시(敍事詩) 문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운문 형식의 글이나 희곡 등을 지칭했던 것이다. 《마하바라타(Maha?ha?ata)》와 《라마야나(Ra?a?an.a)》는 인도의 2대 서사시로 이야기된다. 각각 18편 10만 송(頌)과 7편 2만 4천 송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불교에 있어서는 A.D. 1세기경의 마명(馬鳴:As첺ghosa)의 《불소행찬(佛所行贊:Buddhacarita)》이 부처님의 생애를 소재로 한 매우 화려한 필체의 서사시로 특히 유명하다.
《불소행찬》은 대승의 문헌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그 성립 시기와 형식에 있어서 어쩌면 대승경전의 선구라고도 할 수 있다. 《불소행찬》과 함께 《소품반야경》을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이라고 한역하고 있듯이 송(頌:s쳊oka)이 뜻하는 것은 운율은 물론 찬송(讚頌)을 의미한다.
이것은 많은 대승경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승불교를 송으로 이루어진 찬불문학과 관련하여 그 기원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서사시 문학은 사람의 귀와 마음을 모두 만족시키고자 하는 극히 의식적인 노력을 특징으로 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특별한 정서가 요구되고 운율을 갈고 닦는 것과 같은 미학적인 공력은 물론 정교한 수사적 기교가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시작(詩作)은 해탈·열반을 지향해야 하는 출가 비구에 부적합한 것으로 부처님에 의해 강조되어졌던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의 곳곳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로서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미래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출세간적인 깊은 가르침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도 내지 않고, 궁구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詩人:kavi)에 의해 꾸며진(kavikata?) 경 즉 시로써 꾸민 교묘한 운율과 문장, 그리고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에 벗어난 가르침(경)을 오히려 미래의 비구들은 들으려 하고, 귀 기울이려 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궁구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래에 의해 설해진 참된 경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상윳타 니카야》〈20〉·《앙구타라 니카야》〈2·5〉, 〈5·8〉·《잡아함》 〈제 47권〉).
초기불교 부파가 대승불교 경전을 시인의 작품이며 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대승경전이 초기경전에 비해 일반적으로 희곡적이고 문학적이며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2) 결집과 대승 비불설의 문제
초기불교 부파의 교단 내에서는 공식적인 회합을 통해 당시에 유통되었던 불설을 점검하여 만장일치로 공인하는 절차를 공식적으로 가져왔다.
이러한 합법적인 정전화(正典化) 절차나 형식을 ‘결집(結集)’이라고 하는데, 불교사에 있어 제 1결집에서부터 제 4결집은 모두 초기불교 부파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대승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가끔 카니시카 왕 시대의 제 4결집을 대승경전의 결집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이에 반해 대승에서의 경전의 기원은 반야경류나 《화엄경》 같은 경우는 용수(龍樹)가 용궁에서, 《대일경》이나 《금강정경》 같은 경우는 남천축의 철탑에서 가져왔다는 식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신화적인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가끔 미륵보살이 아난(소승이라고 폄하했던 성문승)과 함께 철위산에서 대승경전을 결집했다는 것 또한 신화적인 철위산과 더불어 신화적(?)으로 수식되고 있을 뿐 역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은 없다. 이러한 결집의 역사를 통해 보면 초기불교 부파의 경전은 대승경전에 비해 형식상 매우 합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적법성은 초기불교 부파 입장에서는 그들만이 정통적인 불교집단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대승 집단과 경전의 권위를 부정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초기불교 집단은 완고하리만큼 자신들이야말로 불교의 정통이라는 확신 속에 살아왔다. 그래서 적법한 근거 없이 나타나기 시작한 대승경전과 집단을 결코 불교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경전은 시인(詩人)이나 비구의 모습을 한 마라나 그의 부하들이, 혹은 데바닷타 또는 외도나 바라문 서적으로 치부하였으며, 나아가서 그 집단은 이단파(異端派)라는 의미의 Vetullava?a나 공화(空花:su?yapus.pa)외도(外道)라는 말이 쓰여졌을 뿐이다. 공화외도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꽃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외도라는 뜻이다.
불교가 아닌 외도로서 불설(佛說)처럼 그럴듯하게 꾸민 날조된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는 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부파에서는 대승경전을 불설로는 물론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느 정도 그 가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의 외경(外經)이나 중국에 있어서의 위경(僞經)과 같은 범주에도 언급한 적이 없다.
경시도 아니고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던 것이다. 이것은 대승 흥기에 즈음하는 초기불교 부파의 어느 문헌에도 대승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3) 스리랑카에서의 초기불교와 대승의 갈등
인도 아대륙(亞大陸)에서 인도불교가 멸망한 이래 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곳은 바로 스리랑카이다. 인도 아대륙의 본토와는 달리 초기불교 부파와 대승간의 첨예한 갈등 속에 대승을 물리치고 끝내 초기불교를 사수한 불교국이 스리랑카다.
이러한 사실(史實)은 그들의 고대 역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마하밤사(Maha?am?a)》나 《니카야 상그라하(Nika?a-san?raha)》, 그리고 《카타밧투(Kathavatthu)》의 주석서 등에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 대승은 Vetulla라고 하였으며 산스크리트는 Vaitulya로 원래 Vaipulya에서 전와(轉訛)된 말로 보인다. 네팔에서 발견된 중요한 9개의 산스크리트본 대승경전을 Vaipulya su?ra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고, 한역으로 방등부(方等部:Vaipulyava?a)나 방등경이라고 하는 대승경전군이나 대승경전의 다른 이름도 이 말에 대한 번역어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18개 또는 20여 개의 초기불교 부파 이름에도 이 파(va?a)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팔리 주석서에는 Vaitulya가 대승의 공관 또는 중관파를 나타내는 말로 대공부(大空部:Maha?un??tava?a)와 함께 쓰여지는 경우는 물론, 다른 서적에서는 초기불교 전통을 잇는 Maha?沖ha?a파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Abhyagiriviha?a파가 Vaitulya 가르침을 받아들여 정법(正法)을 파괴시키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대승의 장(藏)을 나타내는 방등장(方等藏:Vetulla pit.aka)이라는 말과 함께 그 기원에 있어 아쇼카 왕 시대의 바라문 Vaitulya가 불교승려로 가장하여 정법(正法)을 파괴시킬 목적으로 방등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승장이라는 말은 바로 불교로 가장한 이단설(異端說)을 의미하는 경멸적인 말로 쓰여졌다. 아대륙 인도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대승의 세력은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인도에 체류하였을 때에 이르러서 대승의 유식파(唯識派)의 한 중심지로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졌다.
현장 또한 건너가서 학습하려 하였으나, 출발하기 직전에 스리랑카 왕이 죽고 기근에 허덕인다고 하여 오히려 인도로 피신해온 300여 명의 스리랑카 승려들을 만나 중도에서 포기해 버렸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초기불교 전통을 계승하는 Maha?iha?a파와 대승을 수용한 Abhayagiriviha?a파간의 오랫동안의 격렬한 대립은 각 시대의 왕들의 지원과 보호에 따라 내몰리기도 하고 반대로 크게 세력을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에서도 대승은 끝내 초기불교 부파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였다.
대승을 믿는 승려들은 왕권에 의해 처벌되기도 하고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대승경전은 정법이 아니고 불설이 아니라고 하여 왕명에 의해 불태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끝내 스리랑카에서 대승은 이단으로 내몰리고, 대승 보살상과 같은 유적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초기불교가 정통으로 내려오고 현재의 승려들은 이러한 역사를 배우고 있다. 실제로 스리랑카 불교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부처님의 직설(直說)인 매우 오래되고 참되고 순수한 가르침을 보존하고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반면에 스리랑카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대·소승 문제를 체험한 우리 나라의 한 스님에 의하면 “대승불교는 오염되고 변질된 불교라 하여 대승불교의 비구계 자체가 인정되지 않아 비구계을 받은 지 10년이나 20년이 지났을지라도 이 나라의 사미승 아래에 앉아야만 한다.”고 한다. (일중, 〈스리랑카 승가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조사 연구〉, 《세계 승가공동체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조사·연구》, p. 78) 다시 말하면 대승불교는 불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4. 대승의 불설론
대승경전의 비불설 논란과 함께 언급할 필요가 있는 말은 다르마반나카(Dharmabha?.aka)로, 초기 대승경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사(法師) 또는 설법사(說法師)로 번역되었지만, 대승 이전의 초기불교 전통에 따르면 Dharmabha?.aka의 bha?.aka라는 말은 경전을 외어 전수시키는 것과 같은 매우 전문적인 역할을 맡은 승려들을 지칭한 것이었다.
특정한 니카야나 경을 외어 전수시키는 D沖ghabha?.aka, Majjhimabha?.aka, Sam?uttabha?.aka, An?uttarabha?.aka나 Ja?akabha?.aka, Dhammapadabha?.aka등과 같이 bha?.aka는 초기불교 부파들에 있어 경전을 암송하여 전승하는 사람들을 나타냈던 것으로, Dharma라는 말과 조합된 Dharmabha?.aka는 대승경전에서만 나타날 뿐 초기불교 부파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대승의 bha?.aka라는 말의 사용은 대승경전이 초기불교 부파의 경전과 함께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왔던 불설임을 보여 주려고 했던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한낱 후대의 시인에 의해 작성된 비불설이라고 말하는 초기불교 부파의 사람들이 악마로 치부하는 것으로 대항하였다.
대승이 비불설이라는 논란과 함께 다시 대승이 불설임을 증명하는 것은 대부분이 대승 안에서만 반복적으로 시도되어져 왔다. 예를 들면 중기 대승의 문헌인 《대승장엄경론》은 대승이 불설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은 A.D. 7세기의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인도에 체류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도 불교의 중심은 초기불교 부파에 있었던 것으로, 대승의 세력은 초기불교 부파에 비하면 열세인 편이었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많은 지역에서 “모두 소승을 배우고 대승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대승을 공화(空花, su?yapus.pa) 외도라고 하며 석가가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곳곳에서 대승을 비방하여, 비방한 이는 그대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하는 경고와 함께 이국인(異國人)인 현장 스스로 대승교도로서 대승을 비방하는 마음을 끊고 대승불설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이것은 대승이 흥기한 후에도 얼마나 대승경전과 집단에 대한 깊은 불신(不信)이 오랫동안 만연해 있었던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여행기에 의하면 그는 이국 승려로서 할시 아발다나 왕이 주최한 대·소승 논쟁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대승 비방에 대한 《제악견론(制惡見論)》을 지어 소승과 외도들을 꺾고 “거듭 대승을 찬양하고…… 소승을 버리고 대승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이때 전 인도 내의 18개국 왕이 참석하고, 대·소승에 통효(通曉)한 고승 대덕 3천여 명, 바라문 및 이건(尼乾, 자이나교도) 외도 2천여 명, 날란다절의 승려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현장의 완승으로 끝났다고 한다.
물론 현장이 실제로 《제악견론》을 지었는지,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인도불교사에 있어 A.D. 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대승 비불설이 불교계에서 뜨거운 논쟁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오로지 대승법을 위한 그의 구법에 있어 대승이 비불설이라고 하는 비방은 그를 크게 괴롭혔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범망경(梵網經)》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원각경(圓覺經)》 그리고 《수능엄경(首楞嚴經)》 등이 모두 중국에서 제작된 위경(僞經)이다. 인도에 기원하지 않아 진정한 경전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위경으로 분류되어 논란이 있어 왔지만, 동북아 대승불교권에서는 불설로 간주되어 인도 기원의 다른 대승경전보다 더 중시되고 널리 유포되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5. 대승 불설론의 문제
불교가 동북아로 전래된 이후 오랫동안 대승 불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중반의 일본을 시작으로 대승 비불설론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대승 불설론이 여러 가지로 오랫동안 시도되어 왔지만, 역사적이고 문헌적인 입장에서 대승경전이 불설이라는 어떠한 주장도 아직까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난관에 봉착하여 현대의 한국과 일본의 대부분의 불교학자와 불교의 지도자들이 대승경전을 역사적으로는 분명한 비불설로 보면서도 사상적으로는 철저한 불설(佛說)로 보는 절충적 입장으로 ‘대승경전의 권위’를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박경준, 〈대승경전과 정립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 21집》, p. 171).
예를 들면, 대승의 중심에 있다고 자부하는 조계종의 전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의 경우에서까지 대승경전이 부처님이 친히 설한 가르침이 아닌 비불설(非佛說)로 인정하지만, 교리적으로는 근본불교의 중도사상을 잇고 있어 불설(佛說)일 수 있다고 변호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아가서 성철 스님은 중도사상을 기준으로 정통·비정통으로 나누면서까지 소승불교는 불교의 정통이 아니라고 하고 대승을 불교의 정통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앞의 논문 p. 168). 그러나 대승이 이야기하는 중도사상은 사실은 소승불교의 소승경전에서 기원한다. 흔히 소승에 반해 대승 불설을 주장하려 할 때 이러한 모순점이 곧바로 노출되고 있다. 소승경전과 초기경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대승만의 독자적인 가르침이라고 이야기되는 많은 내용들이 소승경전이라고 하는 초기경전에 거의 담겨 있다. 소승을 정통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대승의 기반이 설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더 나아가 대승불교의 흥기 요인을 타락한 부파불교를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근본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고 하여 대승이야말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으로 회귀한 불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소승이라고 폄하했던 것은 초기불교 부파의 행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초기경전, 즉 아함경이나 팔리 니카야 등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까지도 포함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대승은 새로운 경전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현세에 생존해 있지 않아 새로운 경이 출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기존의 불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불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 흥기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 ‘부처님의 참 정신과 근본사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러한 불설이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을 소승경으로 배척한 상태에서 부처님의 근본사상으로 돌아갈 그 어떤 가르침이라도 따로 전해져 오고 있었단 말인가?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이고, 어떻게 알아냈을까?
분명히 대승경전이 나타나기 이전의 초기경전의 불설에 대한 논서나 주석서를 작성하여 그 당시의 전통적인 불교 부파가 드러내지 못한 부처님의 참정신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새롭게 흥기한 대승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초기불교 사상, 즉 아함경이나 다른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던 취지가 바로 대승 흥기의 원인이며 대승경전의 편찬 동기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대승은 대승으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하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의미에서 대승이 대승일 수 있는 것은 대승 이전의 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했을 때 나타난 상대적인 면모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대승은 항상 소승에 대한 대승이고자 하는 긴장과 커다란 부담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현재의 대승 전통의 후예들이 대승 흥기의 기원은 부처님의 참정신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라는 설명 아래, 그 대상은 바로 초기불교였다고 주장한다면 대승은 이미 대승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초기경전을 소승경전이라고 배척하고 석가모니 부처님과 역사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불설이라는 이름 아래 작성했던 과거의 수많은 대승 흥기의 주체자들의 취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로서, 그들의 노력을 일시에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주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있어 설명되고 있는 대승이 돌아가자고 했던 점이 과연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근거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 해결을 통해 대승이 불설일 수 있는 참된 근거와 대승 흥기의 참정신이 더욱 새롭고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대승 흥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대·소승간의 갈등을 풀어나가는 문제에 직결된 매우 중요한 점이라 생각된다.
6. 초기불교의 침묵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 부파에서는 그들을 소승이라고 했던 대승과 대승경전이 역사적인 의미에서 불설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소승이라는 폄하는 어떤 정당성과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흥기에 즈음한 모든 초기불교 부파의 문헌에서 대승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대승경전의 시작이 대승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 먼저 대승적인 문헌부터 은근히 유통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승경전에 반영되어 있는 초기불교 부파의 비난이 주로 대승불교 집단이 아닌 대승경전이라는 문헌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 부파의 안팎으로 새롭고도 이질적인(?) (대승) 문헌이 불설로 가탁(假託)되어 간헐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더라도 초기불교 부파로서는 크게 불온문서시 할 정도로 두드러지거나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초기불교 부파의 그 어떠한 문헌에서도 대승경전은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는 듯이 구체적인 또는 본격적인 언급을 삼가하고 있다.
따라서 대승경전에 대한 초기불교 부파의 입장은 오히려 대승경과 논서 속에서만 유추해 볼 수 있다. 대승경전 곳곳에서 대승경은 비구로 변신한 마라의 설(說)이지 불설(佛說)이 아니라는 것이나, 데바닷타의 설이나 바라문이나 외도의 설이라는 의심과 비난이 그것이다. 이렇게 대승에 대한 초기불교 부파들의 입장이 대승경전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대승이 같은 불교로 인정받아 보려는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 부파는 끝내 비공식적인 비난이나 침묵으로만 일관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불교 부파의 절망적인 큰 벽과 간격이, 결국 대승으로 하여금 소승이라는 일방적인 폄하로 치닫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승은 초기불교 경전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도 불교의 하나로 생각했지만, 초기불교권에서는 그 근저에서부터 대승경전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침묵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대승경전 또한 자신들의 경전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인정했을 때는 대승경전 안에 나타난 자신들의 폄하는 물론, 자신들의 경전을 미완성의 또는 불완전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대승의 소승론(小乘論)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승경전은 초기불교 부파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점은 초기불교 부파와 대승불교가 종파성을 넘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회통할 수 없고, 나아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단결을 호소하고 있는 현 시점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교류까지도 가로막는 영원한 걸림돌이다.
7. 마치는 말
대·소승이라는 역사적 갈등의 배경은 이처럼 깊고 오래된 골을 가지고 있다. 소승이라는 말은 대승에 의한 초기불교에 대한 일방적인 폄칭이다.
대승이 시작한 이래 양자간에는 폄하와 의구심 또는 무시가 계속되어 왔다. 그렇지만 대승이라는 종파적인 입장을 떠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또는 원론적인 측면에서 대·소승 문제를 살펴본다면 대승이 발생하기 이전의 불교를 소승이라고 부를 만한 정당성은 없다.
순전히 대승적 입장에 따른 종파적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대승의 종파적이고 신앙적인 입장에 선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소승이라는 말의 사용은 자제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초기불교 배경이 없이 대승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불교가 흥기한 이래 대승이 일어나기까지의 500여 년 동안이나 부처님의 진의가 감추어져 왔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대승에 이르러서야 부처님의 참다운 경지인 요의설(了義說)이 개현(開顯)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도 불멸 후에 나타난 대승이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불법인 초기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인 부처님에 대한 폄하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십이연기법이나 사성제와 같은 석가모니의 성불법은 대승의 《법화경》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소승을 위한 방편 법문이라고 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대승의 주장과는 달리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완성된 가르침이었다. 대승이 일어나기 전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성불했던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보리·열반·해탈로 표현되는 불교의 최고의 경지를 구가해 왔다.
거기에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차별도 없다. 즉, 역사적인 의미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스스로 보편적인 성불론(成佛論)을 역행하지 않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특정한 시기와 장소를 한정한 구제론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불교라는 이름 아래 상대를 소승이라 폄하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비불교적이고 반불교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초기불교 경전에 소승이나 대승과 같은 차별적인 용어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부처님인 석가모니 또한 그러한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끝>
조준호
동국대 불교학과 및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철학박사.현재 동국대학교 강사. 논문으로 <붓다(Buddha)개념에 관한 연구: 팔리 경전에 나타난 일국토 일불설에 대한 비판><불교의 기원과 우파니샤드 철학:불교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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