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단계(십우도)
십우도(十牛圖) : 선(禪)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
십우도는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을 소에 비유하여 일찍부터 선가(禪家)에서는
마음 닦는 일을 소찾는[尋牛] 일로 불러 왔다. 소의 상징은 참생명, 참 나 그 자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소를 찾는다 함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이를 열 단계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십우도라고 부른다.
십우도는 송(宋)의 보명(普明)의 십우도와 곽암(廓庵)의 십우도 등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곽암의 십우도가 주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는 곽암 선사의 게송을 함께 살펴 본다.
십우도1 - 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서다)
아득히 펼쳐진 수풀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서니
물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마음 피로해
찾을 길 없는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단풍나무
매미 소리뿐.
수풀 우거진 광활한 들판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길도 없는 산 속에서 헤메는 것처럼 본심(本心)을 찾는 건 아득하다.
엄습해 오는 절망과 초조감, 들리는 건 처량하게 우는 늦가을 해질녘의 매미 소리뿐
우리의 청정 자성(淸淨自性)을 찾는 길은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오히려
진정한 탐구의 시작임을 알려주고 십우도에서 소년으로 상징되는것은 순순한 구도심의 상징이다.
동자가 쥐고 있는 고삐는 정진력을 상징하고 수풀은 우리가 욕망으로 인해
소(本性)를 잃어버린 곳이기도 하다.
십우도2 - 견적(見跡: 자취를 보다)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방초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기리.
천지가 하나의 손가락, 만물이 한 마디 말이며
보이는 것마다 소의 발자국 아닌 것이 없고, 들리는 것마다 소의 울음 아닌 것이 없으며,
소를 가린 무성한 수풀조차도 실은 소의 자취이고, 소가 아무리 심산유곡에 있다해도
하늘까지 닿는 그 기세를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첫 번째의 심우에서는 마음의 욕망이 곧 우거진 숲이라 했는데,
견적에서는 풀밭에서도 소 발자국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사실 소는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소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 십우도 두 번째 그림인 견적에서는 소를 찾는 동자가 고삐를 잡고
숲길 사이로 보이는 소의 발자국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이 의미를 전해 준다.
십우도3 - 견우(見牛: 소를 보다)
꾀꼬리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가 언덕엔 푸른 버들
이곳을 마다하고 어디로 갈거나
늠름한 쇠뿔(頭甬)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견우, 찾아 나섰던 소를 보았다. 즉 진심(眞心)을 보았다.
실상은 내가 소를 보았다기보다도 소가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가 곧 자신이라 한다면 찾는 자가 바로 찾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위의 표현 너머에 홍의(紅衣)의 동자가 숲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소를 보고 있으며,
그 숲 뒤로 폭포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십우도는 이렇게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표현된다.
십우도4 - 득우(得牛:소를 얻다)
온 정신 다하여 그 소를 붙잡았지만
힘 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高原) 위에 올라갔다가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만다네
마침내 자기와 세계를 잊어 일체가 모조리 없어졌을 때 홀연히 나타난 소
그러나 옛부터 젖어온 기질을 모조리 없애기는 어렵구나.
어떤 때는 자기도 없고 부처도 없고 세계도 없는 명백한 곳에 이르고,
어떤 때는 다시 대상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들어가는구나.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것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소는 항상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는 나의 외부 어디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핵심이었다.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곧 소를 찾는 길이었다.
십우도5 - 목우(牧牛 : 소를 기르다)
채찍과 고삐 잠시도 떼어놓지 않음은
제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 들어갈까 두려운 것
서로 잘 이끌고 이끌려 온순해지면
고삐 잡지 않아도 저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목우는 일반적으로는 유유히 소를 먹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나무 아래에 소를 먹이는 목우자(牧牛子: 소를 먹이는 이)가 다소 고개를 숙인
수용적 자세로 앉아 있고 그 앞에 소는 풀을 뜯고 있다.
다섯 번째인 목우도는 깨달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함을 비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앎>은 쉬워도 그렇게 <됨>은 지극히 어렵구나,
끊임없이 닦고 익히면 마침내 마음과 대상이 일치하여 잡된 것이 하나도 없는
순수함에 도달하나니, 오묘한 경지가 절로 나타나 꽃을 대하면 사람과 소가 함께 꽃이고,
버들을 대하면 사람과 소가 모두 버들이니, 이제는 영원히 나눠질 것 없네.
채찍은 각성(覺醒)의 상징이다. 그리고 고삐는 내면의 수양을 뜻한다.
각성과 수양은 정진하는 이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각성이 없는 수양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수양만으로는 기계적이고 습관적이 될 뿐이다.
그래서 먼저 각성이라는 채찍이 필요하고 두 번째로 수양이라는 고삐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훈련이 필요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마지막에는 여기에서도 빠져나와 그 각성이 자연스러우며 수행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그저 계속 일어나는 현상이 될 때 그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 때에는 고삐를 풀어 줘도 주인을 잘 따를 것이다.
십우도6 -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으 로 돌아가다)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향하니
오랑캐 피리 소리 마디마디 저녁 노을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가락이 한량없는 뜻이러니
곡조를 아는 이여,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랴
기우귀가는 길들여진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다.
깎아지른 절벽을 근경으로, 그리고 숲길 사이로 피리를 불며 소를 타고 집(本性)으로 돌아가고
있다. 소를 타고 가는 동자의 붉은색 옷은 녹청색조의 바탕위에 강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즉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등 위에 사람 없는 소, 무릎 아래 소 없는 사람.
이제 유유히 참 근원으로 돌아가니 소박한 가락이 노을과 나란히 가고 물과 하늘이 한 빛깔이다.
피리 한 곡조와 노래 한 가락이 만물의 근원이니, 이는 줄 없는 거문고의 비밀스런 곡조일세.
갈등이나 투쟁이 끝날 무렵 모든 것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둘 모두 하나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제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방황하면서 헤맨 것도 성장의 일부였다.
기우귀가는 이렇게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본가(本家, 곧 본래의 성품)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십우도7 - 망우존인 (忘牛存人 : 소를 잊고 사람만 남다)
소를 타고 이미 고향집에 이르렀으니
소 또한 공(空)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초당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잃고 얻을 바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오니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버리고 밝은 달이 맑은 물을 버리듯
소는 더이상 필요 없고 사람 또한 할 일 없네.
아침이 되어 해가 솟아도 여전히 꿈속이다.
망우존인은 집에 돌아 왔지만 소는 간 데 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을 그렸다.
고향집은 나 자신이 비롯된 근원을 말한다.
고향집에 이르렀음은 현상적인 삶과 나 자신의 근원 (本覺無爲)이 서로 만난다는 뜻이다.
이제 채찍(각성)과 고삐(수양)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자성(自性)을 찾기 위한 여행을 처음 떠날 때는 필요했으나 이제 그것마저도 초월된다.
망우존인을 달리 도가망우(到家忘牛)라고도 한다.
도가(到家)란 집에 도달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자기 마음 속에 진심(眞心)이 있는 것이지
별개의 것이 아니었음을 이른다.
일곱 번째 망우존인에 이르러 사람과 소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십우도8 - 인우구망 (人牛俱忘: 소와 사람, 둘 다 잊다)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비어 있으니
푸른 허공만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붉은 화로의 불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여덟 번째인 인우구망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소도 소를 찾는 이도 없다.
채찍, 고삐, 소, 사람 이 모두가 사라져 버리고 텅비었을 뿐이다.
그래서 인우구망의 경지를 나타내는 그림은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일원상(一圓相)이다.
즉 정(情)을 잊고 세상의 물(物)을 버려 공(空)에 이르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내 밖에 찾아야 할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바로 내가 여태껏 찾아 헤매왔던 그것이었다.
찾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삶 그것이 목적이었다.
일원성이 나의 본성(本性)이며 모든 것과 하나였다.
이것의 이름이 공(空)이었으며 한계가 없는 우리의 근원이었다.
십우도가 말해 주는 모든 것은 참나를 찾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실존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른 해답만이 깨달음의 상태로 이끌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십우도9 - 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근원으로 돌아오고자 무척이나 공을 들였구나
그러나 어찌 그냥 귀머거리 장님됨만 같으리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의 사물 보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진정 근원으로 돌아와 보니,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네.
소 찾아 나선 이래 한 생각 한 생각 이 오히려 소의 모습 아니었던가?
보지 않으면 안밖을 함께 보지 않고, 보면 전체를 보나니 기이할 것 아무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네.
반본환원은 있는 그대로의 수록산청(水綠山靑) 산수 정경을 그렸다.
즉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얻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순수한 공(空)일 때 있는 것은 무엇이나 진실되다는 가르침을 구현시키고 있다. 나무와 꽃들, 흐르는 물과 산들은 이미 자신의 참된 집에서
살고 있다. 나무는 산을 흉내내지 않고 흐르는 물은 붉은 꽃을 질투하지 않는다.
인간이 참된 본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뿌리깊은
< 욕망 >이 장애물이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오직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전해 주고 있다.
십우도10 - 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저자에 들어가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
신선의 비법 따윈 쓰진 않아도
그냥 저절로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우는구나.
저잣거리에 들어가 온몸을 드러내 세속의 중생과 함께 하니, 이는 바로 성인의 풍모이네
입전수수는 중생제도를 위해 자루를 들고 자비의 손을 내밀며 중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즉 이타행(利他行)의 경지에 들어 중생제도에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면 원은 최초로 돌아 옴으로써 완결된다.
사람이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만이 완전해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발했다. 여행을 마친 후 성취하게 된다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입전수수에서는 다시 마을로, 중생들 속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세상은 출발하는 곳임과 동시에 끝맺는 곳이기도 하다.
그 동안 우리는 심우도를 보면서 내면으로의 여행, 자기 완성으로 가는 노정을 확인해 보았다.
심우도의 각 단계가 비단 초월적인 궁극적 경계에만 굳이 국한 시키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완성해가는 단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따라서 위로는 깨달음이라는 것에서부터
아래로는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지력을 현실적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 이르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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