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이들이 수행을 한다고 하고,
오체투지를 수만번 한다하더라도
누군가를 대할 때 평화롭게 미소 지을 수 없으면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 -달라이 라마 존자-
오체투지란 머리와 두 팔과 두 다리를 완전히 땅에 붙이는 불교최고의 정중한 예배법이다. 불교도들이 예배를 할 때 이렇게 온몸으로 자기를 낮추는 오체투지 예배를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과 스승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귀의의 표시로서다.
경전에는 제자들이 부처님에 대한 귀의를 표명하기 위해 오체투지를 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둘째는 허물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의 방법으로서다.
율장의 갈마법은 잘못을 범한 사람은 대중에게 허물을 고하고 참회의 예배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오체투지 예배법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태국이나 미얀마 같은 남방불교권의 불교도들은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북방불교권에서는 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은 뒤 머리를 땅에 대는 예배를 반복한다. 이에 비해 티베트에서는 오체를 완전히 땅에 붙이는 전신예배 방식으로 한다. 특히 성지순례에 나설 때는 삼보일배 또는 일보일배를 하는데, 손과 발을 길게 뻗어 전신을 땅에 대고 예배를 한 뒤 손끝 지점에서 다시 예배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성지를 찾아가다 보면 예배횟수는 거의 헤아릴 수가 없다.
예로부터 불자들이 경전을 읽거나 성지를 찾아갈 때는 이렇게 간절한 귀의심과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천축으로 간 구법승들은 불탑 앞에서 온몸으로 땅을 덮으며 지극한 예배를 올렸으며(서역구법고승전) 고려 때 일여스님은 일자일배(一字一拜)로 〈법화경〉을 사경했다.(법화영험전) 또 청말의 고승 허운화상은 중국 보타산에서 오대산까지 삼보일배의 배행(拜行)을 하여 3년만에 회향을 했다.(참선요지) 수행자라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모습들이 아닐 수 없다. 근래 우리 나라 계단에서 행자를 득도시키기 전에 하는 삼보일배는 이런 기록들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삼보일배는 아니지만 불자들에게 절을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분은 수년 전 입적한 성철스님이다. 스님은 친견을 청하는 불자가 있으면 3천배를 해야 허락했다. 달마를 찾아간 혜가가 눈 속에서 단비구법(斷臂求法)하던 정신이 있어야 설법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구도행으로서의 예배가 요즘 들어 약간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느낌이다. 불자들 사이에서는 절을 많이 하는 행위 자체가 대단한 수행인양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절을 잘할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책자가 나오는가 하면, 3천배 참회가 수련회의 단골프로그램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3천배 경험여부가 신심이나 근기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한번을 하더라도 지극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닌 무늬만 예배, 극기훈련처럼 하는 예배에 어떤 수행의 공덕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찍이 부처님은 장아함 〈나형범지경〉에서 ‘삼독을 버리지 못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고행을 해봐야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가르쳤다. 간절한 귀의나 진실한 참회의 마음 없이 예배의 숫자만 채우는 것은 결코 참다운 수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잡아함 〈손타리경〉에서는 어떤 외도가 갠지스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 죄가 없어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물에 사는 고기는 가장 깨끗한 중생이란 말이냐’고 되물으면서 어리석음을 힐난하기도 했다. 이 말씀을 1천배나 3천배를 자랑삼는 사람들에게 바꾸어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한다고 수행이 된다면 방아개비가 가장 빨리 성불할 것이다.’
귀의와 참회를 위해 하는 예배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지적코자 하는 것은 숫자에 집착해서 방아개비처럼 하는 예배는 3천만배를 하더라도 불교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간절한 귀의와 진실한 참회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배가 아니면 쓸데없는 고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3천배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홍사성의 불교사랑에서>
기차게 절하는 법
절은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으로 화두참선이나 위빠사나, 묵조선, 염불, 독경 등
고도의 수행을 하기 위한 수행으로서 참으로 효과적인 기초이며 기본 수행이다.
나의 모든 것을 낮추어서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을 몸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절은
부처님 앞에서 나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키면
어느 순간 참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한두 번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108배, 1000배, 1080배, 3000배, 일만배를 하는
것이다. 이토록 무수히 절을 하다보면 내 인생을 무겁게 짓눌렀던 업장이 벗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참자아를 찾아가 자신을 발견하는 투철한 작업이 수행이라고 했을 때 절은 완전히 자신을
굴복하고 지혜를 얻어가는 과정이자 공부이다.
호흡에 맞춰 절하는 법
절할 때는 숨차지 않고 헐떡대지 않으며 맥박이 평소보다 10% 이상 빨라지지 않아야 한다.
절은 반복되는 동작과 호흡이 조화를 이룰 때 심신의 균형을 가져오며, 수행의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절을 할수록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기 어려운 수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절 수행자들은 그 횟수를 거듭할수록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즐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절하는 동작과 아울러 호흡법을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이 절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이자
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호흡에 맞춰 절하는 법을 잠깐 소개하자면 우선 합장하고 바로 선 자세에서 기마자세를
취한 후 천천히 발가락을 꺾으며 무릎을 꿇는다. 이 동작을 하는 동안 숨을 들이쉰다.
손을 바닥에 짚고 이마와 코를 바닥에 대면서 왼발을 오른발 위에 포갠다.
이러한 접족례에서 숨을 천천히 내쉬어주는데 이 날숨은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약간 나가면서 동시에 발가락을 꺾고 합장할 때까지 쉬어주면서 일어선다. 합장하고
일어설 때 다시 기마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이때 다시 숨이 저절로 들이쉬어진다.
다시 말하면 절하고 일어서면서 코로 들숨이 저절로 쉬어지고 서 있는 상태에서 무릎을
꿇으려 할 때 다시 한 번 코로 들숨이 쉬어진다. 그리고 손 짚고 머리를 바닥에 댈 때,
즉 팔꿈치가 반쯤 굽혀질 때부터 접족례 후 합장하면서 일어서려는 순간까지 입으로
날숨을 쉰다. 이렇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흡흡호’라고 하는데 무의식 중에 2회의
들숨과 1회의 날숨을 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호흡에 맞춰 천천히 절을 해 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점차 익숙해지면 특별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절하는 동작에 맞추어
저절로 호흡이 이루어진다.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호흡이 불안하게 되는데 이때 잘못된
호흡훈련으로 특히 역호흡 흉식호흡과 지식호흡을 수련한 수행자들은 횡경막의
비정상활동으로 호흡이 헐떡이고 숨차게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절을 하면서 호흡수련이 이루어지면 일상생활에서도 저절로 복식호흡을 하게
되므로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짐으로써 장수하게 된다.
코로 들이마시는 숨(들숨)을 짧고 간명하게 하고 내쉬는 숨(날숨)은 길고 부드럽고
가늘고 고요하게 하는 호흡법을 장출식 호흡법, 혹은 토납법 호흡법이라고 한다.
절을 할 때뿐만 아니라 염불, 독경할 때에도 이 호흡에 맞추면 막힌 혈이 열리고 몸 속의
노폐물도 다 빠져나가므로 마음도 상쾌해지고 안정감을 갖게 되면서 복식 단전호흡이
저절로 이루어지면서 대뇌의 각성으로 정신이 맑아진다.
절 삼매를 이루려면
흔히 108배를 할 때 절하는 수를 세기 위하여 염주를 많이 사용하는데 염주를 사용하게
되면 절하는 자세가 바르게 되지 않고 염주소리 때문에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수행을
방해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염주를 들고 있으면 합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합장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심장의 두근거림을 방지할 수 있으나 염주를 들고 계속 절을 하게 되면 두근거림과
헐떡이는 증세가 증가되며 엔돌핀이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이런
상태에서는 잡념이 끊이지 않으므로 번뇌에서 벗어나는 수행을 이루기가 어렵다.
물론 마음 속으로 절하는 횟수를 세다 보면 수를 헷갈리거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이 몸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져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그야말로 하나가 되는 경지를 느끼게 된다.
절을 하면서 삼매를 이루면 업장은 소멸되고 부처님의 가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으로 수를 세면서 삼매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절은 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부처님과 자신에게 온 마음을 돌리는 수행이다.
이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이 청정함을 되찾을 때 기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절 수행의 고비
절 수행을 통해 100일, 1000일 기도를 하다 보면 허리통증 무릎과 발목관절, 발가락,
발바닥의 통증, 현기증, 두통, 몸살, 몸이 무겁고 힘이 없는 무력증과 같은 몸의 이상이
올 수 있다.
또한 짜증과 괴로움, 퇴굴심과 같은 심적인 이상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한 고통의
순간이 바로 수행의 고비다. 이러한 고비는 절 수행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나타날 수 있는 증세들이다. 그러므로 고비가 왔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부터
이를 뛰어넘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퇴굴심을 내지 않고 힘들어도 꼭 하겠다고 하는 굳은 의지는 바로
마음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고비를 넘기겠다는 의지를 발휘하면 힘들어도 한다는 결심이
굳어지게 된다.
그 때부터 비로소 정신세계로 들어가 육신의 주인에서 마음의 주인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이 주인이 되는 순간 절은 육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것이므로 아무런
고통이나 증세도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힘들다 포기하고 싶다는 좌절의 순간이 오면 신체의 일부분이 아프기 시작한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그 관념을 타파하는 순간 진취적이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고 육체는 그 마음상태대로 움직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좌절하고 싶은 순간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고비를
넘기도록 해야 한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아울러 부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절 수행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밝은
마음 맑은 얼굴로 절을 해야 한다.
편안한 마음과 밝은 미소로 절을 하면 절하는 자체가 힘들지 않고 잘 될 뿐만 아니라
신체의 리듬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호르몬인 엔돌핀이 나와 저절로 환희심을 갖게 된다.
반면에 몸과 마음이 불안정하고 무엇인가 쫓기듯이 헐떡이면서 숨차게 절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면 인체에 해로운 호르몬 아드레날린이 나온다.
피부가 경직되고 핏줄이 가늘어지며 혈압이 상승하고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아 수행은
커녕 오히려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게 된다. 그러므로 절 수행을 할 때는 무엇보다 아무런
욕심없이 편안하고 맑은 마음가짐과 밝은 표정으로 임해야 한다.
올곧이 “부처님 고맙습니다”만 염송해서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고 긍정적이며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공이 보이고 고마운 일들이 많아지게 되면 그런 마음들이 현실로
이어진다.
예금이 하나도 없는 통장을 가지고 은행에 가봤자 돈을 주지 않듯이 마음속에 감사함이
없고 부정적 비판적이고 원망, 불평불만만 가득하고 화와 성을 잘내고, 질투, 시기심,
이기심 등이 많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며 하는 일마다 실패하게 된다.
특히 건강이 좋지 않게 되며 병에 걸려도 잘 낫지 않게 되고 아만, 교만, 아집이 강해
사람들이 싫어한다. 염불이나 주력 수행은 삼매를 이루는 데 좋은 방법으로 삼매
상태에선 몸과 마음이 평화롭고 좋지만 삼매가 깨어졌을 때는 가라앉아 있던 업장들이
그대로 떠올라 번뇌망상이 일어나며 혼란이 온다.
업장소멸이 없고 소원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염불 주력 수행을 통해 마음이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러나 “부처님 고맙습니다” 하는 감사 염송수행은 의식적이든 형식적이든 억지이든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만 한다해도 “부처님” 하는 염송 속에 몸과 마음이 저절로
밝아지고 “고맙습니다” 하게 되면 비판적, 심판적, 원망, 불평, 불만, 아만, 교만, 아집,
성냄, 시기, 질투, 고집 등의 어두운 업장이 사라지고 긍정적이며 자신감이 생겨 소원이
이루어지고 행복과 성공이 따라다닌다.
감사의 보약과 하심의 보약
본인은 한때 웃질 않고 말하길 싫어했다. 고맙다는 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고, 도움을
청한다거나, 남을 칭찬한다거나, 누굴 예뻐한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를
드러내놓고 웃어본 적 없이 항상 눈을 똑바로 뜨고 눈꺼풀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눈동자를 이리 저리 움직이지도 않고, 항상 고정된 상태로 미간을 찌푸리고 굳은 표정의
얼굴이었다.
어깨는 항상 경직되어 있고 허리는 공격적으로 굽어 있고 팔은 거들먹거리는 스타일이고
손은 쇠망치처럼 굳어 있었다. 한마디로 거만하고 표독한 냉혈인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절을 많이 하면서 몸을 낮추고 마음은 하심이 되고 “부처님 크신 은혜 고맙습니다”를
수시로 끊임없이 염송하면서 “고맙습니다” 하는 말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가 오면서 몸과 마음에 있던 나쁜 기운이 쏙 빠져나갔다는 느낌이 든 이후부터
힘들게 일해도 지치지 않고 몸살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으며, 병원에 간다든지 약을
먹는다든지 드러누워 앓아 본 일이 없다.
- 글 청견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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