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고(苦)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소리없는 아우성 2012. 12. 31. 14:31

 

고(苦)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OUR REACTIONS TO DUKKHA

 

엘리자베스 애쉬비 지음
이 금 주 옮김
Dr. Elizabeth Ashby

(BODHI LEAVES NO. B26)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범 례

1. 이 글에 인용된 경은 P.T.S.영역본을 참조하여 쪽수를 밝혔음.
2. 인명 지명등 외래어의 표기는 원어의 발음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음.
3.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음.
4. 부호 사용의 용례는 경전에 대해서는 『 』, 저서명 논문명등은 「 」, 역주에 대해서는 *를 썼음.

 

 

 

고(苦)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비구여,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중 고성제이다. 태어남이 고(苦)이고, 늙음이 고이고, 병이 고이고, 죽음이 고이고, 근심 탄식 괴로움 슬픔 절망이 고이다. 싫은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것도 고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그것 역시 고이다. 요컨대 집착에 근거한 이 ‘나’라는 오온 덩어리[五取蘊]가 바로 고이다.”
― 『상응부』, Ⅴ, 357쪽 ―

 

이처럼 엄중하고 단호한 것이 바로 사성제 중 첫번째인 고성제입니다. 이 진리는 진지한 명상을 통해서만 본질 그대로 이해될 수 있으며, 비로소 터득하게 되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도 고가 그러한 것임을 알고 그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이지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언젠가 때가 무르익어 진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가 무엇인지 알면 알수록 자신이라는 존재[有]가 처한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좀더 명확히 보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지적인 접근방법’에 의해서 무수하게 그 모습을 바꾸어 등장하는 고를 놓치지 않고 직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빠알리어의 둑카(dukkha)가 가진 의미를 모두 담을 수 있는 낱말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라는 말이 그 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말이겠지만, ‘괴로움’이니 ‘고통’이니 하는 낱말들도 얼추 비슷한 뜻으로 쓸 수 있겠습니다. 둑카에는 좀더 깊고도 보편적인 의미가 들어있는데, 그것은 에볼라(Evola)의 말처럼 “괴로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하고 흔들리는 일종의 동요상태로서(...) 요지부동의 절대 평온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 자신이 고를 경험하는 경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 공동으로 겪는 고

보편적으로 겪는 고(苦)에는 전쟁, 기아, 돌림병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겪는 집단적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그보다 잘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고로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과 불만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한 불안과 불만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마찰과 좌절에 기인하기도 하고, 소위 ‘영적’인 생활을 해치는 이런저런 기분과 정서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든 피조물들은 지금껏 고통 속에서 다함께 신음하고 고생해왔다.”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둘. 남이 겪는 고
고 중에서도 우리가 직접 목격은 하되 우리 자신이 고통의 당사자는 아닌 경우로서, 가령 교통 사고를 목격하거나, 병을 앓고 있는 이웃을 만나거나, 또는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는 새를 볼 때 느끼게 되는 고통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 자기가 겪는 고
고 중에서도 우리 모두가 각자의 업에 따라서 개별적으로 겪는 고를 말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잘것 없고 초라한 자아(ego)에 매달리는 우리로서는 개별적으로 겪는 그 고통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사람들이 고를 만났을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1.곁눈가리기
대개 고통이라는 것은 생각만해도 몹시 불쾌한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해서든지 외면하려 듭니다. “난 무척 예민해서 차마 그런 얘기는 들을 수가 없어요.”라거나, 더 심한 경우에는 “나는 알 바 아니야.”라고 해버립니다. 유복한 환경의 사람들이나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곁눈가리개를 씌운 말처럼 괴로움을 회피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은 불교에 접하면 우선 인생이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에 질색부터 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복, 즉 지나갔거나 현재 겪고 있거나 또 앞으로 있을 즐거움만을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매일 겪는 사소한 골칫거리들은 모르는 체합니다. ‘곁눈가리기’식의 사고방식에서 한술 더 뜨면 ‘장미빛 색안경’을 쓰게 됩니다. 이 안경을 쓰면 볼테르가 「깡디드」 주1 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낙천주의자처럼 “매사가 더할 나위없이 멋지게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2.무조건 받아들이기
동물들이나 몇몇 원시 종족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이들은 불행한 사태로 인한 고통이나 생존의 위험 같은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들은 이러한 불행이나 위험을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기도하기
신앙심이 강한 이들이 고에 부딪칠 때 보이는 반응은 초월적인 존재에게 도와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어떤 재난을 당했을 때 따로 날을 받아 거국적으로 치뤄지는 기도처럼 의례적인 것도 있으며, 고난을 당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도와달라고 비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며, 설혹 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온당한 행동이라고는 보지 않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심리적으로 본다면 기도를 한 그 개인은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어떤 더 높은 권능자에게 맡겼다는 생각에 위안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4.비탄에 빠지기
아끼던 귀중한 재물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할 경우 사람들은 비탄에 빠지고 맙니다. 마치 외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금쪽 같은 내 자식아, 어디 있느냐? 금쪽 같은 내 자식아, 어디 있느냐?”(『중부』, 제87경,Ⅱ,292쪽)라며 울부짖듯이. 사람들은 걸핏하면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라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업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5.투덜대기
투덜댄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히려 또다른 고나 보태기 십상이지요. 불평분자로 호가난 사람은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고 필경 주위의 친지들도 그를 멀리하여 ‘자기 속을 자기가 달달 볶게’ 내버려두게 됩니다.

6.근심과 들뜸 / 안달하기


이것은 다섯 가지 장애 주2 가운데 하나로, 평온을 깨뜨리는 요소입니다. 불행하게도 늘 안달복달하는 이런 사람은 일을 해도 제대로 되지 않고, 머지 않아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저 좋아서 하는 걱정, 그것도 팔자다.”라고 한다면 좀 혹독하게 들리겠지만, 곰곰이 짚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7.임시방편 찾아내기
“아이고 머리 아파. 두통약 어디 있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는 않고 임시방편만 찾으려 합니다.

 

8.술이나 약물에 중독되기
“그 친구는 속상하다고 술독에 빠지더니, 술병으로 죽을 지경이래!” “그 여자는 줄담배를 피워대더니, 기침이 고질병이 되었어.” 소위 복지국가라는 데에서도 ‘진정제’나 ‘각성제’에 중독되고 코카인과 헤로인의 밀매가 성행하는 등 딱한 일들이 벌어지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중독’은 꼭 약물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거나 지적인 형태의 것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늘 켜놓고 있어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정적인 글이나 공상과학 소설이나 추리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봐야하는 것도 중독의 또다른 예입니다. 이런 내용의 책들은 특히 한밤중에 볼 경우,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기보다 오히려 신경을 피곤하게 합니다.

9.미움과 악의
이 또한 다섯 가지 장애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실제로 당했거나,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걸핏하면 미움과 악의의 태도를 보이기 십상입니다. 쉬운 예로는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을 때 으레 벌어지는 ‘욕 퍼붓기 시합’을 들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 상대방을 멍청이라고 쏘아대면, 그 쪽에서도 즉각 응수를 하게 되어, 사고로 인한 충격도 고통인데 그런 식으로 서로서로가 고를 배가시키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그보다 좀더 사소하게는 쇼핑을 하다가 불손한 점원을 만나게 되거나, 줄을 서있는데 새치기를 당할 때 미운 생각이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밀쳐내거나 “흥, 별꼴이야.” 하기 쉬운데, 이러한 사소한 불쾌감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앙금으로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습니다. 이와 같은 ‘미움 반응’이 극단에 이르면 앙갚음으로 나타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는 식이지요. 최악의 경우에는 살인에까지 이르고, 또 대를 물린 집안간의 유혈극이나 복수극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미움 반응’의 문제에 관하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톱의 비유’ (『중부』, 제21경, Ⅰ,159쪽) 주3 를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0.시새움
“학기말 시험 때문에 나는 고생고생했는데, 우등상은 엉뚱한 놈이 받다니.” 사람들은 매사에 이런 식으로 시샘을 합니다. 불법을 닦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특히 주의해서 삼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수행이 잘되지 않는데, 누군가가 ‘한 소식’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시새움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 자칫하면 초조해지고 낙담이 되어 불행하게도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기뻐해 줄[喜, muditaa] 주4 사람도 있겠지요. 그것이야말로 온당한 반응이라 할 것입니다.

 

11.감정폭발
고에 맞부딪쳤을 때 보이는 반응 중에는 감정폭발도 있는데, 거기에는 상당히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욕지거리를 퍼붓고, 살림살이를 박살내는 짓을 하면 남들은 눈살을 찌푸리지만, 이런 행동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적 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잔뜩 쌓였던 감정이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당사자가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는 그런 감정을 터트려버렸기 때문에 기분이 좀 후련해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2.고통을 즐기기

다행히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반응 가운데 가장 나쁜 현상은 남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가학증(사디즘)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고대 로마의 검투나 스페인의 투우, 심한 사고를 내기 일쑤인 운동경기를 통해 남들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기쁨을 느끼곤 합니다. 이런 경기를 보면서 관중들은 짜릿함을 맛보고, 감각적 흥분에의 욕구를 만족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고대 희랍 비극은 또다른 목적을 겨냥했습니다. 즉 관객에게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정화(淨化), 곧 카타르시스 효과를 얻게 하려는 것으로, 관객들은 고대 희랍의 장중한 비극이 연출하는 엄청난 고를 바라봄으로써 평형감각을 얻게 되며, 쌓여있던 감정을 풀어버리게 됩니다. 그 효과가 매우 극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유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영국에서 상연되었을 때, 그 공연장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반응은 고통과 야릇한 고양감이 묘하게 뒤섞여 일어난 것입니다.
이 고통즐기기 중에서 좀더 미묘한 형태는 자신의 고(苦)를 즐기는, 순교자연하는 기분입니다. 자기는 굉장한 고통도 감내할 능력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다른 둔한 무리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쭐하는 자만심의 소치가 아닐까요.

 

13.불행을 이용하기
자신의 불행을 이용하는 예로는 난쟁이나 지체 기형아 또는 신체의 일부가 붙은 쌍둥이들이 신체적 결함을 대중의 시선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생계를 꾸려가는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또 남의 불행을 통하여 이득을 얻는 가장 저질적인 예로는 어린 아들의 뒤틀린 다리를 보여주며 구걸하는 스페인 거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 맹인이나 지체 장애자가 자기에게 모두들 길을 내주리라는 것을 알고서 혼잡한 차량의 물결 속을 아랑곳 없이 건너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불행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심보가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우리들도 병을 앓고 난 후의 회복기를 괜스레 길게 연장해 보고싶다고 느껴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14.치암(癡暗, moha) 상태로의 퇴행

때로 우리의 자아는 삶과의 싸움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두 손을 들고 패배를 자인하며 포기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 당사자는 정신적으로 일탈상태가 됩니다. 어떤 형태의 정신적인 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고, 그래서 환자가 일체 책임감에서 해방되었다는 엉뚱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다른 형태로는 생활의 어려움과 단조로움에 지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반응인데, 병이 나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까지나 내내 그렇게 누워서 쓸모없는 기생충 상태에 만족하려 들겠지요.

 

15.신체적 반응
고(苦)는 어떤 종류든 항용 감정과 연결되고, 그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신체적 증상이 나타납니다. 갑자기 나쁜 소식을 들으면 복부에 강한 주먹을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왠지 속이 더부룩해지고, 게다가 끊일 줄 모르는 근심 걱정은 흔히 습관성 위장장애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충격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기도 합니다. 공포로 인해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은 부처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장부』, 제2경,Ⅰ,67쪽). 진땀이 나거나 가슴이 뛰는 것도 두렵거나 초조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놀란 상태를 나타낼 때 우리는 흔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는 말을 씁니다. 어떤 불쾌한 일로 인해 화가 나면 순환기 계통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예사여서 얼굴이 벌겋게 되고, 심지어는 흙빛으로 변하고, 그보다 더 심하면 새하얗게 질리기도 합니다.

 

16.자살
고통을 당한 사람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입니다. 서방 교회의 눈에는 자살은 ‘지옥에 떨어질 큰 죄’입니다. 율법은 자살을 범죄로 간주하니까요. 그리고 일반 기독교인들은 자살하는 사람을 비겁자가 아니면 정신이상자로 믿습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 주5 는 좀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린애만도 못하게 두려움에 떨지마라. 어린애들은 놀다가 싫증나면 ‘난 그만 놀테야.’하고 큰 소리치지 않는가. 그와 같이 당신도 그런 처지가 되면 ‘난 그만 놀테야.’라고 당당히 말하라. 그리고 떠나가라. 그러나 떠나지 않고 머물테면 제발 푸념일랑 그만두라.”(에픽테토스) 주6 불교인들의 관점은 또 다릅니다. 불교인들은 자살을 끔찍한 과오로 봅니다.
왜냐하면 자살이란 역시 업짓는 행위의 하나인데 격렬하고 과격한 업은 다음 생에서도 여전히 격렬하고 과격한 업을 되풀이 할 인(因)이 되니까요.
유일한 예외가 있긴 합니다. 그것은 아라한들의 경우인데 업을 짖지 않을 만큼 향상이 완성된 인간인 그들만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삶을 그만두어도 그것이 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다 보니 미처 다 열거하지는 못했지만 꽤나 끔찍한 목록이 되었군요. 하지만 가장 ‘당연한 반응’이 여기에는 빠져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그것을 한번 채워보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앞에서 열거한 바람직하지 못한 항목들을 쭉 훑어보고서, 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는 것이 대체로 탐 套치 삼독심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비교적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 반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1.인내심[忍辱]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 주7 기독교도의 이러한 자세는 인내심이기는 하지만 맹목적인 신봉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인욕이란 감각적 쾌락과 같은 마음의 때(번뇌, aasavas) 주8 를 닦아내는 데 없어서는 안될 덕목입니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상태나 사소한 통증과 상처들, ‘마음에 걸리는 말’ 등에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좀더 편안해지고 싶다는 마음조차 갖지 않고 의연히 대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중부』, 제2경,Ⅰ,3쪽).

 

2.영웅적 자세
“신을 저주하고, 그리고 죽어라!” 그것은 자신이 전지전능자인양 운명에 도전하는 자세입니다.
“운명의 곤봉질에 굽히지 않으리, 내 머리 피투성이될 지라도.” 이것은 오만, 그것도 역겨운 오만이지만 여기에는 비겁한 구석은 없습니다.
이와 아주 다른 경우로서 맹인과 장애자들이 사회에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써 삶을 헤쳐 나아가며 고군분투하는 영웅적 태도도 있습니다. 또 가정에서 늘 겪는 하잘것없어 보이고 고달픈 일상생활을 감당해내는 여인네들의 용기는 별로 인정받지는 못해도 영웅적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고를 만났을 때 영웅적 자세로 대처해나감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고귀하고 영웅적인 정신을 가진 수행자들만이 꿋꿋함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철학적 자세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제정신만은 차려야한다!” “백 년 전이나 백 년 후나 인간사 매한가지.”라는 식으로 냉철하고 객관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포우프 주9 에게 보낸 메리 워틀리 몬테규 부인의 수준 높은 편지는 고에 대해 제법 철학적인 자세를 보여줍니다. “할 수 없죠 뭐. 우리가 지구라는 이 고약스러운 별에 태어났다는 운명은 받아들여야겠지요. 그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일 거예요. 그나마 이 별에는 웃을거리가 많다는 것이나 고마워해야 할까요. 높이 사줄만한 건 하나도 없지만요.” 여기에서 ‘운명’을 업(kamma)이란 말로 바꾸어 읽으면 제대로 뜻이 통할 것입니다. ‘웃을거리’라는 말은 그대로 두고요. 웃음은 선(禪)이 가져다 주는 선물 중의 하나이니까요. 유모어는 존재의 부조화를 인식하는 행동으로서, 사실상 일종의 균형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인간이란 한 마리 이[蝨]보다 더 중요할 것도 없는 존재, 그것도 그 넓은 런던 시내에서 굳이 피카딜리 주10 쪽으로만 기어드는 외로운 이[蝨] 한 마리와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그 점을 알아차
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창조적 자세
화가, 음악가, 시인들은 고뇌에 빠졌을 때 오히려 훌륭한 작품을 만들곤 합니다. 예술가가 고를 잘 통제하여 사실상 유익한 목적으로 돌린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감정에 빠져도 압도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인데, 이들은 고뇌 속에서 울적한 채로 있느니 차라리 일어나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세는 매우 소박한 형태이긴 하지만 바로 정진이란 미덕의 시발이 되는 것입니다.

 

5.동정심
이 시대를 일컬어 보통 황금만능의 시대니 이기주의 시대니 합니다. 그러나 우발적인 교통사고와 같은 분명한 고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즉시 동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대형 열차 사고나 자동차 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간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상이나 감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보냅니다. 병약자나 맹인들이 놀라는 것은 그들을 도와주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달리,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자잘한 고통들은 흔히 간과됩니다.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이나, 따분하고 지루한 사람, 우리보다 못해서 바보같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남의 동정을 받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꺼리며 피하는 이런 사람들도 역시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굳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일부러 찾아다닐 것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과 마주칠 때는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사실 우리 자신이야말로 측은하게 여겨야 할 대상입니다. 특히 이 몸[色蘊]은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오온(五蘊) 가운데 나머지 사온(四蘊)을모두 싣고 다녀야 하니까요.

 

개인적인 고

우리가 고통을 쓰라리게 맛보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고를 통해서이며, 그것은 피할 수 없이 받아야만 하는 유산과 같은 것입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만들기와 ‘내것’ 만들기에 몰두해왔던 우리는 마침내 ‘나’ 그것이 중심축이 되어 우주 전체가 돌아간다고 믿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곧 윤회를 거듭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균형감각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이지요.
어느 아가씨가 애인에게 버림받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 일이 남들에게야 뭐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만, 그 아가씨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당사자와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불행을 당한 여자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는 사실상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녀는 물에 뛰어들어 죽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자기 일에 더 열심히 몰두하면서 한탄을 그만두든지, 시(詩)를 쓰든지 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 모두에게 언제건 들이닥칠 수 있는 개인적 ‘고’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몇 가지 양상을 들어봅시다.

1.통증과 질병
에픽테토스는 “죽음과 통증이 두려운 게 아니라, 바로 죽음과 통증에 대한 공포가 두렵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통증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삿일이 아닙니다. 통증은 보통 우리 몸의 어딘가에 고장이 났음을 알리는 위험표시라고 알고 있어, 상처나 발병 부위에서 통증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통증이란 자각의 문제이니까요. 고에 부딪쳤을 때 통증을 느끼는 것도 마음이고, 그것에 대해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우리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뿌리깊은 것이어서 우리는 그 정서의 본질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에 무어라고 이름을 붙이지도 못합니다. 나는 그것이 자기 연민과 분노와 두려움이 착잡하게 얽힌 것으로, 이 모두는 삼독심의 하나인 악의[瞋, dosa]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경험에서 알듯이 지독한 통증이 오면 우리의 정신은 극도로 비참해집니다. 통증이 감정과 직결되어있다는 논거를 확실히 입증해주는 예로서 모르핀 주사의 결과를 들 수 있습니다. ‘한 대 맞은’ 환자는 희한한 현상을 체험하곤 하는데, 분명히 아픔은 그대로 거기에 있는데도, 자신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모르핀이 뇌 속에서 감정을 통제하는 중추에 작용하여, 그것을 마비시켜 자기 연민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도록 만든 것입니다.
통증이란 것은 우리의 감정에 뿌리를 두었기에 이에 반응하는 방식이 무척이나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에도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드러눕고 마는 경우가 있고, 성격이 침착하고 신중한 사람은 그저 한번 비명을 지르던지, ‘젠장’하고 맙니다.
통증의 강도는 분명코 각 개인의 자각 정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집니다. 완성에 이른 아라한은 그 의식이 아픔과 쾌락을 초월해 있고, 감정 작용이 잘 통어되어 있어 양쪽을 다 느끼긴 하지만 괘념치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아픔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면 고통이 줄어들 수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어떤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으로 쭉 분석해보는 것은 일어나고 있는 감정에 마음이 쏠리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자연히 감정적인 반응도 약화될 것입니다. ‘총알을 깨물고 의연히 참는다’ 주11 는 전통적인 군인정신은 근거없는 말이 아닙니다. 총알에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은 통증을 느낄 새가 없을테니까요. 아마 실제로 그의 마음은 총알과 아픔 사이를 번개처럼 빠르게 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픔은 여전한데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반감된 것이겠지요.
병에 걸렸을 때도 이와 같은 객관적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병은 통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기능을 약화시킵니다. 병이 나면 수행하기도 어렵고, 의기소침해져서 남부끄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거사여, 그런 까닭에 ‘내 몸은 아플지라도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며 정진해야 합니다. 거사여, 그렇게 정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부처님의 말씀」 주12 132쪽) 그러므로 통증이나 질병에 대한 올바른 대응책은 영웅적인 인내와 용기라 하겠습니다.

 

2.집착
사물에 집착하는 것이 여간 재앙거리가 아니지만, 사람에 대한 집착은 그 모든 불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고를 빚어냅니다. 경전 가운데는 『애생경(愛生經)』이라는 중요한 경이 있는데,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를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중부』, 제87경,Ⅱ,292쪽). 우리는 인간적 사랑 속에 우리 최대의 행복이 있다고 믿으며 자랍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근심, 탄식, 괴로움, 슬픔이나 절망이란 것이 있어서 야단법석을 해야 하는 걸까요? 그 해답을 추구하다 보면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주13 중의 하나인 무상(無常,anicca)과 마주치게 됩니다. 사랑은 조건지워진 것으로,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이상적인 경우라하더라도 사랑은 갈애(喝愛, ta~nhaa) 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 그것을 움켜잡으려 합니다. 안정을 희구하며, 이해를 희구하며, 충족을 희구하며, 우리의 ‘근원적 고뇌’를 덜어볼까 희구하면서 말입니다. 일시적으로 그것들을 경험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다 푼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집착과 관련하여 우리가 유념해보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염라대왕이 애완동물, 자식, 친구, 연인을 앗아가버린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남아서 나이를 먹어갑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건 비극이지만 그나마 깨끗한 결말이랄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환멸로서 그것은 만남의 매력이 퇴색되어 갈 때 찾아듭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가 변해버리고 소원해졌음을 알아채고 그러다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황폐해집니다. 이것이 너무 심각해진 나머지 애정관계가 깨어져 버리고, 흔히 뒤에 남는 것이라곤 가슴앓이와 쓰라림 뿐이며, 대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마련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자기가 속았거나 기만당했다고 생각하여 미움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바보였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미워하고, 지금까지 사랑했던 대상에게 이러한 자기 혐오가 투사됩니다.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변질되고 소원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함께 하는 우정과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서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변화하는 주위 상황에 자기를 잘 적응시켜 적절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변모해 가기에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냉소주의자들은 “결국 마지막엔 고(苦)만 남는데 도대체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 자신의 업력에 이끌려 사랑이란 것을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겪어야 할 과정이니까요. 우리가 현생에서건 전생에서건 사랑의 극치와 심연을 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메따(자애, mett 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랑은 오온의 덩어리인 두 사람을 잠깐동안 빛내줄 뿐이지만 메따는 자기초월의 차원 높은 사랑으로 그 빛을 온 세상에 고루고루 비추어 줍니다. 경전에는 “언제 어디서 어떤 즐거움이 찾아지든 즐거움은 즐거움이다.”(『중부경』,Ⅱ,69쪽)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주로 고의 문제를 다루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즐거움을 금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감각세계를 인정하면서 보다 나은 즐거움인 법의 실천에서 오는 즐거움 쪽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물론 그 너머에는 ‘더욱 수승하고 절묘한’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초월상태에서 체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3.늙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엄밀히 말해서 모태에 드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한창 이가 나느라고 칭얼대는 아기가 겪는 아픔이 나이를 먹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듯이,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겪는 것도 또한 나이 먹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늙음의 고통이 가장 큽니다. 육체의 노쇠는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지만 한때 잘 생겼다는 말을 듣던 사람들에겐 평범하거나 못생겼던 사람들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누구나 늙으면 곤혹스러울 정도로 몸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젊었을 때의 속도를 절반도 못 내게 됩니다. 한가한 시간은 너무나 많아지는데 흥미거리는 날로 줄어들어 지루하고 권태롭기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늙는 건 딱 질색이야!”라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그래봐야 헛된 반발일 뿐 고통을 줄이기는커녕 더욱 심화시킬 따름입니다.
노년이란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는 시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는 오히려 향상의 기회가 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밤늦게 나다니거나, 자동차 여행을 떠나거나, 대륙횡단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정원손질조차도 이제는 잊어야만 합니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결국 물질적인 것으로, 윤회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혜롭게 군말없이 그런 즐거움들을 놓아버릴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묵은 습관들을 떨쳐버리고, 삶이란 단지 또 하나의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그 습관마저도 떨쳐낼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애착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아차려서 그 애착을 끊어야만 할 좋은 기회이며, 쌓아두기를 그만두고 부질없는 소유물들을 버리기 시작할 때인 것입니다.

4.죽음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죽음을 겪어볼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응 또한 해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 생각에 대해서나 겨우 반응을 보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십 년 후에나 일어날 지, 아니면 바로 이십 분 후에 닥칠 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고 죽음 저편을 생각해 볼 뿐입니다. 그 생각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그리고 공부여하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를 것입니다.

    땀흘려 일한 뒤의 휴식,
    폭풍의 격랑 지난 뒤의 포구,
    삶이 끝난 뒤의 죽음,
    참으로 평안하네.

참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요. ‘내’가 ‘나’이기를 원하고 있는 한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본질적으로 불안한 이 윤회의 세계에 도로 떨어져 들어올 것입니다. 축생계일지 지옥일지 천상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한 환생이 일어나기까지 이승의 시간개념으로는 얼마나 걸릴런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죽음과 다음 환생 사이에서 사람의 식은 영체라던가 갈애로 만들어진 몸이라던가를 걸치고 계속 기능을 하는 것인지? 중음상태에 대해서 티베트의 「사자의 서(書)」에서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만 빠알리 경전은 전혀 그런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론들은 ‘요설적, 논쟁적, 사변적인 견해들, 사변적 견해가 무성한 황무지’로 제쳐놓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견해들에는 상관을 하지 않으십니다.

 

“미래는 미래로 두어라.” 우리의 관심은 ‘여기’, ‘지금’입니다. 죽음이 악인 것은 지금 우리가 사람 몸을 받아 모처럼 법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데, 그것을 박탈해 버리기에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절박감을 키워서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주14

 

사람은 희한하게도 나이 70이 되어서도 오히려 17세때보다도 죽음이 더 멀리 있는 듯이 느낍니다. 노인이 되면 그동안 살면서 몸에 익힌 습관들이 너무도 질기게 달라붙어 있어서 전에 하던 습관말고는 달리 어떤 것을 시도할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됩니다. 노인들은 지금껏 자신에게 익숙해진 질서가 뒤흔들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그런 그들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온 삶의 조건들을 떼어내갑니다.
그들은 바로 이런 것이 싫습니다. 이 ‘나’라는 것이 여태까지 입고 있던 의상이 벗겨지면 아무것도 없이 벌거벗은 상태로 느껴지게 될테니까요. 일반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의 천국이 별로 매력이 없는데 그것은 천국이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많은 젊은이들은 죽음에 대해서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반응합니다. “죽음은 위대한 모험이야.” 이것은 젊은이들, 마음이 젊은 사람들의 영웅심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종교개혁이 낳은 위대한 학자 에라스무스는 ‘바람직하게 죽는 법, 어떻게 죽음을 잘 맞이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문을 쓴 바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임종시의 회개나 교회의 거룩한 의식들은 사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 죽기 위해서 인간은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전한 신조라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보면 간절한 마음으로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고통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니라.
정말로 이것이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즉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니라.”
정념(마음챙김)에 숙달된 수행자들은, 그 마음이 아직도 ‘술취한 원숭이’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여타의 우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苦)를 대합니다. 우리의 개인적 고통들은 우리 주변에서 모기떼처럼 악착같이 앵앵거리고 맴돕니다. 만약 고통이 격심하면 우리의 정념이 자기 연민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진흙탕에 빠져 엉망진창이 되는 꼴입니다.
균형감각은 사라지고, 장래에 일어날 즐겁지 않은 사태를 미리 상상함으로써 스스로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될 때에는 잠시 멈추어서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응하는 반응을(그 반응은 대체로 뒤죽박죽이지만) 가려내어, 그것이 건전한 반응이든 아니든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봅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정신상태를 대상으로 마음챙김 수행을 하는 것이 되고, 정념 수행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유익한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비로소 고(苦)로부터 떨어져 나와 진정 가치있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해

1) 깡디드: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볼테르의 대표작.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낙천주의를 풍자한 단편소설의 제목이며 주인공 이름.

2) 법륜 팔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방법」 참조.

3) 톱의 비유: 비록 도둑떼가 달려들어 톱으로 팔다리를 자르고 악행을 저지를지라도 그들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태연히 견디며 오히려 그들을 감싸안는 자비의 마음을 내야 할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해주신 유명한 설법. 보리수 잎 構堞「미래의 종교, 불교」참조.

4) muditaa: 사무량심의 희. 더불어 기뻐함. 남의 행복을 자기의 것처럼 기뻐하다. 보리수 잎 模뜀「사무량심」, 32쪽 참조.

5) 스토아 학파: 고대 그리스 罐단시대의 철학.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 에픽테토스(Epiktetos 55년경~135년경): 스토아 학파 후기의 로마 철학자.

7) 「구약성서」 욥기 1장 21절.

8) 마음의 때(번뇌, aasavas): 수행으로 없애야 할 네 가지 마음의 때, 욕루(欲漏), 유루(有漏), 견루(見漏), 무명루(無明漏). 보리수 잎 복 일곱 「경전에 나타난 비유담 몇 토막」, 12쪽의 욕폭류, 유폭류, 견폭류, 무명폭류 참조.

9) 포우프(A.Pope 1688∼1744): 영국의 신고전주의 시대 시인, 풍자가. 몬테규(Lady Mary Wortley Montagu 1689∼1762): 당시 영국을 풍미했던 다재다능한 여성작가. 수필가, 여권주의자, 여행가, 기인으로 알려짐.

10) 피카딜리: 런던의 번화가.

11) 서양에서 마취기술이 발달되기 전 부상당한 군인들을 수술할 때,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물렁한 납총알을 입에 물렸던 관행에서 나온 표현.

12) F.L.Woodward,Some Sayings Of The Buddha; According To The Paali Cannon,(Oxford University Press, 1973).

13) 삼법인(三法印): 무상(無常,anicca) 고(苦,dukkha) 무아(無我,anattaa). 법륜 넷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참조.

14) 사념수행(死念修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