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원효의 화쟁 방법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1:18

원효의 화쟁 방법
(元曉의 和諍 方法)
Wonhyo's Method of Harmonizing Disputes
최 유진(崔 裕 鎭) : Choi, You-jin
경남대 철학과 부교수



- 목 차 -
Ⅰ. 極端(극단)을 떠남
Ⅱ. 여러 이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自在(자재)
Ⅲ. 동의도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며 說함
Ⅳ. 경전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
Ⅴ. 終部分


한 분야의 이론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그것들 각각에 중요성을 부여하여 조화롭게 보고자 하는 것이 元曉(원효;617~686)의 정신이다. 원효는 여러 다양한 이론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켜 붓다의 올바른 진리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和諍(화쟁)이다. 和諍(화쟁)은 원효를 가장 잘 특정지워주는 것이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저술과 그 저술에 흐르는 화해의 정신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화쟁을 강조하는 원효는 화해와 조화를 강조하는 우리나라 불교 전통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화쟁이 원효의 특색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쟁론을 화해시키려 했는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 화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쟁론을 화해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화쟁은 언어적인 문제이다. 언어를 통해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화쟁의 방법은 원효는 언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본고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지만, 간략히 요약하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진리를 전달하지만 한편으로 언어는 진리를 은폐하는 역기능을 하므로 집착을 버리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원효의 언어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언어에 대한 견해에서 출발한 원효의 화쟁의 방법은 극단을 떠남, 긍정과 부정의 自在,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Ⅰ. 極端을 떠남(극단을 떠남)

원효에 의하면 사람들이 논쟁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번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번뇌에 빠져있기 때문에 단정을 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견해에 사로잡혀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싸우게 된다. 원효는 {涅槃經(열반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불세존(諸佛世尊)은 번뇌(煩惱)가 없는 만큼 단정하는 바도 없다. 이런 까닭에 부처를 無上士(무상사)라 부른다. 또 上士(상사)라 함은 諍訟(쟁송)을 하는 것을 이름이요, 無上士(무상사)는 諍訟(쟁송)이 없다. 如來는 다툼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를 無上士(무상사)라 이름한다."

『諸佛世尊無有煩惱 故無所斷 是故號佛爲無上士 又上士者 名爲諍訟 無上士者無有諍訟 如來無諍 是故號佛爲無上士』-『<"本業經疏>" "韓國佛敎全書 1">』
『제불세존무유번뇌 고무소단 시고호불위무상사 우상사자 명위쟁송 무상사자무유쟁송 여래무쟁 시고호불위무상사)』-『 "<본업경소>" "한국불교전서 1">』

번뇌 때문에 어느 것이 옳다, 또는 그르다 하고 단정하여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부처는 다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툼을 없애려면 번뇌를 없애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 근본적인 방법이 된다. 번뇌로 인하여 단정하며 다투기 때문이다.
번뇌를 없애서 단정하는 바가 없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和諍(화쟁)의 방법이지만, 언어적 다툼으로 나타나는 쟁론을 화해시키려 하는 것이 원효의 和諍(화쟁)이므로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和諍(화쟁)은 언어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언어의 성격에 대해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이 선결요건이 되는 것이다.
和諍(화쟁)을 하려면 언어의 성격에 대해 잘 이해를 시켜서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제대로 받아들이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언어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和諍(화쟁)의 방법과는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그러면 언어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 진리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말과 뜻의 상호의존적 성격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 의도하는 바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말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이런 언어를 갖고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써서 논의를 진행시키는가?
원효는 먼저 어떤 표현이든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효는 개념들이 상대적으로 성립함을 지적해서, 한쪽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면서 또 다른 극단도 버리도록 한다. 表員(표원)의 [華嚴經文義要決問答(화엄경문의요결문답)]에 인용된 원효의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華嚴經文義要決問答(화엄경문의요결문답)』-『無內故亦無外(무내고역무외) 外與內必相待故(외여내필상대고)』

"안이 없으므로 밖도 또한 없는 것이니 안과 밖은 반드시 相對(상대)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개념들에 집착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것이 원효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예는 또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涅槃宗要(열반종요)]에서는 "極果(극과)의 큰 깨달음은 實性(실성)을 체득해 마음을 잊고, 實性(실성)의 둘이 없음은 眞妄(진망)을 섞어 하나로 만든다. 이미 둘이 없으니 어찌 하나가 있고, 眞妄(진망)이 섞이었으니 어느 것이 진실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상대적인 것을 떠난다고 주장을 하면서 한 극단에 집착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한 극단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의 상대로서 성립하는 또 다른 극단도 버려야 하는 것임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개념들에 절대적 집착을 해서는 안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遊心安樂道(유심안락도)]에서는 有無(유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法(법)은 有(유)도 아니고 無(무)도 아니다. 二邊(이변)을 멀리 떠날 뿐만 아니라 中道(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의심을 내어서 말하기를, '만약 지금 저울을 다는 것을 본다면 물건이 무거우면 내려가고 가벼우면 반드시 올라간다. 가벼운데 올라가지 않고 무거운데도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말은 말은 있으되 뜻이 없다.
인연으로 나는 법도 마땅히 그러한 것임을 알아야 하니, 만약에 실제로 無가 아니라면 有에 떨어지고 有가 아니라면 無에 해당한다. 만일 無가 아니면서 有일 수 없고 有가 아니면서 無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무거우면서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고 함과 같은지라 이것은 말이 있으되 實質(실질)이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짜져서 생각하는 것은 곧 여러 極端(극단;諸邊제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혹은 依他實有(의타실유)에 집착하여 增益邊(증익변)에 떨어지고 혹은 緣生空無(연생공무)에 집착하여 損滅邊(손멸변)에 떨어진다. 혹은 俗(속)은 有(유)요 眞(진)은 空(공)이라 하여 二邊(이변)을 다 받아들인다면 相違論(상위론)에 떨어진다. 혹은 有도 아니며 無도 아니라 하여 하나의 中邊(중변)에 집착하면 愚癡論(우치론)에 떨어진다."

有와 無는 상대적으로 성립한다. 有가 있으므로 無가 있고 無가 있으므로 有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有가 아니라 하면 곧 無도 아닌 것으로 되어야 한다. 無는 有가 있을 때에만 성립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하나가 있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有가 아니라 할 때 無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有無(유무)의 관계를 말할 때, 有가 아니면 無인 관계가 아닌, 有가 없으면 無도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임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有가 아니라고 말하면 有의 반대편인 無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 위에서는 그것을 극단에 떨어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 이유는 有(유)가 아니라고 함을, 有(유)를 不變(불변)의 實在(실재)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말로 이해하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有를 不變(불변)의 實在(실재)로 보므로, 有가 아니라 함을 또 다른 實在(실재)인 無를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有라는 實在的(실재적)인 本質(본질)이 부정된다면 그것과 함께만 성립할 수 있는 無도 동시에 부정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中道(중도)도 아니라는 것도 이해될 수 있다. 中道(중도)도 有無(유무)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不變(불변)의 實在(실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극단을 떠난다 함은 집착을 경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有가 아니라 하면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또 다른 집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無(무)도 아니고 中道(중도)도 아니라 하는 것이다. 즉 有나 無도 극단이지만 中道(중도)도 또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이다.
원효는 [法華宗要(법화종요)]에서 "모두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나 말대로 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의 두 말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부정하는 것이 또 다른 어떤 것을 인정하는 말이 아닌 그 말에의 집착을 버리게 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따. 이것이 극단을 떠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大乘起信論別記(대승기신론별기)]에서는 佛道(불도)가 有無(유무)를 떠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대저 佛道(불도)의 道(도)됨은 …… 有(유)라고 말하려 하니 하나같이 거기에서 말미암아 空(공)이고, 無(무)라 말하려 하니 만물이 이것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무어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억지로 道(도)라 한다."

여기에서는 有無(유무)를 떠남을 한 극단을 떠나면 다른 극단도 떠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佛道(불도)가 有로도 無로도 규정지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有無(유무)를 상대적 개념으로 놓아 논의를 전개해 가는 앞서의 방식과는 달리 有라는 것으로 붙잡을 수 없고 또한 有아닌 無로도 규정지을 수 없음을 말한다. 有無(유무)를 有가 아니면 無가 아닌 것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이 有도 無도 아닌 이유를 각각의 경우에 제시할 수도 있다. 어쨌든 有라든가 無라든가 하는 극단적인 개념에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의는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의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곧도 볼 수 있다. 有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無에서 주어지고, 無(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有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有라고도 無라고도 할 수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게 계기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부정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긍정과 부정의 自在(자재)라는 원효의 독특한 방식이 문제될 수 있다. 극단적인 것에 집착해서는 안되므로 부정되어야 하지만 그 부정에만 매달리는 것은 또 다른 집착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여러 이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自在(자재)

여러 이론에 대해서 부정을 自在(자재)로 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언어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는 한계를 가지므로 그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선 부정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부정이 오히려 긍정으로 말하는 이유가 된다. 아닌 것이 아님을 표현할 때 긍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긍정이 단순히 그것이 꼭 그렇다는 말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는 이유를 여기에서도 말할 수 있다.
언어적 차원에서 볼 때 모든 것은 결국 상대적으로 성립하므로 긍정과 부정이 자재로 될 수가 있다. 부정을 하는 이유는 집착을 버리게 하고자 함에서이지만, 무조건 부정만 한다고 해서 집착이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도 또한 집착이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극단을 떠나야 함을 강조하지만, 극단을 떠나라고만 한다면 그것도 또한 극단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정 일변도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 원효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가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起信論別記(기신론별기)]의 序文(서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論(론)은 세우지 않음이 없고 論破(논파)하지 않음이 없다. [中觀論(중관론)]이나 [十二門論(십이문론)]과 같은 것들은 모든 집착을 두루 타파하고 또 그 타파하는 것마저 타파하여, 타파하는 주체와 타파되는 대상을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을 부정만 하고 두루하지 못하는 論(논)이라 한다.
[瑜伽論(유가론)]과 [攝大乘論(섭대승론)] 등에서는 깊고 얕음을 두루 세우고 法門(법문)을 判釋(판석)하였으나 스스로 세운 바의 法을 두루 부정하지 못하니 이는 긍정만 하고 부정은 하지 못하는 論(논)이라 한다. 이제 이 論(논)을 볼 때 智(지)와 仁(인)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또 심오하고 보편성을 띠고 있다.
정립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스스로 부정되고 論破(논파)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긍정되어 버린다. 긍정되어 버린다고 함은 저 論破(논파)되어 버린 것들이 論破(논파)가 극치에 이르면 모두 되살려내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요, 스스로 부정되어 버린다 함은 여기에서 정립된 것들이 정립이 끝까지 갈 때 스스로 부정되어 버리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諸論(제론)의 祖宗(조종)이요, 群諍(군쟁)의 評主(평주)이다."

긍정이 극도로 가서 부정되어 버리고 부정이 극단으로 가서 긍정되게 된다는 점에서 [起信論(기신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긍정 일변도로 가거나 부정 일변도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긍정 또는 부정에 대한 집착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 방법을 통해, 또는 적극적 정립을 통해 부처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잘못으로 빠지게 되기가 쉽다는 것이 원효의 요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中觀(중관) 계통의 논서들을 부정 일변도, 唯識(유식) 계통의 논서들을 긍정 일변도라 하여 일단 [起信論(기신론)]보다 낮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起信論(기신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하고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起信論(기신론)]이 諸論(제론)의 祖宗(조종)이 되고 群諍(군쟁)의 評主(평주)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그 평가의 근거 또한 긍정과 부정의 자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긍정과 부정의 자재야말로 모든 논쟁을 평정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함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긍정했다 부정했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往極而遍立(왕극이편립)' '窮與而奪(궁여이탈)'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긍정하고 부정해서 긍정·부정 그 자체에 매달려 있는 차원이어서는 안 된다. 긍정된 것들이 끝까지 가면 스스로 부정되고, 부정된 것이 끝까지 가면 다시 살려져야만 하는 것이다.
긍정을 하지만 끝까지 긍정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고, 부정을 하지만 끝까지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자재의 의미이다. 긍정·부정을 자재로 하는 것은 화쟁하려는 목적에서인데, 그렇게 해야만 화쟁이 되는 이유는 언어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말에 집착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긍정·부정의 자재라는 방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언어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한 방법이 이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집착을 버리게 함은 일단 부정을 통해서 주장된다. 그러나 부정 일변도로 나가면 부정 그 자체에 집착할 수도 있고 부처의 올바른 진리가 적극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측면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에 긍정·부정이 자재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부정에서 어떻게 긍정의 계기가 마련되고 또 어떻게 그것이 자유롭게 구사되는가를 [열반종요]의 논의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대열반은 離相(이상)·離性(이성)·非空(비공)·不非空(불비공)·非我(비아)·非不我(비불아)인 것이다. 無性(무성)을 떠났으므로 非空(비공)인 것이요, 有性(유성)을 떠났으므로 非不空(비불공)이다. 또 有相(유상)을 떠났으므로 非我(비아)라고 설하는 것이요, 無相(무상)을 떠났으므로 非無我(비무아)라고 설한다.
無我(무아)가 아니므로 大我(대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요, 我(아)가 아니므로 또한 無我(무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空(공)이 아니기 때문에 實有(실유)라고 말하기도 하고 空이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虛妄(허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如來(여래)가 간직한 비밀은 그 뜻이 이러하거늘 어찌 그 속에서 서로 다투겠는가."

이것은 열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열반이 虛(허)인가 實(실)인가, 또는 空인가 空이 아닌가 하는 논란에 대해 결론적으로 한 말이다. 이 논의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일단 부정의 형태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離相離性(이상리성), 非空不非空(비공불비공) 등의 말이 그것이다. 空(공)에 대해서만 살펴본다면 처음에 空이 아니라고 부정함은 空이란 개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고, 不空(불공)이 아니라고 함은 不空(불공)이란 개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空(공)이 아닌 것은 無性(무성)을 떠나 있기 때문으로, 空이 아닌 것이 아닌 것은 有性(유성)을 떠나 있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空이 아니다' '空이 아닌 것이 아니다' 함의 이유를 개념적으로 지칭될 수 없음에서 찾는다. 곧 無性(무성)도 아니고 有性(유성)도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한 말을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非空(비공) 또는 非不空(비불공)으로 부정을 나타내던 말이 긍정으로 전환된다. 아닌 것이 아니면 인 것이 되는 것은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이니까 바로 긍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非空(비공)이면 非不空(비불공)이라는 것이 앞서까지의 원효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부정되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것의 부정은 마찬가지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空이 아니니까 不空(불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空이 아니니까 不空(불공)도 아니라는 것이 원효의 논법이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空이 아니기 때문에 實有(실유)라고 말한다고 함은 空의 상대적 개념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이 되므로 주의를 요한다.
우리는 여기에서의 實有(실유)를 실제적인 實有(실유)로 보아서는 안되고 空을 부정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空이 아니니까 그 반대편인 實有(실유)라는 것이 아니라, 空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즉 空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實有(실유)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원효의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하는 방법이 단순히 부정하고 또 부정하는 방법과는 다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개념에 얽매이지 않을 때에 긍정과 부정의 자재가 가능한 것이다.
앞서 들었던 예에서처럼 無(무)가 아니면 有(유)고, 有(유)가 아니면 無(무)가 아니냐는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긍정·부정을 자재로 함으로써 집착을 벗어나게 하고 화쟁에 이르게 하는 구체적인 예는 많이 지적할 수 있다. [열반종요]의 佛性門(불성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佛性(불성)의 體(체)는 바로 一心(일심)이다. 一心(일심)의 본성은 諸邊(제변)을 멀리 떠난다. 諸邊(제변)을 멀리 떠났으므로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해당되는 것이 없는 까닭에 해당되지 않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관해서는 마음은 因(인)도 아니고 果(과)도 아니며 眞(진)도 아니고 俗(속)도 아니며 人(인)도 아니고 法(법)도 아니며 起(기)도 아니고 伏(복)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緣(연)과 관련해서 논하는 경우에는 마음은 起도 되고 伏(복)도 되고 法도 되고 人도 되며 俗도 되고 眞도 되며 因(인)도 되고 果(과)도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즉 非然非不然(비연비불연)의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 주장이 모두 옳기도 하고 모두 그르기도 하다."

앞서의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이 바로 긍정의 계기가 된다. 곧 無所當(무소당)이므로 無所不當(무소불당)이라 하면서 긍정적인 모든 이론들이 인정될 계기가 마련된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왜 無所不當(무소불당)으로 되는가가 중요하다. 즉 無所當(무소당)의 상대적인 극단으로서 無所不當(무소불당)이 되는 것이다. 해당됨이 없으므로 그것의 상대인 해당되지 않음도 부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되지 않음이 없으므로 긍정의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긍정하는 것이므로 긍정 그 자체에 절대적으로 집착하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十門和諍論(십문화쟁론)]의 논의를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앞에서 이것은 실로 有라고 설하였지만 空과 다름이 없는 有이고, 뒤에 말한 有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空과 다른 有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따라서 모두 허용되는 것이요, 相達(상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俱許(구허)가 가능한 것이고 또 그런 것이 아니므로 모두 不許(불허)하는 것이니 이 그렇지 아니함이 그러함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어떤 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집착해서는 안됨을 여기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有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空과 다름없는 有일 수도 있고 空과 다른 有일 수도 있다. 有라고 하는 개념 자체에 집착을 하면 안된다. 非不然(비불연)에서부터 모두 허용함이 가능하고 非然(비연)에서 모두 허용하지 않음이 나온다.
그런데 非然(비연)이면 非不然(비불연)이다. 따라서 모두 허용함과 모두 허용하지 않음이 함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함과 그러하지 않음이 다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긍정과 부정을 완전히 자재로 할 수 있게 되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할 것은 非然非不然(비연비불연)의 문제를 긍정과 부정의 문제로 전환시킨 데에 원효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보통 非然非不然(비연비불연)이라고 하면 긍정과 부정의 문제가 아니라 부정에 또 부정을 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또 집착을 하므로 그것을 부수기 위해서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는 표현이 非然非不然(비연비불연)의 표현이다. 그런데 원효는 非不然(비불연)을 긍정으로 진환시켰다. 긍정으로 하는 표현이 非不然(비불연)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긍정의 표현 자체가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도 된다는 데에 원효의 중요한 착안점이 있다. 여기에서 화쟁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정만이 집착을 부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非不然(비불연)을 긍정으로 전환시켜서, 긍정도 집착도 부술 수 있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 원효가 강조하는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긍정에도 부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언어는 그 자체가 한계를 가지므로 그것 자체에 매달려서는 안되고 그것이 전달할 수 있는 면을 집착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원효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틀린다고 계속 강조하고, 그렇지 않으면 옳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열반종요]에서는 열반이 空하다 또는 空하지 않다고 하는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화해를 시킨다.

"물음:이러한 두 주장의 得失(득실)은 어떠한가?
대답: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두 주장은 모두 옳지 못하다.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워 다투면서 부처의 뜻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결정적인 고집이 아니라면 두 주장이 모두 옳다. 法門(법문)은 걸림이 없어서 서로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됨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모두 그르다고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진리를 전달할 수 있으므로 집착없이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면 옳을 수가 있다. 아무 말이나 무조건 다 맞는 것은 아니고 근거가 있을 때에 그러하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원효는 그 근거를 經典(경전)에서 찾고 있다.
다음으로 긍정과 부정을 자재로 함과 관련해서 지적할 것은, 화쟁을 할 때에 결정적으로 단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열반종요]에서 특히 그러한 예들을 볼 수 있는데, {열반경}에 설한 인연이 있음과 없음, 원어를 번역할 수 있음과 없음, 法身(법신)에 色(색)이 있음과 없음 등에 대해 화해를 하면서 그런 표현을 한다.
즉 두 주장이 다 옳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어떤 이가 말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결정적으로 두 가지가 다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시키는 또 다른 학설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화해시켜서 두 가지 학설이 모두 옳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결정적으로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두 가지 이론이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착하면 옳지 않은 것이 되므로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이론에 대해 긍정과 부정을 自在(자재)로 하는 원효의 이 화쟁의 방법이야말로 원효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따. 단순히 긍정·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大肯定(대긍정)의 태도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를 원효의 이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Ⅲ. 동의도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며 說함(설)

쟁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만 쟁론을 화해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동의함과 동의하지 않음이 문제로 제기된다. 여기에 대한 원효의 주장이 동의도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며 설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화쟁의 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앞서 논의한 긍정·부정의 자재가 이론적인 측면에서 논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태도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원효는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에서 동의함과 동의하지 않음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여러 가지의 다른 견해가 엇갈려 쟁론하고 있을 때에 有見(유견)에 의해 설한다면 空見(공견)과 다를 것이요, 또 만일 空執(공집)에 동의하여 설한다면 有執(유집)과 다를 것이다. 그리하여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쟁론만 더욱 일어나게 할 것이다. 또 저 두 가지에 다 동의하면 자기 안에서 서로 논쟁할 것이고, 저 두 가지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둘과 더불어 서로 논쟁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동의도 하지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설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함은 말 그대로 모두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고,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함은 그 뜻을 살려서 들으면 허용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情(정)에 어긋나지 않고,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道理(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情(정)에 있어서나 理(리)에 있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결론은 동의하지도 않고 동의하지 않지도 않으면서 설한다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말 그대로 취하면 모두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계속 논의해 본 바와 같이 언어는 이치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말 그대로 취한다면 잘못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동의하지 않지도 않는 이유는 그 뜻을 살려서 들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논의했듯이 원효는 모든 말들이 다 나름대로의 옳은 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따. 따라서 살려서 들으면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다. 이것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결국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음의 문제는 언어의 성격을 잘 알아서 표현해야 되고, 또 그 사람의 태도도 잘 감안해서 뜻을 살려 말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라 하겠다. 동의하지도 않고 동의하지 않지도 않으면서 설함으로 해서 그 도리와 정에 모두 어긋남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을 할 때 그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시함을 알 수 있다.
[법화종요]에서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나 말대로 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의 두 말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부정을 하게 되는 이유는 집착을 버리게 하고자 함에서이다. 말 그대로 취하면 용납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집착을 하고 잇기 때문이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의 본질을 모르고 집착을 하므로 그것을 버리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또 뜻을 살려서 들어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집착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언어가 이치를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면에서 해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닌 것이 언어와 이치의 관계라면 다르지 않은 면을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갖게 해 주기 위해서 그 뜻을 살려서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음의 문제에서 동의함과 않음의 둘 모두를 떠나서 설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두 가지 다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앞서 인용문에서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동의함과 동의하지 않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 자신이 집착없는 상태여야 한다. 따라서 화쟁에서는 화쟁을 하는 사람의 집착없는 상태가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아무렇게나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음을 되풀이해서 화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一心(일심)의 상태가 화쟁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동의하므로 도리에 어긋나고 동의하지 않음으로 해서 情(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반대편의 주장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동의하는 것을 理(리)에 대응시키고 동의하지 않음을 情(정)에 대응시킬 수 있다. 그래서 "동의하므로 도리에 어긋나고,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情에 어긋난다. 情과 理에 모두 어긋난다"는 反(반)딜레마가 성립할 수 있다.
이 反딜레마도 의미있는 표현이다. 부정의 방식으로 집착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情과 理에 모두 어긋난다고 표현된다면 그것은 말대로 취하지 못하게 하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집착을 경계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을 벗어난 상태에서 설하는 것을, 동의도 않고 동의하지 않지도 않으면서 설한다는 마찬가지의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동의하면 도리에 어긋나고, 동의하지 않으면 情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동의에서도 벗어나고 동의하지 않음이라는 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뜻에서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

Ⅳ.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화쟁에서 중요한 것은 일부의 경론만을 알고 그것에 집착하고, 낮은 소견을 갖고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의 경론만을 알고 그것에 집착한다면 다른 것도 알게 해주고, 낮은 소견에 빠져 있으면 그것을 고쳐주어야 할 것이다.
이 방법은 긍정과 부정의 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인 면 내에서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진리를 떠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경전 내의 내용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결정적으로 집착한다면 집착을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용 자체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궁극적으로는 진리 그 자체가 아님을 알아서 집착을 버리도록 하여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어떻게 부처의 진리의 말을 잘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여러 경전들에 나타나는 상이한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화쟁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데, 원효가 화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론적인 다툼도 결국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전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하는 다툼이었기 때문이다.
원효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얽힌 실뭉치를 풀 듯이 차근차근 이치에 따라 설명을 해 나간다. 경전 내에서의 연관관계 및 그것이 뜻하는 바를 다른 경전과도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원효의 전 저술이 여기에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 원효는 수많은 경전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서 폭넓게 받아들였으므로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분밖에 모르고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깨우쳐 줄 수가 있었다.
[起信論疏(기신론소)]의 報身(보신)에 대한 논의를 보도록 하자. 원효는 報身(보신)에 대한 여러 異說(이설)을 소개한 뒤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이 같지 않은 것은 法門(법문)이 無量(무량)하여 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方便上(방편상) 설정하는 데 따르더라도 모두 도리가 있는 것이다."

각각 그 경우에 알맞는 설명을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한 가지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각각의 경우에 앞뒤의 맥락을 잘 살펴서 이해하면 되지, 표면적이 차이에만 매달려 다투어서는 안된다.
[열반종요]의 會通門(회통문)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글이 다른 것을 會通(회통)하는 것이고, 둘째는 뜻이 같은 것을 會通(회통)하는 것이다. 첫째의 것에서 같은 것을 설명하는 글들이 서로 다른 이유는 그 설명의 맥락에 따라서이다.
報佛性(보불성)의 경우와 法佛性(법불성)의 경우, 究竟(구경)과 不究竟(불구경)의 경우에 따라서 설명이 달라지는 것이지, 상호 모순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의 경우는 같은 종류의 뜻인데도 문구가 다른 경우에 있어서 그 뜻을 가지고 여러 글을 회통하는 것을 말한다. 표현이 다르더라도 같은 뜻인 경우가 많으니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전 상에서 같은 문제에 대해 다르게 설명이 되는 이유는 연관관계나 그 말을 듣는 대상이 달라서이지,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대상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때도 있고, 다른 표현이지만 결국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치를 잘 알아야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전내용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는 것도 화쟁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원효는 여러 경전의 말이 서로 통함을 논증하는 데 있어서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경전의 말이 틀린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인가? 그가 불교경전에 나오는 얘기들을 다 부처의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특별히 의심할 이유가 없다. 여러 경전들의 얘기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에 대해 의심하여, 부처 당시의 말이 아니지 않는가고 생각한 흔적은 당시의 다른 불교사상가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오히려 경전에 근거하므로 모두 옳다, 또는 모두 實(실)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無量壽經宗要(무량수경종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음:그 두 주장 "本來無漏種子(본래무루종자), 二智所熏新生種子(이지소훈신생종자)"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가?
대답:다 盛典(성전)에 의한 것이니 어느 것인들 진실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그것은 [法華宗要(법화종요)]에서는 [니건자경]을 인용하여, 乘(승)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人(인)의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경전의 말은 부처의 말이므로 뜻이 없는 말이 아닌, 뜻이 있는 義語(의어)이다. 여러 경전들끼리 서로 상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전들끼리 서로 다투는 것은 아니다.
경전의 말도 언어로 나타나는 것은 틀림없으므로 그것이 말 그대로 취한 것이라면 허요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취하면 안된다는 것은 그대로 집착하여 하는 말일 때에 해당되는 말이다. 경전의 말 그 자체가 잘못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취하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경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부처의 말인 경전의 말에 대해서 긍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 화쟁의 방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원효가 각 경전의 위치를 지우는 작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각 경전의 명확한 의미만을 드러내고자 애쓴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경전에 다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경전들의 말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의 자재를 한다면 그것은 화쟁의 대상을 부처로 생각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 부처가 주장하는 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부정한다는 것은 출발점에서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저 사이의 異說(이설)을 화해시킬 때에는 그 얘기가 틀린다는 식의 부정의 방법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경전의 말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경전의 상이한 말들을 화해시킬 때에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면 되는 것이지 부정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경전 사이의 상이한 내용을 화해시킬 때에 말대로 받아들이면 허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지 않는 이유이다.
물론 부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 그 자체에 매달려서 말이 바로 이치인 줄 알고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말이 비록 겉으로는 어떤 경전의 말과 똑같다 하더라도 부정과 긍정을 자재로 하면서 오류를 지적해 줌으로써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상에서 화쟁의 방법에 때해 논의했는데, 그 목표는 결국 부처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집착을 버리고 그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처의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저절로 싸움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원효가 大乘戒律(대승계율)을 강조한 이유도, 또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에서의 止觀(지관)을 겸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金剛三昧經(금강삼매경)}의 요지를 一味觀行(일미관행)으로 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一心(일심)의 경지에 되돌아가게 하는 모든 불교적 수행이 다 화쟁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認識(인식)이 곧 해탈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려면 그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단순한 이론적인 탐구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면-감정, 의지, 정서, 知的(지적)인 면의 모두-에 연관되는 것임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화쟁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절대적인 경지에서 둘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따로 새로운 절대적인 세계가 이쓴 것은 아니다. 그저 집착없는 경지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장남과 코끼리의 예를 가지고 말하자면 장님들이 싸우지 않게 되려면 눈을 뜨게 하는 방법 밖에는 결정적인 다른 방법이 없다. 눈을 뜨게 하는 방법이 화쟁의 방법이다. 따라서 화쟁은 궁극적으로는 一心(일심)의 경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며 화쟁의 완성은 一心(일심)에 돌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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