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방(1)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소리없는 아우성 2013. 3. 4. 13:26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지은이: Walpola Rahula

옮긴이: 이 승 훈 (경서원刊, 1995)
  "what the Buddha taught" (Gordon Fraser Gallery, 1959)

                     <앞 뱀발(蛇足)>

  이제부터 연제할 내용은  라훌라 스님의 "what the  Buddha
taught"를 제가 번역한  책입니다. 그 일부(경)는 이미  경전
란에 실어놓았습니다.
  위에 지루하게 긴  우리말 제목은 이 책의 내용 중에  나오
는 말로서 아상가(Asanga;無著)의 말입니다. 그  의미는 불교
에서 말하는 無我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원고 화일을 가지고서  여기에 맞도록 편집을 하려니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다.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의 로마자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수 많은 원주와  역주를 모
두 살릴 길이 도저히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만
살리고 대부분은 포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내용의 일
부가 불가피하게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만큼은
모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이 책의 주인공,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
한 호칭을 그냥 "부처"(님자도 안붙이고)라 한 것에  대해 이
곳의 신심 깊은 불자님들이 거부감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이 책은  학술적 성격이 강한 입문서이고, 저는 이  책을
불자보다는 불자가 아닌  사람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
냥 "부처"라 했습니다. "불타"니, "붓다"니  하는 말보다는
완전히 우리말로  정착된 "부처"가 더 좋을 것 같아 좀  어색
하더라도 "부처"를 고집하였습니다.
  번역이란 것이 원저자하고  경지가 좀 비슷해야 제대로  할
수 있을 터인데,  안돼는 근기나마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려
용을 썼습니다. 부디  제 작은 원력이 뗏목의 한  조각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뱀발을 마칩니다.

  천불동 법우님 惠存
  불기 2539년 7월
  이 승훈 합장


                       <옮긴이 머리말>

  요즘처럼 "나, 나, 나는  나"해대는 세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대
중매체는 개성 어쩌구  하면서 무슨 세대니 무슨  족이니 하는 이름을
지어 붙이는데 골몰하고  있다. 그처럼 소비행태에만 관계해서 사람을
구분하는 장사속에 휩쓸리는 것이 몰개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생각의 역사에서 보건데  참다운 개성은 오히려 '나'를 내세우
지 않을 때 얻어졌다.  환경과 호흡하며 적응하는 가운데 꼭맞는 개성
이 태어난다. 산중에서 그대로 산의 일부가 되어, 오히려 산의 아름다
움을 더하는 산사山寺에서 보듯이.
  이제 번지러운 광고와  포장 뒤에서 하늘도 땅도  사람도 야위어 간
다. 건강한  삶의 마당이란 사회 안에서의  이기적인 자아뿐만이 아니
라, 자연에 대한 인류의  오만한 실존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겠는가.
세상은 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며, 인류만으로 지구의 생태계가 구성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사실 우리 동양 어디서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라훌라 스님은 이 책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다른 무엇보다
도 내가 없다는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서 가르침은 뗏목과 같
다고 한다. 뗏목은 강을 건너가기 위한 것이지 이고지고 다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와 같아 그 중에 어떤
것이 소용없어진다면 마땅히 버려야 한다. 그러나 내가 없다는 가르침
은 표현과 그 실천 방법만이 달라져 왔을 뿐 불교사 전체에 계속된 불
교철학의 핵심이다.
  지은이의 나라 스리랑카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신선함이 이어지
는 땅이다. 라훌라 스님은 그 신선함을 우리에게 전한다. 여러 떠도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는 근거를 밝혀 새로운 생명으로 설법되고 있다.
그 모든 생명력은 그 나라의 전통에서 자연히 정통하게 된 빨리Pali원
전과, 그리고 지은이 자신의 깨달음과 실천에서 나온 것이다.
  너무 오랜동안 한국의 불자들은 부처님을 잊고서 조사祖師들에 메어
있었다. 조사의  말이라하여 금구金口가 아님은  아니로되, 먹기 좋게
다듬어 놓은 음식일 수록 쉬이 상하는 법이다. 이제 바른 양식을 구하
려거든 남이 차려놓은 때아닌 공양을 탐하여 저혼자 단 한술에 배부르
리라 미혹될 것이  아니라, 본래 스승께 물어  스스로 밭을 일굴 일이
다. 무엇보다도 처음에 이  땅을 손수 일구었던 선배들에게서 그 신선
함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월뽈라  라훌라는 어떤 사람인가? 라훌라의 다른 저
서에서 노오드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의 비교종교학자 에드먼
드 F. 페리Edmund F.  Perry 교수(목사)는 라훌라를 다음과 같이 소개
한다.
    라훌라는 불교의 전통에 따라 수행의 길을 가는 승려로서 자기 삶
  을 일구어 왔다. 라훌라 비구가 실론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시절에
  D.B.단나빨라Dhannapala의 《빛나는 인도인》(Eminent Indians)에는
  "학자이며, 조직가, 계획자, 전도자, 논객이며, 작가", 그리고 식민
  지의 거물들에 유린당한  민중을 위한 투사라고 성격지워졌다. 그는
  "(자기네) 절간에만  들어앉아서, 선거철엔  정치꾼들에게 이용이나
  당하며 ..... 현대 교육을 거부하고, 민중의 삶과 단절해 버린" 중
  들을 해탈시키기 위해  학자로서의 경력을 중단해야했다. 그는 영향
  력 있는 절 '비디알랑까라 삐리베나Vidyalankara Privena'에서 자기
  위치를 확립하였다. 그렇게해서 몇 주안에 그와 같이 반동 정치가들
  을 비난하는 수천 스님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1940년대에 굶주린 민중에게 용기를 주었다. 20년후 그는 실
  론의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이끌었다. 그 기관은 남녀공학의 종합
  대학으로서 실론의 모든 아이들에게 동등한 교육기회가 주어져야 한
  다는 그의 선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대학 학생들의 다수가 20년
  전, 또는 그 이전에 그가 고취시킨 그 민중의 자식들이었다. 라훌라
  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실론의 사회윤리와 경제적 자립에 대한 희망
  을 심어놓았다. 단나빨라가  《빛나는 인도인》에서 전한 바로는 불
  교의 땅 실론이 "친 라훌라와 반 라훌라"의 양 진영으로 갈라졌다는
  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그러하다. 라훌라가 이슈가 되어 그
  런 것이 아니라, 자유와  교육 그리고 경제적 보장이 라훌라의 이름
  과 동의어로서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 실론의 시골에서 그리고 수도
  콜롬보에서, 일자무식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인텔리겐챠들 사이
  에서 라훌라의 이름은 존경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단, 실론의 정
  치가들 중에 그를 무서워하고 미워하는 이기적인 자, 부정한 자, 부
  패한 자들은 빼고서 그러하다.
    이제 그는 서양의 학자들을  위해 불교를 번역하고 해석하는데 정
  신력을 집중하고 있다.  다른 시절에 조국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으로 성격지워지는  것과 똑같은 충실함을 지적 성실
  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서양 학자들은 그의 우정이 따뜻하고, 유쾌
  하며, 어디에도 메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때로는 굽히지 않
  는 주장에  당황하기도 한다. 그 주장들은  정확하고 맑은 생각에서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비구의 유산 중에 가장 훌륭한 것
  을 보여주고 있다.
  (The Heritage of the Bhikkhu,  Grove Press, Inc., New York, 197
  4, pp.xiii~xv.)
  뽈 드미에뷔이 교수의 "이끄는  글"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의 학자로
서의 경력은 승의 대소를  떠나서 화쟁의 통불교에 이른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에게서 원효와  만해를 본다. 우리와 동시대의 외국인에게서
다시 옛 선배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한 스승의 제자이
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스리랑카가 '소승불교' 국가이고 라훌라도 소승법을 따
르는 승려라 할지  모른다. 그러면 라훌라의 경력에,  그리고 이 책에
이른바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한다"는 소승의 모습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아는 바로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그런 것은 없다. 소승은 지
역이 달라서, 교리를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서 소승일 수 없다. 소승은
실천이 달라서 소승인 것이다. 부도덕한 정권의 도덕성을 대신 포장해
주고, 보응의 감언으로 외형만의 불사를 일으키며, 최상승이라 자부하
여 통하지 않는 소리를  법어라하는 것이 바로 소승의 전형일 것이다.
일찌기 원효라는 우리의 옛 선배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극히 공평한
까닭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함께 이루어지며, 그 사사로움이 없는 까닭
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하나되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하나되기 때문에
참다운 것과 속세의 것이 평등'(有至公故 動靜隨成 無其私故 染淨斯融
染淨融故 眞俗平等.《大乘起信論疏別記》)한 것이 대승의 정신이다.
그래서 어둡고 더러운  데서 봉사하는 것을 밝고  아름다운 도를 닦는
것과 다르지 않게 여기고, 사회의 부조리를 방관하지 않으며, 맡은 분
야를 모두 다 귀중하게 여겨 부처님의 님인 중생을 이롭게하는 일이
되도록 헌신하여야 대승일 수  있다. 소승이란 종파가 아니라 여러 좋
은 가르침들이 왜곡되어 편벽고루하고 이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
다. 비단 종교에서 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 전체에서 게으른 소승의 모
습을 제대로 보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처음 일어난  마음으로 돌아가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라훌라 스님이  현대어로 전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원음圓音은
가르침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바르게 알려는 사람에게,
그리고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그 신선함에 돌아가는
뗏목이 되리라 믿는다.
  처음엔 이것이 쉬운 책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갈수록 어렵기만 하였
다. 이 책은 어학 실력으로  번역할 것이 아니었고 다만, 깨달음이 필
요하였다. 지은이는 독자를 위하여 지극한 뜻을 쉬운말에 담아내었다.
그와 같은 정도로 쉽고 아름답게 우리말로 재현해 내려는 시도는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 수준에서 무모한 것이었다.
  이 책은 이미  오래전에 부분이 번역되어 출판된  바 있다. 그 뒤에
다른 사람의 번역판은 완역이기는  하나 앞선 번역판의 여러 오역들이
그대로 실려있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운 번역
을 내게 되었다.
  이 책을 옮기는데 있어서 정말 많은 은혜를 입었다. 우선, 심적, 물
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작업을 채근해주신 홍기석선배님의 고마움
을 잊지 못한다. 또한 자료를 열람하게 해 주시고 지도해주신 홍성복
법사님께 감사드린다. 자료를 참조하는데 도움을 주신 동방불교대학의
박찬연, 최보양씨, 동국대학교의  박상관선생님, 김호성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그리고 조판의 견본을 출력해주신 세봉컴퓨터서비스의 이경종
선배님과 직원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외 다른 여러분께 일일
이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지 못하여 송구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오
래끄는 긴 작업을 별  말씀없이 기다려주시어 책을 내주신 이규택사장
님께 감사드린다.

     불기 2538(1994)년 12월 강변에서
     옮긴이 합장.

                       <이끄는 글>
                                  뽈 드미에뷔이 Paul  Demieville
                                     프랑스 학술원 회원
                                     빠리대학(소르본느) 교수
                                     빠리고등연구소 불교학 주임

  여기 불교에 대한 하나의 해설서가 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적임자
이며 깨달음을 얻은 불교 대표자의 한 사람이 완전히 현대적 정신으로
저술한 것이다. 라훌라 박사(스님)는 실론에서 불교 승려로서의 전통
적인 수련과 교육을 받았으며, 그 섬의 한 지도적인 절(삐리베나Piriv
ena)에서 영향력있는 위치에 있었다. 실론은  아쇼카Asoka왕의 시대부
터 부처의 진리(dhamma;法)가 번창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그 모든 생명
력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이와 같이 오랜 전통 속에서 성장하다가
모든 전통들에  이의가 제기되는 이 시대에,  국제적인 과학적 학문의
정신과 방법에 대면해보기로 결심하였다. 스님은 실론 대학에 입학하
였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나서 실론 불교사에 대한 뛰
어난 학구적 논문으로  실론대학Ceylon University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캘커타대학University of Calcutta에서 탁월한 교수들과
연구하였고 대승불교에  정통한 학자들을 접하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티베트로부터 극동에 이르는  지역을 점하는 불교이다. 스님은 자신의
화쟁和諍사상(oecumenism)을 확대시키려 티베트역 경전(西藏本)과 한
역漢譯경전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고, 우리에게 영광되게도 아상가Asa
nga(無著)에 대한 연구를  준비하러 파리대학(소르본느Sorbonne)에 왔
다. 아상가는 유명한 대승 철학자로서 산스크리트어 원본의 주요 저작
은 유실되고 티베트역과 한역만을  읽어볼 수 있다. 라훌라 박사가 노
란색 가사架裟를 걸치고, 우리와 함께 생활한지도 어언 8년이 되었다.
서양의 대기를 호흡하며 어쩌면  낡고 잘못되었는지도 모를 우리 방식
의 시각으로 자기 종교에 대한 보편적 성찰을 모색하며 지내고 있다.
  스님은 이 책을 서양의 대중에게 소개해 달라고 내게 정중히 부탁하
였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어 본의 "전해 옴"(Agama;阿含)과 빨리어 본
의 "모음집"(니까야)2이라는 가장 오래된 경전에 보이는 불교 교리의
기초 원리가 모든 이에게 전해지도록, 명석하게 풀이하고 있다. 이 경
전들에 있어서 비할 바 없는  지식을 보유한 라훌라 박사는 그 경전들
을 항시, 그리고 거의 그것만을 인용하고 있다. 그 경전들의 권위는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학파가 적의없이 받아들이며, 문자 너머의
정신을 더 훌륭히  해석해내려는 의도 외에는 그  누구도 이 경전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불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 광대한 지역으로 팽창함에
따라 해석은 변화하여왔고 진리(法)는  하나가 아닌 여러 모습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라훌라 박사가 소개한 불교의 모습-휴머니즘
적이고, 이성적이며, 어떤 점에서는 현학적이고, 다른 곳에서는 전도
주의적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거의 과학적인-은 방대한 원전상의
문헌적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스님은 오직 문헌적 증거들에 의해서
만 말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인용문들은 언제나 지나치리만치 세심한 태도로 정확히 번역하였다.
거기에 덧붙인 설명은  간단명료하며, 직설적이다. 그러면서도 학자연
하는 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 중에 대승의 교리 전부를 빨리
원전에서 재발견 해내려 한 것 같은, 몇몇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
다. 그러나 원전들에 대한 스님의 완숙함은 빨리원전들을 새로이 조명
하도록 만든다. 스님은 자신을 현대인이라 부르지만, 여기저기서 제안
된 것들과 비교하여 주장하는 것을 삼가하고 있다. 현대의 사상적 조
류가 만든 것들, 즉 사회주의, 무신론,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같은 것
들과 비교하여 주장하는 것을  삼가고 있다. 진정으로 학구적인 이 작
품에서 스님이 독자에게 소박한  것으로써 풍요롭게 선물한 것은 현대
성, 즉 교리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진가를 헤아린 것이다.


                       <지은이 머리말>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불교가 점차 주목받고 있다. 수많은 단체와 연
구 동아리가 생겨났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책이 상당수 출판되
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대부분이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다른 종교에
서 비롯된 잘못된 가정으로 연구한 사람이 썼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
이다. 그런 책은 반드시 주제를 틀리게 해석하거나, 잘못 설명하고 있
다. 최근에 불교에 대한 책을 쓴 어떤 비교종교학 교수는 부처님의 헌
신적인 시자侍者인 아난다Ananda(阿難)가 비구比丘(bhikkhu)라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난다를  평신도라고 생각했다! 이런 책으로 전
파된 불교 지식이 독자에게 인상지워져 남아있을 수 있다.
  우선, 나는 이 작은 책에서 불교에 대해 배운 바는 없지만 부처님이
정말로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교양 있고 지적인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려고 마음먹었다. 독자들을 위하여 간략한 기술을
목적으로 삼았고, 가능한한  직접적이고 간단하게, 부처님께서 실제
로 하신 말씀을 충실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 말씀들은
'삼장三藏'(Tipitaka)이라는 빨리원전에 보이는 데, 학자들은 보편
적으로 '삼장'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
록으로 인정한다. 여기에 사용한 자료와 인용한 문구는 이들 원전에
서 직접 취한 것이다.  또한 몇 군데에서는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도
인용하였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며, 연구를 보
다 진척시켜보려는 독자들도 염두에 두게 되었다. 그래서 중요 용어의
대부분에 빨리 상당어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각주에 원전에서의 출
처를, 그리고 선정된 참고 서적을 제공하였다.
  내 작업에는  어려움이 여러 가지 였다.  시종일관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방향을 조정하려고  애썼고, 원전과 부처님의 설법형식을 흠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현대의 영어권 독자들이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고대의 경전들이 마음 속에서 맴
돌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온 부처님
설법의 한 부분인 동의어와 반복을 신중히 유지시켰다. 그것은 독자들
에게 스승이 구사한 형식에 대한  개념을 어느 정도 갖게 하기 위해서
이다. 할 수 있는 한 원전과의 밀착을 유지했으며, 내 번역을 쉽고 읽
기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단순함의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하면서도 부처님이
전개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특별한  의미, 그 개념을 취하는 데에는 어
려운 점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부처님이 가르친 것" (What the Bud
dha taught)이라고  선택했을 때 의미를  왜곡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서, 쉽게 이해시켜서 만족을 주려고 하여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이 사
용한 형식까지도 적어 넣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 느꼈다.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거의 모든 것을 이 책에서 논하였다. 그것들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 "거룩한 여덟 길"(팔정도八正道;
Noble Eightfold Path),  "다섯 가지 모임"(오온五蘊; Five Aggregate
s), 업業(Karma), "다시 태어남"(Rebirth), "조건 따라 생겨남"(Patic
casamuppada; 緣起; Conditioned Genesis), "영혼이 없다는 교리"(Ana
tta;無我; the doctrin of No-Soul), "마음을 일깨우는 바탕"(Satipat
thana; 念處;  the Setting-up of Mindfulness)이다.  그 논의 중에는
당연히 서양 독자에게 낯선 논의상의 표현들이 있을 것이다. 독자가
좋다면 먼저 첫 가름을 읽고  나서 다섯째, 일곱째, 여덟째 가름을 읽
어 일반적인  개념이 보다 명확하고 생생하게  된 다음에, 되돌아와서
둘째, 셋째, 넷째, 여섯째 가름의 순서로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상좌
부上座部(Theravada)와 대승불교大乘佛敎(Mahayana) 모두가 사상적 체
계의 근본으로 받아들이는 주제를  다루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
한 책을 쓴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상좌부'라는 용어―'소승小乘'(Hinayana), 즉  "작은 수레"라는 용
어는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는 "어르신네
(theras;長老)의 학파"라고  옮겨질 수 있고,  '대승大乘'은 〔중생을
실어 나르기 위한〕"큰 수레"라고 옮겨질 수 있다. 그 둘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불교의 양대  산맥이라고 알려져있다. 정통 불교라고 여겨지
는 상좌부는 스리랑카,  미얀마〔옛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방글라데시의 치타공Chittagong에서 모셔진다. 상대적으로 나중에 발
달된 대승불교는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골 등지에서 모셔진다. 이들
두 학파 사이에는 주로 몇몇  신앙과 수행, 의식에 있어 다소 다른 점
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논의한 것 같은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에 있어서는 상좌부와 대승불교 모두 다 적의 없이 동의한다.
  이제 내게는 E.F.C. 루도윅Lodowyk 교수께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일만
남았다. 당신은 사실상 이 책을 쓰도록 권유하신 분이다. 온갖 도움을
주시고, 관심을 가지고 여러 제안을 해주신 데 대해, 그리고 원고를
통독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원고를 통독하고 귀중한 제안을 해준
마리안너 묀Marianne Mohn 양께도 매우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
으로 파리의 내 스승이신  뽈 드미에뷔이 교수께, 친절히 이끄는 글을
써주신 은혜에 크게 감사드린다.

     1958년 7월, 파리.
     월뽈라 라훌라 Walpola Lahula


                            마니Mani에게
       '진리를 선물하는 것은 다른 어떤 선물보다도 뛰어나다.'
                   Sabbadanam dhammadanam jinati

  부처라는 이

  부처라는  이는  이름이  '싯닷타Siddhattha'(산.Siddhartha), 성姓은
'고따마Gotama'(산.Gautama)였다. 그는 기원전 6세기에 북인도에서 살았
다.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淨飯王)는 사꺄Sakya(산.Sakya;釋迦)족
왕국(지금의 네팔)의 통치자였다.  어머니는 마야Maya 왕비였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열 여섯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다. 신부는 아름답고 헌신
적인 어린 공주 야소다라Yasodhara였다. 젊은 왕자는 자기 궁전에서 마
음껏 갖은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다 갑자기 삶의 실상과 인간의 고
통에 직면하게 되어 그 해답―누구나 겪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스물 아홉 살에 유일한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나
자마자 궁궐을 떠나, 이 해답을 찾으려는 고행자가 되었다.
  6년 동안 고행자  고따마는 갠지스Ganges강변을 돌아다니며 유명한 종
교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사상체계와 방법을 연구하고 따랐으며, 스
스로 혹독한 금욕수련에 헌신하였다. 그런 것들은 고따마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전통적인 종교와 그  종교들의 방법을 모두 그만두고
제 스스로의 길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서른다섯 살의 어느 날 저녁, 붓
다가야Buddha-Gaya(오늘날 비하르Bihar 주의 가야Gaya 부근)의 네란자라
Neranjara강(尼連禪河) 둑에 있는  한 나무아래서 좌선坐禪하다가 '깨달
음'을 얻었다.(그 나무는 이후 보리수, 즉 "지혜의 나무"로 알려지게 된
다.)[주1] 그후에 고따마는  부처, 즉 "깨달은 이"(覺者)로 알려지게 되
었다.
  깨달은 뒤에 고따마 부처는 바라나시Varanasi(Benares) 근처의 이시빠
따나Isipathana(오늘날의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사슴공원"(鹿野院)
에서 옛 동료인 "다섯 고행자"(五比丘)에게 첫 설법을 하였다. 그날로부
터 45년 동안  모든 계층의 남녀―왕과 농부, 바라문과  불가촉천민2, 부
자와 거지, 성자聖者와 도둑―그들  사이에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가르
쳤다. 카스트Caste나 사회적  소속에 대해서는 아무런 차별을 하지 않았
으며, 그가 가르친  "길"은 배우고 따를 준비가  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다.
  여든 살에 부처는 꾸시나라Kusinara(현재 인도의 웃따르 쁘라데쉬Utta
r Pradesh 주)에서 돌아갔다.
  오늘날 불교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티베트, 중국, 일본, 몽골,  한국, 타이완, 그리고 인도의 일부와, 파키
스탄, 네팔, 그리고 또한  옛 소련지역의 일부에 보인다. 전세계에 불교
인구는 5억에 이른다.

[주1] <역주>  우리는 '보리수菩提樹'(Bodhi-;Bo-tree)라는 나무 이름을
    아주 혼동 되이 쓰고 있다. 우리가 보리수라 부르는 나무는 세 종류
    이며 그 셋은 전혀  다른 종류이다. 여기 등장한 보리수는 뽕나무과
    의 인도  원산으로서 구분지어서 '인도보리수'(학명:Ficus religios
    a)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온실에서 자란다. 그 다음 빨간 열매를
    따먹는 보리수(Elaeagnus  unbellatus)는 보리수나무과의 우리 나라
    자생의 나무이다. 마지막으로 흔히 사찰에서 볼 수 있으며, 그 열매
    로 염주를 만드는  보리수(Tilia miqueliana)는 중국 원산의 피나무
    과이다. 슈베르트Schubert,F.의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가 바로 이  나무(linden tree)이다. 슈베르트의 '보리수'나 보리자
    염주를 붓다가야의 보리수와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1

  부처는 (만약  그를 대중적 의미에서의  종교의 창시자라 불러도 된다
면) 종교의 창시자들 중에서 순수하고 소박하게,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
길 바라지 않은 유일한 스승이었다. 다른 스승들은 신神이거나, 사람 모
양을 한 신의  화신이거나, 신에게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다. 부처
는 다만  사람이었고, 무슨 신이나  외계의 권능으로부터 성령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깨달음과 이룸, 성취를 인간적인 노력과 지성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람은, 아니 오로지 사람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
바라고 노력한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사람이 제 스스로
지니고 있다. 우리는 부처를 "아주 뛰어난 이"(殊勝한 이)라 부를 수 있
다. 그의  '사람됨'은 너무나 완벽해서  후대의 대중적 종파에서는 거의
'초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불교에 의하면 사람의  지위는 최상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주인이라서
그 사람의 운명을 심판할 윗 존재나 권능은 없다.
  '자기가 자기자신의 피난처이다.  어찌 다른 누가 피난처일 수 있겠는
가?'라고 부처는 말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자신을 피난처로 삼아
라', 그리고 다른 이에게서 피난처를 구하거나 도움을 받으려 하지 말라
고 훈계하였다.[주1] 부처는  개개인이 스스로를 개발시키고, 자기 해방
에 힘쓰라고 가르쳐 고취시켰다. 사람에겐 스스로 노력하고 지성을 닦아
모든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그대의
일은 그대가  해야되느니. 여래[주2]는 다만  길을 가르쳐 줄 뿐'이라고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부처가 '구원자'라 불려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해
방, 즉  열반涅槃의 길을 발견하여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할 뿐이
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제 스스로 쫓아가야만 한다.

[주1]<역주> 여기서  '피난처'(refuge)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게 느껴질
    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의미이다. 도참
    圖讖에서 말하는  승지勝地가 바로 그것이다. 《정감록鄭鑑錄》같은
    술서에서 말하듯, 난세를  피하여 보신保身할 수 있는 곳이 '승지',
    즉 피난처이다. 그러나 앞으로 여섯째 가름에서 자세히 보게 되겠지
    만, 부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는 피난처를 소박한 자신
    에게서 구할 따름이고,  그외에 덧붙여 종교적 의미로서 부처(佛)와
    가르침(法)과 동아리(僧)에서 피난처를 구할 따름이다.
[주2] 여래如來(Tathagata)의  문자적 의미는  '진리에 도달한  이', 즉
    '진리를 발견한 이'이다. 이것은 부처가 자신을 가리킬 때나 일반적
    으로 부처를 가리킬 때 쓰이는 용어이다.

  부처가 제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한  것은 바로 이, 개인이 책임져야 한
다는 원칙에서다.《마하빠리닙바나-경Mahaparinibbana-sutta》(D.16;{遊
行經},長阿含2)에서 부처는  결코 승가(승려들의 동아리)[주3]를 다스리
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승가가 자기에게 의존하는 것도 바라지 않
았다고 말한다. 자기  가르침에는 비밀스런 교리가 없다고 말하며, 아무
것도 '스승의  움켜쥔 주먹'(acariya-mutthi;師拳)속에  감추지 않았고,
또는 다른 말로 '소매속에' 들어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주3] 승가僧家(Sangha)의 뜻은 '공동체'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 용어
    는 승려 조직체인  '불교 승려들의 동아리'를 가리킨다. 부처(Buddh
    a;佛), 가르침(Dhamma;法), 동아리(승가;僧)는 "세 의지처"(Tisaran
    a;三歸依處)나 "세  보물"(삼보三寶;빨.Tiratana,산.Triratna)로 알
    려져 있다.
    <역주> 대승적 의미에서는 승가가 출가승려들만이 아니라 부처의 가
    르침에 따르는 사람 모두의 동아리를 뜻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즉
    비구比丘(bhikkhu;남자 승려), 비구니比丘尼(bhikkhuni;여자 승려),
    우바새偶婆塞(upasaka;남자 평신도), 우바이偶婆夷(upasika;여자 평
    신도)가 하나된 동아리(和合衆)를 승가라고 한다.

  부처가 허용한 사고의 자유는 종교사宗敎史적으로 다른 종교에서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부처에 의하면, 자유는 필수불가결 하다. 인간의 해
방은 진리를  제 스스로 깨닫는데 좌우될  뿐이지 어떤 신神이나 외계의
권능이 순종적인 선행에다  보수를 주는 식으로 자비로운 은총을 내려주
는데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은 부처가 꼬살라Kosala 왕국의 께사뿟따Kesaputta라는 작은 읍에
갔었다. 이 읍의 주민들은 깔라마Kalama라는 성씨姓氏로 알려져 있었다.
부처가 자기네 읍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손님으로 맞아 경의를 표하
고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 께사뿟따에 찾아온 사문과 바라문[주4]이 몇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교리만을 설법하고 교화시킵니다. 그리고 남의
교리는 깔보고 헐뜯고 냉소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문과 바라문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역시 자기네 교리만을 설법하고 교화시키
고 남의 교리는 깔보고 헐뜯고 냉소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저희들은 도
대체 누가 바른말을 하는  존경스런 사문과 바라문인지, 그리고 누가 틀
린 말을 하는지 몰라서 항상 의혹과 혼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4]<역주> 여기서  바라문婆羅門(Brahmana)은 카스트에서 바라문 계급
    의 성직자, 사문沙門(recluse)은  그 밖에 계급의 출가자이다. 사문
    은 나중에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출가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부처는 종교사에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이런 충고를 해 주었다.
  '예,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의혹에 사로잡혀 있는 것, 그대들이 혼
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의심스러운 것에서 의심이 일어나기 마
련입니다. 자아, 깔라마들이여,  전해들은 이야기나 관습이나 풍문에 이
끌리지 마십시오. 여러 종교들의 성경이 갖는 권위에 이끌리지 마시오.
논리나 추론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피상적인 사고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사변적인 견해를 즐기는 것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그럴 듯한 것에도 이
끌리지 마시오. '이것이야말로 우리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것이 건전치 못하다(akusala;
不善), 그릇되다, 나쁘다고 알게 된다면 그것을 버리시오. ..... 그리고
그대들이 어떤 것이 건전하고(kusala;善) 좋은 것을 알게 된다면 받아들
이고 따르도록 하십시오.'[주5]

[주5]<역주> 여기에서 선善한  것은 받아들이고 악惡한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고  건전한 것(善)은 받아들이고 건전치 않은 것
    (不善)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
    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2

  부처는 한층 더 나아갔다. 심지어 제자들이 여래(부처) 자신까지도 조
사해 보아야 하며, 그래서 제자가 그가 따르는 스승의 진정한 가치를 완
전히 확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의심(vicikiccha;疑)은 "다섯 장애"의 하나이
다. "다섯 장애"[각주1]란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정신적 진보를 하는
데  있어서 (또는  어떤 진보에  있어서도)장애가 된다.  그러나 의심은
'죄'가 아니다. 불교에는 믿음이라는 계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불
교에 '죄'라는 것 자체가  없다. 몇몇 종교에서 가르치는 원죄같은 것이
불교에는 없다. 모든  해악의 뿌리는 무명[각주2]과 그릇된 견해(miccha
ditthi;邪見)이다. 의혹, 혼란, 흔들림이 있는 한 진보가 가능치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해거나 명확히 보지 않은 이상,
의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진일보하
기 위해선  의심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심을 제거하려는
이는 명확히 보아야 한다.

[각주1] "다섯  장애"(nivarana;五蓋)는 ⑴감각적인 애욕(貪慾), ⑵악의
    (瞋애), ⑶정신적,  육체적 마비와  권태(昏沈睡眠), ⑷근심과 걱정
    (悼擧惡作), ⑸의심(疑惑)이다.
[각주2] <역주> 무명無明(avijja)이라는 불교용어는 더없이 중요한 의미
    를 담고  있으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지은이가
    'ignorance'라고 영역한 것과  같이 우선 '모르다'라는 의미가 있지
    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무명은 모든 삶과 존재가 계속되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명을 단순히 '무지無
    知'라고 옮겨서는  그 의미가 너무  빈약해진다. 이 번역에서는 '無
    明'이라는 한역어를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의심이 없어야만  한다든지, 믿어야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
다. 그냥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고 본다는 것을 뜻하지 않
는다. 한 학생이 수학문제를 공부할 때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를 경우가
닥친다. 그 학생이  미심쩍어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곳에서 그러하다. 그
학생이 이  의혹을 가지고 있는 이상,  풀어나갈 수 없다. 풀어나가기를
바란다면 이 의혹을 해결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 의혹을 해결하는 길
이 있기 마련이다.  그냥 '믿습니다'라던가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말해서는 문제가  풀릴 리 없다. 억지로  믿고, 이해도 못하면서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지 정신적이거나 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는 항상 의심을 쫓아 버리는 일에 열심이었다. 심지어 죽기 몇 분
전까지도 제자들에게 자기  가르침에 의심나는 데가 있으면 나중에 의심
을 씻어낼 수 없었다고 후회하지 말고 질문하라고 몇 번씩이나 당부하였
다. 그러나  제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말한  것은 감동적이었다.
'만약 너희들이  스승이 어려워서 질문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은
친구에게 알리도록 하여라.'(즉,  질문할 것이 있는 사람이 친구에게 말
하여, 친구가 그를 위해 대신 질문토록 하라.)

<역주> 한역경전에는 '너희가 만일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감히 묻지 못하
    겠으면 마땅히  친한 벗을 통해  빨리 와서 물으라'(汝等若自참愧不
    敢問者 當因知識速來諮問)  [{遊行經},長阿含2,大正藏1.26b]로 되어
    있다.

  사고의 자유만이 아니라  부처가 허락한 포용은 종교사를 배우는 학생
에겐 놀라운 것이다. 날란다Nalanda에 우빨리Upali라는 유능하고 부유한
호족이 있었다. 그는 니간타 나따뿟따(자이나 마하비라)의 유명한 평신
도였다. 한번은 마하비라가  우빨리를 일부러 보낸 일이 있었다. 부처를
만나, 업業의 이론에 대해 몇 가지 논쟁을 벌여 부처를 굴복시키기 위해
서였다. 왜냐하면 그 주제에 대해서 부처의 견해는 마하비라와 달랐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논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우빨리는
부처의 견해가 옳고 자기  스승의 견해는 틀렸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래서 부처에게 자기를 평신도(偶婆塞)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다. 그
러나 부처는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대 같은 유명인
사는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유익하니까', 서두르지 말라고 하였다. 우빨
리가 다시금 자기 의사를 표시했을 때, 부처는 이전에 믿던 종교의 스승
들을 이제까지 해오던 대로 계속 존경하고 공양하라고 당부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의 위대한 불교 황제 아쇼카는 포용하고 이해하는
이 거룩한 일화를 받들어  광대한 자기 왕국안의 다른 모든 종교들을 존
중하고 지원하였다. 바위에 새겨진 그의 칙령은 오늘날에도 원문을 읽어
볼 수 있는데, 황제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자기 종교만을  숭배하고 다른 이의  종교를 비난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이며, 이러저러한 도리에 따라 남의 종교도 존중할 지어다. 그렇
  게 하면 자기 종교의 성장에 도움이 되며, 남의 종교에도 똑같이 봉사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종교의 무덤을 파게 되며, 또한 다른
  종교에도 피해를 주게 된다.  자기 종교를 숭배하며 다른 종교를 헐뜯
  는 사람은 누구나 "나는 내 종교를 찬양하리라"는 생각으로 자기 종교
  에 헌신하느라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그와 달리, 그렇게 해서는 자기
  종교를 더욱  심히 상하게 한다. 그러하니  화합은 좋은 것이다. 모든
  백성은 들을  지어다. 다른  이가 가르친 교리에도  귀를 기울일 지어
  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서로 이해하는 정신을 오늘날에도 적용해야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해야겠다고 부언해야겠다.
  이 포용과 이해의  정신은 처음부터 불교문화와 불교문명에서 가장 소
중한 이상의 하나였다.  사람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는데 있어서나 2500년
의 긴 역사에 걸친 전파 과정에서 단 한 번이라도 사람들을 박해하던가,
피 한 방울을 흘리게  한 일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평
화롭게 아시아 대륙 전체로  퍼져서 오늘날에는 5억이 넘는 신도를 갖고
있다. 폭력은 어떤 형태이건, 어떤 구실 때문이건 간에 부처의 가르침에
완전히 반대된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3

  이런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불교는 종교인가, 아니면 철학인가? 그러
나 당신이 무어라 부르건 상관이 없다. 불교는 당신이 어떤 딱지를 붙이
던 간에 그대로이다. 라벨은 하찮은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부처의 가르
침에 붙이는 '불교'라는 딱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어놓은
이름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 속에 무엇이 있나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무슨 다른 이름이라도 향기로운 것을.

  같은 이유로 진리에는  상표가 필요치 않다. 진리는 불교표도, 기독교
표도, 힌두교표도, 회교표도 아니다. 진리는 누군가의 전매품이 아니다.
파벌적인 딱지는 진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며, 사람의 마
음에 해로운 편견을 만들어낸다.
  이는 정신적,  지적 관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에서 역시
그러하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를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또는 유태인 같은 딱지를 붙이
고, 우리 마음속에 딱지와 어우러진 갖가지 편견을 갖고서 그 사람을 대
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우리가 갖다 붙이는 속성과는 전혀 무관할 것
이다.

  사람들은 구별하는 딱지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심지어는 모두에게 공통
된 인간적 성품과 감정에도 딱지를 갖다 붙이려고 기를 쓴다. 그래서 사
람들은 다른 '상표'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불교의 자비
또는 기독교의 사랑을 말하면서  다른 '상표'의 것은 깔본다. 그러나 자
비와 사랑은 파벌적일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나
회교도나 간에 그러하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교도의 것이나
기독교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일 뿐이다. 사랑, 박애,
자비, 포용, 인내, 우정,  욕망, 증오, 심술, 무지, 자만등과 같은 인간
적 가치와 감정에는 당파적인  딱지가 필요 없다. 그것들은 특정 종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어떤 관념이  어디서 왔는가가 하찮다. 한
관념의 근원과 발전은  학술적인 문제이다. 사실, 진리를 이해키 위해서
는 그 가르침이 부처에게서 나왔는지, 다른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아는
것도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을
설명한 중요한  이야기가 《마지마-니까야Majjhima-nikaya》(中部: 경전
번호140)에 있다.

  부처가 한번은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밤을 보냈다. 그 헛간에 젊은 사
문이 먼저와 있었다.[각주1]  그들은 초면이었다. 부처는 사문을 살펴보
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젊은이에게 호감이 간다. 내가 말을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부처는 그 젊은이에게 물었다. '오! 비구여,[각주
2] 그대는 누구의 이름으로 집을 떠났소? 누가 그대의 스승이오? 그대는
누구의 가르침을 좋아하시오?'

[각주1] 인도에서 옹기장이의 헛간은 널찍하고 조용하다. 빨리경전에 보
    면 고행자와  사문들뿐만 아니라,  부처 자신도 방랑수행(遊行)하는
    동안에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밤을 보냈다고 언급하고 있다.
[각주2] 여기에서 부처가 이  사문을 '비구'라 부른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비구라는 용어는 불교 승려에게 쓰인다. 그가 동아리(승가)의
    일원인 비구가 아님을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부처에게 동아
    리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도록 요청했기 때문이다. 아마, 부처당
    시에 비구라는 용어는 자주, 다른 고행자들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
    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가 그 용어의 사용에 엄격한 제한
    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는 "거지", 즉 '음식을 구걸하는 이'를
    뜻하며, 여기서는  아마도 말 원래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비구라는 용어가 불교 승려에게만 쓰인다. 특히, 스리랑
    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같은 나라와 방글라데쉬의 치타공 지방
    의 상좌불교 승려를 가리킨다.

  '오! 벗이여'라고 젊은이가  대답하였다. '사꺄족의 후예, 고따마라는
사문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꺄족을 떠나서 사문이 되었답니다. 그분은
아라한, 즉 "완전히 깨달은 이"라는 드높은 칭송이 자자합니다. 그 세존
의 이름으로 저는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리
고 저는 그분의 가르침을 좋아합니다.'
  '그 세존이며, 아라한이며, 완전히 깨달은 이가 지금 어디에 계신답니
까?'
  '벗이여, 북쪽 나라에  사밧티Savatthi(舍衛城)라고 부르는 도시가 있
습니다. 세존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가 지금 계신 곳
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대는 일찍이 그 세존을  본적이 있소? 그이를 보면 알아볼 수 있겠
소?'
  '저는 그 세존을 뵈온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분을 뵙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는 이 처음보는 젊은이가  집을 떠나 사문이 된 것이 자기 이름을
따라서 임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정체를 숨기고 말했다. '오! 비구여,
그대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소. 잘 듣고 새기도록 하시오. 내 말하리다.'
  '예, 좋습니다. 벗이여'라고 젊은이는 동의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진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젊은이에게 베
풀었다.(그 요점은 나중에 설명하겠다.)
  설법이 끝나자마자, 뿍꾸사띠Pukkusati라는  이름의 그 젊은이는 자기
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부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부처 앞으로 다가가서 스승의 발에 엎드려 절하고는, 몰라보고
'벗'[각주3]이라 부른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처에
게, 수계受戒[각주4]를 주시어 "동아리"에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각주3] 여기서 쓰인  용어는 친구를 뜻하는 아부소Avuso(友)이다. 그것
    은 같은  지위의 사람끼리 부르는  경어이다. 그러나 제자가 부처를
    부를 때는 이 용어를  결코 쓰지 않는다. 대신에 제자들은 "선생님"
    이나 "님"과 비슷한 의미의 반떼Bhante라는 용어를 썼다. 부처 당시
    승려 동아리 사람들은  상대방을 아부소, 즉 벗이라고 불렀다. 그러
    나 부처가 돌아가기 전에 후배 승려는 선배를 반떼(尊師), 즉 "선생
    님"이나 아야스마Ayasma(具壽),  즉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
    다. 그러나 선배는  후배를 이름이나 아부소라고 불러야 한다. 이런
    관습은 지금까지 승가에서 계속되고 있다.
[각주4] <역주> 수계受戒는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받는 것이다. 이것
    은 곧 정식으로 부처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 물론 정해진 형식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것을  '수계식受戒式'이라고 한다. 출가한 승
    려가 되기 위해서 받는 계율을 구족계具足戒라 하며 그 의식을 득도
    식得度式이라고 한다.
  부처는 그에게 발우〔동냥  그릇〕와 가사袈裟〔비구가 걸치는 간소한
옷〕가 준비되어 있느냐고 물었다.(비구는 반드시 세벌로 된 가사(三衣)
와 음식을 구걸키 위한 발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뿍꾸사띠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여래는 발우와 가사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수계
를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뿍꾸사띠는 발우와 가사를 구하러 밖
으로 나갔는데 그만 불행히도 소에 받혀 죽고 말았다.[각주5]

[각주5] 인도에서 소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여기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은 오래된 것 같다. 그러나 일반
    적으로 이 소들은 순하며, 사납거나 위험하지 않다.

  나중에 부처에게 이 슬픈  소식이 전해졌을 때, 부처는 뿍꾸사띠가 지
혜로운 사람이며, 이미  진리를 보았으며, 열반의 실현과정에 있어서 마
지막에서 두 번째  지위를 얻은 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아라한[각주
6]이 되는 마당에 태어났으며 마지막 과정을 거쳐서, 이 세속에 다시 되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각주6] 아라한阿羅漢(Arahant)은 욕망과 증오, 악의, 무지, 자만심, 거
    드름, 등등의 모든  오염과 더러움에서 떠난 사람이다. 아라한은 네
    번째 경지, 그러니까 열반을 실현하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지혜와 자비, 그리고 그런 순수하고 거룩한 성품으로 가득 차 있다.
    뿍꾸사띠는 그때 전문적인 용어로 아나함阿那含(Anagami;不還)[欲界
    의 번뇌를 끊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라 부르는 세 번째 경지에 도
    달했을 따름이다.  두 번째  경지는 사다함其陀含(Sakadagami;一來)
    [한번 욕계에 돌아오는 사람], 첫 번째 경지는 수다원須陀洹(Sotapa
    nna;預流)[흐름에 든 사람]이라 부른다.

  이 이야기에서 뿍꾸사띠가  부처의 이야기를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했
을 때 자기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는 그것이 누구의 가르침인
지를 몰랐음이 아주 명백하다. 그는 '진리'를 보았다. 약이 좋으면 병이
나으리라. 누가 그것을 준비했는지, 어디서 그것이 유래되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4

  거의 모든 종교가 믿음으로 건설되었다. 다시 말해서 '눈먼' 믿음으로
건설된 것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보는 것', 즉 알고 이
해하는 것이지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다. 불경에는 보통 '믿음'이나 '신
앙'이라고  번역되는 삿다saddha(산.쉬랏다sraddha;信)란  단어가 있다.
그러나 삿다란 단어는 그런 류의 신앙이 아니며, 납득에서 탄생되는 '확
신'이다. 대중부大衆部의 불교에서, 그리고 또한 경전에서 일반적인 용
법으로 쓰이는 삿다란 단어는 마땅히 인정되어야 하는데, 부처와 가르침
(法), 그리고 동아리(僧家)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신앙'이
란 요소를 가진다.
  4세기의 위대한  불교철학자 아상가Asanga(無著)에 의하면 쉬랏다에는
세 가지 면이 있다. ⑴어떤 것을 완전히, 그리고 확고하게 납득하는 것,
⑵훌륭한 성품에서의 청아한  기쁨, ⑶마음자세에 있어서 목적을 성취하
려는 열망이나 바램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해시키는 믿음이나 신앙은 불교와
인연이 멀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믿음에 대한 의문은 보지 못 하였을 때 일어난다. 여기서 본다(see)는
말은 그  단어의 모든 의미를 말한다.[각주1]  당신이 보는 순간 믿음에
대한 의문은 사라진다. 만약 내 손에 보석을 쥐어 감추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그것을  보지못했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손을 펴서 보석을 보여준다면  당신 스스로 그것을 보게 되어 의문이 일
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불경  구절에서 '깨달아라 손바닥에 있는
보석(또는 미로발란myrobalan 열매)를 보듯이'를 읽게 된다.

[각주1] <역주> see의, 여기에 관련된 주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눈으로)보다: to use the eyes; have or use the power if sight
   2. 쳐다보다, 주의하다: to look at; get sight of; notice
   3. 이해 인식하다: to understand or recognize
   4. 알아내다: to find out or determine
   5. 경험하다, 겪다: to have experience of; undergo
   6. 방문하다, 만나다: to visit; call upon or meet

  부처의 제자 무실라Musila는 다른 승려에게 '벗 사빗타Savittha여, 헌
신이나 신앙이나 믿음 없이도 좋아하거나 이끌리지 않고도, 풍문이나 관
습에 따르지 않고도,  명확한 이론들로 사유하지 않고도, 사변적 견해들
을 즐기지 않고도, 나는 〔둑카(苦)의〕생성이 그치는 것이 열반임을 알
고 보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처는  '오! 비구들이여, 나는  더러움과 오염의 파괴는 아는
이와 보는 이에게나 (의미)있는  것이며, 알지 못하는 사람과 보지 못하
는 사람에게는 (의미)없는 것이라 말한다'라고 하였다.
  언제나 알고 보는 것이 관건이지 믿는 것이 관건은 아니다. 부처의 가
르침은 '와서  보라'(ehi-passika)고 당신에게  권하는데 한정될 뿐이고
와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경에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언급할 때  언제나 사용하는 표현은
'때와 더러움이 없는  "진리의 눈"(Dhamma-cakkhu;法眼)이 뜨였다', '그
이는 진리를 보았다.  진리를 얻었다. 진리를 알았다. 진리를 꿰뚫었다.
의심을 극복하였다. 흔들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바른 지혜를 가지
고 있는 그대로(yathabhutam;如實)  본다'이다. 부처가 자신의 깨달음을
언급할 때 '눈이 생겼다.  앎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학문이 생겼다.
빛이 생겼다'라고 말하였다. 항상 앎 또는 지혜(nana-dassana;智見)로써
보는 것이지 신앙으로써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라문교의  정통주의(Brahmanic orthodoxy)가  자기네 전통과
권위를 의심하지 말고  유일한 진리라 믿고 받아들이라고 편협하게 주장
하던 시대임을 고려할 때 더더욱 가치가 있다. 한번은 학식 있고 유명한
바라문의 동아리가  부처를 만나러와서 긴  토론을 벌였다. 그 동아리의
한 사람은 까빠티까Kapathika라는 16세의 소년 바라문이었다. 그 동아리
사람들 모두가 그를 두드러지게 똑똑하다고 여겼다. 그가 부처에게 질문
을 던졌다.
  '고따마님, "손상되지  않은 구전口傳"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옛
바라문 성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바라문들이 절대적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
자, 고따마님 이것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부처는 물었다. '바라문들  가운데 단 한사람이라도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라고 제 스스로 알고 보았다고
주장하는 바라문이 있는가?'
  젊은이는 솔직하여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단 한사람의  스승이나 아니면 일곱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
스승들의 스승이나 심지어는 그 성서의 지은이들 중에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고 자기가 알고 보았다고 주장
하는 이가 있는가?'
  '아뇨.'
  '그렇다면 그것은 서로서로  앞사람을 붙들고 서있는 장님들의 행렬과
같네. 첫째 장님도 보지못하고, 가운데 장님도 보지못하며, 마지막 장님
도 역시 보지못하지. 그렇게 내게는 바라문들의 처지가 장님들의 행렬같
아 보인다네.'
  그래서 부처는 바라문의  동아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충고를 해주었다.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라고 결론
짓는 것은  진리를 지키는(문자적 의미는  '수호하는') 지혜로운 이에겐
가당치 않은 일이라네.'
  그 어린 바라문은  진리를 지킨다거나 수호한다는 개념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청하였다. 부처는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졌다. 만약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라고 한다
면 그 한도 내에서만 진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네. 그냥 그렇게만 해서
는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랄 수 있
는 절대적 결론에까지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라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믿기 마련이라서 "이것을
믿는다"라 말할 뿐이다. 그 사람은 그 한도내에서만 진리를 받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단지 자기 믿음이나 신앙 때문에 자기가 믿는 것만 유
일한 진리이고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처는 말한다. '한 가지(어떤  한 가지 견해)에 집착하고 다른 것(견
해)들을 천하다고 깔보는 것, 슬기로운 이는 이런 것을 족쇄라 부른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5

  한번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원인과  결과(因果)의 교리를 설법하였다.
듣고나서 제자들은  명확히 보고 알게  되었다 말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말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이  견해가 그토록 순수하고 명확하다 하더라도, 너
희가 붙들어 놓지 않고, 애지중지하고, 보물같이 여기고, 집착한다면 그
가르침이 뗏목과 같음을 이해치  못한 것이다. 뗏목은 건너가기 위한 것
이지 집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라.'
  부처는 다른 곳에서 이  유명한 비유를 설법하였다. 거기에서 그의 가
르침이 건너가기 위한 것이지 집착하고 짊어지고 다니기 위한 것이 아니
라며 뗏목에다 비유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한 사람이 여행길에 있다. 그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
났다. 이쪽 물가(此岸)는  위험하다. 그러나 저 건너 물가(彼岸)는 안전
하고 위험이 없다.41 안전하고 위험이 없는 저 건너 물가로 건네다줄 배
가 없다. 또한 건너갈 다리도 전혀 없다. 그가 혼잣말을 한다. "이 물바
다는 넓디넓다.  그리고 이쪽 물가는 위험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저
건너 물가는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 저 건너 물가로 건네다 줄 배도 없
고, 건너갈 다리도 없다.  그래서 내가 풀과 나무, 잔가지와 잎사귀들을
모아서 뗏목을 만들고 그 도움으로 손으로 발로 저어 저 건너 물가로 가
는 것이 좋겠다." 오! 비구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 잔가지
와 잎사귀들을 모아서 뗏목을 만들었다. 그 도움으로, 손으로 발로 저어
저 건너 물가로 갔다. 건너가 반대편 물가에 닿고서 그가 생각한다. "이
뗏목은 내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이것의 도움으로 손으로 발로 저어
이쪽 물가로 무사히 건너왔다.  내가 이것을 이고 지고 가는 데 마다 가
지고 다닌다면 좋을 것이다."'[각주1]

[각주1] <역주> 소설과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
    羅蜜多心經》의 끝 구절,  즉 '아제 아제 바라아제'라는 주문(呪)은
    바로 이 "이쪽  물가"(차안)과 "저 건너 물가"(피안)에 대한 내용이
    다. 그 산스크리트 원문과 한역은 다음과 같다.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揭帝 揭帝 婆羅揭帝 婆羅僧揭帝 菩提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그 의미를 콘체Conze,Edward의 영역에 의하여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
    과 같다.
    가 버림이여,* 가 버림이여,         Gone, gone,
    저 건너로 가 버림이여,             gone beyond,
    완전히 저 건너로 가 버림이여,      gone altogether beyond,
    오! 깨달음이로구나! 축복이어라!    what an awakening, all hail!
    * 콘체에 의하면  gate의 접미사 -e는 호격呼格을 의미한다. 그래서
    'gone'을 '가 버림이여'라고 옮겼다.
    [Edward Conze, Buddhist Wisdom Books (London:Happer Torchbooks,
    1958) pp.101~102, 106]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  비구들이여. 그가 이런 짓을 했다면 뗏목에
다 알맞게 행동한 것이냐'
  "아닙니다, 선생님."
  '그러면 어떤 방법이  뗏목에다 알맞게 행동하는 것인가? 반대편 물가
로 건너간 뒤에 그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보자. "이 뗏목은 내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다. 이것의 도움을 받아 손으로 발로 저어 이쪽 물
가로 무사히 건너왔다. 이 뗏목을 물가로 끌어올리거나, 메어두거나, 떠
내려보내고 나서 그것이  어떻게 되던 간에 내  갈 길을 가리라" 이렇게
행동하여야 그 사람이 뗏목을 가지고 알맞게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뗏목과도 같은 교리를 가르쳐왔다.
―그것은 건너가기 위한 것이지 가지고 다니기 위한(직역하면 집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 비구들이여, 가르침이 뗏목 같음을 이해하는 너
희는 유익한 것(dhamma;法)까지도 그만두어야 한다. 하물며 해로운 것(a
dhamma;邪法)에 있어서랴.'[각주2]

[각주2]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의 법法(dhamma)이란 지고한 정신적 성취
    뿐만 아니라, 순수한  견해와 관념이다. 법이 아무리 높고 순수하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하는 것이다. 하물며 해롭고 나
    쁜 것에 있어서랴.

  이 우화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사람을 안전과 평화, 행복, 안정, 열반
의 성취에 인도함을 뜻한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부처가 가르친 교리
전부가 그러한 결과에 인도하는 것이다. 그는 지적 호기심만을 만족시키
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인 스승이어서 사람에게 평화와 행
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것만 가르쳤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6

  부처는 한때에 꼬삼비Kosambi(알라하바드Allahabad 근처)의 싱사빠Sim
sapa나무 숲에 머문적이 있었다. 그는 몇 개의 잎사귀를 손에 들고 제자
에게 질문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것이 더
많은가? 내 손안에 잎사귀 몇 개와 여기 숲 전제에 잎사귀 중에서.'
  '선생님, 세존의 손안엔 아주  적은 잎새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싱
사빠나무 숲 전체에 있는 잎들이 정말로 훨씬 더 많습니다.'
  '그와 같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는 것 중에 너희에게 이야기해준 것
은 아주 적은 것에 지나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매우 많다. 그러면  왜 (그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쓸데가
없기 때문이다. ..... 열반에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이야기
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어떤 학자들이 헛되이 시도하는 것처럼, 부처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을 추측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무익하다.
  순전히 사변적이고 비현실적인 문제만을 만들어 내는 쓸데없는 형이상
학적 질문을 논하는 것에 부처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견해들
의 황무지"라고 여겼다. 부처자신의 제자들 중에도 이런 태도가 못마땅
한 자가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예의 하나로 말룽꺄뿟타Malunkyaputta
(만童子)를 들 수 있다.  그는 형이상학적 문제인 유명한 고전적 질문들
을 부처에게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였다.
  하루는 말룽꺄뿟따가  오후 일과의  '명상'수행에서 일어나, 부처에게
와서 인사하고는 한쪽 켠에 앉아서 말하였다.
  '선생님, 제가 홀로 명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존께
서 제쳐 놓으시고 거부하시어 설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즉, ⑴
우주는 영원한가? 아니면 ⑵영원치 않은가? ⑶우주는 유한한가? 아니면
⑷무한한가? ⑸영혼과 몸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⑹영혼과 몸은 제각각
인가? ⑺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 아니면 ⑻죽은 뒤에는 존재치
않는가? 아니면 ⑼죽은 뒤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치 않는가? 아니
면 ⑽존재치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치 않은 것도 않은 것인가? 이런 문
제들을 세존께서는 제게 설명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태도)는 제 마음
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세존께 와서 이 문
제들에 대해  여쭈어 보려 하였습니다.  세존께서 그것들을 제게 설명해
주신다면 저는 계속 세존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를 것입니다. 만약에 그
것들을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 "동아리"를 떠나가 버리겠습니
다.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  것을 아신다면 제게 그렇다고 설명해 주십
시오. 만약 세존깨서 우주가  영원치 않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대로 설명
해 주십시오. 만약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가 그렇지 않은가 등등에 대
하여 모르신다면  모르는 사람으로서 솔직히,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십시오.'
  말룽꺄뿟따에게 해준  부처의 대답은 오늘날  세계에서 그런 형이상적
의문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불필요하게 마음의 평화를 뒤흔들어
버리는 수 백만의 사람들에게 정말 유익하다 아니할 수 없다.
  '말룽꺄뿟따야, 내가 너에게  "이리 오너라. 말룽꺄뿟따야. 내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라. 그러면 네게 그 문제들을 설명해 주겠노라"라고 말
한 적이 있더냐?'
  '없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말룽꺄뿟따야, 네가 "선생님, 저는 세존밑에서 거룩한 삶으
로 따르려 합니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그 문제들을 제게 설명해 주시리
라 믿습니다"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선생님'
  '말룽꺄뿟따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네게 "이리와서, 내 밑에서 거
룩한 삶을 따르라. 그러면 네게 그 문제들을 설명해 주겠노라"라고 말하
지 않는다. 그리고 너 또한 내게 "선생님, 저는 세존밑에서 거룩한 삶으
로 따르려 합니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그 문제들을 제게 설명해 주시리
라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여, 이런 마당에 누가
누굴 거부하느냐?'
  '말룽꺄뿟따야, 만약에 누가 "나는 그 문제들을 설명해주기 전에는 세
존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
서 이 질문들의 답을 듣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말룽꺄
뿟따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친구와 친척이 의
사에게 데려갔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아라. "누가 내게
활을 쏘았는지를 알기 전엔 이 화살을 뽑아내지 않겠다. 끄샤뜨리야Ksat
riya(무사 계급)일까,  아니면 바라문(사제 계급)일까, 바이샤Vaisya(상
인과농민 계급)일까, 아니면  수드라Sudra(천민 계급)일까? 이름이 무엇
이고 성씨가 무엇일까? 키가 클까, 작을까, 중간일까? 피부 색깔은 까말
까, 갈색일까, 아니면  누런색일까? 그 작자는 촌사람일까? 읍내 사람일
까? 아니면 도회지 사람일까? 무슨 활로 나를 쐈는지 알기 전에는 이 화
살을 뽑아내지 못하겠다. 어떤 종류의 활시위를 썼을까? 어떤 화살일까?
무슨 깃털이 화살에  쓰였나? 살촉을 뭘로 만들었나?" 말룽꺄뿟따야, 그
사람은 이런 것들 중에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말룽꺄뿟따
야, 그와 같이 어떤 이가 "나는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가 아니면 영원
치 않은가 따위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 전에는 그분 밑에서 거룩한 삶
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여래에게서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말룽꺄뿟따에게 거룩한 삶은 그런 견해들과 무관
하다고 설명하였다. 누가 그런 문제에 대해 어떤 주의주장을 갖더라도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生老病死), 슬픔과 비애, 아픔, 통한, 고
통(憂悲惱苦)이 있다. "내가 밝힌  것은 바로 이 삶에서 이런 것들이 그
치는 것(즉,열반)이다."
  '그러하니 말룽꺄뿟따야, 내가 설명해야할 것을 설명하고 설명하지 말
아야될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치 않은가? 등등(열 가지 견해;十
無記)을 설명하지 않았다. 말룽꺄뿟따야, 왜 나는 그것을 설명치 않았는
가? 그것들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정신적인, 거룩한 삶에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더러움에 대한
〕혐오와  〔집착을〕여읨, 〔둑카(苦)의〕그침,  평안, 〔지혜를〕깊이
꿰뚫음,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
게 그것들을 말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말룽꺄뿟따야,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둑카dukkha
(苦), 둑카의 생겨남, 둑카가  그침, 둑카가 그치도록 인도하는 길을 설
명하였다. 말룽꺄뿟따야 내가 왜 그런 것들을 설명하였는가? 그것에 쓸
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거룩한 삶에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더러움에 대한〕혐오와  집착을 여읨, 중
지, 안정, 〔지혜를〕깊이 꿰뚫음,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설명하였다.'[각주1]

[각주1] 부처의 이 충고는 말룽꺄뿟따에게 바람직한 영향을 준 것 같다.
    다른 곳에서 그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부처를 다시 찾아와 아라한이
    되는 길을 따랐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A. (Colombo,1929), pp.34
    5~346; S. IV (PTS), p.72(과 그 아래).

  이제, 부처가 말룽꺄뿟따에게 설명해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아
보기로 하자.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1


  부처의 가르침, 그 핵심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Cattari Ariya-sacc
ani;四聖諦)에 드리워져 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바라나시 근교
의 이시빠따나(오늘날의 사르나트)에서 옛 동료인 다섯 고행자에게 해준
처음 설법(初轉法輪)에서 설명되었다.  우리가 원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설법에서는 네 가지  진리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초기 불교 문헌의 수없이 많은 곳에 등장하고 있다. 거
기에서 엄청난 양의 세부  항목과 함께 여러 다른 형태로 자꾸자꾸 반복
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 문헌들과  해설서들의 도움을 받아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연구한다면 부처의  기본 가르침의 진정한 장점과
정확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둑카Dukkha(苦)[각주1]
     2. 생겨남(Samudaya;集), 둑카의 발생 또는 근원
     3. 적멸(Nirodha;滅), 둑카가 그침
     4. 길(Magga;道), 둑카가 그치도록 인도하는 길


[각주1] 지은이는 아래에 기술한  이유로 이 용어의 영어 상당어를 제시
    하고 싶지 않다.
    <역주> 옮긴이 역시  지은이의 뜻을 존중하여 '苦'라는 한역어를 직
    접적으로 사용치 않을 것이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苦)


  "첫 번째 거룩한 진리"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으레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Dukkha-ariyasacca;苦聖諦)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 의
한다면 삶이 괴로움과 고통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들 한다. 그 번역과  해석 모두가 아주 불충분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가 염세주의라고 여기도록 오해를 불러일으
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수식어와 멋대로 쉽게 번역하고 피상적으로 해석
하는 것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불교는  염세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사실주의이다. 삶과 세계에 대하여 사실주의의 관점에 서있
다. 불교는 대상을 객관적[각주2]으로 바라본다. 불교는 당신을 바보의
천국에 살도록 거짓으로 달래지 않으며 갖은 허구적 공포와 원죄로 겁주
고 괴롭히고  하지 않는다. 불교는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을 둘러싼 세계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완전한 해방과 평
화, 안정, 행복의 길을 보여준다.

[각주2] <역주> 여기서 '객관적'이란 말을 뜻하는 'yathabhutam'의 한역
    은 '如實'이다.  그 뜻은  '있는 그대로',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그 자체로서'이다. 우리말  가운데 '제대로'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
    들어맞는다. 앞으로 자주 등장  할 '객관적'이란 말 모두가 이런 뜻
    을 가진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이 그냥 눈에 보이는 대
    로, 그냥 느껴지는 대로를 뜻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라고 한다. 그
    것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어디까지나 자기 틀로 왜곡해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표현으로 "해가 떠오른다"고한다. 그
    러나 사실은 지구가 돌아  해가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뱀
    을 징그럽다고 느끼고,  악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뱀은 그저
    뱀일 뿐이며,  생태계에서 없어서는  않되는 생물이다.  '있는 그대
    로', '그 자체로서', '여실히'  보는 것은 이와 같은 자기자신과 자
    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가진 편견이나, 인간이라는 종種의 인식 특
    성이 가진 편견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의사는 병을 중대하게 과장하여 모두의 희망을 꺽어 버리기도 한
다. 다른 의사는 병이  없으며 치료도 필요치 않다고 어리석게 단언하여
환자를 거짓 위안으로 속인다. 당신은 첫 번째 의사를 비관론자 두 번째
의사를 낙관론자라고 부를 것이다. 둘다 똑같이 위험하다. 그러나 세 번
째 의사는  증상을 정확히 진단하여 병의  원인과 특성을 알아내고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아 일련의 치료 과정을 용기있게 실
행한다. 그렇게 해서 환자를  구한다. 부처는 마지막 의사와 같다. 그는
인간세의 병에 대한 현명하고 과학적인 의사(Bhisakka 또는 Bhaisajya-g
uru)이다.
  빨리어 단어  둑카dukkha(또는 산.du kha)가  '행복'이나 '안락', '편
안'을 뜻하는 수카sukha(樂)라는  단어에 반대되며, 그 일상적인 용법이
'괴로움'이나 '고통', '슬픔', '비참함'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
나 "첫 번째 거룩한  진리"로서의 둑카라는 용어는 삶과 세상에 대한 부
처의 견해를  대표하는데, 보다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녔으며 엄청나게
넓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에서의 둑카라는
용어가 '괴로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
백히 인정된다. 그러나  거기에다 '불완전', '일시적임', '헛됨', '견고
치 않음' 같은 더 깊은 관념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거룩
한 진리"로서 둑카라는 용어의 전반적인 개념을 수용하는 단어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편하게 번역하
여 불충분하고  틀린 관념을 갖게 하는  것보다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

  부처는 고통이 있다고 말하면서  삶의 행복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반
대로 승려들뿐만 아니라 평신도에  대해서도 물질, 정신 두 가지 모두에
걸친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부처의 설법을 담고 있는 다섯 빨
리원전 "모음집"(니까야)의  하나인 《앙굿따라-니까야Anguttara-nikaya
》(增支部)에 보면 행복(sukhani)의  목록이 있다. 가정생활에서의 행복
과 출가자(沙門)의 행복, 감각적 쾌락의 행복과 자제의 행복, 집착하는
행복과 집착을 여의는 행복, 육체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 등등이 그것이
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둑카에 속한다. 심지어 고도의 명상수행을 해서
도달하는 선정禪定(무아경;dhyana)이라는 아주 순수한 정신적 경지마저
둑카에 속한다. 선정은 그  단어가 수용하는 의미상 고통이 드리운 어떤
그늘에서도 헤어난 것이며  잡스럽지 않은 행복으로 기술되기도 하는 경
지이다. 뿐만 아니라 유쾌한 것(sukha)과 불쾌한 것(dukkha)의 두 감각
모두에서 벗어나, 오로지 순수한 평온함과 각성이 있는 선정의 경지, 이
런 아주 높은  경지까지도 둑카에 속한다. 《마지마-니까야》(역시 다섯
원전의 하나)의 한 경전에서 부처는 이 선정의 정신적 행복을 찬양한 다
음에 그것들이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고, 둑카이며, 변화하는 것'(anic
ca dukkha viparinamadhamma)이라 말한다. 분명히 둑카라는 단어가 사용
된 것에 주의하자. 일반적인 말뜻대로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둑카가
아니고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둑카'(yad aniccam tam dukkham)
이기 때문에 둑카인 것이다.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2


  부처는 사실주의적이고 객관적이었다.  그는 삶과 감각적 쾌락을 즐기
는데 있어서 세 가지를  명확히 이해해야 된다고 말한다. ⑴매력이나 즐
거움(assada;樂味), ⑵바라지 않는 결과나 위험 또는 불만족(adinava;過
患), ⑶자유나 해방(nissarana;出離)이 그것이다. 당신이 쾌활하고 매력
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끌
리게 된다. 자꾸자꾸 그 사람보는 것을 즐기게 되어, 그 사람에게서 기
쁨과 만족을 얻어내게  된다. 이것은 즐거운 것이다.(樂味) 그것은 경험
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 자신과 그 사람의 매력 자체가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듯, 이 즐거움은 늘 그러하지 않은 것이다.[각주1]
시절이 바뀌어 그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그 즐거움을 잃어버
리게 되면 슬퍼진다. 이성理性을 잃게 되고 평정을 잃을지도 모른다. 당
신은 어리석게 행동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해로운 것이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환상의 위험한  측면이다.(過患) 이 또한 경험적 사실이다. 이제
당신이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자. 당신이 완전히 초연하다고
하자. 그것은 자유이며 해방이다.(出離) 이들 세 가지는 삶의 모든 즐거
움에 있어서 진실이다.

[각주1] <역주> 여기서 '늘  그러하지 않다' 대신에 '영원하지 않다' 라
    고 옮긴다면 '영원한' 어떤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불변의 영원
    한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둑카의 한 원인이다. 앞으로 '영원한'
    이란 말은 되도록 피해 갈 것이다.

  이로써 둑카라는 것이 염세주의나 낙관주의적인 문제가 아님이 분명해
진다. 그와 달리 둑카는 고통과 슬픔뿐만 아니라 삶의 즐거움에 대해서
도, 그리고 그것들에서  벗어나는 것까지도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을 완전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해방이 가능하다. 이 문제에 대해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 즐
거움이라고, 그것의 불만족이  불만족이라고, 그것들에서 해방되는 것이
해방이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이해치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저들 스
스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
능치 않다. 또  그렇게 하도록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능치 않
다. 또 그들의 교육에 따르는 사람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
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치 않다.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
나 바라문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은 즐거움이다, 그것의 불만족은 불만
족이다. 그런 것들에서 해방되는 것이 해방이라고 있는 그대로 이해했다
고 하자. 그런다면 저들  스스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전히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교육에 따르는 사람은 감각적 쾌
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둑카의 개념은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된다. 즉,
  ⑴일반적인 괴로움으로서의 둑카(dukkha-dukkha;苦苦),
  ⑵변화가 만들어 내는 둑카(viparinama-dukkha;壞苦),
  ⑶조건에 따른 상태로서의 둑카(samkhara-dukkha;行苦)가 있다.
  태어남·늙음·병·죽음(生老病死), 싫은 사람 그리고 싫은 상태와 관
계를 맺는  것(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좋은 상태와 헤어지는
것(愛別離苦),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苦), 통한, 비애, 고
통,―이렇게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육체적, 정
신적 괴로움의 온갖 형태가 일반적인 괴로움으로서의 둑카(苦苦)에 속한
다.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상태는 영원치 않다. 늘 그러하지 않은 것
이다. 그것은  곧 변화하거나 나중에라도 변화한다.  그것이 변할 때 고
통, 괴로움, 불행을 만들어낸다.  이 흥망성쇠는 변화가 만들어 내는 고
통으로서의 둑카(壞苦)에 속한다.
  위에서 언급한 둑카의 두  가지 형태는 이해하기 쉽다. 아무도 그것을
논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의 이런 측면은 이해
하기 쉽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
에서 늘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에 따른 상태,  즉 둑카의 세 번째 측면(行苦)은 "첫 번째
거룩한 진리"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be
ing)니 '개인'이니 '나'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분석적인 설명
이 요구된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니  '개인'이니 '나'니하고 부르는
것은 늘 변화하는  육체적, 정신적 힘이나 에너지의 결합체일 따름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 무리", "다섯 가지 모임"(pancak-khandha;五蘊)으로
분류될 수 있다. 부처는 '간단히 말해서 이들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
지 모임"(五取蘊)이 둑카이다'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서 부처는 둑카를
다섯 가지 모임으로서 뚜렷하게 정의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둑카란
무엇인가?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이 둑카라고 말해야겠다.'
여기서 둑카와  다섯 가지 모임은 다른  것이 아님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다섯 가지 모임 그 자체가 둑카이다. 우리는 이른바 '존재'라고
하는 것을 구성해내는 다섯 가지 모임에 대한 개념을 좀 가지고 있을 때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3


다섯 가지 모임(오온五蘊)[각주1]
  그 첫째는 "물질의  모임"(Rupakkhandha;色蘊)이다. 이 "물질의 모임"
이란 용어에는 전통적인 "사대 원소"(cattari mahabhutani;四大), 즉 고
체의 성질(地), 액체의 성질(水), 열(火), 운동성(風)이 포함되며 "사대
원소에서 유래한 것"(upadaya-rupa;所造色)도  역시 포함된다. "사대 원
소에서 유래한  것"이란 용어에는 우리의 다섯  가지 물질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그리고 신체와 거기에 대응하는 외부세계의 대상들, 즉
시각적 형상, 소리, 냄세, 맛, 그리고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포함
되며 그리고 또한  마음대상의 영역(處)인 어떤 생각이나 관념이나 개념
들(dharmayatana;法處)이 포함된다. 그래서  안팎을 막론하고 모든 물질
영역은 "물질의 모임"에 속한다.

[각주1] <역주>  흔히들 오온五蘊이라고 하면 '색수상행식色受受想行識'
    이라고 연달아 말하면서, '色에  의하여 受가 있고, 受에 의하며 想
    이 있고, ....., 行에  의하여 識이 있다', 이렇게 차례차례 생겨나
    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각각의 "모임"(蘊)들은 차례
    로 연기緣起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일어난다. 이어질 내용에서 보
    게 되겠지만  受想行識 모두가 여섯  가지 외부현상(六境)의 하나와
    대응되는 여섯 가지 감각능력(六根)중의 하나가 접촉해서 제각기 일
    어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행위가 나뉘어져 있다고 느끼지 않듯이
    "다섯 가지  모임", 즉 오온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오취온五取蘊)이다. 오취온(panc
    u-upadana-kkhandha)은 오온에 욕탐이  있는 것으로서, 오온과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 '取蘊''라는 술어는 원어
    의 문법적  의미상 "取에 속한  蘊'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오취온은
    '취에 속한 온이 다섯 개'라는 뜻으로서 각각 별개의 오온이 집착(u
    padana;取)에 의해서 한  몸으로 통합된다는 의미이다. [고익진, 같
    은 책, 88~91쪽]

  둘째는 "감각들의 모임"(Vedanakkhandha;受蘊)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
들이 이 무리에 속한다.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또는 그도 저도 아니거
나 간에 육체적, 정신적 기관들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경험하는 것이
이것에 속한다. 그것들은 여섯 가지다. 눈이 시각적 형상에 접촉하여 경
험되는 감각, 귀가 소리에,  코가 냄새에, 혀가 맛에, 몸이 만져서 느낄
수 있는 대상에, 마음(불교철학에서 여섯 번째 능력)이 마음의 대상이나
사상이나 관념에 접촉하여 경험되는 감각이 그것이다. 우리의 모든 육체
적 정신적 감각이 이 무리에 속한다.
  불교철학에서 "마음"(manas;意)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한마디하는 것이 여기서 유용할  것 같다. 마음은 물질에 반대되는 류의
정신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거의 모든 다른 체계의 철학
과 종교는 정신이 물질에 반대된다고 받아들이는데, 불교는 그렇지 않다
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각주2] 마음은 단지 눈이나 귀 같은 감각
능력이나 감각기관(indria;根)의 하나일 따름이다. 마음은 다른 어떤 능
력과 마찬가지로 조절하고 발달시킬  수 있으며, 부처는 이 여섯 능력들
을 조절하고 발달시키는 가치를  아주 여러 차례 이야기한다. 능력들 가
운데 눈과 마음 간의 차이점은 전자가 색깔과 시각적 형상의 세계를 감
각하고 후자가 관념과  사상과 정신적 대상들의 세계를 감각한다는 것이
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영역들을 각기 다른 감각으로 경험한다. 우리는
색깔을 들을 수 없지만 볼 수는 있다. 또한 소리는 볼 수 없지만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을 가지고 시각적 형상, 소리, 냄세, 맛, 만져서 느낄 수 있는 대
상들의 세계를 각기 경험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의 한 부분
씩만을 대표하는 것이지 전체적인 세계가 아니다. 사상과 관념은 어떠한
가? 그것들 역시 세계의 일부분이다. 사상과 관념은 눈이나 귀, 코, 혀,
몸의 능력으로 감각, 즉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능력으
로 수용된다.  그것이 마음이다. 그런데 사상과  관념은 이들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능력이 경험하는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사상과 관념은
육체적 경험에 의존하며, 그 조건에 따른다. 그래서 장님으로 태어난 사
람은 다른 감각능력으로 소리나 다른 능력으로 경험한 어떤 다른 것들로
유추하지 않고서는  색깔에 대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세계의 한부분을
형성하는 사상과 관념은 육체적 경험에 의하여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
조건을 따르고,  그리고 마음이 수용한다.  그러므로 마음(意)은 눈이나
귀같이 감각능력이나 감각기관(根)으로 여겨진다.

[각주2] <역주>  여기서 '거의 모든'이란  말은 서쪽 세계에서나 그러하
    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물질과 정신을 둘로 나누는 경우가
    전혀 없다.  佛家건, 道家건, 儒家건,  아니면 東學이건 간에. 종교
    건, 철학이건, 과학이건 간에.

  세  번째는 "지각知覺의  모임"(Sannakkhandha;想蘊)이다. '감각'같이
'지각'도 여섯 가지다. 여섯 가지 내적 능력과 거기에 대응하는 여섯 가
지 외부 대상에 관련된 것이다. 감각과 같이, 우리의 여섯 감각능력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만들어진다.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간에 대상
을 식별하는 것이 '지각'이다.
  네 번째는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Samkharakkhandha;行蘊)이다.
[각주3]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마음먹은 행위 모두가 이 무리에 속한
다. 일반적으로 업業(산.karma,빨.kamma)이라고 알려진 것이 이 무리에
속한다. 업에 대한  부처자신의 정의를 여기서 되새겨 보아야겠다. '오!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마음먹기"(cetana;思)이다.
의도가 있어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를 한다.' "마음먹기"는 '정신이
구성한 것, 정신이 활동하는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좋은 행동이나 나쁜
행동,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행동의 영역들 안에 있도록 마음에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감각'과 '지각'같이 "마음먹기"도 여섯 가지다. 여섯
가지 내적 능력과 거기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세계의 대상(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과 관련된다. '감각'과 '지각'은 마음먹은 행위
가 아니다. 그것들은 업의 효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정신차리기(mana
sikara;作意), 의도(chanda;志欲),  결심(adhimokkha;信解), 확신(saddh
a;信),  정신통일(samadhi;三昧),  지혜(panna;般若), 추진력(viriya;精
進), 욕구(raga;貪), 혐오나 증오(patigha;瞋 엘), 무명無明(avijja), 거
드름(mana;慢), 자아관념(sakkaya-ditthi;有身見,  薩迦耶見) 등등의 업
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만이 마음먹은 행위이다. "정신이 형성한 것들
의 모임"을 구성하는 쉰 두 가지의 그런 정신 작용이 있다.

[각주3] 여기서 "정신이 형성한  것"이란 "다섯 가지 모임" 목록에서 상
    카라samkhara(行)라는 단어의 광범위한 의미를 대표해서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이다. 다른 문맥상에서는 상카라가 조건에 따라서 있는 어
    떤 것, 세상의 어떤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섯 가
    지 모임"이 모두 다 상카라이다.

  다섯 번째는  "식識의 모임"(Vinnanakkhandha;識蘊)이다.[각주4] '식'
은 "여섯 가지  능력"(六根:눈,귀,코,혀,몸,마음)중의 하나를 근거로 하
고,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현상"(六境:시각적 형상, 소리, 냄세, 맛,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 마음의 대상, 즉 사상과 관념)을 대상으로 하
는 작용이나 반응이다.  예를 들자면 "시각적인 식" (cakkhu-vinnana;眼
識)은 눈을 근거로 하고 시각적 형상을 대상으로 한다. "정신적인 식"(m
ano-vinnana;意識)은 마음(意)을 근거로 하고 정신적인 대상, 즉 사상과
관념(法)을 대상으로 한다. '식'은 다른 능력들에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
다. 그래서 '감각'과 '지각', "마음먹기"와 마찬가지로 '식' 역시 여섯
종류로서 여섯 가지 내적 능력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외부대상에 관련되
어 있다.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4


  '식'이 대상을 식별하지 않음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단지
일종의 알아차림, 즉  대상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푸른색으로 예
를 들자면 눈이 빛깔과 접촉할 때 "시각적인 식"이 일어나서, 다만 빛깔
이 있음을 알아차리지만 그것이 푸르다고는 식별하지 않는다. 이 단계에
서는 식별 활동이  없다. 그것이 푸르다고 식별하는 것은 '지각'(위에서
논한 세 번째 모임, 상온想蘊)이다. "시각적인 식"이라는 용어는 일상적
인 말 '보임'[눈에 띔]이 전달하는 것과 같은 관념으로 정의되는 철학적
표현이다. '보임'은 식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형태의 식도 그러하
다.[각주1]

[각주1] <역주> 이  짧은 설명으로 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
    다. 우리의 의미체계로 식의 개념을 파악하려는 데에는 엄청난 논의
    가 필요하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우리의 '氣'를 이해시키려는 시도
    와도 같다. 더군다나  원시불교에서의 식의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식학唯識學에서의 식의 개념과도  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간단
    히 감각능력과  그 대상간의 작용·반작용에  불과한 것을 사람들이
    경험과 대상을 파악하는  주체인 영혼이나 자아로 혼동하게 되는 그
    것이 바로 식이라고 알아두기로 하자. 실제로 태국의 민간에서는 비
    쟌(vijnana(識)에서 유래)을  명백히 영혼으로  보고 있다.[中村元,
    《佛陀의 世界》, 436쪽]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서 보게 되겠
    지만, 識은 자아를 철저하게 부정키 위하여 마련된 의미 범주이다.

  여기서 불교철학에 의하면 물질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자아'나 '영혼'
이나 '자기'로  여겨질 수 있는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정신이 없다는
것과, 식識을 물질에 반대되는 '정신'으로 여겨서는 아니 됨을 되풀이해
야겠다. 이 점이 특별히 강조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식'이 일생 동안
늘 그러한 실체로서 지속되는, 일종의 '자아'나 '영혼'이라는 그릇된 개
념이 초기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 자신의 제자의 한 사람인 사띠Sati는 '[이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옮겨가고 돌아다니는 것은 [언제나]같은 식이다'라고 스승이 가르쳤다고
생각했다.[각주2] 부처는 그에게 식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사
띠의 대답은 전형적인 것이었다.[각주3] '그것은 의사표현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좋고 싫은  행위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경험
과 행위의 주체이다.]

[각주2] <역주>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과 더불어, 《아비달마구사론阿毘
    達磨俱舍論》 (Abhidharma-kosa)의 제4장을  참조하면 이 견해가 완
    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계된 구절을 인용해보면,
    문: 빛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답: 램프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끊임없이 생성되어 연속적으로
    타오르는 불꽃에 대한 비유적인 명칭이다. 이러한 생성이 그 장소를
    바꿀 때 우리는 빛이 움직인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다른 불꽃에
    대한 비유적인 명칭이다.) 마찬가지로 식識도 연쇄적인 식의 순간에
    대한 관습적인 명칭일 뿐이다. 식이 그 장소를 바꿀 때(즉, 다른 대
    상의 요소와 상응하여 나타날  때) 우리는 식이 대상을 지각한다 라
    고 말한다. [체르바츠키 지음, 권오민 옮김, 《小乘佛敎槪論》(서울
    :경서원,1986), 126쪽에서 인용. 부분적으로 표현을 바꿈]
[각주3] <역주> 불교이전부터 있어온 전형적인 견해를 말한다. 즉, 사띠
    는 識을 영원한  실제로서의 자아인 브라만교의 아뜨만과 같은 것이
    라고 잘못 안 것이다.

  '누가보더라도 너는 어리석다'라고 스승은 꾸짖었다. '너는 내가 교리
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있느냐? 내가 식은 조건들에서 일
어나며, 조건들이 없으면 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았더냐?' [즉,  식은 원래부터 스스로 존재해서 대상을 파악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부
처는 식을 조목조목 설명해 나간다. '식은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이 어떤
가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눈과  시각적 형상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
난다. 그러면 그것은  "보는 식"(眼識)이라 불려진다. 귀와 소리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듣는 식"(耳識)이라 불려진다.
코와 냄세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냄새맡는
식"(鼻識)이라 불려진다. 혀와 맛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
면 그것은 "맛보는 식"(舌識)이라 불려진다. 몸과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더듬는 식"(身識)이
라 불려진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사상과  관념) 때문에 하나의 '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생각하는 식"(意識)이라 불려진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비유를 들어 계속 설명해 나간다. 불은 물질이 타
는 것이기에 그 물질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장작 때문에 불이 타면 장작
불이라 불려진다. 섶 때문에 불이 타면 섶불이라 불려진다. 그렇게 의식
은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위대한 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佛音)는 이  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 나무 때문에  타는 불은 오로지 나무가 공급될 때만
탄다. 그러나 더 이상 나무가 없으면(공급되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
서 불이 꺼진다.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나무가 더 이상 공
급되지 않게 될 때〕 불이 장작개비 등등으로 건너뛰어서 계속타는 것이
아니다. 나무조각 불이 일게 되면 역시 그러하다. 그와 같이 의식은 눈
과 시각적 형상  때문에 감각기관의 문에서(즉, 눈에서) 일어나고, 눈과
시각 형상, 빛 그리고  주의하는 조건이 있을 때만 생겨난다. 그러나 그
상태가 더 이상 없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친다. 조건이 변하
였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더 이상 없다고 해서 그 의식이 귀 등으로 건
너뛰어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듣는 식"이 있게 되면 그 역시
그러하다. .....'
  부처는 식이 물질과 감각과 지각과 정신이 구성한 것들에 의존하며 그
것들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선언하였다. 그는
말한다.
  '식은 물질을  수단으로 삼아서(rupupayam;色手段),  물질을 대상으로
하여서(ruparammanam;色所緣), 물질의  지원을 받아서(rupapatittham;色
依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쁨을 찾으면 자라나고 증가하고
발전하게 된다.'
  '누가 "나는 물질과 감각, 지각 그리고 정신이 형성한 것과 따로 있는
의식이 오거나,  가거나, 지나가거나,  생겨나거나, 자라거나, 증가하거
나, 발전하는  것을 보여주리라"고 말한다면 그  자는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5


  이상에서 아주 간략히  "다섯 가지 모임"을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존
재'니, '개인'이니, '나'니 하고  부르는 것은 다만 이들 다섯 무리들의
결합에 주어진 편리한 이름 또는 라벨일 뿐이다. '늘 그러하지 않은 그
어느 것도 둑카이다.'(Yad  aniccam tam dukkham;一切皆苦) 이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부처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서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이 둑카이다.' 모든 것은 잇다은 두 순간에 있어서
도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A는 〔앞으로의〕A와 같지 않다. 그것들
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스러지는 하나의 흐름으로서 있다.
  '오! 바라문이여, 그것은  마치 산골의 시내와도 같다. 멀리멀리 빠르
게 흐른다. 모든  것을 싣고서 흐른다. 단  한 순간도, 찰나도, 촌각도,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끊임없이 흐른다. 바라문이여, 인간의 삶
도 그런 것이다. 산골의 시내와 같다.'[각주1] 부처가 랏타빨라Ratthapa
la에게 말했듯이  '세상은 끊임없는  흐름으로서 있고,  늘 그러하지 않
다.'

[각주1] 이 말은  부처가, 욕망에서는 자유로와 졌지만 희미한 과거속에
    사는 아라까Araka라는 교사(Sattha)에게  해준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기원전  500년경)의 말과
    그의 유명한 표현  '너는 두번 다시 같은  강에 발을 담글 수 없다.
    새로운 물이 항상 네게  흘러들 것이니까'를 상기해 보는 것은 흥미
    롭다.
    <역주>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는 철학자'라고 일컬어졌다. 어쩌면 석
    가모니와 동시대인인 그가 석가모니와는 달리 당시의 사상적 조류에
    서 고립되어 버린 좌절감 때문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은 '생성'과 '존재'의 두 가지로 대별된
    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자를,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후자를 대
    표한다. '생성'의 세계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나고 죽
    고 하면서 흐르고, 변화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는 견해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는 신이 만
    든 것도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다. 세계란 정도에 따라 불타오르기
    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었으며, 현재에도 그렇
    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단편30)[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서양철학사(上)》(대구:이문출판사,1988) 65쪽에서 인용] 이는 마
    치 "불의 설법"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존재'의  세계관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움직임과 변화는
    이성적인 인식이 아니고,  감각적인 인식이며 이런 모습들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참된 실체는 변화
    하지 않으며  정지해 있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경험하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세계를 단순한 로고스logos로 추상화시키는 것
    을 용이하게 한다. 영원하고 변치 않으며 절대적인 기하학적 이데아
    idea는 그래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의 주류
    로서 계속되고 있다.  반면에 서양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
    자가 없었다.
      그러면 불교의 세계관은  동動인가 정靜인가? 이것은 너무도 엄청
    난 주제이기에 여기에서  제대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화엄일승
    법계도華嚴一乘法系圖》의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같은 구절
    등에서 말하는 부동不動  또는 정靜이 단순히 정지해 있으며 변화하
    지 않는 '실체'를  그리고자 함이 아님을 강조해야 겠다. '제법부동
    본래적'에 대하여 주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음'은 앞의 '성품'을 가리킨다. '성품'이란 머무름이
    없는 법의 성품이다.'(不動者, 指前性也. 性者無住法性也) 《華嚴一
    乘法界圖記叢髓錄》[大正藏45.721c]
      불교뿐만이 아니고  모든 동양적 세계관에  변화하지 않는 우주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관에서의 정靜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가에 대해 그  간단한 답을 조선말의 대학자 최한기崔漢綺(1803~187
    7)에게서 들을 수 있다.
      '만물을 깊이  궁구해보면 운행하여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두 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을 편안케 하는 것은 곧 정
    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동을 불안하게 하는 것을 不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정의 이름은 상대적인 짝이 아니어서 크게 움직이
    는 가운데 있다 말하며, 편안함과 편안하지 않음을 들어서 靜·不靜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潛究萬物, 無不運化則,  皆可謂動. 而安其動者, 卽可謂靜; 不安其
    動者, 亦可謂不靜.  然卽, 動靜之名非對偶, 而言大動之中. 擧其安與
    不安,  而言靜不靜.(《氣學》卷二,  三十一張)[《明南樓全集》제1권
    (서울:여강출판사,1986), 240쪽]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즉  시간 밖에 있는 실재라는 것은 인간
    이 만들어낸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관념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것이 약속체계일 따름이고,  부단히 변화되어온 것을 과학사에서 얼
    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실재가 있다고 가정하면 한
    정적인 범위에서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발전
    된 과학이  평화와 생명을 조화롭게 기르는  과학은 결코 아닐 것이
    다.

  일련의 원인과 결과로서 하나가  사라지며, 다음에 올 것의 조건을 만
든다. 그것들에는 불변의 실체가 없다. 그들 배후에는 영원한 '자아'(아
뜨만Atman)나, 개별성이나, 진정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누
구라도 어떤 물질이 진정한  '나'라고 부를 수 없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아니면 어떤 감각이나, 지각나,  정신적 활동들 중의 어떤 것이나, 어떤
의식을 진정 '나'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
의존하는 이들 다섯 가지 육체적, 정신적 모임들이 심리적, 생리적 기계
같이 결합되어[각주2]  함께 작업하면 우리는  '나'라는 관념을 얻는다.
그러나 이는 거짓된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정신이 형성한 것"일 뿐이
다. 우리가 조금 전에 논한 "네 번째 모임"의 쉰두 가지 "정신이 형성한
것"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아관념(sakkaya-ditth
i;有身見, 薩迦耶見)이다.

[각주2] 붓다고사Buddhaghosa는 실재로 '존재'를 나무로 만든 기계(나무
    인형: daruyanta)에 비유하였다. Vism. (PTS), p.594~595.

  이 "다섯 가지  모임"들이 어우러진 것을 우리는 통속적으로 '존재'라
부르는데, 그것은 둑카 그 자체(行苦)이다. 이들 "다섯 가지 모임" 배후
에 서서 둑카를 경험하는  다른 '존재'또는 '나'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
다. 여기에 대해 붓다고사가 말하길
     '고통이 존재하더라도, 고통받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네.
      행위가 있지만, 행위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네.'
  움직임 배후에서,  〔자신은〕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움직이
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그저 움직임일 뿐이다. 생명이 약동하고 있
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생명은 움직임 그 자체이다. 생명과
움직임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사고의 배후에서 생각하
고 있는 것은 없다. 사고 그 자체가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고
를 제거하고 나면 생각하는 어떤 것을 찾아 볼 수 없게된다. 여기서 불
교의 이런 견해가 데까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
한다'(cogito ergo sum)에 얼마나 상반되는가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과연 삶에 태초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날지 모른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의 흐름, 그 시작은 고려할 가치
가 없다. 신神이 생명을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대답에 경악할지 모
른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에게 '신의 처음은 어떠했나요?'라고 묻는
다면 그는 주저없이  '신께 있어서는 최초란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
면서 자기 대답에는 경악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
이여, 이 계속되는  순환(samsara;윤회輪廻)에 가시적인 종말이란 없다.
헤메이고, 맴돌며,  무명無明으로 덮혀 있고, 목마름(tanha;욕망-갈애渴
愛)의 족쇄가 채워진, 존재하는 것들의 태초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부처는 더 나아가, 삶을 계속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인 무명
에 대해 언급하여 이렇게 말했다. '어떤 지점을 너머서부터는 무명이 없
다고 가정하는 그런 방법으로 무명의 첫 시작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극단 너머에 삶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것이 간추린 "둑카에  대한 거룩한 진리"(苦聖諦)에 대한 의미이다.
이 "첫 번째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각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처가 말하듯, '둑카를 보는  이는 둑카가 생겨나는 것도 보며, 둑카가
그치는 것도  보며, 그리고 역시 둑카가  그치도록 인도하는 길도 보기'
때문이다.[각주3]

[각주3] 정말로 부처는 어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하나라도 보는 이
    는 다른 세 가지  또한 본다고 말하였다.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
    는 상호연관된 것이다.


둘째 가름: 첫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Dukkha(苦) -- 6

  어떤 사람들이 그릇 인상 지우듯 "둑카에 대한 거룩한 진리"가 불제자
의 삶을 우울하거나 슬픔에 가득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
와 반대로 진정한 불제자는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에게는 공포와 번
민이 없다. 항상 고요하고 청아하여서 변화나 재난에 불안해하거나 좌절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부
처는 결코 우울하거나 어둡지 않았다.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언제나 미
소짓는 이"(mihita-pubbamgama)로  기술되었다. 불교회화나 조각에서 부
처는 항상 행복하고,  청아하고, 만족스럽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표현된
다. 괴로움이나 번민이나 고통의 자욱은 결코 찾아 볼 수 없다.[각주1]
불교예술과 불교건축, 불교사원은 결코 우울하거나 슬픈 인상을 주지 않
는다. 대신에 고요하고 청아한 기쁨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각주1] 고따마가 고행자였을 때 갈비뼈 전부가 드러나도록 야윈 모습을
    묘사 간다라Gandhara의  불상과 중국의  포우-키엔Fou-Kien[漢字 불
    명]에 또 하나의 불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깨닫기 전에, 그가 부
    처가 되고난 뒤 비판한 가혹한 고행 수련에 순종할 때의 모습이다.

  비록 삶에는 괴로움이 있지만 불제자는 삶을 어둡게 덮어 버리거나 괴
로움에 화를 내거나 못 견뎌해서는 안 된다. 불교에 의하면 삶에서의 주
요한 해악의 하나가 '혐오' 또는 증오이다. 혐오(pratigha;瞋 엘)는 다음
과 같이 풀이된다.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괴로움에 대한, 그리고 괴로
움에 관계된 것들에 대한 악의. 그 기능은 불행한 상태와 해로운 행위의
토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에 못 견뎌하는 것은 잘못이
다. 괴로움에 못 견뎌하거나 화를 내어서는 그것을 제거치 못한다. 오히
려 근심을 조금씩 더하며,  이미 불쾌한 형편을 악화시키고 더욱 화나게
한다. 필요한 것은 화를 내거나 못 견뎌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괴로움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
것을 어떻게 제거하는가  이해하고 나서 인내와 지성과 결단과 기력으로
기꺼이 실천하는 것이다.
《테라가타Theragatha》(長老偈)와  《테리가타Therigatha》(長老尼偈)
라 불리는 두 개의  고대 불경이 있다. 거기에는 남녀 부처 제자들의 즐
거운 말이 가득하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통하여 삶의 평화와 행복
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꼬살라Kosala의 왕이 부처에게 이렇게 말
했다. 수척하고, 천박하고, 창백하며, 야위었거, 호감이 없어 보이는 여
러 다른 종교의 제자와는 달리, 부처의 제자는 '즐거움이 가득하여 고취
되어  있으며(hattha-pahattha), 기쁨에  넘쳐 의기양양하며(udaggudagg
a), 정신적인 생활을 즐기며(abhiratarupa), 감각이 쾌활하고(pinitindr
iya), 번민에서 벗어났으며(appossukka), 청아하고(pannaloma), 평화롭
고(paradavutta), 가젤영양[각주2]의 마음으로(migabhutena cetasa), 즉
가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였다. 왕은 이런 건강한 기질이 '이 존
경스런 분들은 세존의 가르침의 위대한 의미를 깨달았으며 그 의미를 완
전히 깨달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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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2] <역주> 가젤gazelle영양은  소과 가젤라속의 영양羚羊으로서 아
    프리카, 이란, 인도, 몽골 등지의 건조한 지역에서 서식하는 동물이
    다. TV의 동물 다큐멘타리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므로 기
    회가 있으면 잘 관찰하기 바란다. 이런 비유가 뜻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

  불교는 우울함과  슬픔, 후회와 어두운  마음자세를 완전히 반대한다.
그런 것들은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장애로 여겨진다. 그 반면에 즐거
움(piti;喜)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Bojjhamgas;覺分)의 하나이
며, 열반을 깨닫는 수행을 하는데 필수적인 성품임을 꼭 기억해 둘 필요
가 있다.



셋째 가름: 두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苦)의 생겨남"(集)[각주1] -- 1

[각주1] <역주>  사무다야samudaya는 한역漢譯경전에서  集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 뜻은 生起, 즉 '생겨남'에 해당된다. 생겨나는 현상 모두가
    '모여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集이라는 말
    은 빈번히  '집착執着'이라는 단어와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소리가
    같기 때문이다.  물론 넓게보아 "두 번째  거룩한 진리"(集聖諦)안에
    집착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集' 자체를 집착으로 한
    정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苦)의 생겨남, 또는 둑카의 기원이다.(Duk
khasamudaya-ariyasacca;集聖諦) 두 번째 거룩한  진리에 대한 가장 대중
적이고 유명한 정의는 원전의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다
음과 같이 쓰여있다.
  '다시 존재함과 다시 생성함을 야기하는 것(ponobhavika), 그리고 열렬
한 탐욕에 구속되게 하는  것(nandiragasahagata), 그리고 여기저기서 신
선한 환희를 찾게 하는 것(tatratatrabhinandini), 그것은 "목마름"(열
망:tanha;渴愛)이다. 즉, ⑴감각적 쾌락에 대한 목마름(kama-tanha;慾愛)
이며, ⑵존재하려고 하고 생성하려고 하는 목마름(bhava-tanha;有愛), ⑶
존재하지 않으려는(자기 파괴의) 목마름(vibhava-tanha;無有愛)이다.'
  모든 형태의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존재가 계속되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 "목마름",  욕구, 탐욕 열망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일원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것이 연관되어있고
상호의존적이라서 제일원인이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둑카의
원인이나 기원으로 여겨지는 목마름도 다른  어떤 것에 그 발생(集)을 의
존한다. 그것이 감각(vedana;受)이다. 그리고 감각은 〔감각기관이 대상
에〕접촉함(phassa;觸)에 의존하여 일어나며, 그런 등등이 "조건 따라 생
겨남"(緣起)라고 알려진 동그라미를 이룬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마름"이 둑카를 불러일으키는 최초 또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
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뚜렷하고 직접적인 원인이다. 즉, '주요한 것'이
고 '두루 만연한 것'이다. 그래서 빨리원전의 어떤 곳에서는 '둑카의 기
원'(集)에 대한 정의  자체에, 항상 처음 위치로  주어지는 "목마름"에다
오염과 더러움(kilesa;煩惱,sasava dhamma;有漏法)을 덧붙여 포함시킨다.
불가피하게 지면이  제한된 우리 논의에서는  무명無明으로부터 일어나는
거짓된 자아관념이 이 "목마름"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기억해두면 족할 것
이다.
  여기 "목마름"이란 용어에는 감각적 쾌락과 부와 권력을 바라고 집착하
는 것만이 아니라 관념과 이상, 견해, 주장, 이론, 개념그리고 신앙을 바
라고 집착하는 것(dhamma-tanha;法愛,法執)도 포함된다. 부처의 분석에
의한다면 가족들간의 사소한 개인적  불화로부터 나라들간의 엄청난 전쟁
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이 이런 자기 본위의 "목마름"에
서 비롯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모
두 이런 자기 본위의 "목마름"에 근원을  두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논의와 대화를 경제적, 정치적  용어만으로 해결하려고 드는 거물급 정치
가들은 수박 겉만을 핥을 따름이며, 결코 문제의 진정한 근원에 파고들지
못한다. 부처가 랏타빨라에게 말했듯이  '세상은 궁핍한 것인데도 갈망하
고들 있다. 그래서 "목마름"의 노예(tanhadaso)가 된다.'
  누구라도 이기적 욕망이 세상의 모든 해악을 만들어낸다고 인정할 것이
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목마름"이란 욕망이 어떻
게 다시 존재하게끔 하고 다시금 생성(ponobha-vika)할 수 있게 하는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제 "첫 번째  거룩한 진리"의 철학적
측면에 대응하는 "두 번째 거룩한 진리"의 철학적 측면을 더욱 깊이 논의
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업과 다시  태어난다는 이론의 개념을 좀 알
아야 한다.
  존재들이 존재하여 지속되기에 필요한  '원인' 또는 '조건'이란 의미에
서의 네 가지 "영양분"(ahara;食)이 있다. 그것은 ⑴보통의 물질적인 음
식(kabalinkarahara;段食), ⑵우리의  감각기관(마음도 포함해서)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것(phassahara;觸食), ⑶식識 (vinnanahara;識食), 그리
고 ⑷의도 또는 의지(manosancetanahara;意思食)이다.
  이들 네 가지 중에 마지막으로 말한  의도는 살려고 하고, 존재하려 하
고, 또다시 존재하려고 하고, 계속 있으려 하며, 자꾸자꾸 생성되려는 의
지이다.[각주2] 그것은 존재와 지속의 근원을 지어내는 것으로서 유익하
고 해로운 행위들(kusalakusalakamma;善不善業)을  하려고 몸부림치는 것
이다. 그것은 "마음먹기"(cetana;思)와  같다. 우리는 부처가 정의한대로
"마음먹기"가 업業임을 앞에서 보았다. 바로 위에서 말한 "마음먹기"에
대해서 부처는 다음같이 말한다. '"마음먹기"의 영양분을 이해하면 세 가
지  형태의 "목마름"을  이해한다.'[각주3] 그러므로  "목마름", "의도",
"마음먹기" 그리고 '업'이란 용어는 모두 같은 것으로 정의된다. 그것들
은 생겨나려 하고, 존재해 있으려 하며, 다시금 존재하려 하며, 자꾸자꾸
생성되려 하고, 점점 더 자라나고, 점점 더 쌓아두려 하는 의지, 즉 욕망
으로 정의된다. 이는 둑카를 일으키는 원인이며,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
지 모임"의 하나인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行蘊)에 근원을 두고 있
다.

[각주2] 이  "의도"를 현대 심리학의 '리비도libido'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역주> 리비도는 엄밀히 말해서 심리학(psychology)이 아니라 정신분
    석학(psychoanalysis)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성적性的 본능의 에
    너지로서 생애를 통하여 새로운  대상들에 부착하게 하고, 여러 형태
    의 동기화된 행동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각주3] "목마름"(tanha;渴愛)의  세 가지 형태는 ⑴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⑵존재하려 하고 생성하려 하는 욕망, ⑶존재하지 않으려는 욕
    망이다. 이들은  위에 주어진 "둑카의  생겨남"(samudaya;集)에 대한
    정의이다.

  부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둑카가 생겨나는 원인, 그  싹이 둑카 자체에 있는 것이지
둑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고 주의 깊이 주목하여 기억해야 한
다. 그리고 둑카를  그치게 하는 것, 둑카가 부서지게 하는  원인, 그 싹
역시 둑카 자체에 있는 것이지 둑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님도 똑같이 잘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빨리원전에서 자주 나오는 유명한 문구, '생
겨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치는 성질이 있다'(Yam kin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m)가 의미하는  바이다. 어떤
존재, 어떤 것, 또는 어떤 체계가 생겨나는 성질, 존재하려는 성질을 그
자체에 지녔다면 스스로 그치고 파괴되는 성질, 그 싹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둑카(다섯 가지 모임)는 스스로 생겨나는 성질을 그 자체에 지
녔으면서 스스로 그치는 성질 또한 그  자체에 지니고 있다. 이 점은 "세
번째 거룩한 진리", 즉  적멸寂滅(Nirodha)에 대한 논의에서 다시 다루어
질 것이다.



    셋째 가름: 두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苦)의 생겨남"(集) -- 2


  빨리어로 깜마kamma 또는 산스크리트어로 까르마karma('하다'라는 의미
의 어원 "끄리kr"에서 왔다)인  업業은 문자상으로는 '동작' 또는 '하다'
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업이론은 독특한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단지 "마음먹은 행위"를 의미하지 모든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많
은 사람들이 틀리게 제멋대로 사용하듯이 업이란 것은 업의 결과를 의미
하지 않는다.[각주1] 불교용어로서의 업은  결코 그것의 효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업의 효과는 업의 "열매"(kamma-phala;業果) 또는 "결과"(kamma-
vipaka;業報,業異熟)로 알려져있다.

[각주1] <역주> 우리도 업이라는 용어를 흔히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 대
    표적인 예가 '업의 굴레'라는 말이다. 그와  같이 업을 무슨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보게 되
    겠지만 업은 행위  그 자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업이라고 잘못
    아는 그것은 '업의 결과'(業報)이다.  '전생前生의 업 때문에 .....'
    라는 말은 원래의 의미를 잘 반영한다. 그러나 그 역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동양사상 전체에서 그런 피할 수  없고 정해져있는 운명이란 것은 없
    다. 운명이란 말 자체가  命이 '변화'(運)함을 의미하는데 의미가 왜
    곡되어 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그것은
    단지 과거에 행한 업이 인연따라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현재
    의 바른 업과 바른 인연으로써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마음먹기"는 욕망이 상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적
으로만 좋거나 나쁜 것이다. 따라서 업은 상대적으로만 좋거나 나쁜 것이
다. 좋은 업(kusala;善業)은 좋은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나쁜 업(a
kusala;不善業)[각주2]은 나쁜 효과를 만들어  낸다. "목마름", 의도, 업
은 이롭거나 해롭거나 간에, 그 효과를 내는 하나의 힘을 갖고 있다. 즉,
계속되게 하는 힘, 좋은 방향 또는 나쁜 방향으로 계속되게 하는 힘을 갖
고 있다.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간에 업은  상대적이며 "계속되는 순
환"속에 있다. 아라한은 행위를 하더라도 업을 쌓지 않는다. 아라한은 거
짓된 자아관념에서 벗어났으며, 계속되려 하고 생성하려 하는 "목마름"에
서 벗어났으며, 다른 모든  더러움과 오염(煩惱,有漏法)에서 벗어났기 때
문이다. 그에겐 "다시 태어남"이 없다.

[각주2] <역주> 흔히 '악업惡業'이란 말을 함부로 쓰는 데, 아꾸살라akus
    ala의 의미는 꾸살라kusala, 즉 선善의 부정태, 결여태인 불선不善이
    지  악이 아니다.[水野弘元,  《パ一リ語辭典二訂》(東京:春秋社,198
    1), 2쪽 참조] 동양에서는 원래 선에  반대되는 말이 악이 아니라 선
    의 부정형태, 즉 선의 결여태인  불선이다. 악이라는 말 자체도 기독
    교에서 선에 대비시키는 그러 악이 아니라 아름답지 않고, 싫은 것을
    가리킨다. 동양에서는 선과 악을  구분 지우는 절대신 같은 심판자가
    없기 때문이다. 악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우리말 용례의 하나
    가 '악필惡筆'이라는 말이다. 그  의미는 좋지않은 것을 뜻하지 악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옮긴이는 'good and bad'와
    'good and evil'을 善과 惡이라고 옮기지 않았다.

  업의 이론이 이른바 '도덕적 정의'나 '보상과 처벌'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적 정의나 상벌의 개념은 최고의 존재, 즉 절대신 개념에서 생
겨난 것이다. 신은 심판자이며, 입법자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려내
는 이다. '정의'라는 용어는  애매하고 위험해서 그 이름으로 이로움보다
해가 인류에게 더 많이 행하여졌다. 업의  이론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작
용과 반작용 이론이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거기에 정의나 상벌개념
으로 하는 일이란 없다. 모든 의도적  행위는 그것의 효과나 결과를 낳는
다. 좋은 행위는 좋은 효과를 내며  나쁜 행위는 나쁜 효과를 낸다. 그것
은 정의나, 당신의 행위를 심판하는 어느 누구 또는 어떤 권능이 내리는
보상이나 처벌이 아니다. 이는 그 자체의 성질, 그 자체의 법칙일 따름이
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업이론에 의하면
죽고 난 다음의  삶에서도 의도적 행위의 효과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
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에서 죽음을 무어라 하는가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존재란 것이 정신적  육체적 힘 또는 에너지의 결합체에
불과한 것임을 보았었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육신이 기능하지
않는 것이다. 육신이 기능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모든 힘과 에너지가 완
전히 멈춘 것일까? 불교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존재하려 하고, 지속하
려 하며, 자꾸자꾸 생성하려는 의지와 마음먹기, 욕구, 목마름은 모든 생
명들과 모든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며 심지어는 온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힘, 가장 엄청난 에너지
이다. 불교에 의하면 죽어서 몸의 기능이  사라져도 이 힘은 멈추지 않는
다. 그 대신 계속 다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어, "다시 태어남"이라 부르
는 것, 즉 다시금 존재함을 이룬다.
  이제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난다. '자아'나 '영혼'(아뜨만)같이 영원하고
변함없는 실재나 실체가 없다면 다시금 존재할 수 있는 것, 죽은 뒤에 다
시 태어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은 뒤의 삶을 논하기에 앞
서 이 삶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삶이 지속되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미 여러번 반복했듯이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것은 "다섯 가지 모
임"의 결합, 즉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들의 결합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변
화한다. 그것들은 잇닿은 두 순간에서조차 똑같이 있지를 않는다. 그것들
은 모든 순간마다 태어나고 죽는다. '"모임"들이 생겨나고 늙고 죽을 때,
오! 비구여, 이 모든 순간마다 너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그러므로 이번 생애  동안에서 조차 우리는 매 순간  나고 죽고 하지만
우리는 계속 살아 있다. 우리가 이 생애에서 자아나 영혼같이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실체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
찌 몸이 기능하지 않게 된 뒤에  그 힘들 스스로가 배후에 자아나 영혼없
이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이 육신이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어졌을 때에도 그 에너지는 몸 따라 죽
지 않아서 어떤 다른 모습이나 형태를  취해 계속 유지된다. 그것을 우리
는 다른 생애라 부른다. 한 어린이는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능력이
연약하지만 자신 안에  다 자란 어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른바 존재란 것을 구성하는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는 자신 안에 새로운
형태를 취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른이 되려고 점점 자라나고 힘
을 모은다.
  영원하고 변치 않는 실체가 없듯이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그냥 지
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명백히  한 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지나
가거나 옮겨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되지만 매순간 변화하는 한 계열이다. 그 계열은 정말, 움직이는 것일 뿐
이다. 그것은 밤새  타는 불꽃과 같다. 어느 순간에나  같은 불꽃이 아니
다. 어린이가 자라 예순 살의 늙은이가 된다. 분명 예순 살의 늙은이는 6
0년 전의 어린이와  같지 않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다.  그와 같이 여기서
죽어 다른 데 다시 난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다.
(na ca so na ca anno) 그것은 같은 계열의 연속이다. 삶과 죽음 간의 차
이점은 한 순간의 생각일 뿐이다. 이  생애에서 마지막 순간에 생각은 이
른바 내생에서 첫 순간 생각의 조건이  된다. 사실상 그것은 같은 계열의
연속이다. 이번 생애 자체에서도 똑같이 한 순간의 생각이 다음 순간 생
각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불교의 관점에서는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한 의
문이 대단한 미스테리가 아니며 불제자는 결코 이 문제에 대해 염려치 않
는다.
  존재하려 하고 생성하려 하는 이 "목마름"이 계속되는 한 "계속되는 순
환"(윤회)은 그치지 않는다. 오로지 실재,  진리, 즉 열반을 보는 지혜로
써, 이 몰아가는 힘, 즉 "목마름"을 단절시켰을 때만 멈출 수 있다.



       넷째 가름: 세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가 그침"(滅) -- 1


  세 번째 진리는 고통으로부터, 둑카의 계속됨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
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둑카가 그침"이라는 "거룩한 진리"(Dukk
hanirodha-ariyasacca;滅聖諦)이다. 그것이 바로 닙바나Nibbana, 즉 열반
涅槃이다. 대중적으로는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Nirvana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둑카를 완전히 제거키 위해서는  둑카의 근본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 근본이란  것은 "목마름"이다. 그래서  열반은 또한
"목마름의 소멸"(Tanhakkhaya;愛盡)이라는 용어로 알려져있다.
  그럼 당신은 물으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열반이 무엇인가? 이 아주 자
연스럽고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여러 문헌들이  쓰여졌다. 그것들은
그 문제를 밝혀주기보다는 더더욱 혼란시키기만 했다. 그 질문에 대한 유
일한 해답은 말로는 절대로 완전하고 만족스럽게 대답 할 수가 없다는 것
이다. 열반이라는 '절대진리' 또는  '궁극적 실재'의 진정한 성질을 표현
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너무나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감각기관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사물과 관념을 표현하려고 인간 대중들이 창조하여 사
용한다. '절대진리'같은 초월적 경험은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
서 그런 경험을 표현할 말이 있을 수 없다. 마치 물고기가 자기 어휘 안
에 굳은 땅의 성질을 표현할 말을 갖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거북이가 친
구 물고기에게 뭍을 걸어서 못에 돌아온 참이라고 말하였다. 물고기가 말
하였다. "물론, 헤엄쳤다는 뜻이겠지." 거북이는 뭍에서는 헤엄칠 수가
없다, 그것은 굳어서  그 위로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런게 어딨느냐, 자기 연못같이 물이 분명하다, 일렁이
며, 거기에 들어가 헤엄칠 수 있을 뿐이라고 우겨댔다.
  말은 우리가 아는 사물과 관념을 상징하는 기호이다. 그리고 이 기호들
은 보통 사물에서조차 그 진정한 성질을 전달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
언어는 진리를 이해하는 관건으로 착각되어 그릇되이 여겨지고 있다. 그
래서 '무지한 사람은 수렁에 빠진 코끼리처럼  말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
다'고 《능가경楞伽經》(Lankavatara-sutra)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어없이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열반을 긍정적인 용어로써 표현하여 설명한다면 우린 당장에 그
런 용어와 어우르는 관념으로 파악할 것이다. 그런 관념은 아예 뒤바뀐
것이기 쉽다. 그래서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 보통이다.―아마도
덜 위험한 형식이리라. 그래서 "목마름의 소멸"(愛盡), "합성되지 않음",
"조건에 구애되지 않음"(Asamkhata;無爲), "탐욕이 없음"(Viraga;離貪,離
慾), "그침"(Nirodha;寂滅), 열반涅槃(Nibbana), 즉 "불이 꺼짐"이나 '소
멸' 같은 부정적 용어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빨리원전에 보이는 대로 열반에 대한 몇 개의 정의와 묘사를 고려해 보
기로 하자.
  '그것은 바로 이 "목마름"이 완전히 그치는 것이다. 목마름을 포기하는
것이다. 목마름을 단념하는 것이다. 목마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목마름
에서 떠나는 것이다.'
  '조건 따라 있는 것이 모두  고요해지고, 모든 더러움을 포기하고, "목
마름"을 소멸하고, 떠나고, 그치는, 그것이 열반이다.'
  '오! 비구들이여, 무엇이 '절대적인'("조건에 구애되지 않는":無爲) 것
인가? 오! 비구들이여, 그것은 탐욕(ragakkhayo;貪)의 소멸, 증오(dosakk
hayo;瞋)의 소멸, 미혹(mohakkhayo;痴)의  소멸이다. 오! 비구들이여, 이
것을 '절대적인' 것이라 부른다.'
  '오! 라다Radha야, "목마름의 소멸"(愛盡)이 열반이다.'
  '오! 비구들이여, 조건에 따른  것이거나 조건에 따르지 않는 것이거나
간에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여의는 것이(離慾)이 최상의 것이다. 말하자
면 자만에서 벗어나는 것, 목마름을 부수는  것, 집착을 뿌리뽑는 것, 계
속됨을 끊어 버리는 것, "목마름"을 소멸시키는 것, 집착을 여읨, 〔둑카
의〕그침, 그것이 열반이다.'
  한 "방랑수행자"(Parivrajaka)가 "열반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단도직입
적으로 질문을 했을 때 부처의 수제자 사리뿟다Sariputta(사리불舍利佛)
의 대답은 부처가 (위에) 설정한  "조건에 구애되지 않음"의 정의와 같았
다. 즉, '탐욕의 소멸, 증오의 소멸, 미혹의 소멸'이었다.
  '탐욕과 이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取蘊)에 대한 열망을
버리고 부수는 것, 그것이 둑카를 그치게 한다.' [사리뿟따의 말]
  '계속됨과 생성(Bhavanirodha)을 그치는 것이 열반이다.'[또 다른 제자
무실라의 말]
  그리고 더 나아가, 부처는 열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으며, 조건에 구애되지 않
는 것이 있다.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으며, 조건에 구애되지 않는 것
이 없다면, 태어나고, 자라고, 조건에 따르는 데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
나지 않고, 자라지 않으며, 조건에 구애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
나고, 자라고, 조건에 따르는 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단단함(地), 유동성(水), 열(火), 그리고 운동(風)의 이 네 가
지 원소(四大)는 있는 곳이 없다. 길이와 너비, 미세함과 거대함, 이로움
과 해악, 이름과 형상, 등등의 개념은  모두 허물어졌다. 또한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서있는 것도, 죽음도 태어남도, 감각의
대상들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열반이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부정적인 것
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되고, 자아를 멸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열반은 분명히 말하건데 자아를  멸하는 것이 아니다. 멸할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뜻이 있다면 자아에 대한 미혹이나
거짓된 관념을 멸한다는 것이다.
  열반이 긍정적이다, 또는 부정적이다라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부
정적'이나 '긍정적'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며 양분되는 것의 영역에 들어
있다. 이 용어들은 열반에 적용될 수 없다. 절대진리는 양분되는 것과 상
대성을 떠나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단어가 반드시 부정적인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건
강에 해당하는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단어는 아로갸arogya(無病)라는 부
정적인 용어인데 직역하면 '병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로갸는 부
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불멸의 존재"(산.Amrta,빨.Amata;不死)
라는 단어 또한 열반의 상당어인데 부정적이다. 부정적 가치에 대한 부정
은 부정이 아니다. 열반에 대한 잘 알려진 동의어의 하나가 '자유'(빨.Mu
tti,산.Mukti;脫)이다. 아무도 자유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리
라. 그러나 자유에 있어서도 부정의  측면이 있다. 자유는 언제나 방해되
는 것, 해로운 것, 부정적인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유
는  부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뭇띠(Mutti;脫)  또는 비뭇띠(Vi-mutti;解
脫), 즉 '절대적 자유'인 열반은 모든 해악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열망과
증오와 무지로부터의 자유로움, 모든 양분되고 상대적이며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받는 모든 용어에서 벗어난 것이다.



       넷째 가름: 세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가 그침"(滅) -- 2


  우리는 《마지마-니까야》(中部)의 《다뚜비방가-경Dhatuvibhanga-sutt
a》(M.140)[分別六界經(中阿含162)]에서 완전한 진리로서의 열반 개념을
약간 얻을 수 있다. 이 최고로 중요한 교설은 부처가 뿍꾸사띠에게 전해
준 것이다. 한밤중에,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스승은 그가 이지적이고 열성
적인 것을 알고서 설법을 하였다. 경에서 해당되는 부분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단단함, 유동성, 열, 운
동, 공간과 의식이다. 그는 그것들을  분석하여 그것들 중에는 '내 것'이
니 '나'니 '내 자신'이랄 것이 없음을 밝혀 내었다. 그는 의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가, 기쁘고 불쾌하고 또 그도 저도 아닌 감각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가를 이해하였다. 이 앎을 통해 그의 마음은 집착을 여
의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순수한 평온함(upekha;捨)을 발견하게 되었
다. 지고한 정신적 경지를 성취하도록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순수한 평온함이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한다.
  '내가 "무한한 공간의 영역"(空無邊處)에서  이 정화되고 더럼 없는 평
온함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마음을 개발한다 하더
라도 그것은 정신이 만들어 낸 것(samkhatam;行)에 지나지 않다.[각주1]
내가 "무한한 의식의 영역"(識無邊處)에서 이 정화되고 더럼 없는 평온함
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 내가 "아무것도 없는 영역"(無所有處)에서,
..... 또는 "지각하지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영역"(非想非非想處)에
서 이 정화되고 더럼 없는 평온함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것과 조화를 이
루도록 마음을 개발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신이 만들어 낸 것에 지나
지 않다.' 그리하여 그는 지속과 생성(bhava;有) 또는 소멸(vibhava;無
有)을 정신적으로  창조하거나 의도하지 않게 된다.[각주2]  그는 지속과
생성 또는 소멸을 구성하거나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걱정이 없기에, 내
면이 완전히 고요해 졌다.(스스로 반열반에 들어서 불이 완전히 꺼졌다.:
paccattamyeva parinibbayati) 그래서  '태어나는 일은 다시없다. 성스럽
게 살아왔으며, 해야될 일은 다하였다. 이 때문에 해야할 일이 더이상 남
아 있지 않다'라고 알게 된다.

[각주1] 모든  정신적이고 신비로운 경지들은 그것이  순수하고 지고하다
    하여도 정신의 창작물이고,  마음이 만든 것이며, 조건에  따라 있는
    것이고, 구성된  것(samkhata;行)임에 유의하라.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며, '진리'(sacca;諦)가 아니다.
[각주2] 이것은 그가 새로운 업業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그는 "목마름", '의도', "마음먹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기쁘거나, 불쾌하거나 또는  그도 저도 아닌 감각을 경험할
때에는 그것이 늘 그러하지 않음을, 그것이 자기를 묶고 있지 않음을, 그
것을 욕망에 의해 경험하지 않게 돛밗알게 된다. 어떤 감각이 있더라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감각을  경험(visam-yutto)한다. 그는 몸이 해체되
면 모든 감각이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안다. 마치  호롱의 불꽃이 기름과
심지가 다하였을 때 꺼져 버리듯이.
  '오! 비구여, 그러므로  그런 깨달음을 얻은 이는  절대적 지혜를 얻은
것이다. 모든 둑카의 고갈이 거룩한 절대적 지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진리에 기초한  이런 그이의 해방은 흔들릴 수  없다. 오! 비구여,
그것이 비실재적이라는 것(mosadhamma;虛妄法)은  거짓이다. 그것이 실재
라는 것(amosadhamma;不妄法), 즉 열반이라는 것은 '진리'(Sacca;諦)이
다. 오! 비구여,  그러므로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 '절대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이며 거룩한 진리'(paramamariyasaccam)
는 열반이다. 그것은 '실재'이다.'
  다른 곳에서 부처는  분명히 열반이란 말이 들어갈  장소에 '진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진리와 진리에로 인도하는 길을 가르치
겠노라.' 여기서 '진리'는 분명히 열반을 의미한다.
  그러면 '절대진리'란 무엇인가?  불교에 의하면 '절대진리'란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조건에 따라서 있고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내면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건 간에 '자아'니,
'영혼'이니, '아뜨만'이니 하는 변화하지 않고, 무궁하며, 절대적인 실체
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진리'이다. '진리'는 부정적 의미의 진리
로서의 대중적 표현법이 있더라도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 진리
의 깨달음, 즉 미혹이나  맹됨(無明)없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如實하
게) 보는 것은 열렬한  목마름을 고갈(Tanhakkhaya)시키고 둑카를 그치게
하는 것(Nirodha)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여기서 열반이 윤회輪廻와 다르
지 않다는 대승불교의 견해를  기억하는 것은 흥미있고 유용하다.[각주1]
윤회나 열반은 당신이 보는 방법―주관적으로, 또는 객관적으로―에 따라
서 같은 것이 된다. 이 대승불교의  견해는 아마도 바로 우리의 개략적인
논의에서 참조하고 있는 정통 상좌부의 빨리원전에 보이는 개념들에서 발
전되어 나온 것 같다.

[각주1]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菩薩)는 '윤회는  열반과 다른 어떤 것
    도 아니며, 열반은 윤회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中論頌》25.19)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what the Buddha taught" (Gordon Fraser Gallery, 1959)
              지은이: Walpola Rahula / 옮긴이: 이 승 훈

       넷째 가름: 세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가 그침"(滅) -- 3

  열반이 열망의 고갈로부터 얻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하면 잘
못이다. 열반은 그 어떤 것의 결과도 아니다. 만약 그것이 어떤 결과라면
원인이 만들어 내는 효과이어야 한다.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
따라 있는 것"(行)이다. 열반은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원인과 결
과를 떠나있다. 진리는 결과도 효과도 아니다. 그것은 선정禪定이나 삼매
三昧라는 신비로운 정신적 경지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진
리는 그냥 있다. 열반은 그냥 있다.[각주1]  유일하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열반을 깨닫도록 인
도하는 길이 있다. 그러나 열반이 이 길의 결과는 아니다. 당신은 길따라
산에 오른다. 그렇다고  산이 길의 결과이거나 길이내는  효과는 아니다.
당신은 빛을 본다. 그러나 빛이 당신 시력의 결과는 아니다.

[각주1] <역주> 원문에는 'TRUHT IS. NIRVANA IS.'로 되어있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열반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열반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궁극적'이라면 그 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열반 뒤에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 진리'가 아닐  것이며, 열반이 아닐 것이다. 라다
라는 승려가 부처에게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였다. '열반의 목
적(또는 결과)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어떤, 열반의 목적이나 결과를
믿어 의심치 않아서  열반뒤의 어떤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대답하였다. '오!  라다야, 그 질문은 한계를  벗어났구나.(즉, 관점에서
벗어났다.) 열반과 더불어 거룩하게 사는 이는 열반을 (완전한 진리속으
로 들어가는) 삶의 마지막 관문으로 여기고,  삶의 목표로 하고, 삶의 궁
극적 결말로 여긴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열반 또는 반열반般涅槃(Parinirvana)에 드셨
다' 같은 통속적이고 부정확한 몇몇 구절들은 열반에 대하여 많은 허구적
추측을 불러일으켜 왔다.[각주2] 당신이 '부처님이 열반이나 반열반에 드
셨다'라는 구절을 듣는 순간 열반이 어떤  상태, 또는 어떤 영역, 아니면
어떤 위치로, 그렇게 어떤 류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이 아는
바에 따라 '존재'라는 단어의 용어상의 의미로 열반을 상상해 내려고 애
쓴다. '열반에 들었다'는 이 통속적인  표현은 원전과는 다른 것이다. 원
전에는 '죽은 뒤 열반에 들었다' 같은  것이 없다. 부처의 죽음을 정의하
거나 열반을 실현한 아라한을 정의하는데 쓰이는 반열반(parinibbuto)이
라는 단어가 있지만 그것은 '열반에 들다'를 뜻하지 않는다. 반열반은 간
단히 말해서 '완전히 지나가 버림', '불이 완전히 꺼짐' 또는 '완전히 고
갈됨'을 뜻한다. 부처나 아라한에게는 죽은  뒤에 다시 존재하는 일이 없
기 때문이다.[각주3]

[각주2] '부처님의 반열반 뒤에' 대신 '부처님의 열반 뒤에'라고 쓰는 사
    람들이 있다. '부처님의 열반 뒤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런 표현은 불교 문헌에서 알려져  있지 않다. 언제나 '부처님의 반열
    반 뒤에'라고 쓰여있다.
[각주3] <역주> 열반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완전한 죽음"이라고 이해
    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전혀 옳지 않다. 열반은 삶과 죽음, 그 어
    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은 양분되고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열반을 죽음과  관련지어 오해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도 부처나 승려의  죽음을 '열반'이라고 잘못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
    다.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열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열반의 세계에
    서 삶과 죽음을 바라본 말을 듣는다면  이런 오해는 풀릴 것이다. 열
    반의 세계에서  삶을 바라보는 말로서는  《삼국유사》의 '사복설화'
    만큼 여실 如實한 것은 다시없다.
      옛날 경주에  어느 과부가 남자와 통하지도  않고 잉태하여(不夫而
    孕)* 아이를 낳았는데 열 두  살까지는 말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
    하였다. 그래서 사동蛇童(때로는 사복蛇卜이라고도 한다)이라고 불렸
    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사동은  원효를 찾아갔다. 원효가 예를 다하
    여 인사하였으나 답례도 않고서,
      '"자네와 나의 지난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그 소가 죽었으니 장
    사지내러 가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원효가 "좋다"라고 말했다. 집에
    도착하여 원효에게  포살수계布薩受戒(참회의식)를 행케하여, 원효가
    시체에 축원을 드리며 가로되 "나지  말아라! 그로 인한 죽음이 고苦
    (둑카)니라. 죽지 말아라! 그로  인한 태어남이 고니라"라고 하였다.
    사동이 "제문이 번거롭다"고 하며 고쳐 말하였다. "죽음과 남이 모두
    고니라!"'
      "君我昔日馱經, 今已亡矣, 偕葬何如?" 曉曰: "諾." 遂與到家, 令曉
    布薩受戒, 臨尸祝曰: "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 福曰: "詞
    煩." 更之曰: "死生苦兮."  [《三國遺事》, 〈義解第五〉, 蛇福不言;
    《三國遺事引得》(서울:통나무,1992) 112~113쪽]
      * 대게 "과부가 남편없이 잉태"했다고 잘못 옮기고나서, 사복의 신
    분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대해서, 그리고 사
    복설화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상현,〈蛇福說話에 나타난 華嚴思想
    〉 [《新羅華嚴思想史 硏究》(서울:민족사,1991), 161~187쪽]을 참고
    하라.

  이제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난다. 부처나 아라한에게는 죽은 뒤, 즉 반열
반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나? 이것은 대답되지 않는 질문의 범주(avyakat
a;無記)에 들어간다.y부처는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우리 어휘중의
말로는 아라한의 사후에 일어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부
처가 밧차Vaccha라는 한 "방랑수행자"에게  대답할 때 아라한의 경우에는
'태어남'이나 '태어나지 않음' 같은 용어가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왜
냐하면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에  어우러지는 물질, 감각, 감지, 정
신의 활동, 의식(識)같은 것들이 완전히 부수어지고 뿌리뽑혀서, 죽은 뒤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은 뒤의 아라한은 나무의 공급이 그쳐서 꺼진 불이나, 심지와 기름이
다되어 꺼진 호롱의  불꽃에 자주 비유된다. 여기서  꺼진 불꽃이나 불에
비유되는 것은 열반이 아니고 열반을 실현한 사람의 "다섯 가지 모임"으
로 이루어진 '존재'임이  어떤 혼동됨 없이 명확하고  분명히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을 강조해야겠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대 학자들까지도 열
반에 대한 비유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반은
결코 꺼진 불이나 꺼진 등에 비유되지 않는다.



       넷째 가름: 세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가 그침"(滅) -- 4


  또 다른 통속적인 질문이 있다. 자아가  없고 아뜨만이 없다면 누가 열
반을 깨닫는  것일까? 열반까지 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자아'가 없다면 지금 생각하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는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사고 그 자체일 뿐이고 사고 배후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았
다. 그와 똑같이 깨닫는 것은 지혜,  깨달음 그 자체이다. 깨달음 배후에
있는 다른 자아 같은 것은 없다. 둑카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존
재건, 사물이건, 또는 체계건, 그 어떤 것이든지 발생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 자체에 그치고 파괴되는 성질과  싹이 있음을 보았었다. 그래서 둑카,
즉 "계속되는 순환"인 윤회에는 생겨나는 성질이 있다. 그것에는 역시 그
치는 성질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둑카는 "목마름"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
고 지혜(般若) 때문에 그친다.  "목마름"과 지혜는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
둘 다 "다섯 가지 모임"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생겨나는 싹뿐만 아니라 그치는 싹도 "다섯 가지 모
임"속에 들어있다. 이것이 다음과 같이  부처가 말한 유명한 격언의 진정
한 의미이다. '이 육척 단신의 감각할 수 있는 몸 그 자체로 나는 세상
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그침과, 세상이 그치도록 이끄는 길을 분명
히 알았다.' 이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전부가 "다섯 가지 모임"에 기
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자신에 기초함을 의미한다.(여기서는
"세상"(loka;世間)라는 말이 둑카가 있어야  할 곳에 쓰여졌다.) 이는 또
한 둑카의 생겨남과 그침을 낳는 외적인 힘이 없다는 의미이다.
  "네 번째 거룩한 진리"(다음 가름에서 다루어질 것이다)에 의해서 지혜
를 개발하고 수행을 할 때 삶의 비밀을 보며, 사물의 실재를 그 자체로서
보게 된다.[각주1] 비밀이 벗겨졌을 때, 진리를 보게 될 때, 미혹 속에서
열심히 윤회의 지속을 만들어 내는 모든  힘들이 잠잠해지고, 더 이상 업
이 형성한 것을 양산해 내는 짓도 할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미혹이 없으
며, 더 이상 계속될 "목마름"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울증의 원인이
나 비밀을 환자가 발견하여 알았을 때 치료되는 정신병과 같다.

[각주1] <역주> 칸트Kant,Immanuel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물들 그 자
    체(Ding an sich)를  보게 된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이 '사물들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물들 그 자체'는 오직 '예지
    적인 직관', 즉 신의 직관만이 인식할 수 있고 인간의 오성으로는 감
    성에 의해 경험되는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힐쉬베르
    거, 《서양철학사(下)》, 472 ~473쪽 참고]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최고선'(summum bonum)이 죽은  뒤라야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은 바로 이  생애에서 실현할 수 있다. 당신은 그것
을 '성취'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진리', 즉 열반을 깨달은 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는
모든 '정신 장애'와 강박  관념에서 자유롭고, 다른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걱정과 분쟁에서 자유롭다. 그의 정신 건강은 완벽하다. 그는 과거를 후
회치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재에서  충만된 삶을 산
다. 그래서 자아를 내어 비추는 것이  아닌 순수한 감각으로 사물을 음미
하고 즐긴다.[각주2] 그는 즐겁고, 고취되 있으며, 순수한 삶을 즐긴다.
그의 감각기관은 상쾌하고 고통에서 자유로우며, 청정하고, 평화롭다. 그
는 이기적 욕구와 증오, 무지, 잘난척,  자만심, 그리고 그런 모든 '더러
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순진무구하고, 부드러우며, 보편적 사랑과 자
비, 친절, 동정심, 이해심,  그리고 너그러움이 가득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봉사는 순수하기 그지없으며, 그것은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심지어는 어떤
정신적인 것도 쌓아두지 않는다.  그는 '자아'에 대한 미혹과 생성하려는
"목마름"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각주2] <역주> 여기 "내어 비춤"이라고 옮긴 원문의 'projection'은 '투
    사投射'라고 번역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로서의 'pro
    jection'은 자기 속에 억압된 경향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
    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계모가  아이를 미워하고 있는데 그 미워하는
    마음이 억압을 받아서, 오히려 그 아이가 자기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
    각하는 것이 그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 'p
    rojection'이 그런  의미에만 한정된다고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번역에서는 'projection'을 그 의미에만 한정시키지 않을 것이다. 옮
    긴이가 "내어 비춤"이라고 옮긴  것은 '비루먹은 개 눈에는 비루먹은
    개만 보인다'는 식으로 사물을  주관적으로 왜곡하여 보는 것 전부를
    가리킨다.

  열반은 모든 양분되고 상대적인  용어들을 떠나있다. 그래서 그것은 선
과 악, 옳음과 그름, 존재함과 존재치 않음 같은 우리의 개념들을 떠나있
다. 심지어는 열반을 기술할 때 사용되는 '행복'(樂)이란 단어조차 여기
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사리뿟따가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오!
벗이여, 열반은 행복이다! 열반은 행복이어라!' 그러자 우댜이Udayi가 물
었다. '하지만 사리뿟따 친구여, 감각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일 수
있겠는가?' 사리뿟따의 대답은 고도로 철학적이며 평범한 이해를 떠난 것
이었다. '감각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다.'
  열반은 논리와 이성(atakkavacara;推論)을 떠나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
반 또는 '궁극적 진리' 혹은 '실재'에 대해 고도의 사변적인 논의를 한다
하여도 그것은 자주 쓸데없는 지적 유희로 전락하며, 그런 방법으로는 열
반을 결코 이해치 못할 밖에 없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는 상대성이론에
대해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대신에 참을성 있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
를 해나간다면 어느날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열반은 '지혜로운 이
가 자신안에서 깨닫는  것'(paccattamveditabbo vinnuhi)이다. 만약 우리
가 그 "길"을 참을성 있게 근면하게 따라간다면, 열심히 수련하여 우리
자신을 정화한다면, 그리고 필수적인 정신적 개발을 달성한다면, 어느날
우리 자신 안에서 열반을 깨달을 것이다. 수수께끼 같고 어마어마한 말들
로 우리 자신을 짐지우는 일없이.
  그러면 이제 열반을 깨닫도록 인도해주는 "길"로 넘어가기로 하자.



           다섯째 가름: 네 번째 거룩한 진리: "길"(道) -- 1


  "네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苦)의 그침"에 인도하는 "길"이다.(Duk
khanirodhagaminipatipada-ariyasacca;道聖諦)  이것은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기에 "가운데 길"(Majjhima Patipada;中道)로 알려져 있다. 그 한 극
단은 감각적 쾌락을 통해서 행복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등하고, 천
하며, 무익하다. 그리고 그저 그런 사람이 가는 길이다.' 다른 것은 여러
형태의 금욕주의로서 자기를 학대(苦行)하여 행복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
은 '고통스럽고, 무가치하며, 무익하다.'  처음에 부처는 자기 스스로 이
양극단을 시도해보았다. 그래서 그것이 쓸모 없음을 깨달았고, 개인적 체
험을 통하여 '눈뜸과 앎을 주고, 고요함과 통찰력, 깨달음 그리고 열반에
인도하는' "가운데 길"을 발견하였다.  이 "가운데 길"은 일반적으로 "거
룩한 여덟  길"(Ariya-Atthangika-Magga;八正道)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여덟 범주 또는 여덟 갈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1. 바른 이해(Sammaditthi;正見)
     2. 바른 생각(Sammasankappa;正思惟)
     3. 바른 말(Sammavaca;正語)
     4. 바른 행위(Sammakammanta;正業)
     5. 바른 생계수단(Sammaajiva;正命)
     6. 바른 노력(Sammavayama;正精進)
     7. 바르게 마음을 일깨우기(Sammasati;正念)
     8. 바른 정신집중(Sammasamadhi;正定)
  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부처가 45년  동안 몸바친 가르침 전부가 이  "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발달상태와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방법과 다른 말로 설
법하였다. 그러나 불교 문헌들에  흩어져있는 그들 수많은 법문의 진수는
"거룩한 여덟 길"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길"의 여덟 범주 또는 갈래를  위에 있는 일반적인 조항번호 순서대로
하나하나 차례대로 따르고 실천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보다
는 각 개인의  능력이 허용되는 정도에 따라 더 많이  또는 그보다 적게,
동시에 발달시켜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서로서로 연결되어 각기 다른 것
들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여덟 요소는 불교 수행과 교육의  세 가지 진수(三學), 즉 ⑴윤리적
행위(Sila;戒), ⑵마음 닦기(Samadhi;定), ⑶지혜(Panna;慧)를 증진시키
고 완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 항목에 따라서
길의 여덟 갈래를 무리 짓고 설명한다면  명확하게, 더 잘 이해하는데 보
다 도움이 될 것이다.
  '윤리적 행위'(戒)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자비라
는 광대한 개념으로 짜여있다. 그것은 부처가 가르친 토대 위에 있다. 많
은 학자들이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쓸 때에 부처가 가르친 이 위
대한 이상을 잊고서 메마른 철학적, 형이상학적 헤메임에만 탐닉하고 있
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부처는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이의 행
복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bahujanahitaya bahujanas
ukhaya lokanukampaya) 가르침을 폈다.
  불교에 의하면 완전해지려 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발전시켜야될 두 가
지 성품이 있다. 하나는 자비(karuna;悲)[각주1]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p
anna;慧)이다. 여기서 자비는 감정적 측면 또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성품
인 사랑, 박애, 친절, 너그러움, 그리고 그런 류의 거룩한 성품들을 대표
하는데 비하여 지혜는 지적 측면 또는  정신적 가치들의 입장에 서 있다.
만약 누가 지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오로지 감정적인 측면만을 발달시킨
다면 그는 맘씨 좋은 바보가 된다. 한편 감정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지적
측면만 발달시키는 것은 다른 이에 대한 정이 없는 차가운 마음의 지성인
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둘 다 동등하게 발달시켜야
만 한다. 그것이 불제자가 사는 길이 가 닿는 곳이다. 즉,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지혜와 자비는 나눠지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주1] <역주> 여기서의 悲를 '슬플비'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이는 마
    음을 함께 하는 것, 즉  자비를 뜻한다. 한역 불교문헌에서 등장하는
    한자는 여타의 문헌과 다른 뜻, 다른 음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먼저, "거룩한 여덟 길"의 세 가지 요소가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 "윤리
적 행위"(戒)에 속해 있다. 즉,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태도"
가 그것이다.(조항의3,4,5번)
  "바른말"(正語)은 ⑴거짓말, ⑵험담과 중상 그리고 개인과 집단들 간에
증오심, 적의, 분열, 불화를 일으킬  만한 말, ⑶거칠고, 무례하고, 경박
하고, 심술궂고, 악의 있는 말, ⑷어리석고 쓸모 없고 바보 같은 수다와
잡담을 금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형태의 그릇되고 해로운 말을 금기시한
다면 자연히 진실을 말하게 되고, 친절하면서 상냥한, 쾌활하면서도 점잖
은, 뜻 깊고도 쓸모 있는 말을 쓰게  된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바
른 때와 바른 장소에서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쓸모 있는 것을 말할 수 없
다면 "거룩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바른 행위"(正業)는  도덕적이고, 존경할 만하고,  그리고 평화스러운
행위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생명의 파괴, 도둑질, 정직치 못
한 태도, 부정한 성관계를 금기시 해야 하며, 남이 올바르게 평화롭고 존
경할 만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일깨운다.
  "바른 생계수단"(正命)은 남에게  해를 주는 직업, 즉  무기와 살상 병
기, 취하는 음료, 독극물, 등을 거래하는  것과, 짐승을 죽이는 것, 사기
등등을 하는 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지 말아야되며, 명예스럽고, 부끄
럽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직업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해
악을 주며, 바르지  못한 생활 수단인 무기와  살상무기의 거래를 금하는
것을 볼 때 불교가 어떤 종류의  전쟁도 강력히 부인하는 것을 여기서 명
확히 알 수 있다.
  "여덟 길"의  이 세 가지  요소("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수
단")는 "도덕적 행위"를 구성한다. 불교의 윤리적, 도덕적 행위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 걸쳐 행복하고 조화로운 생활의 증진을 목적으로 함을 알아
야 한다. 이 도덕적 행위는 모든 지고한 정신적 성취를 위한 불가결한 기
초로 여겨진다. 이 도덕적 토대없이 정신의 발전은 가능치 않다.



           다섯째 가름: 네 번째 거룩한 진리: "길"(道) -- 2
-

  다음은 "마음 닦기"(Samadhi;定)의 차례이다. 그것에는 "여덟 길"의 다
른 세 요소가 속한다. 즉,  "바른 노력", "바르게 마음을 일깨우기"(또는
"주의하기"), 그리고 "바른 정신집중"이다.(조항의6,7,8번)
  "바른 노력"(正精進)이란 활기찬  의욕이다. ⑴해롭고 불건전한 상태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의욕, ⑵이미 일어난 그런 해롭고 불건전
한 상태를 제거하려는 의욕, ⑶이제까지 일어나지 않은 유익하고 건전한
상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고, 계기를 부여하는 의욕, ⑷이미 존재하는
유익하고 건전한 상태의 마음이  완전해지도록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하려
는 의욕이다.
  "바르게 마음을 일깨우기(또는  "주의하기")"(正念)는 ⑴몸의 동작(kay
a;身), ⑵감각이나 느낌(vedana;受), ⑶마음의 활동(citta;心), ⑷관념과
사상, 개념, 그리고 사물들(dhamma;法)에 대하여 부지런히 일깨우고 염두
에 두며 주의하는 것이다.
  숨쉬기에 정신 집중하는  수행(anapanasati;安般守意)은 유명한 수련법
의 하나인데, 정신 개발을 위한, 몸에 관계된 수행법이다. 몸에 관계해서
주의력을 발달시키는 몇 개의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명상'의 한 형
태이다.
  감각과 느낌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불쾌하고,  그도 저도 아닌 모든 형
태의 느낌과 감각에 대해, 또 그것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
는가에 대해 명확히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의 활동에 대해서는 마음이  음란한지 아닌지, 증오에 차있는지 아
닌지, 미혹에 젖어있는지 아닌지, 마음이 산만한지 집중되어 있는지, 등
등을 지각하여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마음의 모든 움직임, 그것들이 어
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관념들과 사상과 개념과 사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의 성질과, 그것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가, 그것들이  어떻게 발전되는가, 그것들이 어
떻게 억제되고 파괴되는가, 그런 등등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이 마음 닦기 또는 명상의 네 가지 형태는 《사띠빳타나-경Satipatthan
a-sutta》(念處經; "마음을 일깨우기")에 자세히 다루어져있다.
  마음 닦기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요소는 일반적으로 황홀경 또는 무
아경이라 부르는 선정禪定의 네 가지 경지(四禪, 四靜慮)에 이끄는 "바른
정신집중"(正定)이다. 선정의 첫 경지에서는 감각적인 욕정, 악의, 게으
름, 걱정, 불안정, 냉소적 의심 같은  열렬한 욕망과 어떤 불건전한 생각
이 버려지며, 어떤  정신적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즐거운 느낌과 행복이
유지된다. 두 번째 경지에서 모든 지적 활동이 억제되며 평안한 마음과
'정신통일'이 개발된다.  그리고 즐겁고 행복한 느낌은  여전히 그대로이
다. 세 번째 경지에서는 즐거운 느낌, 그것은 동적인 감각인데, 그 또한
사라진다. 이때에는 마음 가득한  평온함과 더불어 행복한 성품이 그대로
있다. 선정의 네 번째 경지에서는 행복하거나 불행하건 간에 즐겁고 슬픈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순수한 평온과 각성만이 남는다.
  그렇게 마음을 "바른 노력",  "바르게 마음이 깨어있기", 그리고 "바른
정신집중"으로 훈련하고 닦아서 개발한다.
  남은 두 가지 요소, 즉 "바른  생각"과 "바른 이해"는 '지혜'(慧)를 구
성하게 한다.
  "바른 생각"(正思惟)은 사심  없는 자제와, 집착을 여읨과,  사랑의 생
각, 비폭력의 생각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에게로 확대되는 것
이다. 여기서 사심 없는 집착의 여읨, 사랑 그리고 비폭력이 지혜의 측면
으로 분류된 것에  주의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중요하다. 이는 진정한
지혜가 이 거룩한 성품들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과, 이기적인 욕망과 악
의, 증오와 폭력적인  생각 모두가 지혜의 결핍이  초래한 결과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간에 모든 삶
의 마당에서 그러하다.
  "바른 이해"(正見)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각주2]
그리고 사물을 진정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
다. 그러므로 "바른 이해"는 결국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
으로 환원된다. 이런 이해는 '궁극적  실재'를 보는 최상의 지혜이다. 불
교에 의하면 이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라 부르는
것은 지식이다. 그것은 기억의 집적이며 어떤 주어진 데이터에 의해 주제
를 이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조건에〕따른 앎"(anubodha;
隨覺,了悟)이다. 그것은 그리 깊지 않다. 진정 심오한 이해는 "꿰뚫음"(p
ativedha;貫通,通達)이라 부른다. 그것은 이름과 라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진정한 본성으로서의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런 꿰뚫음은 마음이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나고, 명상을 통하여 충분히 개발되었을 때만이 가능해진
다.

[각주2] <역주> 이런  점에서 불교를 훗설Husserl,Edmund의 현상학現象學
    에 관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섣부른 견해이다. 훗설
    에게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의심의 가능성도
    배제하는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윤명로, 〈훗설에 있어서의 現
    象學의 構想과 志向的 含蓄〉,  한국현상학회 편, 《現象學이란 무엇
    인가》(서울:심설당,1983), 29쪽]
      훗설은 '선험적 자아'의 확립을  통하여 과학의 발달에서 야기되는
    인간성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식의 가정
    이나 해결 태도는 불교철학과 전혀 관련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길"에 대한 이 짧은 논의로부터 그 길이 각자가 스스로 따르고 실천하
고 발전시켜야 할 생활방식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몸과 말과 마음에
서의 자기 수양이며 자기 개발이고,  자기 정화이다. 그것이 신앙, 기도,
예배나 의식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길"은 통념적으로 '종교'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완성을 통하여 '궁극적 실재'를 깨닫도록, 자유와 행복과 평
화를 완성시키도록 이끄는 길이다.
  불교국가에서는 종교적인 절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습과 의식이 있
다. 그것들은 진정한 "길"과는 상관이 적다. 그러나 어떤 종교적 감흥을
만족시켜주고, 발전이 덜된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이며, 그 사람들이 점진
적으로 "길"을 따르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거룩한 네 가지 진리"와 관련해서  우리에게는 실천해야될 네 가지 임
무가 있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苦)이다. 그것은 삶의 본성이다. 그것은
괴롭고, 슬프면서도 즐겁고, 불완전하면서 불만족스러우며, 늘 그러하지
않으며,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우리의 임무는 삶을 사실
그대로 명확하고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parinneyya;遍知)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의 기원"(集)이다.  그것은 욕망이며,
"목마름"이며, 다른 모든 열망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고, 오염이며 더러움
(煩惱)이다. 이 사실을 그냥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서 우
리의 임무는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부수어서, 뿌리뽑는 것이다.(paha
tabba;滅作)
  "세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가  그침"(滅), 즉 완전한 진리, 궁극적
실재인 열반이다. 여기서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sacchika
tabba;應作)
  "네 번째 거룩한 진리"는  열반을 깨닫도록 인도하는 "길"(道)이다. 그
러나 "길"을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길"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이 경
우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bhavetabba;修
習)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1


  일반적으로 '영혼', '자아',  '자기'라고 내세우는 것이나, 산스크리트
어로 아뜨만Atman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사람안에 영원하고, 늘 그러하
며, 절대적인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실재란 것은 변화하는 현상적 세
계 배후에 있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이다.  어떤 종교들에 의하면 각자 개
인은 신이 창조한 개별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죽은
뒤에는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 영혼의 운명은 창조자의 심판에
좌우된다. 또 다른 종교들에 의하면 영혼이 완전히 정화되어 마침내 영혼
이 기원되어 나온 신이나 범천梵天이나  우주적 영혼 또는 아뜨만과 하나
가 되기까지 여러 생애를 거친다. 사람의 이 영혼이나 자아는 사상을 생
각하는 자이고, 감각을 느끼는 자, 모든 좋고 나쁜 행위에 대하여 보상과
처벌을 받는 존재이다. 그런 개념은 자아관념이라 부른다.
  불교는 그런 영혼이나 자아 또는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데서 인
류의 사상사에서 독특한 입장에 서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자아관
념은 환상이며, 실재와 상응하지 않는 거짓된 신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그리고 '내 것', 이기적 욕망, 열망, 집착, 증오, 악의, 잘난척, 자
만심, 이기주의, 그리고 다른 더러움과  오염과 문젯거리 같은 해로운 생
각들을 낳는다. 그것은 개인적인 갈등에서부터 나라들 간의 전쟁에 이르
기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불화의 근원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모든
해악이 이 거짓된 견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관념이 심리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은
자기보호와 자기보존이다.  사람은 자기보호를 위하여  신을 창조하였다.
자기자신의 보호와 안전과 안녕을 위하여 신에게 의존한다. 마치 어린아
이가 자기 엄마, 아빠에게 의존하듯이. 사람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영원히
사는 불사의 '영혼' 또는 아뜨만의 관념을 품어 왔다.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달래려고 이 두 가지를 갈구한다. 그래서
그것들에 깊이 그리고 열광적으로 달라붙는다.
  부처의 가르침은 이런 무지와  나약함, 두려움 그리고 욕망을 떠받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제거하고, 부수고, 바로 그 뿌리를 잘라서 깨
달은 사람을 만들고자 목적한다. 불교에 의하면 우리의 '신'과 '영혼'에
대한 관념은 거짓이고 헛된  것이다. 이론적으로 고도로 발달하였다 하여
도 그것들은 모두 똑같이 복잡한 형이상학적, 철학적 미사여구로 옷입힌,
극도로 섬세한 정신의 "내어 비춤"이다. 사람에게 이 관념들은 아주 깊이
뿌리 박혀서 그렇게 친밀하고 그렇게 소중하며, 그것에 반대되는 어떤 가
르침도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는 자기 가르침이 "흐름
을 거스르는 것"(patisotagami;逆流行), 즉 사람의 이기적 욕망을 거스르
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깨달은 뒤 네 주가 지나고 나서 반얀나무[각주1]
아래 앉아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는 심오하고, 알기 어려우며, 이해하
기 어려우며, ..... 오로지 지혜로운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 진리를
깨달았다. ..... 욕망에 지배되며 우매한 대중에 둘러 쌓인 사람은 이 진
리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고, 고귀한 것이며,
심오하고, 섬세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각주1] <역주> 반얀나무banyan(榕樹)는 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루는 신
    비로운 나무이다. 이 나무의 특징은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 땅에 닿으
    면 그대로  줄기가 되어 퍼져나간다.  법정, 《인도紀行》(서울:샘터
    사,1991), 29~33쪽에 자세한 설명과 사진이 나와 있다.


  부처는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고서 그가 마악 깨달은 그 진리를 세상에
가르치려는 시도가 헛되지 않을까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래서 그는 세상
을 연꽃 웅덩이에 비교해 보았다. 연꽃 웅덩이에는 아직 물 속에 완전히
잠겨있는 연꽃들이 좀 있다. 수면에 올라와 있는 다른 것들이 있다. 물위
에 서 있는 다른 것들이 또 있으며 그 연꽃에는 물이 닿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도 똑같이 발달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진리를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그것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나 없음" 또는  "영혼이 없음"이란 교리는 "다섯  가지 모임"(五蘊)에
대한 분석과 "조건  따라 생겨남"(Paticca-samuppada;緣起)이란 가르침의
당연한 결과 또는 필연적 귀결이다.
  앞에서 "첫 거룩한 진리"(둑카;苦)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우리가 하나의
존재 또는 개체라고 부르는 것은 "다섯 가지 모임"으로 구성되었고, 이것
들을 분석하여 설명할 때 그 배후에 '나', 아뜨만 또는 '자아' 또는 어떤
변화하지 않고 영속하는 실체가  없음을 보았다. 그것은 분석적인 방법이
다. 종합하는 방법인 "조건 따라 생겨남"이란 교리를 통해서도 같은 결과
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에 의하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
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르고,  관련되고, 상호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불
교의 상대성이론이다.[각주2]

[각주2] <역주>  이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아인슈타인Einstein,Albert의
    상대성이론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여기
    서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연기론적으로 상호의존하
    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고전역학에서 '절대적'이라고
    만 여겨지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질량이 관측자의 속도나 관측자가
    받는 중력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다르게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
    한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2


  우리가 바로  "나 없음"(Anatta;無我)이란 문제를 정확히  다루기 전에
"조건 따라 생겨남"의 간추린 개념을 알아두는 것이 유용하다. 이 교리의
골자는 짧은 사행시 형태로 주어진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Imasmimsati idamhoti)
  이것이 생겨나서, 저것도 생겨난다.(Imassuppada idamuppajjati)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Imasmimasati idamnahoti)
  이것이 그쳐서, 저것도 그친다.(Imassanirodha idamnirujjhati)[각주1]

[각주1] 이것을 현대적인 형태로 고치면
        A가 있을 때는, B가 있다.
        A가 일어나, B는 일어난다.
        A가 없을 때는, B가 없다.
        A가 그쳐서, B가 그친다.
<역주> 이 주석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 습관 때문에
    A를 선행하는 것으로 B를 나중에 오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
    나 A와 B에는 어떤 것이라도 대응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
    모가 있으면 자식이 있다. 부모가 없으면 자식도 없다'라고만 생각하
    고 '자식이 있으면 부모가  있다. 자식이 없으면 부모도 없다'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식을 낳아야 비로
    소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서로
    관련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연기는 사슬이 아니라 원으로써 이해
    되어야 한다고 지은이는 분명히 말한다.


  조건에 따름과 상대성 그리고 상호의존의  이 원리에 입각해서 삶 전체
의 실존과 연속, 그리고 그 그침을  세분된 형태로 설명한다. 그것을 "조
건 따라 생겨남"(緣起)라 부르는데, 열두 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무명無明에 의하여 의도적 행위나 업 형성(行)의 조건이 마련된다.
     (Avijjapaccaya samkhara)
  2.  의도적 행위에 의하여 의식(識)의 조건이 마련된다. (Samkharapacc
     aya vinnanam)
  3.  의식에 의하여 정신적, 육체적 현상(名色)의 조건이 마련된다. (Vi
     nnanapaccaya namarupam)
  4.  정신적, 육체적 현상에 의하여 여섯 감각능력(六處: 즉, 신체의 다
     섯 감각기관과 마음)의 조건이 마련된다.(Namarupapaccaya salayata
     nam)
  5.  여섯 감각능력에 의하여 (감각적,  정신적)접합(觸)의 조건이 마련
     된다. (Salayatanapaccaya phasso)
  6.  (감각적,정신적)접합에 의하여 느낌(受)의 조건이 마련된다. (Phas
     sapaccaya vedana)
  7.  느낌에 의하여 욕망, 즉 "목마름"(愛)의 조건이 마련된다. (Vedana
     paccaya tanha)
  8.  욕망, 즉 "목마름"에 의하여 집착(取)의 조건이 마련된다. (Tanhap
     accaya upadanam)
  9.  집착에 의하여 생성 과정(有)의 조건이 마련된다. (Upadanapaccaya
     bhavo)
10.  생성 과정을 통하여 태어남(生)의 조건이 마련된다. (Bhavapaccaya
    jati)
11.  태어남을 통하여 (12)늙고 죽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등등(老·死·
    憂·悲·惱·苦)의 조건이  마련된다. (Jatipaccaya  jaramaranam ..
    ...)[각주2]

[각주2] <역주> 이것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시도가 아님
    에 주의해야 한다. 연기론緣起論은 다만, 삶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사
    람들을 돕기 위하여 윤회와  두카(苦)의 원인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근본불교의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설은 Narada,M.
    The Buddha and His  Teachings (Kandy:Buddhist Publication Societ
    y, 1988), Ch.25, pp.240~249을 참고하라.


  바로 이것이 삶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떻게 지속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가 이 형식을 반대 순서로 취한다면 그 과
정이 그치는데 이를 것이다. 즉, 무명이 완전히 그쳐서 의도적 행위나 업
형성이 그친다. 의도적 행위가 그쳐서 의식이 그친다. ..... 태어남이 그
쳐서 늘고 죽고 슬프고 그런 등등이 그친다.
  이 요소들은 서로 조건짓고(paticcasamuppada)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의 조건을 받고도(paticcasamuppanna) 있음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
서 그것들은 모두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래서 절대적인 것이나 독립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 이미 보았듯이 불교는 제일원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건 따라 생겨
남"은 원으로 여겨야하지 사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한 문제가  서구의 사상과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그러나 "조건 따라 생겨남"에 의한다면 불교철학에서
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또, 발생할 수도 없다. 존재하는 것 모두
가 상대적이고, 조건에 따르며, 상호의존적이라는데, 어떻게 홀로 자유로
울 수 있겠는가? 네 번째 "모임", 즉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行蘊)
에 속하는 의지는 다른 모든 사상처럼 조건에 따라서(paticca-samuppann
a) 있다. 이 세상에서 이른바 '자유'라  부르는 것 자체가 절대자유는 아
니다. 그 또한 조건에 따르고 상대적이다.  물론 그런, 조건 따른 상대적
인 '자유의지'란 것은 있지만, 그것은 조건에 구애되지 않은 것, 절대적
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따르고 상대적이라서 이 세상에 육체
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절대 자유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자유의
지'라는 말에 조건들로부터 독립된 의지, 원인과 결과로부터 독립된 의지
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 모든
존재가 조건에 따르고 상대적인데, 어떻게 의지나 어떤 물질 같은 것이
조건없이 생겨나고, 원인과 결과를  떠나서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인가?[각
주3] 여기서 다시 말하건대 '자유의지'에 대한 관념은 근본적으로 '신'과
'영혼', 정의, 보상과 처벌의 관념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
의지라는 것만이 자유롭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지'의 관념
자체도 조건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각주4]

[각주3] <역주> 바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늘날  우리 앞에 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인 생태와  환경의 파괴가 유래한다고 본다. 인류의
    생존이 생태계에 달려있다고 파악하지  않고, '나'의 외부 세계인 자
    연을 얼마든지 자기 의지대로  자유로이 해쳐먹어도 '나'에게는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이 근본 원인이다. 환경문제를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
    으로만 다루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치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연
    을 이해하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교정되어야 가능하다. 이미 우리에게
    깊이 훈습되어 있는 서양의 인간에  대한 실존적 인식과 자연에 대한
    정복의지를 연기緣起의 조화로  정화하여야 가능하다. 앞으로 불교의
    연기관,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에 의하여  생태와 환경문제를
    고찰하고 해결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전경
    수 교수의〈엔트로피, 부등가교환, 환경주의:문화와 환경의 공진화론
    〉[《과학사상》(서울:범양사), 1992가을  제3호, 85~109쪽]은 '전체
    로서의 환경'과 '부분으로서의 문화'라는 혁신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한번 읽어 볼 것을 간곡히 권한다.
[각주4] <역주> 여기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견해를 '숙명'이나 '필연'
    또는 '결정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자유'에 대한 반대 개념
    은 '구속'이지  '필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태길, 《倫理學》(서
    울:박영사,1987) 381쪽]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3

  "다섯 가지 모임"으로 존재를 분석한  것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조건
따라 생겨남"의 교리에 의해서도, 아뜨만이나 '나', '영혼', '자아' 또는
'자기'라 불려지는 불멸의 실체가 사람  안팎에 머물러 있다는 관념이 거
짓된 신앙일 뿐이며 정신을 내어 비추는 것이라 여겨질 따름이다. 이것이
불교의 "영혼 없음", "자아 없음"(Anatta;無我)이라는 교리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두  종류의 진리가 있음을 여기서 언급해야겠다.
즉, 관습적인 진리(빨.sammuti-sacca,산.samvrti-satya;世俗諦)와 궁극적
인 진리(빨.paramattha-sacca,산.paramartha-satya;勝義諦)가 그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나', '너', 존재', '개인' 등등의 표현을 쓸 때 그
런 자아나 존재가 없다고 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세상의
관습에 따라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 궁극적
진리에 '나'니 '존재'니 하는 것이 없다.《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M
ahayana-sutralankara)에서 말하길, '사람(pudgala;補特伽羅)은 명칭(pra
jnapti)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하여야 한다.(즉, 관습적으로는 존재하는 것
이 있다.) 그러나 실재(dravya)로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불멸의 아뜨만을 부정하는 것은  소승이건 대승이건 간에 모든 교리체
계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이 점에 있어 완전히 일치하는 불교전통
이 부처가 원래 가르쳤던 것에서 벗어났다고 추정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최근에 몇몇  학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자아개념을  살짝 끼워
넣으려 헛된 시도를 하는 것은 엉뚱한 짓이고 불교의 정신에 완전히 반대
된다. 이 학자들은 부처와 그 가르침을 존중하고 찬미하고 존경한다. 그
사람들은 불교를 우러러 본다. 그러나 자기들이 가장 명확하고 심오한 사
상가라고  여기는 부처가,  자기들이 그렇게도  바라마지않던 아뜨만이나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이 영원한 존재에 대한 요구에 부처의 지지를 구하고 있다. 물론 그 사람
들이 구하는 것은  소문자 s로 쓰는 사소한  개인적 자아(self)가 아니라
대문자 S로 쓰는 큰 '자아'(Self)이다.
  자기가 아뜨만이나 '자아'에  대해 믿는다고 솔직히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는 부처가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
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현존하는 원전에서 볼 수 있
는 한, 결코  부처가 인정하지 않은 관념을  불교에다 도입하려고 애쓰는
일은 누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신'과 '영혼'을 믿는  종교들은 이들 두 관념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그것들을 늘 반복하여  가장 웅변적인 어조로 천명하고 있
다. 만약 부처가 모든 종교에서 그토록 중요시하는 이들 두 관념을 읒
했다면 다른 것에 대해 말하듯  그것들을 공식적으로 천명했을 것이 분명
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감추어져있다가  그가 죽고 25세기가 지난 뒤에야
발견될 리는 없다.
  사람들은 부처의 "나 없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아가 부수어지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이 된다. 부처는 이에 무
심하지 않았다.
  한 비구가 한번은 그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자신속에서 영원한 것
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
까?'
  '그렇다, 비구여. 그런 일이 있다'라고 부처가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
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졌다. "우주는  저 아뜨만이다. 나는 죽은 뒤에
그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머물러 있으며, 늘 그러하고, 변하
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영원토록 존재할 것이다" 그가 모든 사변
적인 견해를 완전히  부수어 버리려고 하고, .....  "목마름"이 소멸되게
하며, 집착에서 떠남, 그침, 열반을 이루게 하는 교리의 감화를 여래나
그 제자에게 받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생각한다.  "나는 파괴당할 것이
다. 나는 부수어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
는 한탄하고 자기를 걱정한다. 슬퍼하고, 흐느끼고, 가슴을 치고, 정신이
나간다. 오! 비구여, 그렇게 자신에게서 영원한 어떤 것이 발견되지 않으
면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곳에서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내가 없다는(無我), 또
나는 어느 것도 가질 수 없다는(無所有) 이 생각은 배우지 못한 중생에게
는 무서운 것이다.'
  불교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부처가 존재는 물질, 감각, 감지, 정신이 형성한 것, 그리고 의식속에 있
다고 분석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 중에 자아는 없다라고 말
한다. 그러나 이들 "다섯 가지 모임"이  아닌 사람이나 어떤 다른 곳에서
도 자아가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입장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불가하다.
  그 하나는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존재는 오로지 이 "다섯 가지 모임"
로 구성된 것이며, 그 밖에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부처가
어떤 존재에 대하여 이들 "다섯 가지  모임"이 아닌 어떤 것이 있다고 말
한 곳이 없다.
  둘째 이유는 부처가 무조건적으로 아뜨만이나 영혼, 자아, 자기의 존재
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단호한 어조로 한군데서만 그런 것이 아니
라 여러번, 사람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간에, 우주의  다른 어떤 곳에
있거나 간에 그것들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예를 좀 들어보자.
《법구경法句經》(Dhammapada)에 부처의 가르침에서 극도로 중요하고 필
수적인 세 구절이 있다. 그것들은 스무째 가름의 5, 6, 7번이다.(또는 27
7,278,279절) 그 첫째 그리고 둘째 구절은 말한다.
  '조건 따라 있는 것은 모두 다 늘 그러하지 않다.'
  (Sabbe SAMKHARA anicca; 諸行無常)
  '조건 따라 있는 것은 모두 둑카이다.'
  (Sabbe SAMKHARA dukkha; 一切皆苦)
  셋째 구절은 말한다.
  '모든 법法에는 자아가 없다.'
  (Sabbe DHAMMA anatta; 諸法無我)
  여기서 첫째, 둘째 구절에는 "조건 따라 있는 것"(samkhara;行)이란 단
어가 쓰인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나  셋째 구절에는 그 자리에 법
法(dhamma)이란 단어가 쓰였다. 왜 셋째 구절에서 앞의 두 구절과 같이
"조건 따라 있는 것"(samkhara)이란  단어가 쓰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법이란 단어가 대신 쓰였는가?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요점이 있다.
  상카라samkhara(行)라는 용어는 "다섯 가지 모임", 즉 육체, 정신 모두
를 막론하고 조건에 따르고, 상호의존하며, 상대적인 모든 사물들과 상태
로 정의된다. 만약 셋째 구절이 '모든 조건 따라 있는 것에는 자아가 없
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록 조건에 따르는
것은 자아가 없지만  조건 따라 있는 것 외에서는, 즉  "다섯 가지 모임"
밖에서는 '자아'가 있을  수도 있다. 법이라는 용어가  셋째 구절에 쓰인
것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법이라는 용어는 상카라라는 용어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이다. 불교용
어 중에 법보다 넓은 의미의 용어는 없다. 그것은 조건 따라 있는 것들과
상태들뿐만이 아니고 조건에 따르지 않는 것들, 절대적 진리, 열반까지도
포함한다. 우주안이건 밖이건, 좋건  나쁘건, 조건에 따르건 조건에 따르
지 않건, 상대적이건 절대적이건 간에 이  용어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
다. 그러므로 이런 말, 즉 '모든 법에 자아라는 것은 없다'에 의한다면
"다섯 가지 모임" 안에서만 아니고 그  밖에 어떤 곳에서도, 즉 "다섯 가
지 모임" 밖에서도, 또는 "다섯  가지 모임"과 유리되더라도 '자아'가 없
고 아뜨만이 없음이 아주 분명해 진다.
  상좌부上座部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는 각 개인에서건 법에서건 간에 자
아가 없음을 의미한다. 대승불교 철학은 이점에 있어서 "개인적 차원의
나 없음"(pudgala-nairatmya)뿐만 아니라 "전 우주적 차원의 나 없음"(dh
arma-nairatmya)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어떤 차이점도 없이 정
확히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4


《마지마-니까야》의 《알라갓두빠마-경Alagaddupama-sutta》(M.22; {阿
黎咤經},中阿含200)에서 부처가 제자에게  설법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영혼설(Atta-vada)을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
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여라.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너희는 보
았느냐?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지 않
는 그런 영혼설을.'
  '정말로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훌륭하다. 오! 비구들이여, 나 역시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지 않는 그런 영혼설을 보지 못하였다.'
  만약 부처가 인정한 어떤 영혼설이  있다면 여기서 그것을 설명했을 것
이 분명하다. 그는 비구들에게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설은 받아들
이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의 견해로는 그런 영혼설이 없다.
그리고 사소한 것이든 거창한 것이든  간에 어떤 영혼설도 거짓되고 환상
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온갖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슬픔과 비애, 괴로움,
흔들림과 걱정을 줄줄이 엮어낸다.
  같은 경에서 계속 설법하며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자아도,  자아에 속하는 어떤 것도  정말로 찾아내지
못했으면서 "우주는 저 아뜨만('영혼')이다. 나는 죽은 뒤에 영원하고,
머물러있으며, 늘 그러하고, 변치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실재
로서 존재할 것이다" 이런 사변적인  견해, 그것은 완전히 바보스러운 것
이 아니냐?'[각주1]

[각주1] S.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은 이 문구에 대해 말하길, '부처가
    반박한 것은 작은  자아가 영구히 계속된다고 떠드는  거짓된 견 ㎖이
    다'(《인도철학》(Indian Philosophy), Vol.  I, London, 1940, p.48
    5)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
    로 부처는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인 아뜨만이나  영혼을 반박하였다.
    우리가 바로 지금 앞문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크건 작건 간에 그 어
    떤 자아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부처의 견해로는 아뜨만에 대한 모
    든 이론은 거짓된 것, 즉 정신의 "내어 비춤"이다.
<역주> 부처의 가르침이 다른 인도철학, 특히 요즘 잘나가는 인도의 명상
    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명상으로 얻어
    진다는 대아大我 또는 '참 나'라는  신비한 경지도 다만 마음이 만들
    어낸 것에 불과하며(113,171쪽을 참조하라), 거기에 의존하려거든 차
    라리 지금 소박하게  느끼는 현실의 자기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편이
    낫다고 가르친다.(이하 참조)


  여기서 부처는 아뜨만이니 영혼이니 자아니 하는 것은 실재로는 어디서
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분
명히 말하고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자아를 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처음부터 잘못 번
역하여, 잘못 해석해 버린 몇 가지 예를 인용한다. 그것들 중에 하나가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 'Atta hi  attano natho'(열두째 가름 4번, 또
는 160번 시문)인데, "자기는  자기의 주主님이다"로 번역하여, "큰 나는
작은 나의 주님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우선 그 번역부터가 정확치  않다. 여기서 앗따Atta는 영혼이란 의미에
서의 '자아'를  뜻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빨리어의  '앗따'라는 단어는
우리가 앞에서 본 것과 같은, 특정적으로 그리고 철학에서 영혼설을 언급
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동적이며, 한정적이지 않은 대명사[각주
2]로 사용된다. 그런  영혼설을 언급하는 경우와 달리  이 시구가 나오는
《법구경》의 열 두째 가름 같은 일반적 용법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곳
에서는 '나  자신'(myself), '너 자신'(yourself),  '그 자신'(himself),
'어떤 이'(one), '어떤 이  자신'(oneself) 등등을 의미하는 유동적이고,
한정적이지 않은 대명사로 쓰인다.

[각주2] <역주> 즉, 재귀대명사(reflexive pronoun)와 부정대명사(indefi
    nite pronoun).


  다음에 '나토natho'라는 단어는 '주님'을 의미하지 않고 '피난처', '지
원', '도움', '보호'[각주3]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실은 'Atta hi attano
natho'가 '자기가 자기의 피난처이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돕는 이
다.' 또는 '의지처'를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어떤 형이상학적 영혼이나
자아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의지해
야지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각주3] 《법구경》의 주석서에서는 '나토는 의지처(피난처, 도움, 보호)
    를 뜻한다'(Natho'ti  patittha)라고 말한다.(DhpA.II,PTS,p.148) 고
    대 싱할리Sinhale어《법구경》주석서(Sannaya)는 'natho'를, '그것은
    의지처(피난처,도움)이다'(pihitavanneya)라고 의역하고 있다.(Dhamm
    apada Puranasannaya, Colombo,1926,  77쪽) 만약, 우리가 'natho'의
    부정형을 취한다면 이 뜻이 더욱 확고해진다. 'Anatha'는 '주님이 없
    는'이란 의미가 아니라  '도움 없는', '의지할 데  없는', '보호받지
    못한', '가난한'이라는 의미이다.  빨리성전협회(PTS)의 빨리어 사전
    에서도 'natha'를  '보호자', '피난처', '도움'이라고  설명하지 '주
    主'라고 하지 않는다.  'Lokanatha'라는 단어를 '구세주'라고 번역하
    는 것은 완전히 통념적인 기독교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서 아주 잘
    못된 것이다. 부처는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진실로
    '세상의 피난처'를 뜻한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5


  부처의 가르침에 자아의 관념을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다른 예는 유명한
말, 'Attadipa viharatha, attasarana anannasarana'이다. 이것은 《마하
빠리닙바나-경》의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이 구절은 직역하면 '네 자신
을 너의 섬(의지처)로 만들어서, 네 자신을 너의 피난처로 만들어 살아가
라. 그리고 다른 이를 너의 피난처로 만들지 말아라'를 뜻한다. 불교에서
자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앗따디빠attadipa'와 '앗따사라나attasar
ana'라는 말을 "자아를 등불로  삼아라", "자아를 피난처로 삼아라"로 해
석하고 있다.[각주1]
++++++++++++++++++++++++++
[각주1] 여기서 'Dipa'는 등불을 뜻하지  않고 분명히 '섬'을 뜻한다. 《
    디가-니까야》의 주석서(DA. Colombo ed., p.380)에서는 여기 'Dipa'
    라는 단어에 다음같이 주석을 붙이고 있다.  '네 자신을 섬, 마치 망
    망대해에 섬같은 의지처(쉼터)로 만들어서 살아가라.' (Mahasamuddag
    atam dipam viya attanam anam dipam patittham katva viharatha) 윤
    회輪廻(samsara), 즉 "존재의  지속"은 보통 바다(samsara-sagara)에
    비유된다. 그리고 대양에서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섬 같은 단단한
    땅이지 등불이 아니다.
++++++++++++++++++++++++++
  우리가 이 단어들이  말해진 배경과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아난다에게 해준 충고의 완전한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다.
  그때 부처는  벨루바Beluva라고 부르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반열반)전에 석달 동안이었다.  이때 그는 여든 살이었고 매우
심한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어서 거의 죽게(mara-nantika) 되었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아를  없애 주지 않고 죽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모든 고
통을 참고 병세를 호전시켜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회복이 된 뒤, 하루는 거처 밖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부처의 가
장 헌신적인 시자 아난다는 사랑하는  스승에게 다가가서 곁에 앉아 말하
였다. '선생님. 저는 세존의 건강을 보살펴 왔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편
찮으셔서 돌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병색은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제 능력으로는 더 이상 낫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위
안이 있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동아리"를 감동시키는 가르침이 남아있는
동안엔 떠나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는 연민에 가득  차 인간적인 정으로, 헌신적이고 사랑하는
시자侍者에게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아난다야. "동아리"가 내게서 무얼
기대하느냐? 나는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법을 가르쳐왔
다. 진리(法)에 있어서 여래에게  스승의 움켜쥔 주먹(師拳)같은 것은 없
다. 물론, 아난다야. 동아리를  이끌어가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동
아리는 그에게 기대야 한다. 그의 가르침을 펴게 하라. 허나 여래는 그럴
생각이 없구나. 그러면 왜 그가 동아리를 지도해야 하는가? 나는 이제 늙
었다. 아난다야. 내 나이 여든이다. 낡은  수레는 수선해야 다닐 수 있듯
이 내게도 그러하구나. 여래의 몸은 수선해야 계속될 수 있다. 그러하니
아난다야. 네 자신을 너의 섬(의지처)으로 만들어서 살아가라. 다른 누구
도 아닌 네 자신을 너의 피난처로 만들어라. 법法을 너의 섬(의지처)으로
만들어라. 법을 네 피난처로 만들어라. 다른 어떤 것도 네 피난처가 아니
니라.'
  부처가 아난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주 명백하다. 아난다는 슬프고 우
울하였다. 아난다는 위대한 스승이 죽은 뒤에 제자들이 피난처도 없고 지
도자도 없이 모두 외로워하고 도움 받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서 부처는 제자들이 자기자신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가르친 법法에 의존
해야하고 남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서 아난다
에게 위안과 용기와 확신을  주었다. 여기서 분명 형이상학적 아뜨만이나
'자아'의 문제는 그 관점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더 나아가, 부처는 아난다에게  자기자신이 어떻게 자기의 섬이나 피난
처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법을 자신의 피난처나 섬으로 삼을 수 있는가
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몸과, 감각과, 마음과, 마음의 대상들(사염처
四念處;Satipatthana)에 마음을 두는 것,  즉 일깨우는 수련을 통하여 그
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곳에도 아뜨만이나  자아에 대해서 말한
바가 없다.
  자주 인용되는 또 다른 문헌이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아뜨만을 찾으
려 애쓰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곤 한다. 부처는 바라나시에서 우루벨라U
ruvela로 가는 길목의 숲속에서 한 나무 밑에 앉아있었다. 그날, 젊은 왕
자들이 서른 명의 친구로 모여 아내를 데리고 그 숲으로 소풍을 왔다. 아
직 총각이었던 한  왕자는 기생을 데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동안, 그 기생은 값나가는 물건을 훔쳐서 도망가 버렸다. 그들은 그 숲에
서 기생을 찾다가 나무 밑에 앉아있는  부처를 보고는 한 여자를 보지 못
했느냐고 물었다. 부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설명
하자 부처는 그들에게 물었다.  '젊은이들이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엇
이 그대들에게 더 나은가요?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 자신을 찾는 것과?'
  여기서도 역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부러
형이상학적인 아뜨만이나 '자아'라는 멀리서  가져온 관념을 도입하고 있
다는 증거가 없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앉으라 권하여 설법을 해 주었다. 현존하는 증거로는 그가
가르쳐 준 것의 원전에 아뜨만에 대해 언급한 말이 없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6


  밧차곳따Vacchagotta라는  "방랑수행자"(Parivrajaka;遊行者)가 아뜨만
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을 때 부처가 침묵하였다는 소재에 대해 쓴 것이
매우 많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밧차곳따가 부처에게 와서 물었다.
  '고따마 선생님. 아뜨만이 있습니까?'
  부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고따마 선생님. 아뜨만이 없습니까?'
  역시 부처는 묵묵부답이었다.
  밧차곳따는 일어나서 가 버렸다.
  그 방랑수행자가 가 버린 뒤에  아난다는 부처에게 왜 밧차곳따의 질문
에 대답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부처는 자기 입장을 설명하였다.
  '아난다야, 방랑수행자 밧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 물었을 때 내
가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영원주의 이론(sassata-vada;常住論)에
집착하는, 사문과 바라문의 편을 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난다야,  그 방랑수행자가 "자아가 없습니까?"라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고 대답했다면  소멸주의 이론(uccheda-vada;斷滅論)
[각주1]을 신봉하는 사문과 바라문의 편을 드는 것에 불과하다.'[각주2]

[각주1] <역주> 상주론常住論은 형이상학적으로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하
    는 이론이다. 단멸론斷滅論은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되어 없
    어지게 되어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여기에 대해서는 水野洪元, 김현
    옮김, 《原始佛敎》(서울:지학사) 71~76쪽을 보라.
[각주2] 다른 기회에 부처는 그 밧차곳따에게 '여래에겐 학설이 없다. 사
    물들의 본성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주었다.(M. I PTS, p.486)
    여기서도 부처는 어떤 이론가들에도 부응하려 하지 않았다.


  '또 아난다야, 밧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
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다는 내 앎과 일치하겠
느냐?'
  '분명 아닙니다, 선생님.'
  '그리고 또 아난다야, 그 방랑수행자가 "자아가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면 이미 혼란스러워하는 밧차곳따에
게 더욱 엄청난 혼란을 줄 것이다.[각주3]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
문이다. "이전에 정말 나는 아뜨만(자아)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잃어버렸다."'

[각주3] 사실은 그 이전이 분명한 다른 때에 부처가 어떤 깊고 미묘한 문
    제―아라한이 죽은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문제―를 설
    명해 주었을 때 밧차곳따는 말했다. '고따마 선생님, 여기서 저는 무
    지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고따마 선생님과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가졌던 아주 작은 믿음 마져도 지금은 달아나 버
    렸습니다.'(S. IV PTS, p.487)  그래서 부처는 그를 또다시 혼란시키
    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가 왜  침묵하였는가는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가  전체적인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부처가 질문과 질문자들을 다루는 방법―이런 문제를
논하는 자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을 고려한다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
다.
  부처는 누가 질문하건 간에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아무 생각도 없
이 대답을 해주는 컴퓨터가 아니었다. 그는 자비와 지혜 가득한 현실적인
스승이었다. 그는 자기 지식과 지성을 내세우려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
으며, 깨달음의 길을 가는 질문자를  도와주기 위해 대답하였다. 그는 항
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발달 수준과 경향, 정신의  완성도, 성격, 특별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였다.[각주4]

[각주4] 부처의 이 앎을 '감관을 초월하여 아는 지혜'(Indriyaparopariya
    ttanana)라고 부른다.


  부처에 의하면 질문을 다루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⑴어떤 질문
은 바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 ⑵다른 것은 그것들을 분석하는 방법으로
대답하여야 한다. ⑶그러나 다른 것은 반문하여서 대답하여야 한다. ⑷그
리고 마지막으로 제쳐놓아야 할 질문이 있다.
  질문을 제쳐놓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특정한
질문은 대답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가 바로 이 밧
차곳따에게 이런 말을 해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듯이, 우주는 영원한가
아닌가 등등의 유명한 문제들을  부처에게 질문했을 때 그렇게 대답한다.
같은 식으로 부처는 말룽꺄뿟따와  다른 이들에게 대답해왔던 것이다. 그
래서 부처는 아뜨만(자아)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같은 것을
또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을  항상 논하고 설명했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다'
라는 그의 앎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아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예전에  자아가 없음을 받아들여서 이미 혼란스러
워하는 불쌍한 밧차곳따를 같은 문제를 가지고 불필요하게, 아무 목적도
없이 혼란스럽게 하고  동요를 일으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나 없음"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특별한 경우
에는 침묵으로 질문을 제쳐두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것이었다.
  우리는 또한 부처가 밧차곳따를 오래 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음을 잊
지 말아야 한다. 캐묻기 좋아하는 이  방랑수행자가 그를 보러온 것이 이
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스승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구도자를 위하여 많은 사상을  가르쳐주고 엄청난 배려를 해주었다. 빨리
원전에서는 이 밧차곳따 같은 방랑수행자들이 돌아다니다 자주 부처와 부
처의 제자들을 만나러와서 같은 종류의 질문을 자꾸자꾸 던지는 것을 많
이 언급하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이 문제들에  거의 강박관념이 되어서
아주 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부처의 침묵은 밧차곳따에게 그 어떤 웅변적
인 대답이나 토론을 해주는 것보다도  훨씬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각
주5]

[각주5] 그 이유는 나중에 밧차곳따가 다시 부처를 만나러 오지만 이번에
    는 늘 하던 질문을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
    다. "제가 고따마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고따
    마 선생님께서 좋고 나쁜  것(kusala kusalam)을 간단히 가르쳐 주신
    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부처는 그가  설명해 달라고 간청한 그 좋
    고, 나쁜 것을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래서 밧
    차곳따는 그것을 실천하였다. 결국  밧차곳따는 부처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의 지위"(阿羅漢果;應供位)에 도달하였으
    며 '진리', 즉 열반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아뜨만에 대한 문제와 다
    른 문제들은 더 이상 밧차곳따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M. II, PTS,
    p.489과 그 아래.)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7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아'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나 '의식'으로
알려진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부처는 사람이 마음(心)이나 사
상(意)이나 의식(識)보다는 육체적 몸(kaya;身)을 자아로 여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몸은 마음 같은 것보다는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나 사상, 관념은 몸보다 빨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변화하기 때
문이다.[각주1]

[각주1] 어떤 사람들은 대승불교의 '아뢰야식阿賴耶識'( laya- vijnana),
    즉  "저장의 의식"(藏識:여래장如來藏;Tathagatagarbha)을  '자아'와
    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능가경楞伽經》은 그것이 아뜨
    만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Lanka. pp.78~79)
<역주> 지은이는 아뢰야식과 여래장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학파에 따
    라서는 그 둘을 다르게 보는 경우가 있었으나, 원효를 비롯하여 우리
    의 전통에 이어지는 사람들은 그 둘이 같다고 말한다. 아얄라식은 세
    간의 망상과  번뇌들이 쌓이는 "저장의 의식"이다.  여래장이란 중생
    모두가 감추고 있는 본래 성품(즉,  부처)을 말한다. 이 둘이 현상적
    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인 실천에 임할
    수가 있게 된다. '흙덩이와 흙먼지는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
    은 것도 아니다. 금과  금세공품도 이와 같다.'(譬如泥團微塵 非異非
    不異 金莊嚴具亦如是) [《大乘起信論疏記會本》, 韓國佛敎全書 1책 7
    46쪽b]
      원효의 여래장사상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은 이기영, 《元曉思想》
    (서울:홍법원,1967) 127~140쪽을 참고하라.


  대응되는 실재가 없는 자아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는∼'[각주2]이
라는 막연한 느낌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열반을 깨닫는 것인데 그
렇게 쉽지는 않다. 《상윳따-니까야》에  케마까Kemaka라는 비구와 한 무
리의 비구들 간에 이 점에 대한 깨달음의 대화를 한 것이 있다.

[각주2] <역주> 원문은 'I AM'.


  이 비구들은 케마까에게 "다섯 가지  모임" 중에 자아나 자아와 관계된
어떤 것이 보이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케마까는 '안 보인다'라고 대답했
다. 그래서 비구들은 만약 그렇다면 케마까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
라한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케마까는 자기에게는  "다섯 모임"
속에서 자아나 자아와 관계된 어떤 것을 어떤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내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은 아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오!
벗들이여. "집착하려 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取蘊)에 있어서 '나는∼'이
란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나다'라고  보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
리고 나서 케마까는 자기가 '나는∼'라 부르는 것이 물질(色)도, 감각
(受)도, 지각(想)도, 정신이 형성한 것(行)도,  식(識)도, 또 그 밖에 어
떤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나다'라고 보는 것은 분명 아니더라
도, 그는 "다섯 가지 모임"에 있어서, 단지 '나는∼'이란 느낌이 있었다.
[각주3]

[각주3]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자아를 일컬어 말하는 것
    이다.


  그는 그것이 꽃향기와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꽃잎의  향기도, 색깔의
향기도, 꽃가루의 향기도 아니다. 단지 꽃의 향기일 뿐이다.
  케마까는 더 나아가 깨달음의 처음 단계에 도달한 사람에게도 '나는∼'
이란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더욱
발전하였을 때 '나는∼'이란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다. 마치 깨끗하게 빨
래한 옷감의 세제 냄새가 상자 속에 넣어두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듯이.
  이 토론은 아주  쓸모가 있어서 토론이 끝나자  그들은 깨닫게 되었다.
경經에서 말하길 케마까를  포함한 그들 모두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되었다. 결국, '나는∼'이란 느낌이 제거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나는 자아를 가졌다"(상주론자常住論者의 이
론)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자아를 가지지 않았다"
(단멸론자斷滅論者의 이론)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도 그릇 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둘  다 족쇄이고 그 둘 다  '나는∼'이라는 거짓된 관념에서
발생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없음"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어떤 주장이나 견해도 취하지 말고, 단지 사물들을 정신을 내어 비추는
일없이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 또는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단지 육체적, 정신적  "모임"(蘊)들의 결합체로
보는 것이다. 그 모임들이 순간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서로 상호의존하며  작용하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  중에 영원하고, 늘 그러하며,  변화하지 않고, 무궁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나 없음"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한 의문이 일어난다. "아뜨만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작용)의 결과를 받게 될까?" 아무도 이 질문에 부처 자신보다 나은 대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비구에게  이 의문이 일었을 때 부처가 말하
였다.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가르쳐왔다. 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그
어디서나 조건에 따라 있음을 보아라.'[각주]

[각주4] <역주> 과거에 만들어진 조건에 따라서 현재의 상태가 존재한다.
    현재의 조건에 따라서 미래의 상태가 존재하게 된다. 사물은 단지 원
    인에 의한 결과로서 존재할 따름이고 존재를 결정하거나 부여받는 근
    본실체란 없다. 즉, 사람에게 있어서  업의 결과를 받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과거에 지은 업의 결
    과이다.


  "영혼 없음" 또는 "자아 없음"에  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부정적인 것이
나 단멸론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열반과도 같이 그것은 진리이고
실재이다. 그리고 실재는 부정적일 수 없다. 부정되는 것은 존재치 않는
허구적 자아에 대한 거짓된 믿음이다. "나 없음"(Anatta;無我)에 대한 가
르침은 거짓된 믿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지혜의 빛을 발한다. 그것은 아상
가가 아주 적절히 말한 대로 부정적이지  않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
다는 사실이 있다.'(nairatmyastita)[각주]

[각주5] <역주> 아상가Asanga(약 4세기)는  간다라 지방의 바라문 출신으
    로 처음엔 소승교단에 출가했으나 나중에 마이뜨레야Maitreya(彌勒尊
    者;약 4세기 초)를 만나 대승에 귀의한다. 아상가의 동생 바수반두Va
    subandhu(世親;약4,5세기)는 원래  소승불교철학(俱舍論)의 대가였으
    나 형 아상가의 영향을 받아 대승으로 전향하게 된다. 이들을 요가짜
    라Yogacara(瑜伽師)라 불렀는데, 이 말은  곧 '요가', 즉 명상수련을
    뜻한다. 바수반두는 이  학파의 교의를 유식唯識(Vijnaptimatra)이라
    이름 붙였다.
      유식철학은 워낙 방대하고  난해하여 여기서 간단히 말할  수 없으
    나, 거츨게 말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으며 인식작용으
    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철학이다. 이를 '지각되
    는 것은 존재하는  것'(esseestpercipi)이라는 버클리Berkely류의 주
    관적 관념론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여기서의 '인식'이란 서양철
    학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대상을 지각하는 주체로
    서의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로서의 내가  실체로서의 대상에
    접하여 인식작용이 있게 된다거나, 이 세계는 내 사유의 투사에 불과
    하다는 생각은 '자아'가  있다고 여겨야만 가능해진다. 유식학에서는
    인식의 성립이 실체와 실체의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
    유假有(幻色)와 가유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고정된 실체끼리의 만
    남이 아니기 때문에 그 관계는 역동적이며, 상호적이며, 능동적일 수
    있게 된다.[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양평:통나무,198
    6), 83~84쪽 참고]
      유식학은 탕唐에 유학한  원측圓測(613~696)을 거쳐 신라에 유입되
    었고, 원측과  같은 시기에 원효도 화엄학을  연구하면서 독자적으로
    유식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교학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식철학은 한국불교사상의 큰 줄기의 하나로서 이어지게 된다. 이렇
    게 아상가의 생각은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상의 역
    사는 단절되지 않는다.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1


  부처는 말했다. '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병이 있다. 그 두 가지란 무
엇인가?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이 그것이다. 일년 동안  또는 2년 동안,
..... 심지어는 백년 동안이나, 아니 그보다 오래도록 육체가 병에 걸리
지 않는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정신적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즉,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단 한 순간이라도 정신이 병들지 않는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이
드물구나.'
  부처의 가르침은, 특히 '명상'하는  방법은 정신이 평안하여 완전히 건
강한 상태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불제자건  불제자가 아니건 간에
부처가 가르친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명상'에 대해 아주 심하게 오해하
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명상'이란 말을  듣는 순간 일상의 활동에서 도
피하는 것을 생각한다. 사회와 단절된 좀 먼 곳에서, 어떤 석굴이나 절간
의 불상같이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예상한다. 그리고 신비스런 것이
나 비밀스런 사상이나 황홀경에  몰두하는 것을 예상한다. 진정한 불교의
'명상'은 전혀, 이런 류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주제에 있어서 부
처의 가르침은 아주 잘못 이해되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만 이해되어서, 후
대에는 '명상'의 방법이 판에 박힌 거의 전문적 의례나 예식의 한 종류로
전락하여 타락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제  3의 눈같은 좀 영적이고 신비
적인 힘을 얻기 위한 '명상'이나 요가yoga에  흥미가 있다. 얼마 전에 인
도에는 온전한 시력을 지녔으면서도 귀로 보는 능력을 개발하려 애쓰는
비구니가 있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영적 도착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욕망이 일으키는 문제이다. 즉, 능력에 대한 "목마
름"이다.
  '명상'이란 말은 바바나bhavana(修行)라는 원어에 대해 매우 빈약한 상
당어이다. 바바나의 원 뜻은 '수양'  또는 '개발', 즉 정신수양이나 정신
개발을 의미한다. 불교의 바바나는 제대로 말하자면 그 용어의 완전한 의
미로서의 정신수양이다. 그것은 애욕, 증오, 악의, 게으름, 걱정과 불안,
회의적인 근심들 같은 더러움과  흔들림으로 가득찬 마음을 정화하고, 정
신집중, 일깨우기, 지성, 의지, 활력, 분석 능력, 자신감, 즐거움, 안정
같은 성질의 배양을 목적한다.  궁극적으로는 사물들의 본성을 있는 그대
로 보는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한다.  그래서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을 깨닫는다.
  두 가지 형태의 '명상'이 있다. 그  하나는 경전에 기술된 여러 방법대
로 정신집중력(samatha;止,奢摩他  또는 samadhi;定,三昧,三摩地)을 개발
하는, 즉 마음을 한 점으로 모으는 것(빨.cittekaggata, 산.cittakagrat
a;心一境性)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영역"(無所有處)이나 "지각하지
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영역"(非常非非常處)같은  최고의 신비로운
경지에 이끄는 것이다. 부처에 의하면 이 모든 신비로운 경지는 마음이
창작해낸 것이고,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조건에  따르는 것이다.(行)
그것들은 실재, 진리, 열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형태의 '명상'은
부처 이전에도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순전히 불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
렇다고 불교 '명상'의 장외로  배제시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열
반을 깨닫는데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  자신이 깨닫기 전에 다른 스
승 밑에서 이런 요가 수행을 하였고 최고로 신비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부처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완전한 해방을 주지
못했으며, '궁극적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이 신비로운 경지들이 단지 "이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ditthadhammasukh
avihara;現法樂住)이나 "평화로운  삶"(santavihara;寂靜住)에 지나지 않
으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비빠사나vipassana(산.vipasyana 또는 vidarsyana;觀,毗鉢
舍那)로 알려진 다른 형태의 '명상'을 개발하였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통찰'하는 것인데 마음이 완전히 해방되게 하고 궁극적 진리, 열반을 실
현토록 이끌어준다. 이것이 핵심적인 불교의 '명상', 불교의 정신 수양법
이다. 그것은 마음이 깨어있기,  일깨우기, 주의집중, 관조觀照에 기초를
둔 분석적인 방법이다.[각주1]

[각주1]<역주> 이 두 가지  형태의 명상법을 흔히 여래선如來禪이라고 부
    른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평정과  통찰"(지관止觀)이라고 한다. 《
    天台小止觀》이라고 알려진 즈이(智의)의 《修習止觀坐禪法要》는 선
    수행의 입문서로서 유명하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에서 지관에 대해서 대단히 명철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머리 구절
    은 지금까지의 내용과 일치한다.
      '어떠한 방법으로 마음의 산란함을 막고 도리를 살필 것이냐? '止'
    라는 것은 모든  그릇된 대상을 설정하는 짓을  멈추는 일이니, 본래
    사마타의 방법을 따라하는 것이며,  '觀'이라는 것은 무슨 원인과 동
    기로 이와 같은 마음의 동요가 생겼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하면
    없어지는가 하는  것을 분별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본래 인도말로
    비빠사나라 불리우는 관찰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기영, 같은책 3
    75쪽에서 인용]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觀義故. 所
    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毗鉢舍那觀義故.[《大乘起信論疏記會
    本》, 韓國佛敎全書, 1책 781쪽a]
      원효와 의상義相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탕唐의 대 학승學
    僧 화짱法藏(643~712)은 《般若心經》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色卽
    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수행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색色이 곧 공空임을 관찰함으로써 지행止行을 이루고, 空이 곧
    色임을 관찰하여서 관행觀行을 이룬다. 空과 色은 둘이 아니어서, 한
    순간의 생각에 둘이 다같이 현현한다.  따라서, 止와 觀을 함께 갖추
    어서 행할 때,  비로소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2) 色이 곧
    空임을 보아 큰 지혜를 이루어서, 삶에도 죽음에도 머무르지 않게 된
    다. 空이 곧 色임을 보아 큰 자비를 이루어서, 열반에 머무르려 하지
    도 않게된다. 色과  空의 경계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큰 지혜와 큰
    자비의 생각이  다르지 않게되고,  머무름이 없는 실천을  이루게 된
    다.'
      一觀色卽空以成止行, 觀空卽色以成觀行. 空色無二, 一念頓現. 卽止
    觀俱行, 方爲究竟. 二見色卽空,  成大智以不住生死 ; 見空卽色, 成大
    悲以不住涅槃. 以色空境不二,  悲智念不殊, 成無住處行. [《般若波羅
    蜜多心經略疏》大正藏33.553b]
      《대승기신론소》에서 止와 觀의 두  가지 방법으로써 설명한 원효
    의 수행관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거
    기서 진정한 선정, 진정한  삼매인 '금강삼매'에서는 결코 우리의 현
    실 생활과 진리의 세계는 둘이 아니며, 동動과 정靜도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에서 교조화된 선종禪宗이 유행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선에만 머무르려 하기  쉽상인 수행자들의 태도에 대해 누누히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불교에서는 화두話頭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화
    두는 집착을 여의기 위한 방편일  터인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뗏목
    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 석가모니 부처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돌아가서 禪의 근본을 살피고, 원효가 제시한 수
    행 방법을 오늘날의 사정에 응용하여 새로운 우리의 禪문화를 재창조
    해내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2


  몇 쪽에다 그런 광범위한 주제를 정확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
나 여기서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정신수양 또는 정신 개발법인 진정한 불
교의 '명상'에 대해 아주 간략히 개괄적인 개념을 알아보기로 하자.
  정신개발('명상')에 대해 부처가 해준 설법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
띠빳타나-경Satipatthana-sutta》({念處經}(中阿含98))이라  일컬어진다.
이 설법은 전통적으로 아주 높이 숭상되어서 불교사원에서 일과적으로 낭
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 가정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깊은 애정으
로 경청하면서 낭송되고 있다. 아주 흔히  비구들이 죽어 가는 사람의 침
상 곁에서 그 사람의 마지막 생각을 정화하려고 이 경을 낭송한다.
  이 설법에서 가르쳐준 '명상'의  방법은 생활을 저버리지 않고, 회피하
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명상'들은 모두 다 우리 생활에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일상 활동과,  우리의 슬픔과 즐거움, 우리의  말과 생각, 우리의
도덕적 그리고 지적 의무들에 연관이 있다.
  그 설법은 네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 첫 부분은 우리의 몸
(kaya;身)을 다룬다.  둘째는 우리의 느낌과  감각(vedana;受)을, 셋째는
마음(citta;心)을, 넷째는 여러 가지 도덕적, 지적 주제들(法)을 다룬다.
  어떤 형태의 '명상'이든지  그 필수적인 것은 "마음이  깨어있기" 또는
정신차리기(sati;念)이며  주의집중 또는  지켜보기(anupassna;隨觀)임을
명확히 마음에 새겨야 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의 하나로서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몸에 관계된 '명
상'의 예는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깨어있기 또는 일깨우기'(anapan
asati;安般守意)라고 부른다. 경에서 특수하고 제한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기술한 것은 오직 이 '명상'에 대한 것뿐이다. 이 경에 주어진 다른 형태
의 '명상'은 당신이 좋을 대로 앉거나,  서거나, 걷거나, 또는 눕거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에 의하면,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깨어있는 수행
을 위해서는 앉아서,  '다리를 교차시키고, 몸을 곧추세워  두고, 마음을
깨어있게' 해야 된다. 그러나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는 것(跏趺坐)이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것은 아니며, 쉽지 않다. 특히 서양 사람들
에게 그러하다. 그래서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는 것이 힘든 사람은 의자에
앉아도 좋다. '몸을 곧추세워 두고  마음을 깨어있게 한다.' '명상'을 하
는 사람은 곧추세워 앉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수행에 있어서 아
주 필수적이다. 그러나 뻣뻣하게 긴장하는  것이 아니다. 손을 무릎 위에
편안히 올려놓는다. 그렇게 앉아서 당신이 편한 대로 눈을 감거나 코끝을
응시한다.
  당신은 하루 종일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만 결코 그것을 염두에 두는 일
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단 일초라도 숨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바로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노력도, 어떤 억제도 하지 말고, 평
소처럼 들이쉬고 내쉬어라. 이제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고 숨이 들
고나는 것을 지켜보고 관찰하여,  숨이 들고나는 것을 마음이 알아차리고
경계하도록 하라. 당신이 숨을 쉴 때에 어떤 때는 깊은 숨을 쉴 것이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 모두 상관할 필요가 없다.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숨쉬어라. 다만 할 일은, 깊은  숨을 쉴 때 그것이 깊은 숨이
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른 숨도 이와 같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의
마음이 숨에 완전히 집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움직임과 변화를
알아차려야 한다. 주변환경 같은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려라. 눈을 들어
어떤 것을 쳐다보거나 하지 말라. 5분이나 10분 동안 이것을 하도록 시도
하라.
  처음에 당신은 집중하기위해 숨에 마음을 가져다두는 것이 엄청나게 어
렵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이 어찌나  잘 달아나 버리는지에 놀랄 것이다.
마음은 가만있질 않는다. 당신은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나는 소리들을 듣게 된다.  마음은 소란스럽고 산만해 진다. 당신
은 당황하여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수행을 하루 두 번 아침
과 저녁에, 한번에 오 분이나 십 분 가량을 계속해 나간다면, 점점 마음
이 숨에 집중되기  시작할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뒤에 당신의 마음이
완전히 숨에 집중되는, 즉 가까이서  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당신에게
아무런 외부세계가 존재치 않는 그런 순간이 닥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
이다. 이 짧은  순간은 엄청난 경험이다. 즐거움과  행복, 평안이 가득하
여, 그것을 지속하고 싶어 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아직은 지속할 수가 없
다. 그렇더라도 이것을 규칙적으로 수행한다면 자꾸자꾸, 그리고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숨에다 마음을 두어 당신 자
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자신을 의식하는 한 결코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이 숨에 마음이 깨어있게 하는 수련은 가장 간단하고 쉬운 수행의 하나
인데 지고한 신비적 경지(dhyana;禪)[각주2]에 도달하도록 이끄는 집중력
의 계발을 의미한다. 그 밖에, 집중능력은 어떤 종류의 깊은 이해에 있어
서나 필수적이다. 꿰뚫음에 있어서도,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에 있어
서도, 열반의 깨달음까지 포함해서도 그러하다.

[각주2]<역주> 선禪은 댜나dhyana의 음역이다.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되
    면서 선은 독특한 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가 주위에서 접하는 선
    은 여기서와 같은 신비적 경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 가름 전
    체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과는 별도로 이 숨쉬기에 대한 수련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
다준다. 육체적인 건강과 긴장이완과  숙면 그리고 일상 업무에서의 능률
에 있어 유익하다. 그것은 당신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만든다. 신경성이
되거나 흥분이 되어  있는 순간이라도 이것을 단  2분만 수행한다면 당신
스스로 즉시 고요하고 평화로워짐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충분한 휴식
을 취하고 깨어난 것같이 느낀다.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3


  또 다른 아주 중요하고  현실적이며 유용한 형태의 '명상'(정신개발)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즉 몸으로 하건, 말로 하건, 생활에서 사
사로운 일을 하건, 공적인 일을 하건, 직업적인 일을 하건 간에 하루의
일과를 하는 동안  알아차리고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잠자거나 간에, 팔·다리를 뻗치거나 굽히거나 간에, 주위
를 바라보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건 침묵을 지키건, 먹건 마시건 간
에, 심지어는 똥누고 오줌눌  때에도―이런 행위들을 하거나 다른 행위를
할 때에 행위하는 그 순간에 완전히  일깨워 마음이 깨어있어야 한다. 말
하자면, 당신은 현재 순간에, 현재의 행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
은 과거와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현재 순간과 현재의 활동에 관련시켜서 그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행위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에 산다. 지금  여기서 어떤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생각 속, 상상하는 문제들과 걱정들 속 같은 다른 곳에
서 살고 있다. 보통 과거의 기억 속이나 미래에 대한 욕망과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이 일하는 그 순간에서 살지 못하고, 그것을 즐
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손에 잡은 일이 행복하지 않으며 불
만스럽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지금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
다.
  언젠가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흔한 광경이다. 그는 밥 먹을 시간도 없는 매우 바쁜 사람이란 인상을 준
다. 당신은 그가 밥을 먹는지, 책을 보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누구는
그가 한꺼번에 두 일을 한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사실, 그는 일하지도 못
하고,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한다. 그는 긴장되어 있으며 마음이 흐트러져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는 일을 즐기지도 못한다. 그의 삶은 현재의
순간에 살고 있지 않으며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어리석게도 생활에서 도
피하려고 한다.(그렇다고 이 말이  점심,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와 이야기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당신이 애쓴다고 생활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다. 당신이  살아있는 한,
시내에 있건 동굴 속에 있건 간에  삶에 부대껴서 살아가야만 한다. 진정
한 삶은 현재 순간에 있다. 그것은 스러져 가 버린 과거의 기억 속에 있
는 것도 아니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꿈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
의 순간 속에 사는 이는 진정한 삶을 영위하며 행복하기 그지없다.
  하루에 한끼만 먹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사는  부처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밝은 모습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부처는 '그들은 과거를 후회
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에 살고 있
습니다. 그래서 밝은 모습이오.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바보들
은 베어진 푸른 갈대같이 (볕 속에서)말라 버린다오'라고 대답하였다.
  마음이 깨어있기는 '나는 이것을  한다'라든지 '나는 저것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여가지고 의식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니다. 정반대이다.
당신이 '나는 이것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당신은 자기를 의식하
게 되어, 그 행위속에 살지 못하고 '나는∼'이라는 의식 속에 살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당신의 일을 망치게 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당신이 하는 일 속에서 당신 자신을 잊어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연설자가 자기를  의식하게 되어 '나는 청중들에게  연설하고 있
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연설은 흐트러져서 생각의 흐름이 막히게 된다.
그러나 말할 때 자기 연설 속에서 자신을 잊게 되면 최상의 상태가 되어
말을 잘하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예술이든, 시이든, 지적인 것이든, 정신
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위대한 작품은 창조자들이 자기 행위 속에서 완전
히 망각하게 되었을 때, 자기자신을 모두  잊고 자기를 의식하는 데서 떠
난 그 순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부처가 가르친, 이런  우리 활동에 관련된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수행
또는 일깨우기는 현재의 순간 속에서 살고,  지금 하는 행위 속에서 사는
것이다.(이는 또한 근본적으로 이 가르침에 기초를 두는 〔동아시아의〕
선禪(Zen)의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 이런 형태의 명상에서는 "마음이 깨
어있기"를 개발시키려고 어떤 별난 행위를 치뤄야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정신을 차려야되는 것이다. 당신은
별난 '명상'을 하는데 귀중한 시간을 일초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오로
지 당신의 평범한 일상 생활의 모든  활동에 대해 낮이나 밤이나 항상 마
음이 깨어서  일깨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위에서 논한 이들  두 형태의
'명상'은 우리의 몸에 관계된 것이다.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4


  다음은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거나 간에 우리의 모든
감각이나 느낌들과  연관된 정신개발('명상')의 수행법이 있다.  그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당신은 불행하고 슬픈 느낌을 체험한다. 이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은 어둡고,  흐릿하며, 명확치 않다. 그것은  풀죽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왜  불행한 느낌이 드는지 명확히 알지 못  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은 불행한 느낌으로 인하여 불행해지지 말아야 함을,
걱정으로 인해 걱정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두어야 한다. 단지 왜, 불행하
거나 걱정되거나 슬픈 감각이나  느낌이 있는지 명확히 알도록 노력하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즉 어떻게 그 원인이 되는가, 그것이 어떻게
사라지는가, 즉 어떻게 그치는가를 밝히도록 노력하라. 마치 과학자가 어
느 대상을 관찰하듯, 어떤 주관적 작용도 배제시키고 바깥에서 그것을 관
찰하는 것처럼 밝혀내려고 노력하라. 여기서 다시, '내 느낌'이나 '내 감
각'으로 주관적으로 그것을 바라보지  말아야되며, 오직 '하나의 느낌'이
나 '하나의 감각'으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역시 '나'라는 거
짓된 관념을 잊어야만 한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 성
질을 볼 때 당신의 마음은 그  감각에 대하여 점점 초연해지고 집착을 여
의고 자유롭게 된다.  그것은 모든 감각이나 느낌에  대해 똑같이 그러하
다.
  이제 우리 마음에 대한 '명상'의 형태를 논하기로 하자. 당신의 마음이
열렬한지 초연한지, 증오나 악의,  시기심에 정복당해 있는지, 아니면 사
랑, 자비로 가득 차 있는지, 환상에 빠져있는지, 아니면 명확하고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지,  그런 기타 등등의 사실에  철저히 주의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하는 일이 아주 많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린 그것을 회피
하려 한다.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듯 자신의 마음을 대담하고 솔
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비판하거나 심판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옳고, 그른 것이나 좋
고 나쁜 것을  식별해내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관찰하
고, 지켜보고, 조사하는 것이다. 당신은 법관이 아니고 과학자여야 한다.
당신이 마음을 관찰해서 그 진정한 성질을  명확히 알게 될 때 그런 감정
과 정서와 상태들에  대해서 초연하게 된다. 당신은  그렇게 해서 집착을
버리고 자유롭게 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정말로  화가 났으며, 노여움과 악의와 증오
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해보자. 화난 사람이 자기가 화났다는 것을 진정으
로 염두에 두어 깨닫지 못함은 엉뚱하고 역설적인 일이다. 자기 마음의
상태를 깨닫고 염두에 두게 되는 순간,  즉 자기가 화난 것을 보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끄러워져서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그 성질,
즉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
서 다시 '나는 화나 있다'라든지  '나의 분노'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고 되새겨야겠다. 당신은 화난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염두에 두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화난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조사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모든 정서, 감정, 그리고 마음의 상태에 대해 취할 태도이다.
  다음으로 윤리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주제에 대한  '명상'의 형태가
있다. 우리의 모든 공부와 독서, 토론, 대화와 그런 주제들을 심사숙고하
는 것이 이 '명상'에 속한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논한 주제들을 깊
이 생각하는 것은  '명상'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앞에서 케마까와 승려
동아리 간의 대화가 열반의 실현에 이끄는 '명상'의 한 형태임을 보았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명상'으로 "다섯 장애"(Nirvana;五蓋)를 연구하고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즉,
     1. 육체적 욕망(kamacchanda;貪慾)
     2. 악의나 증오, 노여움(vyapada;瞋 엘)
     3. 권태와 게으름(thina-middha;昏沈睡眠)
     4. 불안과 걱정(uddhacca-kukkucca;掉擧惡作)
     5. 회의적인 불안(vicikiccha;懷疑)
  사실상, 어떤 명확한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발전을 하는데 있
어서도, 이들 다섯 가지는 장애로 여겨진다. 그것들에 굴복당하게 되면,
그리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옳고 그른 것, 또는 좋
고 나쁜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깨달음의  일곱 요소"(七覺分,七覺支)로써 '명상'을 할  수도 있
다. 그것들은
  1.  마음이 깨어있기(sati;念): 즉, 우리가  위에서 논했듯이 육체와
     정신 모두에 대해서 그  모든 활동과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것.
  2.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조사, 연구하는 것(dhamma-vicaya;擇
     法): 여기에는 종교,  윤리, 철학에 대한 공부와  독서, 연구, 토
     론, 대화, 그리고 그런 교리적 주제와 관련된 강의를 듣는 것까지
     모두 포함된다.
  3.  추진력(viriya;精進):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마음  굳게 일하는
     것.
  4.  즐거움(piti;喜): 염세적이나 어둡고 우울한  마음자세와는 정반
     대의 성질.
  5.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기(passaddhi;輕安): 육체적으로나 정신적
     으로나 뻣뻣하게 긴장해서는 안 된다.
  6. 정신집중(samadhi;定): 위에서 논한 바와 같다.
  7.  평온함(upekka;捨): 즉,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서 삶의 모든 흥망성쇄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기.
  이런 성품들을 배양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은 진실된 바램, 의지 또는
의도이다. 똑같이, 성품들 각각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다른 여러 물질적,
정신적 조건들이 경에 기술되어있다.
  또한 우리가 앞에서 논한 대로  '존재란 무엇인가?' 또는 '나라고 부르
는 것은 무엇인가?'같은 의문을 연구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蘊) 같은
주제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해서 '명상'할  수도 있다.
그런 주제들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이  네 번째 형태의 명상이다. 그
것은 궁극적 진리의 깨달음에 이끈다.
  우리가 여기서 논해온 것과는 별도로  '명상'에 대한 다른 많은 주제들
이 있다.  전통적으로 40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특별히  네 가지
"숭고한 경지"(Brahma-vihara;梵住)를 언급해야겠다.
  ⑴'마치  아기 엄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듯' 한정  없는 보편적 사랑과
     좋은 의도를 어떤 차별도 두지 말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확대시키는
     것.(metta;慈)
  ⑵고통과  걱정과 시달림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자비.(karuna;悲)
  ⑶남이  성공하고 잘 되고 행복함에 마음을 함께 하는 즐거움.(mudita;
     喜)
  ⑷삶의 어떤 흥망성쇠에도 평온한 것.(upekkha;捨)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1


  불교는 우리 각박한 세상의 선남선녀가  실천할 수 없는 아주 지고하고
숭고한 체계라서, 진정한 불제자가 되고 싶다면 절간이나 좀 한적한 곳에
은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슬픈 오해이며, 분명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데 기인
한 것이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거나 어쩌다가 읽어본  것을 가지고 그런
경솔하고 그릇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불교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이
해치 못하여서 단지 부분적이고 편향된  시각만을 제공하는 사람이 쓴 것
을 읽어 본데 따른 결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절간의 승려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거룩한
여덟 길"은 불제자가  사는 방법이며,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거나, 동굴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 버
릴 수는 없다. 아무리 불교가 거룩하고  순수하다 하여도 요즘 세상에 일
상생활을 하면서 따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 대중들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불교의 정신을 정확히 이해한다면(문자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 일반인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따르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
다.
  어떤 이들은 사회에서 단절되어 외딴 곳에서 산다면 불교를 받아들이기
가 더 수월하고 편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식
의 은둔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을 무디고 침체하게 만들어
서 정신적, 지적 생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참된 출가란 육체적으로 속세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의
수제자 사리뿟따는 어떤 사람이 금욕적인 수행에 헌신하면서 숲 속에 살
더라도 불순한 생각과 '더러움'이 가득할 수도 있으며, 다른 어떤 사람은
금욕적인 수행을 하지 않으면서 고을이나 도회지에 살더라도 순수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리뿟따는 이들 둘 중에
고을이나 도회지에서 순수하게 사는 사람이  숲 속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 위대하다고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생활을 떠나야 한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것은 실천하지  않는 데 대해 생각없이 변명하
는데 지나지 않는다. 불교 문헌에는 평범한 보통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
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열반을  깨달은 남녀들을 여러 차례 언
급하고 있다. 한번은 "방랑수행자"  밧차곳따(우리는 이미 "나없음"의 가
름에서 그를 만났었다)가 부처에게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부처의 가르침
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남녀 평신도(優婆塞와
優婆夷)가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처는 한 둘이 아니고 일이
백이나 오백도 아닌  훨씬 많은 수의 평신도들이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자기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분
명히 말한다.
  어떤 이는 소음과 혼잡에서 멀리  떠나 조용한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기분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료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도우며,
봉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불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더 칭찬할 만하
고 용기 있는 일이다.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훈련을 미리 하여 충
분히 성숙된 다음에는 남을 도울 양으로, 자기 마음과 성품을 향상시키려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유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동
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행복과 '구원'만을 생각하며  고독하게 온
생애를 산다면 이는 분명히,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며 봉사하는데
근거를 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물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보통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불교를 따를 수 있는데 왜 부처가 설립한 "승려들의 동아리"인 승가가 있
는가? 승가는 자신의 정신적, 지적 발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데 생애를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
이 있는 보통 평신도가 승려같이 자기 전 생애를 남에게 봉사하는데 바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양 의무가 있는 가족이나 다른 어떤 속세의 구
속이 없는 승려는 부처가 지도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전 생애를 '많은 이
의 이익을 위해,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해' 바쳐야될 위치에 있다. 역사적
으로 불교사원이 정신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각주1]

[각주1] <역주> 이  말은 승려인 지은이가 단지  의도적으로 승가를 좋게
    말하려고 함이 아님을 분명히 해 두어야 겠다. 지은이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으며, 스리랑카를 비롯한  몇몇 불교 국가에서는 승려가 사
    회봉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출가는 봉사하기 위하여'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다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2


《시갈라-경Sigala-sutta》({善生經} 長阿含16, 中阿含135)은 부처가 평
신도의 삶과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대단히  존중했는지를 보여준
다.
  시갈라Sigala라는 젊은이가 선친의 유언에 복종하여, 하늘의 여섯 주요
지점에, 즉 동서남북상하에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부처는 젊은이에게 자
기 가르침의 "거룩한 계율"(ariyassa vinaye;聖律)에서의 여섯 방향은 다
르다고 말했다. 부처의  "거룩한 계율"에 의한 여섯  방향은 동쪽이 부모
요, 남쪽이 스승이며, 서쪽이 아내와 아이들, 북쪽이 친구와 친척 그리고
이웃이며, 아래쪽이 하인과 일꾼  그리고 피고용인이고, 위쪽이 성직자이
다.
  '이런 여섯 방향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부처가 말했다. 여기서 '예
배'(namasseyya)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신성한 것과 명예스럽고 존
경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에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위에
언급한 이 여섯의 가족과 사회집단을 신성하여, 존경하고 예배드릴 만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부처는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해서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의무들이 시갈라에게 해 준 설법에서 설명된다.
  첫째,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신성하다. '부모님은 브라흐마라 불리운
다'(Brahmatimatapitaro)라고 부처는 말한다.  브라흐마(梵)란 용어는 인
도사상에서 최상이며 가장 신성한 개념으로 정의되는데, 부처는 여기에
부모를 포함시켰다. 그래서 요즘도  훌륭한 불교 집안에서는 자녀들이 부
모에게 매일 조석으로, 말 그대로 '예배'를 드린다. 자녀들은 "거룩한 계
율"에 따라 부모에 대해 정해진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늙으면
봉양해야 한다.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집안의 전통을 계승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벌어놓은 재산
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사지내야 한다. 반면
에 부모에게는 자식들에 대해 정해진 의무가 있다. 자식들이 나쁜 길에
들지 않도록 한다. 유익하고 옳은 활동에 참가시켜야 한다. 훌륭한 교육
을 시켜야 한다. 좋은 집안과 혼인을 시켜야 한다. 온당한 방법으로 재산
을 물려주어야 한다.
  둘째, 스승과 제자의 관계. 제자는 마땅히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께 복
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시중을 들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반면에 스승은 제자를  올바르게 훈련시키고 향상시켜야 한다. 제
자를 잘 가르쳐야 한다. 제자를  자기 친구에게 소개시켜야 한다. 교육이
끝났을 때 생계대책이나 직업을 마련해주기에 힘써야 한다.
  셋째, 부부 관계. 부부간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라고, 또 신성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거룩한 가정생활'(sadara-Brahmacariya)이라 부른다.
[각주2] 여기서도 '브라흐마'라는 용어의 중요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
계에 대해 최고의  경의가 주어지고 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서로에게 헌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정해진 의무가 있
다. 남편은 항상 아내를 존경하여서 결코 얕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내
를 사랑해야하고 아내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아내에게 지위와 안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옷과 보석을 선물해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
야 한다.(부처는 남편이 아내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야 하는 선물 같은 것
까지 잊지 않고 말했다. 이 사실은 보통 사람의 감정을 향한 자비로운 정
이 얼마나 이해심 있고 동정적이었나를 보여준다.) 반면에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아야 한다. 손님과 방문객, 친척, 친구, 그리고 고용인들을
대접해야 한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한다. 모든 활동에서 슬기롭고 생기가 있어야 한다.

[각주2] <역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梵行)는 원래 인도에서 전통
    적인 출가수행자의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렇게 부부의 삶
    에 대해서도 성직자와 다름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네 번째, 친구, 친척, 이웃들 간의 관계. 서로 인심이 후해야하고 자비
로워야 한다. 유쾌하고  기분 좋게 말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의 복지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에게 평등한 말씨를 써야 한다.〔즉,
하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간에 싸움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것에 대해서 서로 도와야 한다. 다른 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저버리
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주인과 하인 간의 관계.  주인 또는 사용자에게는 하인이나 고
용인에 대한 몇 가지 의무가 있다.  노동은 소질과 능력에 따라 할당되어
야 한다. 충분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 의료보장이 되어야 한다. 특별 수
당과 상여금을 인정하여야 한다.  한편 하인이나 고용인은 응당 근면해야
되고 게을러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유순하며 주인을  속이지 말아야 한
다. 자기 일을 최대한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여섯째, 성직자(원문에는 사문과 바라문)와  평신도 간의 관계. 평신도
는 성직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애정과 존경으로 돌보아야 한
다. 성직자들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평신도에게 지식과 배워야할 것을 가
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해악을  멀리하도록 좋은 길로 이끌어주어야 한
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과 사회적 유대를 가지고 평신도로 사는 것이 "거룩
한 계율"에 속해있음을 본다. 그리고  평신도의 삶도 부처가 구상한 불제
자의 생활방식의 골격을 이루는 것을 본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빨리원전의 하나인《상윳따-니까야》에서는 신神(d
eva)들의 왕인 제석천帝釋天(Sakka)이 덕망 있게 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칭송할  만한 행위를 다하고 덕망이  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는 평신도 제자들께도 예배를 드리겠노라'고 선
언하고 있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3


  불제자가 되려고 할 때 반드시 거쳐야 될 입문의식(또는 세례)은 없다.
(그러나 승가의 일원인 비구比丘가 되려면 장구한 과정의 계율 훈련과 교
육을 거쳐야 한다.) 어떤 이가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
가르침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을 품게 되어 따르려  애쓴다면 그이는
불제자이다. 그렇지만 불교국가에 이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에 의한다면
일반적으로 "세 보물"(三寶)이라 부르는 부처와 가르침(法)과 동아리(僧)
를 자기의 피난처로 삼아야  불제자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속가제자가
지켜야될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인 "다섯 계율"(Panca-sila;五戒)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다섯 계율은 ⑴생명을 파괴하지 말 것(不殺生), ⑵훔치지
말 것(不偸盜), ⑶간통을 범하지 말 것(不邪淫), ⑷거짓말을 하지 말 것
(不妄語), ⑸취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 것(不飮), 등인데, 옛 경전에서 주
어진 문구대로 낭송한다. 불교의  종교적 절기의 법회에서 승려의 선창에
따라 이 구절들을 낭송한다.
  불제자가 거행하지 않으면 않되는  외형적인 예식이나 의식은 없다. 불
교는 살아가는 방법이어서 필수적인 것은  다만 "거룩한 여덟 길"에 따르
는 것뿐이다. 물론 모든 불교국가에는 종교의 절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의식이 있다. 절에는 불상과 탑(stupa)이나 부도(dagabas) 그리고 보리수
를 모시는 제단이 있다. 거기에 불제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꽃을 공양하며
등불을 켜고 향을 사른다.[각주3] 이것은 유신론唯神論적 종교에서 하는
기도 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길을 알려준 스승을 기념하여 경의를
표하는 방법일 따름이다. 이런 전통적 행사는 필수적이진 않지만 지적으
로,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감흥과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그 사람들이 점차 길에 들어서도록 도와주는 데에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
다.

[각주3] <역주> 상좌불교 지역에서는 이러한 것만을 공양한다. 우리네 절
    집안에서는 돈, 쌀, 과자, 과일 같은 것들을 바치고 있는데, 좀 생각
    해 볼 문제가 아닐런지 .....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4


  불교가 오로지 고상한 이상과  지고한 도덕적, 철학적 사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민중들의  사회적, 경제적 복지는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 안 것이다. 부처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이 있었다. 도덕적이고 정신
적 원리에 기초한 순수한 삶을  살아나가지 않고서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에 무관심하고서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움을 부처는 알고 있었다.
  불교는 물질적인 부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을 위
한 수단, 즉  더 높고, 더 거룩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수단, 즉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지고한 목표를 성취키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래서  불교는 정신적 성공에 도움이 되는
어떤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요구를 인정한다. 심지어 어떤 외딴곳
에서 명상에 전념하는 승려까지도 그러하다.[각주4]

[각주4] 승가의 일원인  불교 승려는 사유재산의 소유를  바랄 수 없지만
    공유재산(Sanghika;僧家物)을 소유하는 것은 허용된다.


  부처는 삶을 사회적, 경제적 배경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기지 않
았다. 부처는 삶을 전체적으로, 즉 모든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윤리적, 정신적 그리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과
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조금 밖에 알려져있지  않다. 특히 서양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룬 수 많은 설법이 고대 불경들에 흩어져있
다. 그 예를 조금만 들어보기로 하자.
《디가-니까야》의   《짝까밧띠시하나다-경Cakkavattisihanada-sutta》
({轉輪聖王修行經}長阿含6)은 가난(daliddiya;貧窮)이 도둑질, 거짓말,
폭력, 증오, 잔학, 등등의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
다. 옛날 왕들은 오늘날의 정부들과 같이 범죄를 형벌로 진압하려고 애썼
다. 같은 니까야의 《꾸타단따-경Kutadanta-sutta》({究羅檀頭經}長阿含2
3)은 이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설명한다. 이 방법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부처는 범죄를 뿌리뽑기 위해선 민중의 경제적
형편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농업을 위해선 농부와 경작자에게
종자와 다른 시설들이 제공되어야  한다. 무역업자와 상업에 종사하는 사
람에게 자본이 제공되어야 한다. 노동자에겐 충분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렇게 민중에게 충분한  수입을 벌어들이기 위한 기회가 제공된다
면 만족하게 될 것이며, 불안감이나 고민을 갖지 않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국가는 평화로워져서 범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는 경제적 형편을 개선시켜주는 것이 평민들에게 얼마
나 중요한가를 말했다. 이것이  욕망과 집착으로 재산을 긁어모으는 것을
용인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부처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반대된다.
뿐만 아니라, 생계를  벌어들이는 것은 무엇이라도 허용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무기의 생산과 판매같이 부처가 사악한 생계수단
이라고 비난한 돈벌이도 있다.
  한번은 디가자누Dighajanu라는 사람이  부처를 찾아와서 말했다. '선생
님. 저희는 처자식과 더불어 가정생활을 꾸려 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
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저희들의 행복에 도움이 될 만
한 어떤 교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는 그에게 세속적 삶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간에 기술이 좋아야하고, 유능해야
하며, 열심히 일해야하고, 활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utthana-sampada;努力具足).  둘째, 이마에 땀을 흘
리고 정당하게 번  수입을 지켜야 한다(arakkha-sampada;守護具足).(이는
재산을 도둑등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개념들
은 시대적 배경과 대조하여 고려되어야 한다.)[각주5] 셋째, 믿음직하고,
학식이 있으며, 덕망이 있고, 도량이  넓으며, 지적인 친구, 해악에서 떠
난 바른길에 들도록 도와줄 친구, 그런 훌륭한 친구가 있어야 한다(kalya
na-mitta;善友). 넷째, 수입을 알맞게 나누어서 너무 많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적지도 않게끔 써야 한다.  즉, 게걸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아도 않되
지만 사치스럽게 살아도 안 된다. 다시 말해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sa
majivikata;等命).

[각주5] <역주> 당시는 격동기였고  제정일치의 신분 질서가 붕괴되는 혼
    란기였다. 특히,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뿌라나 까사빠Purana Kassapa
    는 '어떤 일을 하던지 또는 시키던지, ..... 생명을 해치더라도,  도
    둑질을 하더라도, 타인의 집에 침입하더라도, ..... 강도질을 하더라
    도, ..... 타인의  처와 통하더라도,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런 짓을
    해도 악을 행한 것이 되지 않는다.  설령, 날이 선 무기를 갖고서 이
    세상의 생물을 모두 하나의  고기더미나 고기덩이로 만들어도 이것으
    로 인하여 악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또한 악의 과보果報가 오는 것
    도 아니다.'[D. II, pp.17~18,  中村元, 《佛敎의 本質》, 19~20쪽에
    서 인용]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내세來世에서 평신도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네 가
지 미덕을  설한다. ⑴"믿음"(Saddha;信):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가치들에 대해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 ⑵"계율"(Sila;戒): 생명을
파괴하고 해를 입히는 것을 금해야  한다. 훔치고 사기치는 것, 간통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그리고 취하는 음료를 금해야 한다. ⑶"베품"(Caga;
捨): 자기 재산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버리고 자비와 너그러움을 길러야
한다. ⑷"지혜"(Panna;慧):  괴로움을 완전히 파괴하고  열반을 실현토록
이끌어주는 지혜를 개발하여야 한다.
  어떤 때는 부처가 돈을 저축하고  쓰는데 대해 세부적으로 가르친 일까
지 있었다. 예를 들면 시갈라라는 젊은이에게 말할 때 수입의 사분의 일
은 일상의 지출로, 반은 사업에 투자하고, 사분의 일은 어떤 위기에 대비
하여 남겨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번은 부처가, 대  부호이며 가장 헌신적인 평신도  제자의 한 사람이
며, 유명한 사밧티(舍衛城)의  기원정사를 설립해준 아나타삔디까에게 평
범하게 가정생활을 하는 재가자에겐 네 가지 행복이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행복은 경제적 안정, 또는 충분한 재산을 정당하고 올바른 수단으로
벌어서 향유하는 것이다(atthi-sukha). 두  번째 행복은 재산을 너그럽게
자신과 가족과 친구와 친척 그리고 바른 일에 쓰는 일이다(bhoga-sukha).
세 번째 행복은 빚이 없는  것(anana-sukha), 네 번째 행복은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간에 해악을 저지르지  않고 오점없이 순수한 삶을 사
는 것이다(anavajja-sukha). 여기서 이들 중에 세 가지가 경제에 대한 것
임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부처는  경제적, 물질적, 행복은 더러움이 없고
훌륭한 생활에서 나오는 정신적  행복의 '16분의 1의 값어치도 없다'라고
그 부호에게 상기시킨 것에 주목해야 한다.
  위에 주어진 몇 가지 예에서 부처는 경제적 부를 인간의 행복에 필요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오로지 물질적이기만 해서 정신적, 도덕적 근본이 결
여된 것이라면 진정하고 진실된 발전이라 인정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물질적 발전을 고취시키면서도  사회가 행복하고 평화스럽고 만족
되기 위한 윤리적 정신적 성격의 발전을 언제나 대단히 강조해 왔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5


  부처는 정치에 대해, 전쟁과 평화에  대해 아주 정확하였다. 여기서 다
시 반복하지만 불교가 비폭력과 평화를 보편적 메시지로 옹호하고 전파하
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폭력도, 어떤 종류의 생명의 파괴도 허용하지 않
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일이다.  불교에 의하면 '정당한 전쟁'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 그것은 증오, 잔학성,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시키고 변명
하려 돈 찍듯 찍어내어 두루 유통시킨 거짓된 용어일 뿐이다. 누가 정당
하고 부당한 것을 결정한단 말인가? 힘세고 승리한 쪽이 '정당'하고 약하
고 패한 쪽이 '부당'할 따름이다. 우리의 전쟁은 항상 '정당'하고 너희의
전쟁은 언제나 '부당'하다. 불교는 이런 태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는 비폭력과 평화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장에 가서 개
인적으로 중재하여 전쟁을 막기도 하였다. 로히니Rohini강의 용수用水 문
제로 공격태세를 취했던, 사꺄(釋迦)족과 꼴리야Koliya족 간의 분쟁의 경
우에 그러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아자따삿뚜Ajatasattu(阿 世)왕이 밧지
Vajjis족의 왕국을 침공하는 것을 말로써 막았었다.
  부처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부당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있
었다. 민중들은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고문 받고, 학대당하였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잔인한 형벌로 괴롭혔다. 부처는 이 비인간적인 것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부처가 훌륭한 정부라는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음을 《법구경》의 주석서(Dhammapadatthakatha)에 기록하고 있다.
그의 견해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과 대비해서 평가
되어야 한다. 부처는 정부의 우두머리,  즉 왕과 각료들 그리고 관리들이
부패하고 공정치 않으면 온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불행해지
는가를 보여주었다. 한 나라가 행복하려면 올바른 정부를 가져야 한다.
이런 형태의 올바른 정부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는 부처가 《자따까J
ataka》(本生經)의  "왕의 열  가지 의무"(dasa-raja-dhamma;十王法)라는
가르침에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옛날의 '왕王'(Raja)이란 용어는  오늘날 '정부'라는 용어로 바뀌
어야 한다. 그러므로 "왕의 열 가지 의무"는 오늘날에 국가의 우두머리,
즉 각료들과 정치 지도자들,  입법부와 행정부의 공무원 등등같이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왕의 열 가지 의무"의  첫째는 후하게 아량을 베푸는 자선(dana;布施)
이다. 통치자는 부와 재산에 열망을 품거나 집착하여서는 않되며, 민중의
복지를 위해 분배하여야 한다.
  둘째: 지고한 도덕적 성품(sila;持戒).  왕은 생명을 파괴한다던가, 속
이거나, 훔치거나, 남을 착취하거나, 간통을 범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취하는 음료를 마신다던가 하는 짓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왕
이 최소한 평신도의 "다섯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하는 것이다(pariccag
a;永捨). 왕은 백성이 좋아하는 것에 모든 개인적 안락과 명예와 명성 그
리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넷째: 정직과 성실(ajjava;正直).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
나 편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의도가 솔직해야하며 대중을 속이지 않아
야 한다.
  다섯째: 친절과 온화함(maddava;柔和). 왕은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
  여섯째: 생활습관에 있어서  엄격하기(tapa;苦行). 소박한 생활을 하여
야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탐닉하지 말아야  한다. 왕은 자기 억제를 해야
한다.
  일곱째: 증오,  악의, 적의로부터 벗어나기(akkodha;無忿).  왕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여덟째: 비폭력(avihimsa;不害). 이것은  왕이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 그리고  폭력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에 해당
하는 모든 것을  피하고 막아서 평화를 증진하기에  노력해야함을 의미한
다.
  아홉째: 인내, 견딤, 포용력,  이해심(khanti;忍慾). 왕은 역경과 어려
움 그리고 모욕을, 성품을 상하지 말고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열째:〔백성의 뜻에〕반하지 않는 것, 가로막지 않는 것(avirodha;不相
違). 그것은 말하자면 백성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되며, 백성의 복지에
도움이 되는 어떤  행위라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왕은 백성과 화합하여서 다스려야 한다.
  어떤 나라가 그런 성품을 타고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그 나라가
행복해질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유토피아만은 아니었다.
과거에 이런 생각을 토대로  왕국을 세운 인도의 아쇼카Asoka같은 왕들이
있었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6


  세계는 오늘날 지속적인 공포와 의혹 그리고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과
학은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 새
로운 죽음의 도구를 휘둘러대면서 엄청난  힘으로 다른 여러 나라에게 협
박을 가하고 도전하고 있다. 세상의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파괴와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벌리고 있다.
  세계는 인간성을 깡그리 파괴시킨  가운데, 서로 박살내기에 불과한 이
미친 길을 가고  있다. 이제 그 방향으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
전체를 멸망시키는 지점에 서있다.
  인류는 자기네가 지어낸 처지에  두려워하며, 탈출구를 찾으려고 몇 가
지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나 부처가 전해준 것, 그 이외의 방법은 없
다. 즉, 비폭력과 평화, 사랑과 자비, 너그러움과 이해, 진실과 지혜, 모
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경, 이기심과 증오와 폭력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메시지이다.
  부처는 말했다. '증오에 의해서는  증오가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친
절하여서 가라앉는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
  '친절하여서 노여움을 이겨야 한다. 착하여서 못됨을, 자비로써 이기심
을, 그리고 진실 되어서 거짓을 이겨야 한다.'
  이웃을 정복하고 짓밟으려 갈망하는  한, 사람에게 평화와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부처가 말했듯이, '승리자는 미움을 길러내고, 패배자는 비참속
에 빠진다. 승리와 패배, 모두를 포기하는 이는 행복하고 평화롭다.' 평
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유일한 정복은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백만 명을 정복한 이 보다도, 오직 한  사람 자기를 정복한 이가 가장 위
대한 정복자이다.'
  당신은 이들이 모두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말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증오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서로 죽이는 것이
현실적인가? 정글 속에 야수같이 그치지 않는 두려움과 의심속에서 살아
가는 것이 현실적인가?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편안한 것인가? 증오가 증
오에 의해서 진정되는 일이 있었던가? 해악으로 해악을 이긴 적이 있었던
가? 그러나 개인적인 경우일지라도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진정되고, 착하
여서 못됨을 이긴 예가 있다. 당신은 이것이 개인적인 경우에는 사실이고
현실인지 몰라도 국가적인 일,  국제적인 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대중들은 최면술에 결려있다. '국가적'이니 '국제화'니 '국
가'니하는 정치적, 선전적 용어에  심리적으로 혼란되고, 눈멀었으며, 속
고 있다. 한 나라가 개인들의  거대한 모임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나라나
국가가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개인이 생각하
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나라나 국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개
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나라나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누그러질 수 있다면 한 나라나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분명히 실현될 수 있다. 한 개인의 경우에서도 증오를 친절로
대하려면 도덕적 힘에 있어서 엄청난 용기와 대담성 그리고 믿음과 확신
을 가져야만 한다. 국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욱 그러해야되지 않
겠는가? 당신이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면 그것은 옳다.  분명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노력해야만 한다. 당신은
그것이 위험한 시도라고 말할지 모르나 분명히 그것이 핵전쟁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그런 위대한  통치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
는 것이 위안이 되며, 오늘날에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
는 광대한 제국을 안팎으로 다스리는 데에 이 비폭력과 평화와 사랑의 가
르침을 적용하려는 용기와  신념과 선견을 가졌었다. 그가  바로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라 불려지는  인도의 위대한 불교황제 아쇼카(기원전 3세
기)이다.
  처음에는 자기 할아버지(챤드라굽따Chandragupta)와 아버지(빈두사라Bi

ndusara)를 본받아 인도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깔링가Ka
linga에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깔링가를 복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수십만
이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불제자
가 되었을 때, 부처의 가르침으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바위에 새겨
둔 그의 유명한 칙령중의 하나(현재 '비문칙령 13장'(Rock Edict XIII)이
라고 부른다)를 오늘날에도 읽어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황제는 깔링가의
정복을 언급하며 자기의 '뉘우침'을  공표하고, 그 학살을 생각하면 얼마
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지'를 말하였다. 그는 다시는 절대로 어떤 정복
을 위해서도 칼을 뽑지 않겠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폭력을 버리고,
자기를 제어하며, 청정함을 닦고,  온화하기를' 바랐다. 이는 물론 "신들
의 은총이 나린 이"(즉, 아쇼카)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정복이라고 여겨
진다. 즉, 경건을 통해 정복한 것(dhamma-vijaya;法勝)이다. 그는 전쟁을
자기 스스로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손들이 새로운 정복을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경건을 통해 정
복하는 그런 정복만을 생각해야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유익한 것이다'라고 자기 희망을 표현하였다.
  이는 인류역사상 권력의 최 전성기에  있는 승리한 정복자가 여전히 영
토의 정복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였으면서도 전쟁과 폭력을 포기
하고 평화와 비폭력으로 돌아선 유일한 예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세계를 위한 교훈이 있다. 한 제국의 통치자가 전쟁과
폭력을 공식적으로  등지고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어떤
이웃의 왕이 아쇼카의 경건함을 군사 공격을 하는데 유리점으로 삼았다던
가, 그의 일생 동안 제국 안에서 어떤 반란이나 모반 사건이 있었다는 역
사적 증거는 그 어느 것도 없다.  오히려 온 나라가 평화로웠고, 제국 밖
의 다른 나라들도 그의 온화한 지도력을 받아들인 것 같다.
  힘의 균형이나 핵 억제력의 협박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무기의 힘은 공포를 낳을 수 있을 뿐이고 평화를 낳지 못
한다. 공포를 통해서는 진정한 평화, 계속되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공
포를 통해서는 오직 증오와 악의와 적개심만이 올 수 밖에 없다. 그 당시
만은 억누를 수 있지만 폭발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사나
와지게 된다. 진실되고  진정한 평화는 자비롭고(metta;慈), 우호적이며,
공포와 위험에서 벗어난 분위기에서만이 득세할 뿐이다.
  불교는 파괴적인 권력 투쟁이 포기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
는다. 정복과 패배를 떠나 고요함과 평화가 득세하는 사회, 죄 없는 사람
이 박해받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회, 군사전쟁이나 경제전쟁으로 백
만 인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자신을 정복한  이를 더 존경하는 사회, 친
절하여서 증오가 정복되며,  유익한 것으로 해로운 것을  정복하는 사회,
적의, 시기심, 악의, 그리고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사
회, 자비가 행위의 추진력인 사회,  미물까지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
이 공정하게, 사려 깊게 그리고 사랑으로 다루어지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을 누리는 가운데 평화롭고 조화를  이룬 삶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
고 거룩하기 그지없는 목표인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의 깨달음을 지향하
는 사회가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끝.
       "what the Buddha taught" (Gordon Fraser Gallery, 1959)
              지은이: Walpola Rahula / 옮긴이: 이 승 훈