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관련 글들

수행에 진척이 없다고? 그래도 앉으라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4. 11:06

 

새벽에 깨어나 꼿꼿이 앉아있으라.
다만 좌복을 펴고 앉아 묵묵히 지켜보라.

그것이 독경이 되어도 좋고,
염불이나, 다라니 독송이 되어도 좋으며,
108배를 해도 좋고,
아니면 다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만 해도 좋다.

그 순간에 몰입하라.
하루 중 온전히 마음을 비우고
앉아 있는 시간을 가지라.
무언가를 이루어 보겠다거나,
이렇게 앉아 기도 수행을 하면 무언가 달라지겠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을 모두 비운 채 다만 바라보기 위해 앉으라.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불교를 접하고 신심이 생길 때는
3.7일 기도다, 100일 기도다, 금강경 독송이다, 108배다 해서
기도 수행도 자주 하게 되고,
아침 저녁으로 좌선도 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정진에 임한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하다보면
물론 처음에는 ‘가피력을 입었다’거나,
‘기도를 하면 마음이 평화로와진다’거나,
‘기도를 하니까 삶이 달라진다’거나,
심지어는 ‘기도를 하면 뭐든지 다 이루어진다’거나 하면서
신심을 내고 환희심을 내다가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신심이 뚝 떨어지곤 한다.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하면
내가 생각했던 대로 다 이루어 져야 하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되는 듯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는 그것이 마음대로 잘 안 되는데서 문제가 생긴다.

참선을 한다고
뭔가 눈에 보이게 마음이 평온해 지는 것도 아니고,
대비주 수행을 1만독, 10만독을 넘게 했는데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금강경 독송을 매일같이 7독씩 몇 년을 했는데도
내 삶에 그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실망을 하고 좌절을 한다.
‘이렇게 해도 별 것 없구나’
‘하나 안 하나 별 차이 없이 똑같구나’

그러나 이 말을, 이런 생각을 한 번 돌이켜 보라.
거기에는 내 스스로 파 놓은 함정이 있다.
기도 수행을 하면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바로 ‘바라는 마음’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말이다.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라고, 어떻게 되어지기를 바라곤 한다.
하기야 사람들의 속성상 바라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그 힘든 수행을 하겠는가.
수행을 하면 무언가가 바뀌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그것을 할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불법문중의 방식이 아니다.
이 문에 들어오면 세상의 방식과는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세상에서야 우리의 모든 행위의 이유는
어떤 목적을 이루는 방향으로 행해지지만
출세간의 이 문으로 들어오면 목적없음이 바로 목적이 된다.

다만 앉아 있는 것이지,
다만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좌선을 하고 출근했더니
하루가 더 맑고 상쾌해 지는 것 같더라,
수행을 오래하다보니까
마음에 중심이 잡히고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같더라,
금강경을 오래 독송하다 보니까
온갖 마장들이 다 없어지고 마음 내는대로 다 이루어지더라,
하는 말들은 모두가 어리석은 욕망 밖에 되지 못한다.
그것은 참선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면 얼른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생각의 흐름에 끄달리지 않을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수행을 하고 참선을 하다보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깨어있는 사람이다’거나,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라는 우월한 상이 생겨난다.
이 때 깜짝 놀아 얼른 지켜보지 않는다면 그 때부터 수행은 거꾸로 간다.
정진은 없고 퇴보와 후진만이 있게 된다.

새벽에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좌복 위에 앉으라.
다만 앉아서 묵묵히 지켜보라.
이러한 행위를 참선이라거나, 좌선이라거나, 수행이라고 이름짓지 말라.
이것이 잘 한 것이라고 뿌듯해 하지도 말라.
이렇게 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예 지워버려라.

좌선을 하는 이유는
모든 목적과, 모든 바람과, 모든 기대와,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는 작업이다.
그야말로 모든 행을 멈추고 다만 바라보는 작업일 뿐이다.
모든 행을 멈추는 좌선을 하면서 무언가를 바라는 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바람과 기대와 목적이 없는 참선이야말로 온전하다.
그랬을 때 참선에는 진척이 없고 진도가 없다.
참선이 잘 된다거나, 안 된다거나,
참선을 했더니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참선을 했더니 마음이 고요해 진다거나,
참선을 했는데도 깨달음은 여전히 요원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참선이다.
이런 참선을 하는 자에게는 실망도 없고, 좌절도 없고, 포기도 없다.
다만 그저 묵묵히 할 뿐.

현대인들이 행하는 참선과 수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 점이다.
현대인들은 목적을 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데 익숙하다.
무언가 분명한 목적의식이나 바람을 가지지 않으면 좀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조급한 목적의식이 참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참선 수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 얼마 못 가 포기하고 만다.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이유다.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라고, 무언가를 깨닫기를 바라고,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어떤 목적을 이루기를 바라는 참선을 하는 이상
그 참선의 수명은 짧을 수 밖에 없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의 수많은 조사스님들께서 드러내 보이신
이 가르침을 어찌 그렇게 쉽게 믿지 못하고 퇴전심을 내는가.
아무런 목적 없는 참선,
오직 묵묵히 무겁게 앉아 비춰보는 회광반조의 참선에는
모든 불보살님과 역대 선지식의 밝은 소식이 담겨 있다.

다만 그것을 믿고 묵묵히 나아가라.
비록 좌선하는 순간, 기도하는 순간
별로 깨달아지는 것이 없고, 느껴지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게 잘 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순간에 조차,
그것이 바로 최고의 수행이요 참선의 순간임을 의심치 말라.

참선수행이나 기도수행은
언제나 별로 깨달아지는 것도 없고 느껴지는 것도 없다.
수행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불평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이 수행의 핵심이다.

다른 외도의 수행이나, 돈 벌이에 급급한 명상방법을 보면
무언가를 이루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을
수행의 진척으로 생각할 지 모르지만
이 문중의 가르침에서 그런 것들은 쓰레기통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일 뿐이다.

공부하는 수행자는
평범할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어떤 특별한 경계를 만나거나,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없을 때,
바로 그 평상심의 때가 가장 소중한 수행의 때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수행자는 다만 묵묵히 정진해 갈 뿐
포기하거나, 실망하거나, 진척 없음을 탓하지 않는다.

이 공부는 다만 순간 순간을 문제 삼는 것이지
노력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다.
수행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사람들, 목적의 성취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공부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한다.
결과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와 있음을, 이미 지금 이 순간이 과정이자 결과임을 깨닫고 누릴 뿐이다.

순간 순간의 깨어있음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바라던 궁극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만족스러울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지족의 열반이 될 것이다.

수행에 대해, 깨달음에 대해, 부처에 대해
그 어떤 지식적인 논의나 토론, 고차원적인 이론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최고의 현학적인 지식일지라도 이 공부에서는 무의미하다.
이 공부는 생각 너머에, 지식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 공부를 하나도 할 필요가 없다거나,
경전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버리고 묵묵히 있는 그대로 순수히 바라보는 것,
그저 좌복 위에 앉아 관조(觀照) 해 보는 것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선 수행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근사하거나, 있어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속에 그 어떤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아주 사소하고 단순하며 평범한 것일지 모른다.

수행자는 다만 좌복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혹은 걷고 안고 눕고 움직일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듯 하지만
그 모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
또한 고요함 속에 다시 움직임이 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10년을 앉아 좌선을 했지만 아무런 깨달음도 없다고?
그래도 여전히 앉으라.
수행 중에 그 어떤 변화도, 경계도, 환희심도 없다고?
그것이야말로 이 수행이다.

공부하는 수행자에게는 잡초가 보물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잡초라고 생각될 지 모르지만
수행자에게는 그 잡초가 바로 부처요 보물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언뜻 보기에 잡초같이 보잘 것 없는
모든 순간 순간이 그대로 보물처럼 소중한 순간임을 알 것이다.
안 된다고 느낄 때가 사실은 가장 잘 되고 있는 때임을 알 것이다.

매일같이 목적 없는 참선을 행하라.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고요히 앉아 지켜보라.

잘 되고 안 되고를 여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잘 되고 있는 때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삶이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