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육조단경에서의 견성의 의미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1:20

 

육조단경}에서의 견성의 의미
The Significance of the Insight into the
Original Nature in the Platform Sutra
이 월 호 (Lee Wol-ho):쌍계사 중강



<차 례>
1. 머리말
2. 견성의 사례
3. 견성의 요건 3.1. 견성의 계기 3.2. 그릇된 신념들
4. 견성의 의미 5. 맺음말

1. 머리말

최근 들어 불교의 수행방법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라 생각된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수행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는 수행론이 있다는 점이 가장 커다란 특색이며, 따라서 수행에 관한 연구와 논의는 불교를 진정 불교답게 만들어 주는 첩경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나 철학이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지 못한다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또한 그러한 이상이 자신의 노력이 아닌, 절대타자의 의도에 따라 성취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수행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수행이야말로 저마다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주체자로서의 노력 혹은 선택의 여지를 열어 주는 관문이 아닐까?
그러한 점에서 최근 참선에 관한 반성적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불교의 현재 대표적 수행법은 바로 참선법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는 있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 참선에 관한 체계적 지도나 이해는 결핍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지적도 심심찮게 들리곤 한다.
참선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참선의 이유와 목적 혹은 방법 등과 같은 기본적 개념은 확실히 정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하는 수행길에서 목적지가 어딘지, 가는 길이 어떻게 되는지, 무얼 타고 가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면, 차라리 출발을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특히 참선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見性(견성)에 관하여 집중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 가장 표준이 되는 것은 {六祖壇經(육조단경)}이다. 六祖惠能(육조혜능;638∼713)이야말로 선을 대중화하여 선의 황금기를 열기 시작한 최고의 인물이다. 그의 법문을 기록하고 있는 {육조단경}은 작금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선의 핵심서이다. 또한 선가에서 견성이라는 표현을 본격적으로 쓰게 되는 데는 {육조단경}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이야말로 견성법을 새롭게 부각시켜서 참선에서의 가장 주요한 개념으로 정립시켜 놓은 기초적 문헌인 것이다.
따라서 우선 {육조단경}에서의 견성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으로써 그 범주를 국한시켜 참선의 궁극적 목적에 관한 논의에 임하고자 한다. {육조단경}에는 여러 판본이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장경각에서 발행한 {돈황본 육조단경}(이하 {단경})은 최고본이라고 하는 돈황본을 중심으로 하되, 대승사본, 흥성사본, 덕이본 및 종보본을 대조 및 참고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책을 중심 텍스트로 사용하면서 다른 판본을 참고로 삼고자 한다.

2. 견성의 사례
참선이라고 하면, 언뜻 불립문자의 격외도리만을 떠올려 견성에 관한 논의조차도 한갓 망상에 불과하다고 단칼에 배격해 버릴 수도 있다. 또한 견성도리는 감히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것이며, 수십 년 이상 수행에 몰두한 이도 감히 입을 뗄까 말까 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논의코자 하는 선은 그러한 선이 아니다.
적어도 {단경}에서 밝히고 있는 참선, 혹은 견성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기만 한 것이 아님에 틀림없다.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특수한 장소에서, 일정한 기간에 행할 수 있는 선이야말로 진정한 선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미 해오고 있는 선이야말로 진정한 선이 아닐까?
그러므로 누구든 참선 혹은 견성도리에 대하여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맞건 틀리건 간에. 아니, 오히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견해를 짐짓 드러내어 잘못을 검증받고 개선해 나감으로써 바른 도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아니하고, 이것이야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며 자칫 어긋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각자 심중에서 추론만 하고 있다면 더욱더 미궁의 함정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단경}에서는 견성이야말로 이와 같은 상호간의 문답을 통해 달성되는 것임을 예시하고 있다. 우선 육조스님 스스로도 문답을 통해 깨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시었다.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서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처럼 육조스님 스스로도 오조스님께서 {금강경} 설해 주심을 한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쳤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頓法(돈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본성을 돌이켜보는 것, 다만 한 생각 돌이키는 것, 그것이 바로 돈법이며, 이러저러한 수행과 이러저러한 단계를 거쳐야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돈법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곧 견성을 말한다. 그것은 뒷날 육조스님이 법문을 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번 듣자 그 말끝에 크게 깨쳐(言下大悟;언하대오) 진여의 본래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頓見眞如本性;돈견진여본성). 이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언하대오가 곧 돈견진여본성 즉 견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돈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조대사 자신이 다름 아닌 한마디 말끝에 견성을 체험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육조대사가 교화한 제자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한마디 적절한 언어로써 주고받는 가운데 견성을 체험하고 있다.
그 첫 번째로, 육조스님은 가사를 전수받아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이를 뒤쫓아온 혜명과 대화를 통하여 법을 전하고 있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혜명에게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에 마음이 열리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마음이 열렸다는 것은 곧 깨쳤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일찍이 오조대사가 육조스님을 전송해 주면서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 하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덕이본 {육조단경}에서는 위의 과정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육조스님의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않는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어느 것이 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 하는 법문에 혜명이 언하대오하였다고 한다.
방금 전까지 육조스님을 덮쳐 가사를 도로 뺏어 갈 생각에 가득 차 있었으며,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한 혜명이 오로지 한마디 법문을 듣고 마음이 열려 그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생한 일화는 거듭 나타난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다. 그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였으나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문득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지성은 신수스님이 파견한 일종의 첩자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의 법이 빠르고 곧은지를 가리고자 하는 신수스님의 문인으로서 그 분부를 기쁘게 받들어 조계산으로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육조스님의 법문을 듣고 언하에 깨치고 있다. 결국 지성은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육조스님의 문인이 되어 그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한마디 법문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의 예를 더 들자면, 항상 {법화경}을 외웠으나 칠 년이 되도록 마음이 미혹하여 법의 당처를 알지 못하던 법달이다. 그는 육조스님을 찾아와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육조스님의 설명이 있자,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상이 {단경}에 나타나는 견성의 사례이다. 이와 같은 사례를 심층 분석하여, 견성의 요건과 의미를 탐구하기로 한다.

3. 견성의 요건

3.1. 견성의 계기
위에서 네 가지 견성의 예를 들었다. 육조스님 자신과 의발을 빼앗고자 쫓아온 혜명, 그리고 신수가 첩자로 파견한 지성, 그리고 {법화경}을 외워 오던 법달 등이다. 이는 참다운 견성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이 어떤 동일한 수행을 해온 것은 아니다. 또한 단계적 절차를 함께 밟은 적도 없다. 굳이 공통점을 찾아내자면, 그들은 참다운 선지식을 만났으며, 그 선지식의 한마디 가르침에 곧바로 깨침을 얻고 있다.
이로써 보건대, 선지식과의 만남이야말로 깨침에의 결정적 계기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육조스님은 아직 견성하지 못한 이에게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을 권하고 있다. 보리 반야의 지혜는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능히 스스로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전제되는 조건이 있다면, 다만 스스로가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선지식과의 만남도 물거품에 불과할 것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거친 성품의 혜명이나 첩자로 온 지성, 그리고 경을 외워 오던 법달에게 공통된 점은 진정으로 무언가 알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치열하게 알고자 하는 마음만 갖추어진다면, 한마디의 법문으로써 대오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니, 선지식을 찾아 문답을 나눔으로써 바로 깨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육조스님은 언어문자의 가르침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적절히 활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 직접 법 설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 종취를 잃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36對法(대법)이다. 즉 서른여섯 가지로 상대적인 법을 설하되, 구경에는 쌍으로 된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그 흔적마저 없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36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하지만, 밖으로는 모양을 떠나고 안으로는 공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언어를 쓰되, 언어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이 서른여섯 가지로 상대해 가르치는 법을 비방하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법을 비방하면서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할진대는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언어건 문자건 적절히 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언어문자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이미 상대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약으로써 환병을 다스릴 뿐, 병이 낫고 약이 필요 없어지면 더 이상 집착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강경}을 지니면 반드시 견성하리라는 가르침과 {육조단경}을 만나 얻은 이는 자신이 친히 주는 것을 만남과 같아서, 얻은 이는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라는 표현 같은 것도 위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3.2. 그릇된 신념들
참선수행의 첫 단계에서 흔히 듣게 되는 '몸뚱이 조복'이란 말이 있다. 참선이라 하면 곧바로 좌선과 동일시하여 다만 좌복 위에서 오래 앉아 버티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것이다. 그러나 {단경}에서는 이러한 점을 분명히 경계하고 있다.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은 마음이라고 하며, 망심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 또는 망심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바른 수행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사실 꼼짝 않고 앉아 있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이 최상이라면, 그것은 곧 무정물과 같은 것이다. 나무토막이나 바위덩어리를 좌복 위에 앉혀 놓는다면, 그 이상 가는 수행자가 없을 것이다. 밥 한끼 먹이지 않아도 되고, 잠 한숨 안 재워도 아무 불평 없이, 그리고 정말 미동도 하지 아니하고, 조금의 망심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행의 목표가 바윗돌이나 나무토막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婆子燒庵(파자소암)'의 일화가 떠오른다. 한 스님에게 암자를 지어 드리고 20년 동안 시봉한 노파가 자신의 딸을 보내어 시험하였을 때, 썩은 고목처럼 차디찬 바위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던 수행자를 쫓아 버리고 암자를 불살랐다는 일화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수행의 목표가 무정물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고 한다. 도리어 정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다.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으니라.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육조스님은 결코 몸뚱이 좌선을 중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궁극적인 좌선의 의미도 다르게 풀이되고 있다. 몸뚱이가 좌복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좌선이 아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에 대하여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坐(좌)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禪(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몸뚱이 좌선에 국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좌선의 참 의미에서는 어긋난다는 것이다. 달마스님이 이심전심의 법을 주창함으로써 사람들을 경전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한다면, 육조스님은 우리를 좌선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보건대, 참으로 움직이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자성이다. 몸뚱이가 아닌 것이다. 자성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한 생각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라고 하는 육조스님의 말씀은 최근에도 충분히 유효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말한,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 것, 이것도 하나의 견성 요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에 있으면서도 도를 닦을 수 있느냐고 하는 韋史君(위사군)의 질문에 대하여,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을진대는 일체가 다 방해롭지 않나니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도다"라고 대답해 주고 있다.
일체가 다 방해롭지 않다는 것은 세상사 모든 일이 도를 닦는 일에 다름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 마음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는다.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조스님은 "화상은 좌선을 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은 신회에게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항상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이고, 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을 볼 뿐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이처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세간의 허물을 보지 않는 것이 어째서 이처럼 중요할까? 그것은 남의 허물을 보면 다툼이 시작되고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게"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안으로는 불성을 보고, 밖으로는 공경을 행하는 것이 참다운 공덕이 된다고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我相(아상)을 끊지 못하면 공덕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참다운 좌선이란, 무정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유정은 움직일 줄 아는 것이다. 참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이지 않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첫째 뜻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바깥 경계에 대하여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 것이다.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망심을 제거하여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이것 역시 무정물을 닮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바윗돌과 고목이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우리가 닦고자 하는 것은 무정물의 선, 無情禪(무정선)이 아니다. 우리는 유정물이다. 애초에 생각이 있는 것이다. 어찌 무정과 닮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생각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며, 다만 머무르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분간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박되는 것이다.
이것은 망념이 모두 사라진 연후에야 비로소 견성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머무르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육조스님은 말한다.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게끔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이는 것이니, 곧 이름하여 치우친 견해라고 하는 것이다.

억지로 생각을 없애고자 하는 것, 이것은 곧 斷見(단견)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을 모두 제거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즉 죽는다는 것이다. 시체가 되어야 생각이 끊어진다. 시체를 닮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닦고자 하는 것은 시체의 선, 즉 屍身禪(시신선)도 아니다.
그렇다면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상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다만 머무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판단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지켜볼 따름인 것이다. 판사가 되지 않고 관찰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머무르면 묶인다. 그러므로 머무르지 않으면 묶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안으로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형상을 아예 보지 않고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정물 혹은 시신과 다름이 없어진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닦고자 하는 것은 무정선 혹은 시신선이 아니다. 유정으로서 일체를 보고 듣고 생각하되 일체에 머무르지 않는 것, 이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망념을 붙잡고 부질없이 씨름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망념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망념이 망념인 줄 알면 이미 무념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망념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애고자 노력한다거나 씨름한다거나 하는 것은 이미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해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망념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만 관찰해 줌으로써 자연히 무념의 상태가 달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견성을 하려면 오랫동안 좌선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점이다. 또한 마음을 쉴 새 없이 닦아서 마침내 망념이 완전히 사라져야 비로소 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이제는 집단의식화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의 오류인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고정화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입견들이야말로 견성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이야말로 바로 집단의식의 산물에 불과하며, 수행인들은 여기에서 하루바삐 벗어날 필요가 있다.
몸뚱이 좌선에 집착한다거나 망념을 닦아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은 이미 돈오가 아닌 것이다. 돈오는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구현되는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 어떠한 조건이 붙는다면, 그것은 이미 돈오가 아니다. 오랫동안의 사전 수행이 필요하다든가 망상이 완전히 소멸되어야 가능하다든가 하는 것은, 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쓴다고 할지라도 이미 점차적 깨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견성의 의미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견성을 위하여 정작 필요한 것은, 몸과 마음을 붙잡고 씨름할 것이 아니라 오직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선지식의 지도를 통하여 곧바로 자성을 보고, 철저히 이 성품에 입각한 수행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나 마음은 성품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물거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물거품과 허깨비를 붙잡고 무슨 승부를 겨룰 것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자성에 입각한 수행이다. 그렇다면 자성은 어떠한 것인가?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이니라.

자성은 허공과 같이 만법을 포함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공처럼 그저 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자성의 본체는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다. 자성은 본래 청정하며, 불생불멸하며, 구족하며, 동요가 없으며, 모든 법을 창조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닦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성은 닦을 것이 아니고, 다만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修性(수성)이 아니라 견성인 것이다. 본다고 하지만, 보는 성품과 보여지는 성품, 즉 主(주)와 客(객)이 갈라진 상태도 아니다. 자성은 모든 이원성에서 벗어나 있다. 보는 이가 곧 보여지는 이인 것이다. 자성은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서 있는 그대로의 완전성을 보는 것이 곧 자성을 보는 것과 통한다. 계·정·혜 삼학을 설명하면서 육조스님은 말한다.

마음의 땅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니라.

이로써 보건대, 계·정·혜 삼학이란 것도 지금부터 닦아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자성에 갖추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심지에 그릇된 견해나 어지러움 혹은 어리석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이미 삼학이 성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성을 깨치면 계·정·혜 삼학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성의 단박 닦음(頓修;돈수)이다.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닦고 세우고 할 것이 없음을 바로 아는 것이다. 자성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만약 닦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성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頓修(돈수)는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시시각각 견성하고 시시각각 돈수하는 것이다.
돈수란 다른 말로 不汚染修(불오염수)를 말한다. 이것은 오염되어 있는 것을 닦아서 불오염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불오염인 것을 철저히 알고 지켜 가는 것이다. 육조스님은 남악회양을 만나서 묻는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한 물건이라고 말씀드린다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하는가?"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될 수는 없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不汚染;불오염)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


이것은 자성에 관한 문답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자성은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비록 한 물건이라고 이름 붙일지라도 딱 들어맞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닦아 증득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오염될 수는 없다. 바로 이 불오염이야말로 자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닦고 증득한다고 하여도, 오염된 것을 닦아 내서 바야흐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불오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뿐인 것이다.
이러한 불오염에 입각한 수행이야말로 바로 돈수이다. 이미 닦아 내야 할 것이 있고 없애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돈수가 아니다.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그대로 부처인 것이지, 다시 오염을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취지는 저 유명한 노행자(혜능)의 게송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음이요,
명경은 또한 받침대가 없음이라,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때와 먼지가 끼겠는가.


이 게송에 앞서 神秀(신수)는 몸뚱이를 보리의 나무(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로 비유하였고, 마음을 명경대(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로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몸뚱이와 마음을 부지런히 닦아서(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티끌을 제거해 내는(莫使有塵埃;막사유진애) 수행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육조스님은 몸뚱이나 마음에 초점 지워져 있는 수행을 단연코 거부하고 있다. 이처럼 몸뚱이나 마음이 아닌 자성에 입각한 수행이야말로 육조스님의 수행인 것이다. 자성 즉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때와 먼지가 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야말로 불오염수의 취지를 잘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성은 마치 물의 흐름과 같아서, 시작과 중간과 끝에 있어서 항상 본성은 일정한 것이다. 이것은 비유컨대,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서 하나의 완벽한 인격체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아직 덜 자란 어른으로 보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완전은 불완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견성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인식의 대전환이다. 그것은 衆生知見(중생지견)을 열지 않고 佛知見(불지견)을 열어 出世(출세)하는 것이다. 불교의 출세, 그것은 불지견을 여는 것이다. 스스로가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한, 항상 중생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고 하는 육조스님의 말처럼, 닦건 말건 잘났거나 못났거나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본래 부처인 것이다. 이처럼 불지견이란,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못 깨친 중생으로 묶어 놓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본래 성품이 있는 그대로 완벽함을 알아채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견성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체의 단계를 거부한다. 어떠한 단계라도 설정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돈수가 아니다. 불오염수가 아니다. 불지견을 여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단계이기 때문에 목적과 방법의 이원화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목적이 곧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경}에서의 수행법은 다름 아닌 견성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견성법은 무방법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단경}에서의 견성은 곧 목적이자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과 방법이 이원화되지 아니한 것이고, 따라서 돈수이자 불오염수이자 불지견을 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입각처에서 보자면, 우리는 단순히 견성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이 곧 수행이자 깨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방법이 곧 결과이며, 수단이 곧 목적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견성을 다만 목적으로만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다른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따로 설정하려 든다면, 그것은 점차적 단계를 세우는 것이며, 이미 {단경}에서의 본래 취지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화두를 드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화두를 드는 것이 다만 견성을 위한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벌써 이원화가 진행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방편으로서의 화두를 들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화두는 방편이자 진실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간화수행법이 참으로 돈오와 돈수를 표방한다면, 活句(활구)를 성성하게 들고 있는 그 순간이 곧 깨침의 순간에 다름 아님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알 수 없는 의심, 그것이 바로 보리의 현전이다. 대답할 수 없는 물음,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관찰자이다. 그것은 망념이 일어나면 이를 다스려 없애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다스리고 말고 할 게 없는 상태이다. 성성적적하게 깨어 있으면서 다만 바라볼 뿐, 판단하거나 시비분별하지 않는 상태이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는 집중이 아니다. 즉 망념을 억지로 다스려 가면서 화두에 집중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화두는 그 자체로 무심이다. 무의식적 자각의 상태로 성성적적하게 깨어 있으면서 어떠한 망념도 그저 바라볼 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항상 깨어 있는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5. 맺음말
{육조단경}에는 견성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육조스님은 견성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고 있으며, 성품에 입각한 수행이야말로 참다운 수행임을 강조하고 있다.
몇 가지 견성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견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작 몸뚱이 좌선이나 마음 닦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러한 기존관념은 견성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견성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선지식과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선지식과의 만남, 그리고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단박에 자신의 본성을 돌이켜볼 때, 더 이상 닦고 말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修性(수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見性(견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닐까? 성품은 다만 보면 되는 것이지 닦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육조스님이 {금강경}이나 {육조단경}의 지송을 적극 권장한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풀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은 곧 문자로 된 선지식인 것이다. 경전을 제대로 읽는 것도 선지식과의 대화에 다름 아니다. 언어문자의 활용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언어문자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전제된다.
한편 선지식을 만나더라도 간절히 묻는 마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선지식과의 만남에 앞서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견성을 위해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 것이다. 남의 허물이 보이면 자기 허물이라 여기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남의 허물을 보게 되면 다툼이 생겨나고,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질없이 몸뚱이만 앉혀 놓고서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 아니라 자성을 앉혀야 한다. 정작 동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자성인 것이다.
이렇게 보건대, 견성법은 어떠한 사전 준비단계라든가 점차적 닦음을 전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자체로서 목적이자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이며, 돈수이다. 불오염수이며 불지견을 여는 것이다.
간화선이 돈오를 표방하는 한, 활구 참선도 이러한 바탕에 입각해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 참구가 다만 견성을 위한 방편일 뿐만이 아니라 견성 그 자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만 미래의 견성을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화두의 참다운 효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The Significance of the Insight into the
Original Nature in the Platform Sutra



차례
위치

In the Platform Sutra, we can find the term 'the insight into the original nature(見性)' often. Hui-neng stresses on the importance of the insight into the original nature over and over again, and speaks of the practice based on the looking at his own nature as that which it really means by that word.

Through the few examples of the insight described in the Platform Sutra, it is can be said that all needed for the insight is not the seating meditation nor the cultivation of mindfulness. The concerning to his bodily training or concentration of mind with the intentional effort to get rid of delusion is noting but a effort to be a non-living being. Human mind is naturally of flux and moving. How could it be fixed to tranquillity like a piece of wood or a rock. But, then, what should be done to get insight into his own nature?

First, the dialogue with the master is the most important. With his questioning and answering, he can take look back his original face in- stantly, and no more left to be practiced for himself. Wouldn't it have been called as the insight into the nature rather than the practice? Nature is just to be seen, but not to be practiced because it is originally pure. It is thus Sudden Enlightenment.

Furthermore, it is in this context that Hui-neng strongly recommend to read the Diamond Sutra and the Platform Sutra over again. To say again, the sutras can be regarded as a training masters. To read carefully the sutras is to get the dialogue with the masters. The practical usefulness of written language is now regarded as extremely important fact. However, it is supposed to be not mess with the language.

By the way, when he came to be accepted by his master, it will be useless unless he ask for his questions earnestly. Thus, he have to keep his sincerity in mind before the encounter with his master. Next step to the insight into the nature will be looking away from the other's shortcomings. That other's faults are found means that he has a fault. Nevertheless, if he keeps looking at the other's shortcomings, quarrel is arisen and his own nature will be disappeared. Thus, to be seated and be stable on his place is not his body folding legs, but his original nature. The only thing to be not unstable is his own nature.

The original face of mind is not to be practiced but just to be looked. There is no any dualistic state that the observer take a look at the observed. The original nature transcends that kind of dualism. The observer is the observed. Also, the Insight is the Nature itself. The original nature is perfect. Thus, to see everything as it is to take a look at its perfection.

We, here, need to reconsider what is the ultimate meaning to be get a insight into the nature. This does not some sequent steps at all. If the steps are established, that is not the Sudden Enlightenment, nor immac- ulate practice.

Thus, the insight described in the Platform Sutra can be regarded as not only the end of the practice but also the way to attain it. It means that the end and its way are not divided from each other, and does not come to the dualistic. It is also said to be the beginning of Sudden enlightenment or immaculate practice.

From this standpoint of view, we does not practice simply to attain the insight into the original nature, which also should be our one way of practice itself. The insight should have to pursue by itself as a way to reach t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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