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부활의 의미.

소리없는 아우성 2020. 4. 12. 18:01

“부활 없다면 인생·죽음 답변도 없어…이승 초월해야 구원” 

 

‘정감록’이 조선의 종말 예언했듯

옛 이스라엘도 묵시 문학 성행

 

육신 부활? 시신 소생처럼 들려

부활의 육신은 신령한 육신 뜻

 

부활절(12일)을 앞두고 경기도 용인에서 8일 정양모(85) 신부를 만났다. 그는 성서신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광주 가톨릭대, 서강대, 성공회대 교수를 역임했다. 다석 유영모의 영성을 연구하는 다석학회장도 15년째 맡고 있다. 프랑스에서 3년, 독일에서 7년간 머무른 탓에 외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프랑스어·독일어·영어는 물론이고 예수가 썼던 아람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하다. 그에게 물음을 던지면 늘 ‘정확한 답’이 돌아온다. 정 신부에게 예수와 부활을 물었다.

 

유영모 영성 연구 다석학회장 15년째

 

 

Q : 곧 부활절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이 왜 중요한가.

 

A : “가톨릭·개신교·정교회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 공부’ ‘예수 닮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첩경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이승의 현실이라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부활로 들어가면 말을 잃기 십상이다. 부활은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 사건이기 때문이다.”

 

 

 

Q :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나.

 

A : “입을 다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부활이 없다면 어찌 되겠나. 인생과 죽음에 대한 답변도 없어진다. 그러니 예수 부활, 우리 부활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활 신앙이나 부활 이야기는 유대교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기술됐다.”

 

 

 

Q : 묵시 문학이 뭔가.

 

A : “묵시 문학은 ‘역사는 곧 끝장나고,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한다. 묵시 문학 가운데 구약 성서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다니엘서, 신약 성서에서는 요한묵시록(개신교는 ‘요한계시록’이라 부름)이다.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100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난세 중의 난세였다. 시리아 정권의 압제에 주권을 잃은 이스라엘이 다시 로마 정권에 점령을 당한 시절이었다.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전적으로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백성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시절이었다. 그래서 말세론이 성행했다.”

 

 

 

Q : 왜 말세론이 필요했나.

 

A : “종말이 닥쳐서 적들은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하리라. 현세는 물러가고, 새 하늘 새 땅 신천지가 도래하리라. 묵시 문학은 그걸 담고 있다. 그래서 묵시 문학은 한마디로 난세 문학이다. 한국에도 아주 흡사한 형태가 있었다. 조선조 말기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던 시절에 성행한 ‘정감록(鄭鑑錄)’이다.” 당시 민간에 널리 퍼졌던 ‘정감록’은 조선의 종말을 예언했다.

 

이어서 정 신부는 ‘육신 부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요즘도 ‘예수의 부활이 육신의 부활인가, 아니면 영적인 부활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다. 육신 부활 사상의 뿌리는 과연 어디일까. 정 신부는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 임박 사상과 더불어 종말 때 육신 부활이 있으리라는 강렬한 희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Q : 육신 부활에 대한 갈망, 어디에서 비롯됐나.

 

A : “묵시 문학 태동의 직접적 계기는 마카베오 독립전쟁(기원전 167~142년 벌어진 고대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독립군이 무수하게 처단을 당했다. 처단을 당한 저들을 하느님이 버려두지 않고 거두어 가신다. 유대인은 그렇게 믿었다. 그게 육신 부활 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말한다. 예수님의 육신이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인도 장차 육신이 부활하리라.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이 ‘육신 부활’을 이해하기는 나날이 더 어렵다. 글자 그대로 하면 ‘시신 소생’처럼 들릴 수도 있다.”

 

 

Q :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주일미사와 예배 때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나.

 

A : “사도신경에 그 고백이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 속의 육신 부활 신조도 참 조심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보면서 ‘시신이 소생한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건 구원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바울)도 ‘부활의 육신은 신령한 육신이다. 영광스러운 육신이다’ 고 했다. 다시 말해 이승의 육신이 아니라 이승을 초월한 육신이란 뜻이다.”

 

 

 

Q : 지금도 이승에 있는 실제 우리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어찌 되나.

 

A : “이승의 몸은 결국 소멸하는 존재다. 그러니 이승의 육신이 부활한다 해도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건 구원이 아니다. 이승을 넘어서고, 이승을 초월해야 영원이 있다. 그것이 구원이다.”

 

 

하느님이 예수님 추수해 가신 게 부활

 

이 말끝에 정 신부는 불교의 ‘열반’을 꺼냈다. “불가에서는 ‘부활’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열반’이란 말을 쓴다.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 팔리어로는 ‘닛빠나’, 그걸 중국에서 한자로 음역한 게 ‘열반(涅槃)’이다. 열반이 뭔가. 탐(貪)·진(瞋)·치(癡)라는 이승의 삼독(三毒·세 가지 독)을 온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과 열반, 둘 다 이승의 질곡을 초월한다. 그래서 구원이다. 이승에 함몰되면 구원이 아니다.”

 

 

Q : 당신이 바라보는 부활 후의 구원이란 어떤 것인가.

 

A : “저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추수’ ‘수확’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신약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많고도 많다. 그중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다. 그 대목이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딱 두 군데 나온다. 요한1서 4장 8절과 16절이다. 그런 하느님을 의식하고,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化身)이다. 화신은 불교 용어다. 그래도 나는 그대로 쓰고 싶다. 예수님은 사랑의 덕을 끝까지 밀고 가다가 처형이 되셨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제대로 살았고, 또 제대로 죽었다. 그런 예수의 인생을 추수해 가신 것. 나는 그걸 부활이라고 본다.”

 

 

‘동정녀 마리아’ 출생, 예수 위대함 강조 위한 것

 

제가 젊었을 적에 가톨릭 교리를 압축한 ‘천주교 요리(要理) 문답’이란 책이 있었다. 신앙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형식이었다. 320개의 물음과 320개의 대답. 그때는 그 책만 달달 외우면 됐다. 당시 나의 신앙은 성찰 이전에 교리 중심이었다. 그렇게 살 적에는 편했다.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으로 유학을 갔더니 달라졌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리가 생겨난 과정과 해석의 과정을 파고들었다. 한동안 유학 온 일을 후회했다. 나의 신앙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오히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가령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를 많은 사람이 너무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처녀의 잉태와 출산이 가능한가. 그걸 따진다. 성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잘난 사람들은 돌계집으로 불리는 석녀(石女)나 노파에게서 태어났다. 예수님 직전의 세례자 요한도 석녀 겸 노파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들보다 더 위대한 분이었다. 석녀 출생이나 노파 출생이라고 하면 동격이 되니까 성에 차지 않았다.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야만 출생 급수가 기적이 된다. 다시 말해 ‘동정녀 마리아’는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다. ‘이 세상 잘난 사람 많고 많지만, 그 누가 우리 님과 같으리오.’ 그런 예수의 위대함을 출생 이야기로 엮은 것이다. 요즘 세계 성서학계에서는 꽉 막힌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렇게 본다. 보편적 해석이다. 다시 말해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심층적 해석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충격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꽤 많다.

 

 

용인=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